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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신작시/진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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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미
밤의 보속
검은 우산을 가진 늙은 뒷모습의 여인
긴 그림자를 쫓으라.
잘게 부서지는 성찬용 빵이 흩날려 거리를 새하얗게 지운다. 끓는점에서 비로소 얼어붙는 사람들은 말을 잃고 서 있다. 그날 그가 꾸린 것은 가방이 아니라 그 자신이었다. 객차에 오르면서 가방은 쇠줄로 그를 비끄러맨다. 은발의 여자가 우산을 펼친다. 밤의 가락지에서 뻗어 나온 살이 죽죽 허공을 가르며 질주한다. 사방팔방의 모서리가 팽팽하게 당겨진다. 검게 빛나는 원단의 밤, 하늘이 펼쳐진다.
쇠줄을 당겨보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소리를 질러보지만, 앙다문 입술 위로 자물쇠만 덜걱거린다. 두 손을 모아보지만, 기도는 자라지 않는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더듬더듬 그의 어깨를 건드리는 여자의 손이 느껴진다. 더럭 겁이 난다. 뿌리치려 사지를 버둥거려 보지만 이 익숙한 어둠을 벗어날 수가 없다. 다만 고개를 떨어뜨리면, 낯선 사내의 손을 끌어 배 위에 얹으며 미소 짓는 여자와 똑같은 눈매가 일그러진 양수 위에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음유시인
상판이 부서지고 뚜껑이 달아나고
반쯤
넋 나간 피아노였다. 바람이 거세게 밟고 지나가면
어깃장 치듯
둥―
반음 낮은 볼멘소리를 뱉어 놓곤 했다.
진수미․
1997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 달의 코르크 마개가 열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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