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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고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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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
김윤영의 타잔
(≪실천문학≫ 2005년 가을)
돌아온 ‘타잔’
문학평론가|고인환
김윤영의 「타잔」은 영화 주인공 ‘타잔’을, 꼭 그만큼이나 아련해진 근대 서사의 자의식과 절묘하게 포개놓은 작품이다. 작품을 읽는 내내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방식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서사 양식’, 혹은 ‘현실 속에서 현실 너머를 꿈꾸는 서사의 모순된 운명’ 등 문학사회학의 고전적 명제가 뇌리를 맴돌았다. 새로운 서사 양식에 대한 실험(모험)이 범람하는 시대, 우리의 삶은 여전히 근대 서사 양식에 매여 있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환기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우리 시대의 ‘타잔’을 관찰하고 있는데, 이 ‘미워하기 힘든 인물’을 통해 현대인의 삶을 차분하게 곱씹고 있다. 그러면, ‘부잣집 막내아들’이자 캄보디아 여행 가이드인 화자의 ‘길찾기’ 과정을 음미해 보자. 이 작품의 화자는 자칭 현실주의자다. 그는 ‘섣불리 평등이니 연대니 지껄이지’ 않지만,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표할 줄 안다. ‘안 될 싸움을 굳이 하거나 되지도 않을 유토피아에 목숨을 거는 일을 이해는 하지만’ ‘동참하’지는 않는다. ‘무지개는 언덕 너머에 있는데’ ‘여기서 무지개를 찾’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고 싶은 여행을 계속하면서’, 서서히 그의 ‘스타일’을 찾고 있을 뿐이라고 자위한다. ‘끈적끈적하게 들러붙는 서울의 공기와 사람들은’ 그의 취향이 아니다. 그가 ‘굳이 다른 나라들을 놔두고 캄보디아’에 머물고 있는 이유는 ‘그 특유의 느긋한 분위기 때문’이다. 하지만 캄보디아에 꾸역꾸역 밀려드는 한국인들로, 어떤 날엔 앙코르 와트가 경복궁인가 싶을 정도다.
이러한 화자의 쿨한 삶에, ‘타잔’이 되고 싶은 푸줏간 주인이 불쑥 끼어든다.
마장동 김씨는 ‘나무타기’가 꿈이었다. 심지어 나무를 타다가 손가락 하나가 부러졌지만, 아버지에게 ‘나무 탔다는 걸 숨기’고 ‘버티다가’ 잘라내기까지 했다. 그는 ‘푸줏간→곱창집→횟집→커피집(테이크 아웃)→화장품가게’를 전전하다 파산한다. 이는 ‘나무타기’에서 점점 멀어지는 삶에 다름 아니며, 그가 자본의 논리에 포획되는 과정과 동궤에 놓인다. 이렇듯, 낙천적인 기질을 지녔고, 성실한 생활인이었던 마장동 김씨가 ‘타잔’으로 전락하는 과정이 작품의 중심 서사를 이룬다.
이러한 전락에는 결혼이 가로놓여 있다. 결혼은 냉혹한 자본의 논리를 표상하는 상징이다. 우선, 화자가 캄보디아 현지의 젊은 여성과 한국의 늙은 노총각 사이의 결혼을 매개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 이 결혼의 이면에는 ‘자본주의 세례를 받기 시작’한 캄보디아의 현실이 가로놓여 있다. 이러한 국제결혼은 화자의 눈에 다음과 같이 비춰진다. ‘말이 선이지 물건을 고르는 것과 차이가 없다’. ‘숙맥같이 보이는 노총각들이었지만 여자들을 볼 때는 흠 없는 상품을 고르려는 냉철한 고객으로 변해 있었다’. ‘한국이라면 꿈도 못 꿀 그런 여자들이었다’. ‘어린 캄보디아 여자를 팔아넘기는 행위다’. ‘문제는 당사자인 현지 여자들이 긍정적이라는 점이다. 잘사는 나라 가서 코카콜라 마시며 에어컨에 TV에 자가용에, 남보란 듯 살고 싶다는 그들의 바람은, 60년대 우리의 삶과 너무 닮아 있다’. 이상의 진술은 자본의 논리에 무방비로 노출된 캄보디아인의 삶과, 감추고 싶은 우리의 치부를 섬뜩하게 길어 올리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국제결혼과 마장동 김씨의 결혼을 겹쳐 놓는다. 마장동 김씨는 ‘빚을 다 갚아주고 술집에서 빼낸’ ‘꽃같이 고운 색시’와 결혼한다. 그렇게 아내가 된 여자는 김씨의 삶을 점차 자본의 논리 속으로 끌어들인다. 못 배우고 가진 것 없으면 제대로 된 여자 하나 만날 수 없는 현실에서, 상품화된 결혼은 순박한 김씨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다. 결국 마장동 김씨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 옛날이 그립다며 힘겹게 웃어 보’이며 종적을 감춘다.
작가는 이러한 마장동 김씨의 삶과 화자의 그것이 길항(拮抗)하며 빚어내는 우울한 일상을 ‘타잔의 이미지’로 직조하고 있다. 마장동 김씨는 화자에게 조금씩 스며든다. 이 스며듦의 과정을 차분하면서도 담담한 시선으로 음각하는 작가의 시선이 믿음직스럽다. 그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싹둑 잘린 한가운데 중지를 ‘클로즈업’해 바라보는 화자에게, 김씨가 보내는 ‘아무런 편견이나 열등감이 없는 웃음’ : 화자를 뜨끔하게 함.
2) ‘그저 이게 내 직업이니까, 그저 열심히 한다는 순박한 표정’(낙천적인 기질과 성실한 생활인의 자세)으로 소 도축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들려주기 시작한 김씨 : 도축 장면이 별로 징그럽게 느껴지지 않음.
3) 다시 캄보디아를 찾은 미워하기 힘든 인물, 김씨 : ‘너무 오래 계시면 후유증이 커요. 돌아가시면 또 거기 생활이 있잖아요.’라고 참견하면서, ‘참나, 내 입에서 이런 얘기가 나오다니. 장장 10년을 집 떠나 떠돌고 있는 주제에, 생활이고 나발이고 꼴값도 못하는 내 주제에’라고 스스로에게 놀람.
4) 김씨의 후배로부터 손가락 부러진 진짜 사연을 들음 : ‘사는 게 왜 이럴까, 젠장, 하고 혼자 욕을 하면서’ 호텔방에 앉아 양주를 마심.
5) 파산한 김씨의 소식을 들음 : 김씨의 화장품 가게를 찾아갔다가, 자신이 알던 그 김씨가 아닌 것 같아 ‘잠시 망설이다가 뒷걸음쳐 그대로 나와버’림.
화자가 김씨의 삶에 개입하는 과정이, 관찰에서 공감으로 변모하고 있음이 섬세하게 드러나 있다. 김씨의 삶에 다가가는 화자의 심리가 위와 같이 치밀하게 구조화됨으로써, 다음의 인용문에서 ‘삼십대 중반’까지 살아온 스스로의 정체성을 심문하는 대목이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
내가 찾는 건 호텔 키가 아니라 내 인생의 방향 같았다. 내 판단력이란 것도 그리 믿을 만하지 않다는 걸, 나는 진즉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무작정 일을 계속하고 이건 내 독창적인 스타일을 찾기 위한 여정의 일부일 뿐이라고 자위해왔다.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제대로 방향도 찾지 못하면서. 합리주의자이고 현실주의자라며 자처하면서. 어디서부터 문제일까.(p.335.)
내가 어렸을 때 아문센 같은 탐험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곤 했었지만, 진짜 내가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 주변의 어른들은 아문센이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했다. 베토벤이나 에디슨은 다 알지만. 나는 어른들이 잘 모르는 위대한 탐험가란 점이 근사해 보여서, 또 부모님이 그저 기특해하니까 으쓱한 기분에 그렇게 나불거렸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그것이 정말 내 꿈인 양 기정사실화되어 버렸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로 내가 동경했던 것은, 다른 아이들처럼 타잔이나 슈퍼맨, 스파이더맨 같은 만화 속 영웅들이었다. 나는 그때, 남극 같은 덴 한 번도 갈 생각도 해보지 않은 어린 사기꾼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내 살고 싶은 대로 산다고 설치면서 사실은 교묘하게 어리광을 부리는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쭉.
문득, 누군가 뒤에서 이렇게 묻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사는 게 부끄럽지도 않은가, 라고.(pp.336-337.)
‘그렇게 사는 게 부끄럽지도 않은가’라는 질문이 진한 여운을 남기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근대 사회에서 자신의 꿈을 간직하고 살아내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꿈을 하나 둘 버려가는 과정이 근대적 일상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이렇듯, 화자는 마장동 김씨의 삶을 통해 잃어버린 내면을 되새김질해 보는 기회를 얻고 있다. 다시 만난 마장동 김씨, 아니 ‘타잔’은 근대적 일상을 낯설게 하는 불온한 이미지로 충만해 있다.
내 눈앞에 홀연히 그가 나타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는 나를 보고 웃더니 내 어깨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코를 찌르는 악취와 땀 냄새 때문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지만 나로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현지 오토바이 기사들이 다닐 만한 대로가 눈앞에 보였을 때, 그는 나를 풀썩 내려놓고 손을 내밀었다. 가운데의 손가락 세 개가 없었다. 하나가 아니라 셋. 그래서 손이 아니라 짐승의 발처럼 서글퍼 보였다. 나는 그 손을 잡고 흔들며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문득 위를 쳐다보곤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해진 러닝셔츠 같은 너덜너덜한 천 쪼가리를 허리에 아무렇게나 두르고 있었다. 그 벌어진 천 사이로 성기가 덜렁거리는 게 확연히 보였다. 하얀 이를 보이며 그가 웃어 보였지만 그건 나를 바라보고 웃는 게 아니라 어떤 다른 세상을 향해 짓는 미소였다. 그의 눈동자는 단 한 번도 날 제대로 응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쓱 일어나더니 가까이 있는 나무로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가 안 보일 때쯤 어딘가에서 쉭쉭 소릴 내며 뭔가가 나무에서 나무로 옮겨가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타잔이었다.(pp.335-336.)
‘코를 찌르는 악취와 땀 냄새’, ‘가운데의 손가락 세 개가 없’는 ‘짐승의 발처럼 서글퍼 보’이는 손, ‘벌어진 천 사이로 성기가 덜렁거리는’ 몸, ‘어떤 다른 세상을 향해 짓는 미소’, ‘단 한번도 날 제대로 응시하지 않’는 눈동자 등 ‘타잔’의 상징으로 제시된 이미지는, 근대인으로서의 자의식을 버려야만 비로소 다가갈 수 있는, ‘근대 이전/근대 이후’의 역설적 낯섦의 기표이다. 어찌 이 불온한 표상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 장을 덮으니, 마음 한 구석에 묻어두었던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솟아오른다. 오늘날 ‘문제적 주인공’(Problematic individual)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부정한 세계에 온몸으로 맞서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성실하고 순박하게 사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 어떻게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을까?
이 난공불락의 사회에서 ‘타잔’을 찾아 나설 용기가 없어, 가끔 ‘손가락 하나 없던 시절의 마장동 김씨와 곱창에다 소주를 마시며 취하는 꿈’을 꾸거나, 아니면 자연스럽게 마주칠 날을 기다리며 ‘우울’해 하는 화자의 모습이야말로 현대인의 음울한 초상이 아닐까? 이를 과연 ‘문제적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타잔’이 ‘문제적 주인공’인가?
고인환․
2001년 <중앙일보> 평론 등단
․저서 결핍, 글쓰기의 기원 등 ․≪문학과 경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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