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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이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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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472회 작성일 08-02-26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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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


김중혁 「無用之物 博物館」
(≪문학과사회≫ 2005년 여름)

상상력은 결핍 혹은 잉여의 구멍에서 충만감을 퍼 올린다!

이정석(문학평론가)


금반지에는 구멍이 있는데 이 구멍은 금과 마찬가지로 금반지에게 본질적인 것이다. 금이 없다면 ‘구멍’(그렇다면 구멍은 아예 실존할 수도 없으리라)은 반지가 아니다. 그러나 구멍이 없다면 금(금은 구멍이 없더라도 실존한다) 또한 반지가 아니다.
―알렉상드로 코제브의 󰡔역사와 현실 변증법󰡕에서

≪문학과사회≫가 이번에 여름호를 내며 소폭이나마 지면의 변화를 꾀했다. 그 변화의 시도들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이 <선택, 젊은 소설>이라는 코너다. 이 난을 신설한 편집동인들은 “언제나 ‘문학적 전위’를 옹호해 온 ≪문학과사회≫의 편집 방향을” 상기시키며 “새로운 문학의 징후를 가장 개성적이고 날카롭게 보여주는 작품을 선정하여 재수록”함으로써, “보다 젊은 목소리를 발굴하는 데 이 지면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이라 다짐한다. 그리고 그 첫 작품으로 ≪한국문학≫(2004년 겨울호)에 실렸던 김중혁의 「무용지물 박물관」을 재호명해 싣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새로움은 어디에 있는가? 우찬제는 간략한 해설(「관음(觀音)의 묘사, 그 혼성 감각의 뿌리」)에서 「무용지물 박물관」이 “귀로 소리를 본 뒤에 쓴 관음(觀音)의 소설이”라는 것, “목소리로 시각 장애인의 눈을 열어주고 있다는 것, 이 관음의 묘사야말로 안과 의사가 임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문학 상상력의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말한다. 이때 문학적 상상력의 본령에 대한 그의 지적은 적절해 보인다. 다만 ‘역설적 혼성 감각’에 의해 인도되는 상상력의 세계가 아직 충분히 설명되고 있지 못한 듯하다. 그렇다면, ‘역설적 혼성 감각’과 관련해서, 「무용지물 박물관」이 전하고자 하는 상상력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추가적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나’는 “엉터리 예술가들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10년 동안 일하던 회사를 그만 두고 조그만 디자인 사무실을 차린다. 예술과 상품, 진짜와 가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시대. 돈을 위해 홀딱 벗고도 당당하게 예술을 한다고 주장하는 시대. 하지만 ‘나’는 그러한 분위기에 편승해 얼치기 디자이너마저 예술을 한다고 떠들어대는 꼴이 영 못마땅하다. “예술과 판매량은 정확히 반비례”하거늘. “예술은 일종의 진창과 같아서 한번 발이 빠지게 되면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은 그 무엇이거늘. 그래서 ‘나’의 모토는 “예술은 집에 가서 하고 회사에서는 디자인을 하자”다.
“압축하지 않는 건 죄악입니다. 디자인이든 삶이든 말예요. 너저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나열하는 건 정말 비경제적인 짓입니다.”라고 서슴없이 이야기하는 ‘나’는, 효율성을 절대적으로 중시하는 도구적 이성의 신봉자다. 따라서 메이비의 의뢰를 받아 디자인해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나’의 라디오를 두고, 경박한 언론처럼 “안테나가 곧 라디오이며 라디오가 곧 안테나라는 형이상학적 질문이 내재된 철학적 테크놀로지”라고 호들갑을 떨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그것은 관습적 인식을 뒤집는 ‘시적 아이디어’로 초현실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 마그리트적 예술이 아니다. 외려 표면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효율성을 극단적으로 추구한 상품미학의 결정체라는 점에서, 그건 마그리트와 대척점에 있다.
하지만 ‘나’는 “피처럼 온몸을 통과해 심장으로 전달된 후 마음의 밑바닥을 돌멩이로 톡톡 두드리”는 메이비의 목소리를 매개로 효율성의 원리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어렴풋이 감지하게 된다. 시청각을 모두 활용하는 텔레비전에 비한다면 청각에만 의존하는 라디오는 분명 결여를 지닌 매체다. 더구나 그 결여는 도구적 이성이 용납할 수 없는 엄청난 비효율성을 낳지 않는가. 텔레비전을 본 사람이 단 2분 만에 간명하게 정리한 야구경기를, 라디오를 고집하는 자는 무려 20분 넘게 이야기를 늘어놓아야만 설명이 가능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비효율성을 통해, 라디오는 우리로 하여금 효율성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미처 감지하지 못하는 삶의 미묘하고 풍부한 결들과 접촉할 수 있게 한다. “야구장에서 불어오던 바람의 느낌. 긴장한 선수들의 몸동작. 파란 하늘 속으로 날아가는 하얀 야구공에 대한 설명을 정말 실감나게 묘사했다. 20분이 금방 지나가버렸다.” 이제 박물관에나 처박아 두어야 할 골동품이 되어버린 LP레코드는 또 어떤가. 레코드판을 꺼내서 쌓인 먼지를 조심스레 닦아내는 절차에 번거로움을 느껴본 적이 있거나, 상처 난 레코드판의 골에서 묻어나오는 잡음 때문에 짜증을 내 본 경험이 있는 낡은 청춘들은 기억하리라. 갓 CD가 나왔을 즈음, 그것의 편리함과 깔끔한 음색에 다들 얼마나 흡족해 했는가를. 하나 기쁨도 잠시, 요즘은 깔끔한 원음을 들려주는 CD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LP의 잡음에 매혹 당하는 자들이 있다(「그녀의 무중력 진공관」).
김중혁은 유용성의 차원에서는 무용한 것들을 욕망한다. 그렇게 도구적 이성의 차원에서 보면 완벽한 체계에 구멍을 내는 결여이자 존재에 들러붙은 쓸모없는 군더더기가, 그 너머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체계와 존재를 풍성하게 하는 긴요하고 소중한 존재가 된다. 거기에, 팔딱이는 생의 감각이 숨어 있다. 쓸모없어 보이는 것의 절대적 필요성, 결여의 존재성. 역시 반지의 존재성을 가능케 하는 결핍으로서의 구멍은 무용지물이 아니다. “컴퓨터 하는 사람들은 타자기가 종이를 낭비한다고 하는데 그건 정말 웃기는 소리입니다. 종이를 버리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게 낭비입니까. 아니면 컴퓨터처럼 종이를 아끼면서 생각을 지우는 게 낭비입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회색 괴물」)
마침내 ‘나’는 메이비가 디제이를 맡고 있는 시각 장애인을 위한 인터넷 라디오 방송 ‘메이비의 무용지물 박물관’을 들으면서, 결여에서 충만함을 이끌어내는 놀라운 상상력의 세계를 직접 체험하게 된다. 이때 ‘역설적 혼성 감각’이 상상력의 세계로 들어가는 필수적 기제 역할을 한다. 눈은 “느낌을 단순화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미묘한” 존재감을 단순화해 버린다. 그러니 차라리 눈을 감고 상상력으로 어둠을 응시하라. 그러면 “그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릴 것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려진 그 사물들은 움직이지 않는 무생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물”이 될 것이다.

나는 가끔 눈을 감고 어둠 속에다 잠수함을 그려본다. 메이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잘 그려지질 않지만 그래도 이젠 어느 정도 비슷하게는 그릴 수 있다. 잠수함이 완성되면 나는 캄캄한 어둠 속으로 잠수함을 발전시킨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시야가 굉장히 좁지만 눈을 감으면 공간은 끝없이 넓어진다. 잠수함은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잠수함에다 노란색을 칠하고 싶지만 그것만은 잘 되질 않는다. 언젠가는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잠수함이 심해를 누비는 광경을 그려 보라. 그 잠수함은 침몰의 염려가 없으며,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연료가 고갈될 걱정도 없고, 수명의 제한을 받지도 않는다. 어쩜 그건 최초의 잠수함보다 오래된 걸 수도 있고, 최신형의 잠수함보다도 우수한 건지도 모른다. 상상의 잠수함이 펼치는 이 아름다운 항해의 상상을 통해, 작가 김중혁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현실적 차원에서 상상력은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닌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구적 이성의 효율성에 얽매이지 않는 상상력이 바로 인류의 고갈되지 않는 생명력의 원천이다!’



이정석․
2004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 등단
․숭실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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