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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문화산책/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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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984회 작성일 08-02-27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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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산․책

한국영화가 그려내는 남북이야기


서성희|영화평론가



최근 북한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대박’행렬을 이루면서 더 이상 북한을 소재로 한 영화가 위험하거나 껄끄러운 대상이 아니다. 지금은 흥행의 소재가 된 북한 이야기도 시대적 요구에 따라 변화를 겪으며 다루어져 왔다. 따라서 이 글은 한국영화가 북한을 그려내는 시대적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오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단일민족’ 또는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을 내세우는 언술과 현실적 실천이 얼마나 차이를 보이는가를 확인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1. 북한과 만난 영화담론
한반도의 대중들에게 해방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불현듯 찾아왔으며 분단도 예기치 않게 왔다. 그리고 분단이 50년 이상 지속되리라는 것 역시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이러한 남북한 역사의 예측불가능성은 분단정권의 수립과 전쟁을 수행했던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해방과 함께 시작된 세계적인 냉전체제의 형성은 분단정권의 형성자들에게 분단정권을 가져다주었고 전쟁은 그들에게 전쟁의 책임 혹은 학살의 책임을 묻기는커녕 정권의 안정화에 기여하였다.
비록 한반도가 외세에 의해 분단되었을지라도, 이후 한반도는 냉전을 철저히 내화했으며 ‘냉전체제’에 어느 정도 독자적인 체제 즉 ‘분단 체제’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렇듯 한반도의 분단이 자생성을 가진 분단체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유지하는 분단세력의 실천이 존재하고 있음으로 의미한다. 이러한 ‘분단세력의 실천’을 통해 한반도의 분단체제는 냉전체제의 해체에도 불구하고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는 거대한 담론의 체계라고 할 만큼 상징과 담론이 동반되지 않는 정치행위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담론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실천을 인도한다고 할 때, 분단체제는 남북한 정권이 행사한 강제력만이 아니라 ‘담론’에 의해서도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중들이 분단의 해체를 바라면서도 분단정권을 지지하는 모순적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권력의 강제력만이 아니라 대중들을 그러한 경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심리적인 강제력을 함께 파악해야 한다. 따라서 이글은 권력의 강제력과 함께 남북문제를 다룬 영화를 통해 그 근저에 흐르는 기본 논리를 발견함과 동시에 분단체제의 정치적, 문화적 담론을 동시에 살펴보고자 한다.

2. 미군을 도와 쳐 부셔야 할 적, 북한
사회통합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는 문제는 사회학자들이 부딪히는 핵심적인 문제 중의 하나이다. 이 문제는 두 개의 입장으로 대별되는데 사회는 지배집단의 강제에 의해 통합된다는 입장이 있는 반면 사회계약이나 동의 같은 공통의 가치체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이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강제와 동의는 그 정도는 다를지라도 동시에 작동할 뿐 아니라 아무리 강제력에 기반한 정권이라도 그들의 강제력을 정당한 권위에 의해 보장받으려 하며, 이를 통해 대중을 설득해 나간다.
한민족의 경우, 오천년 단일민족의 신화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식민경험은 대중에게 강한 민족의식을 갖게 했다. 남북한 대중들에게 민족주의는 규범이고, 통일은 당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남북한 정권은 대중들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민족주의 담론을 구사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신화를 적극적으로 생산하였다.
50년대 당시의 정치담론은 이승만의 ‘문명의 사명론’이 우세하던 시기로 동서의 이항대립에 기초해 서양, 더 정확히 말해서 미국의 사명을 남한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정책이다. 남한은 반공의 보루로서의 역할을 통해 세계사적 사명을 부여받으며, 자유진영의 전진기지로서의 위치에 정당성을 스스로 부임한다.
휴전 직후라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압도적으로 많이 제작되던 시기에 한민족에게 총부리를 겨누어야 하는 상황에 대한 논리적 근거로 제시된 것이 바로 ‘문명의 사명론’이다. 상대방의 정권을 괴뢰정권이라 불렀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전쟁은, 괴뢰정권으로부터 그리고 소련(혹은 미국) 제국주의로부터 민족의 구성원을 해방시켜야 된다는 무력통일론을 가능하게 하는 민족해방 민족주의의 논리가 동시에 작동한다.
북한을 소재로 한 영화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인 1955년 이강천의 <아리랑>은 미군 두 명을 숨겨준 주인공의 가족이 좌익의 박해를 받는 상황을 설정하는데, 이런 관점은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영화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영화 <아리랑>에서 한민족인 북한군을 물리친다는 명분이 아니라 괴뢰정권의 비인간적인 행위로부터 민족의 구성원을 해방시켜야 하는 사명과 함께, 더 나아가서는 세계의 수호자인 미군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여주인공을 등장시킴으로써 미군에 동참하여 좌익과 맞서 싸우는 것이 남한의 세계사적 사명임을 영화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나운규의 원작을 6.25 당시로 시대상황을 바꾸어 다시 영화화한 이 작품은 2개월간 국도극장을 비롯한 개봉관에서 20만 명이라는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당시 서울시민이 200만 명이 채 안 되고,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원활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아리랑>은 놀라운 관객 동원을 기록한 지배 담론을 형성한 지배영화였다.

3. 민족해방에서 발전담론으로
분단 이후 50년대까지의 남한의 정치 담론은 민족주의, 좀더 정확히 정의하자면 민족해방민족주의였다. 남북은 상대방의 체제를 괴뢰체제로 정의하면서 미소제국주의로부터 상대방의 대중들을 해방시킨다는 명분 하에 분단과 전쟁 그리고 전후복구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60년대에 들어서면서 분단체제를 형성시킨 민족해방민족주의는 해체된다. 남한 정권은 대내적인 상황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함과 동시에 정권의 안정적인 재생산을 이루기 위해 분단체제에 입각한 새로운 민족주의를 구성하기 시작한다.
이승만의 반공규율사회에 저항하는 새로운 민주주의적, 민족주의적 요구를 가진 세력들이 등장하게 되고 그것은 4.19로 나타나게 된다. 1960년 4.19의거로 자유당 정부가 물러서게 되고, 전반적인 사회개혁의 물결 속에 영화계는 기존의 정부주도의 심의검열을 대체할 만한 민간기구인 ‘영화윤리전국위원회’가 결성된다. 이 시기에 남북문제를 다룬 영화는 <오발탄>, <7인의 여포로> 등으로 제도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작품들이 많이 등장한다.
4.19세력들은 민주/반민주주의 대립 틀을 중심으로 다른 요구들을 배치하여 대중을 동원하는데 성공하였지만, 곧이어 역사에 등장한 5.16주도세력들은 이승만의 민족주의의 담론의 다른 균열에 주목하고 있었다. 5.16세력들은 이승만의 독립/식민의 이항대립을 발전/빈곤의 담론으로 대체하면서 다른 대립들을 발전/빈곤의 대립을 중심으로 배치하였다. 이승만에게는 자주독립이 가장 중요한 담론이었다면 박정희에게는 발전이 가장 중요한 담론이 된다. 이러한 ‘발전담론’이 성립되었을 때 민주화나 통일이라는 과제는 발전의 중심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
영화계에 4.19당시 창작의 해빙기가 있었음에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후에 검열은 다시 계속되어 <오발탄>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후에 상영불가 조치를 당하고, 이만희 감독의 <7인의 여포로>가 북한군복이 남한군의 것보다 좋아 보인다는 이유로 반공법의 용공혐의로 입건된다. 이런 강압적 분위기는 1962년 1월 26일 국가재건회의가 제정 공포한 영화법에서 비롯되었다. 이로 인해 당시 71개 영화사/프로덕션이 16개 사로 합병되었고 신규등록 또는 강화된다.
사회가 불안정하고 사는 일이 힘들어지는 시기에는 항상 영화가 호황을 누린 사실이 역사적으로 입증되듯이, 이 시기 또한 정치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전체적인 제작편수가 급격히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다. 남북문제를 다룬 영화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양적인 증가는 자연스럽게 내용의 확대로 이어진다. 이전에 남북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주로 6.25전쟁을 소재로 했던 내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이 시기의 분단영화들은 다양한 내용을 담았다.
예를 들어 전쟁고아의 불운한 삶과 희망을 다룬 <내 마음의 고향>(1960), 피난지 부산에서의 사랑을 다룬 <이별의 부산정거장>(1961), 이념갈등을 겪는 형제를 다룬 <사랑과 죽음의 해협>(1962), 꿈속에서 북한의 모습을 보는 코미디 영화<합죽이의 신혼열차>(1962), 간첩과 특무대원의 첩보전 영화<비밀통로를 찾아라>(1962), 해병의 장렬한 전투를 그린<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상이군인의 비애를 다룬 <검은 장갑>(1963) 등 다양한 분단의 양상을 본격적으로 그려냈다.
이 시기에 남북문제를 다룬 대표적인 영화들은 <5인의 해병>(1961), <검은 무의의 마후라>(1966),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돌아온 여군>(1965), 신상옥 감독의 <이 생명 다하도록>(1960), <빨간 마후라>(1961), <육군 김일병>(1961), 조배하 감독의 <소령 강재구>(1966), 이성구 감독의 <지하실의 7인>(1969), 김동학 감독의 <509 전차대>(1967), 남태권 감독의 <사나이 UDT>(1968) 등이 있다.

4. 반공이데올로기 설파의 도구로
남북한 정권이 일인 영구집권체제를 형성하는 일련의 과정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대략 1967년부터 시작되어 1972년에 제도적으로 완성되는 남북한 정권의 독재체제 확립 시기는 국제적으로는 냉전체제에 대결구도가 완화되면서 데탕트가 형성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 동북아 정세는 냉전체제의 전형적 대결구도인 남한, 미국, 일본의 남방 삼각체제와 북한, 중국, 소련의 북방 삼각체제의 대립이 미국과 중국의 화해로 인해 대결구도가 약화되는 형태를 띠었다. 미국과 중국의 화해는 사회주의권의 분열과 관련된 것으로 이것은 북한이 독자노선을 추구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남북한 간에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면서 1968년의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와 그에 뒤이은 대화 분위기가 공존하던 시기였다.
남북한 정권은 국제적인 해방분위기 속에서 남북 간의 화해를 추구하고 보다 나은 자본주의 혹은 보다 나은 사회주의를 추구하기보다는 정권을 영구히 재생산하기 위한 시도를 행한다. 남한 정권은 경제 발전의 성공에 따른 시민사회의 분화와 성장에 기반을 둔 시민사회의 도전에 직면하여, 3선 개헌을 통해 집권을 연장하고 드디어 1972년 유신헌법을 확립함으로써 영구집권 계획을 완성한다.
이 시기에 이르러 남북문제를 다룬 영화에 대한 정부의 간섭은 상당히 깊었고 영화를 체제이데올로기 재생산 도구로 보았던 정부 측에 의해 1970년대 남북문제를 다룬 한국영화는 반공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도구로 전락, 이로 인해 인본주의적인 사고와 고민을 진지하게 했던 작가들조차 반공적 성격이 더욱 짙어진 영화를 양산할 수밖에 없었다.
남북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영화산업의 침체기와 맞물려 있다. 1973년 당시 23개의 영화제작사 중 20개가 불황으로 도산하는 등 영화계의 하부구조가 파산상태에 있었다. 이런 가운데 유신정부가 들어서고 정부는 종래의 영화제작업을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고치는 한편, 엄격한 등록 요건을 두어 개인영화인에 의한 영화제작을 사실상 완전히 차단했다. 제4차 영화법 개정은 어려움에 처한 한국영화계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시행되었지만 그 내용은 오히려 엄격한 통제정책을 취함으로써 더욱 한국영화계의 침체기를 가속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영화제작은 유신 이념을 구현해야 한다는 연례 영화 시책 제1조와 시나리오 사전 심의, 필름의 심사 검열 조항은 한국영화를 대중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는 악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둘째, 이 시기에는 반공이데올로기가 더욱 강화되어 분단영화의 검열은 절정에 이르렀다. 이는 우수영화 제작 및 수입 방침을 보면 영화를 바라보는 정부의 시각이 어떠한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데, 정부는 우수영화 제작방침 항목 중에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애국, 애족의 국민성을 고무 진작시킬 수 있는 내용, 민족주체성과 애국, 애족정신을 북돋워 줄 수 있는 영화를 포함시켰다. 1982년도 영화시책의 목표에 기존에 있던 목표 외에 반공안보영화제작 유도 문구를 추가시켰는데, 그 조항으로 “가) 반공영화 여부의 심사는 영화 검열시 병행하여 실시한다. 나) 영화진흥공사는 반공영화 시나리오 공모, 전문작가 양성 등 반공영화 진흥책을 강구하여 연중 실시한다.”를 두었다. 그리고 1983년도에는 영화시책의 목표를 좀더 노골적으로 “반공, 안보영화 제작을 유도하여 자주국방 태세를 확립”한다고 설정한다. 또한 1984년 영화의 수급에 관한 조항에서 대종상 부문에 반공부문 포함하는 정책 추진하기도 한다.
셋째, 1970년대의 우리 사회의 근대화를 배경으로 해서 급격하게 증가된 TV의 보급이다. TV보급의 증가로 역사극, 멜로드라마, 홈드라마 등 영화의 대중적 장르를 안방극장에 내주었다. 넷째, 영화관객에게 제공되는 남북문제를 다룬 영화 자체의 질적 하락의 문제이다. 사실상 이 문제는 매우 본질적인 문제였다. 사실상 이 시기의 분단영화는 대부분 고답적인 이분법으로 구성되어 있어 관객은 등을 돌리게 되었다.
지금도 기억에 선명한 이 시기의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김청기 감독의 <똘이장군>(1978)이다. 북한의 불쌍한 소녀 숙이는 늑대의 탈을 쓴 공산당의 부하들에게 붉은 수령의 생일선물로 산삼을 캐오라는 명령을 받고, 금강산을 헤매다가 바위에서 굴러 떨어지게 된다. 깊은 산속에서 동물들과 생활하며 숲속의 장군으로 불리던 인간인 똘이는 동물들과 함께 인간인 숙이를 구해준다. 이를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된 똘이는 숙이를 통해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데, 즉 똘이의 부모님은 탈북을 기도하던 붙잡히고 똘이는 버려지게 된 것. 한편 공산당은 붉은 수령의 생일이 다가오자 ‘빨리 땅굴을 만들어라’, ‘참호를 만들어라’, ‘산삼을 캐오라’며 강요한다. 이를 알아차린 똘이는 숲속의 동물친구들과 같이 제3땅굴을 파내려가고 있는 ‘북한괴뢰’를 무찌르고, 강제 노역 중이던 아버지를 구출하던 중 ‘붉은 수령’과 정면대결을 벌이며 이들의 음모를 분쇄한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으로 인물에 대한 극단적인 상징처리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을 십분 발휘한다. 따라서 당시 남한에서 인식하고 있는 북한 사람에 대한 편견이 어떠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영화이다. 북한에는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라 늑대와 돼지등 짐승의 탈을 쓰고 있다 설정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영화들이 북한의 이미지를 비인간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지배담론에 부합하는 영화담론을 형성한다.

5.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된 한민족
80년대 말은 세계적인 격변기였다. 소련이 개혁과 개방을 주장하더니 급기야 해체되고 동구사회주의가 몰락하였다. 또한 급속한 산업구조의 변화로 탈산업사회 혹은 포스트-포드주의적 산업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세계사적 정치구조의 변화와 산업구조의 변화에 힘입어 ‘세계화’의 물결은 가속도를 붙여 나가기 시작했다.
영화계도 이 세계화의 바람에 예외가 아니었다. 1986년 제6차 영화법 개정을 통해 외국영화사의 국내활동이 가능하도록 제도적 여건을 제공하며 UIP를 맞을 준비를 마친 정부는 UIP의 국내정착을 확고히 도와주기 위해 한국영화에 검열의 완화라는 수혜를 주었다. 이러한 상대적 검열완화로 인해 정지영 감독의 빨치산의 비극적 최후를 그린 영화 <남부군>이 대중에게 선을 보이게 된다. 1990년에 나온 <남부군>은 비단 감독의 작가정신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변화의 물결이 주요 원인이 되었던 작품이다. 임영은 <남부군>과 관련된 시대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남부군>의 성공은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심지어 이 영화들은 도대체 영화는 보러 오지 않는 사람들로 알려진 4,50대 남성들도 상당히 관심을 가졌던 작품이다. 이 사건은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감독이 읽어낸 시대정신으로 분석되어질 수 있다. 당시는 아직 군사 독재가 계속되어지는 상황이었기는 하지만 그 독재자조차도 자신의 입으로 민주화를 강조할 정도로 민주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고, 그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다. 그런 순간에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은 당시의 시대정신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지리산 빨치산을 소재로 한 <남부군>에는 빨치산 주인공들이 대한민국 정규군인의 토치카를 파괴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에서 일부 관객들이 박수를 치곤해서 문공부에서 조차 논의가 분분했으나 공식적으로 문제 삼지는 않겠다는 뒷얘기가 있었다.”
<남부군>은 <피아골>(1955)과 마찬가지로 빨치산의 시점에서 영화가 진행되지만, “<남부군>을 통해 이데올로기 편향을 지양한 휴머니즘 추구, 사신(死神)과 함께 하는 극한상황 속에서의 인간의 생명력, 분단의 비극이 오늘날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 등을 표현하고자 했다.”는 감독의 말에서도 드러나듯 <남부군>은 ‘분단의 희생자들’을 처음으로 2분법적 시각이 아닌 민족적 휴머니즘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어 큰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더불어 이 시기는 박정희 정권 이후 계속된 경제위주 고도성장 정책으로 빈부의 차이를 비롯한 사회적 위화감이 조성되어 남북문제에 있어서도 문제작의 출현이 두드러진 시기이다. 이 체제도 저 체제도 선택하지 않고 민족주의 입장을 표명하는 중도주의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태백산맥>(1994), 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을 그린 <그 섬에 가고 싶다>(1999), 기존 충무로가 금기시해 온 반미 시각을 드러낸 장길수 감독의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1991), <웨스턴 에비뉴>(1993) 등의 작품을 배출해 냈다.
<태백산맥>이 보여주는 휴머니즘 정신은 임권택 감독이 1985년에 만든 <길소뜸>에서 비롯된다. 6.25동란의 참상이나 북한의 만행에 초점을 두는 반공영화가 아닌 분단이란 상황이 어떻게 한국 민중들의 삶을 변화시켰는가에 대한 테마를 다루고 있다. <길소뜸>은 분단을 바라보는 시각이 과거와 획을 긋는 작품이다. 핏줄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게 했던 6.25전쟁은 그 자체가 비극이고 깊은 아픔이었던 것을 말해준다.
이 시기 또 하나의 중요한 작품인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는 한 섬마을을 중심으로 이데올로기 대립에 휩싸인 그러나 정작 이데올로기를 알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에서 눈에 띄는 것은 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이란 소재다. 국군=선(善)이란 모티브가 주를 이루었던 이전의 영화들에서는 상상을 하지 못했을 법한 소재거리인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아닌 마을사람들에 대한 단순한 증오심으로 실제는 국군이지만 인민군을 끌어들여 분풀이를 하려 했다는 설정은 과거 남북 분제를 다룬 영화에 대한 패러디로서도 읽힐 수 있다.
결국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분단이 가져온 상처가 많은 희생을 가져왔으며, 전쟁 자체가 하나의 병정놀이일 수 있고 그 놀이 때문에 그토록 많은 인명이 죽어야만 했는가?라는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감독의 휴머니즘 정신은 다소 초현실주의적인 마지막 장면을 통해 형상화된다. 영화에서 민족분단을 바라보는 시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것이다. 이 시기의 영화들은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 식의 이분법적 시각에서 벗어나 이데올로기 대 휴머니즘으로 남북문제를 파악하고 있다. 이런 속에서 남북한 사람들 모두 이데올로기의 피해자라는 시각을 보이고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길소뜸>, <남부군>, <태백산맥>, 그리고 <그 섬에 가고 싶다>는 각각 당시 남북한 관계의 변화와 통일 담론의 흐름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 <길소뜸>에서 분단의 희생자로 남한사람들을 제시하던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남부군>에서 분단의 희생자를 빨치산인 북한사람에게로 확장하더니 급기야 <태백산맥>과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서는 분단의 희생자로 한민족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6. 북한 ‘사람’으로 바라보기
한반도의 급격한 변화는 동북아에서 냉전적 대결구도의 한 축이었던 북한, 중국, 소련의 북방 삼각체제가 완전히 해체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관계는 남한과 북한, 그리고 미국의 삼각관계가 형성되면서 찾아왔다. 그리고 남북한 관계를 규정짓는 남북한 간의 힘의 관계도 완전히 역전되었다. 70년대 중반부터 역전되기 시작한 남북한의 경제력은 80년대 후반 들어 현격한 격차를 낳게 되었다. 남북한 내부의 변화도 급격한 것이었다. 남한에서는 군사정권이 해체되는 노태우 정권을 지나 김영삼 정권이라는 ‘문민정부’가 들어서더니, ‘햇빛정책’의 김대중을 지나 ‘평화번영정책’의 노무현 정권에 이르렀다.
이승만의 식민/독립의 이항대립에 입각한 정치중심주의, 박정희의 발전/빈곤의 이항대립에 입각한 경제중심주의를 지나 87년 6월 민주항쟁은 4.19의 이항대립 즉 민주/반민주의 이항대립을 다시 전면 부각시켰지만, 민주화 운동의 이항대립 즉 민주/반민주는 안정/혼란의 이항대립과 대결해야 했다. 오늘날까지 보수주의 담론의 토대가 되는 이 ‘안정이데올로기’는 박정희 시기를 통해 두 가지 구성성분을 갖게 된다. 하나는 반공이데올로기의 변형태인 ‘안보이데올로기’이다. 북한으로부터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정권의 안정이 필수적이라는 논리를 통해 대중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또 다른 하나는 박정희의 발전/빈곤의 이데올로기가 안정이데올로기로 변화한 것인데, 정국의 혼란은 경제발전을 가로막고 대중의 생활수준을 하락시킬 것이라는 ‘발전이데올로기’로 대중을 설득한다.
안정이데올로기는 영화에서도 그대로 재생산되어 안보와 경제를 우위에 두는 담론을 구성한다. 남북문제를 다루는 영화에 새로운 장르적 변신을 꾀하며 이런 기조에 포문을 화려하게 연 것은 <쉬리>(1999)였다. 그러나 비슷한 소재를 가진 영화들이 시대에 따라 지속과 변화의 요소를 동시에 가지고 있듯, <쉬리>가 가지고 있는 상상력의 구조에도 이전의 남북문제를 다룬 영화와는 변화된 시대상황과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반세기에 걸친 체제 경쟁에서 이제는 남한의 상대적 우위가 확고해졌다는 자신감이 그것이다. <쉬리> 속의 북한은 절박한 생존의 문제에 직면에 있는 허약한 체제였고, 생존을 위한 마지막 돌파구로 테러를 감행할 수밖에 없는 분열된 체제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쉬리>는 그 화려한 장르적 화법에서뿐만 아니라 그 근본정신에서도 철저히 할리우드적(미국적)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미국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꼽고 있는 것은 더 이상 공산주의라는 이념 때문이 아니다. ‘독 안에 든 쥐’인 북한이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수단으로 고양이를 물지도 모른다고 하는 끊임없는 위협, 이것이 탈냉전 시대에 새로워진 미국의 대북 이데올로기의 핵심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쉬리>가 단지 새로운 포장을 한 ‘반공영화’에 머물고 있다거나 기능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쉬리>의 ‘북한 사람들’에게서 이제까지의 반공영화에서와는 다른 인간다운 숨결과 매력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자신감 덕택이었을 것이다. 영화 <쉬리>를 본 대다수의 관객은 현실로 닥친 북한의 위협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면서 극장문을 나서는 것이 아니라, 불온하게도 이방희의 슬픈 사랑에 가슴 아파했고, 조국의 슬픈 운명에 대해 절규하며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남파 무장간첩’ 박무영의 인간적 매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실, 매혹적인 반영웅으로서의 박무영의 존재가 없었다면 <쉬리>의 영화적 활력과 매력은 그만큼 반감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쉬리>를 통해 북한과 북한인들은 그렇게 인간의 얼굴을 하고 우리 곁에 다가왔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그 어조와 정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간첩 리철진>(1999)과 <공동경비구역 JSA>(2000)이 <쉬리>와 공유하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간첩 리철진>은 <쉬리>의 기본적인 상황 설정 즉 식량난에 처한 북한의 체제 위기를 반복하면서도 한층 더 인간적인 북한 사람인 간첩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감독의 재기발랄한 상상력과 화법으로 그려진 리철진의 모습은 순박하고 소박한 시골 청년의 그것이었고, 그랬기에 체제로부터 버림받아 죽는 그의 슬픈 운명은 정말 가슴 아픈 것이었다. 무엇보다 생계 걱정이 우선인 평범한 소시민으로서의 고정간첩은 마음 쓸쓸한 연민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공동경비구역 JSA>에 이르면 북한 사람은 급기야 믿고 의지하고 싶은 든든한 맏형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아우의 생명을 구해주고 냉엄한 현실을 가르쳐줄 뿐만 아니라, 아우의 결정적인 인간적 허물을 너그럽게 덮어주는 맏형으로서 말이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최대 매력은 체제 대립의 최전선인 전방에서 이렇듯 가슴 찡한 형제애의 상상적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냉엄하다. 그 남북한의 조우는 상상의 공간에서조차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이 시기의 영화들이 냉전 시대의 족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시기에 와서야 비로소 북한 사람도 ‘사람’이라는 의미를 생산해내게 되었다.

7. 아직도 북한과의 조우는 판타지 공간에서만
김대중 정권의 햇빛정책을 전후해서 남북문제를 다룬 일련의 영화들에서 인간의 얼굴을 회복한 사람들을 등장시키며 북한 사람들을 지나치게 순수하고 우직한 인물로 그려내기 시작한다. <간첩 리철진>은 이데올로기의 중압을 깃털처럼 털어내고, 눈길 주기도 두려웠던 대상에서 경쾌한 웃음과 주인공이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되는 묘사를 통해 은근한 슬픔도 함께 끄집어낸다. ‘이념’의 허위성이 씁쓸하면서도 통쾌하게 풍자되고, 이제 ‘이념’ 때문이 아니라 ‘배고픔’ 때문에 휴전선을 넘어온 간첩 리철진은 화려한 서울을 배회하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비운의 인간이 된다. 그 어느 쪽으로도 귀환할 수 없는 완전한 이방인이자 타자인 리철진은 이후 <이중간첩>에서 다시 한 번 이방인을 불러들인다.
<이중간첩>은 앞선 세 영화들의 많은 요소를 차용/반복하고 있다. <쉬리>와는 긴장감 넘치는 첩보 스릴러와 체제 대립이 낳은 남녀의 비극적 사랑이라는 장르적 설정을 공유하고 있다. <간첩 리철진>과는 체제에 의해 이용되고 버려지는 간첩, 그리고 남한 내에서 안착한 채 오랫동안 활동해 온 고정간첩과 그의 딸이라는 인물을 공유한다. 내러티브의 전개를 위해 제3국이라는 공간(또는 제3국인)이 필요했다는 점에서는 <공동경비구역 JSA>와 유사한 점이 있다. 이러한 반복은 분단 현실이라는 것이 서사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원천이면서 동시에 억압으로 작용하는 것임을, 다시 말해서 가능한 상상력의 범위에 어떤 임계점을 설정해주는 것임을 뜻하는 것일 터이다.
앞선 세 편의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현재였다. 따라서 체제 경쟁에서의 상대적 우위라는 현재적 상황 설정을 통해 무리 없이 인간화된 북한 사람들을 창조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중간첩>이 직시하고자 하는 우리의 80년대는 서슬 퍼런 냉전의 기운이 한반도를 감싸고 있던 때였다. 이렇듯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상상력의 공간을 허용하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삼엄하고 답답한 80년대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점이 앞선 세 영화와 <이중간첩>의 가장 큰 차이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체제의 핵심으로 들어간 주인공 림병호의 이중적 위치를 통해 80년대 남한의 진짜 현실을 직시하고 드러내는 데 많은 영화적 에너지를 투자하고 있으며, 자연히 어두운 비극의 색조를 지닌 영화로 재현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태생적으로 지니게 된다.
결국 <이중간첩>의 서사공간은 제3국으로 시작(동베를린)해서 제3국(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끝맺는다. 궁지에 몰린 림병호와 윤수미의 탈출을 도와주는 인물 또한 제3국인이다. 분단된 한반도는 여전히 상상 속에서나마 자신의 이야기를 완결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그 옛날 제3국행을 선택해야만 했던 <광장>의 이명준은 <공동경비구역 JSA>를 통해 돌아와 서로 대면하지 못하는 남과 북의 형제들을 매개하며 서로의 진짜 진실을 알 수 있게 해주고 그럼으로써 비극을 완성한다. 이 새로운 한국적 장르의 포문을 연 <쉬리>가 과도할 정도로 제3자(할리우드)의 화법을 차용해야 했던 것도 어찌 보면 필연이었다. <간첩 리철진>에는 그러한 제3자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의 리얼리즘의 무게조차 의도적으로 지워버리고서야 가능했던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남북문제를 그린 영화들이 순수하고 우직한 북한 사람들을 극단적으로 희화화하는 상업주의 코미디 전략과 조우해서 북한을 탈역사화하면서 부분 소비하는 신세대 경향에 부합하는 장르가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만취한 상태에서 해일을 만나 남한의 피서지로 쓸려온 혁명 전사들이 북조선으로 유턴하기 위해 아등바등 기를 쓰는 코믹물 <동해물과 백두산이>(2003), 남한 청년과 북한 처녀의 사랑이 대대로 원수로 지낸 두 집안의 비극을 연상시키는 의도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인용하면서 만든 <남남북녀>(2003), 그리고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그리고 말장난처럼 얼짱 그녀가 진짜 간첩이라는 황당무계한 설정이 기둥으로 자리 잡고 있는 삼수생의 낭만적인 판타지인 <그녀를 모르면 간첩>(2004)은 최소한의 리얼리즘도 저버린 내러티브를 구사하는 일련의 영화들이다.
이러한 북한 재현의 추상화 혹은 탈역사화는 <웰컴 투 동막골>에서 정점을 이루어 영화의 무대와 거기 등장하는 북한 사람들을 탈역사화하고 있다. 결국 2005년에 남북문제를 다룬 영화는 역사가 사라지고, 이미지나 정서만 남게 된 것이다.

한반도의 분단이라는 외상은 50여년의 세월 동안 이렇듯 집요하게 환상의 공간인 한국영화 속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분단 한반도, 그것은 한국영화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서사적 상상력의 모태인 셈이다. 그런데 분단 현실은 한국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서사적 상상력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제약하는 근본적인 억압이기도 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남북문제를 다룬 일련의 영화들은 당시의 남북한 관계의 변화와 지배적 통일 담론의 흐름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영화는 정치의 강제력에 의한 검열 외에도 일정정도의 자기 검열을 먼저 하면서 지배담론과 일정정도 운율을 맞추며 문화담론을 형성해나간다.
따라서 남북문제를 소재로 다룬 일련의 영화들을 살펴보면서 남북한 정권이 이념보다 민족이 중요하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이 냉전의 해체와 함께 통일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북한을 왜곡된 이미지의 재현하면서 분단체제에 동참하는 내러티브를 구사하거나 재미 위주로 소비해 버리는 관객과 영화생산자의 협력에 기인해 왔다는 혐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서성희․
동국대 연극영화학과 박사과정
․현재 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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