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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정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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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계절 작품읽기|
【소설】
박금산 「경계에서 잠들다」
(≪현대문학≫ 2005년 7월)
너무 이르거나 혹은
너무 늦거나
정재림(문학평론가)
1.
「경계에서 잠들다」는 ‘잠’에서 시작해서 ‘잠’으로 끝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잠깸’에서 시작해서 ‘잠듦’으로 끝난다. 그런데 세 명의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숙면을 취하지 못한다. 아이는 자주 깨어나서 울음을 터뜨리고, ‘그’와 ‘아내’는 핸드폰의 알람 소리와 아이의 울음 소리 때문에 수면을 방해받는다.
가족들의 잠을 방해하며 이른 시각부터 알람이 울린 까닭은 무엇인가. 대학의 시간강사인 ‘그’가 다음날 강의 준비를 미처 마치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이다. 새벽 2시에 잠자리에 들면서 ‘그’는 4시 53분, 56분, 59분, 알람이 세 번 울리도록 설정해 놓았었다. 세 번째 알람을 듣고 5시에 일어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만다. 핸드폰 배터리의 방전으로 두 번째 알람이 울리지 않았고, 결국 아침 7시까지 자버리고 만 것이다. ‘그’는 차선책을 택한다. 아내를 출근시키고, 아이를 처가로 보낸 후 강의 준비를 하는 것. 그것이 현재의 상황에서 ‘그’가 혼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침부터 아내와의 소모적인 신경전이 계속되지만 혼자 남고 싶다는 생각에 참고 참는다. 하지만 아이가 깊이 잠드는 바람에 시간이 또 지체되고, 시간은 벌써 9시가 되어버린다. “11시 수업이니 10시에는 집에서 나가야 한다, 벌써 8시 30분이다, 10시에 나가려면 9시 30분까지만 책을 볼 수 있다, 면도를 해야 하고 셔츠를 다려야 한다, 양말짝을 맞춰 신는 데에도 몇 분이 걸린다, 타이는 또 어디에 있을까.”
결국 출발해야 하는 10시까지 남은 시각은 60분에 불과하고, ‘그’는 스스로에게 마지막 타협안을 내놓는다. “노트북에 다운받아놓은 오블로모프와 닐스 뤼네의 줄거리만 대충” 읽고 학생들 앞에서 “닐스 뤼네의 무신론에 감동한 척해 버”리기로 작정한다. 이렇게 백보 양보하지만 현실은 끝까지 ‘그’를 배반한다. 강의 자료가 담겨 있는 노트북이 사라져 버린 것! “노트북이 놓여 있던 자리는 깔끔하고 허전하게 비어 있었다.” ‘그’가 잠들어 있는 사이, 도둑이 공부방 방충망을 찢고 창문 아래 놓여 있던 노트북을 집어간 것이다. ‘그’와 아내가 순진하게도 바람의 흔적이라고 믿었던 방충망의 찢어진 자국은 실은 사람의 흔적이었다. 도둑이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가 아내에게 전화를 걸고, 흥분을 떨쳐 버리기 위해 담배를 피우고, 그래서 시간은 또 흘러간다.
2.
이 소설에는 ‘시간’ ‘시계’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4시 53분에 알람이 울렸다”는 소설 첫 문장을 비롯해서, “시계를 봤다, 벌써 불을 꺼야 할 시각이었다”, “7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자 시각이 궁금해졌다”, “지금 시각 9시” 등. ‘그’는 시간을 끊임없이 의식하며 자주 시계를 들여다본다. ‘그’의 시간은 분 단위로 분절되어 있는 형국이다. ‘그’는 5시에 일어나기 위해서 4시 53부터 3분 간격으로 3번의 알람이 울리도록 설정해 놓는 사람이다. 아이의 밥을 지으면서 센 불로 끓이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2분, 약한 불로 줄여서 쌀을 익히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5분, 불을 끄고 뜸을 들이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3분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5분 후로 찍어둔 시계판 눈금에 바늘이 얼마나 가까워져 있는가”를 확인하기도 한다. 또 아내가 7시 30분에 깨워달라고 말했기 때문에 잊지 않고 정확히 그 시간에 아내를 깨운다. 강의 준비할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자주 체크하고, 시간을 가장 효율적인 활용하는 방법을 고안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미소한 단위로 분할될 수 있는 근대의 시간, ‘시계적 시간’에 익숙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시간을 초․분 단위로 효율적이고 규모 있게 사용하더라도, 무능력하고 비효율적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듯하다. 그러니까 ‘그’가 새벽 5시부터 깨어나 잠을 설쳐가며 무언가를 하긴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안 한 것과 진배없다는 이야기이다. 설사 새벽 5시에 성공적으로 기상을 했더라도, 혹은 노트북을 도둑맞지 않았더라도, 역시 ‘그’는 무능력한 사람일 뿐이다. 왜냐하면 대학 시간강사라는 ‘그’의 직업이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달에 18만5천2백 원에 불과한 ‘그’의 수입은 소위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한다. 연봉 2,800만 원의 경제인이자 법적 세대주인 아내의 온갖 짜증을, ‘그’가 끝끝내 참는 것도 자신의 형편없는 경제적 능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9만 원이 채 안 되는 돈을 벌기 위해 월요일부터 꼬박 3일을 투자하는 ‘그’의 행태는, ‘그’의 입장에서나 아내의 입장에서나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자신도 잘 알다시피, 차라리 집안일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게 여러모로 합리적인 처사이다.
때문에 ‘그’가 열심히 ‘시계적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는 ‘시계적 시간’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벗어나 있는 셈이다. 물론 ‘그’가 자청해서 자본주의적 시간을 위반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어느 누구 못지않게 효율적이고 경제적으로 시간을 활용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조금 빨랐거나 늦었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시간을 유용하지 못한다. 5시에 일어나야 했지만 4시 53분에, 너무 일찍 깨는 바람에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 잠잤던 시간을 벌충하기 위해서 아침 시간을 확보했지만 쓸데없는 일들로 시간을 소모해 버리고 만다.
한번 더 생각해 본다면, 단순히 ‘그’가 조금 늦거나 혹은 너무 빨랐기 때문에 실패한 것만은 아니다. ‘그’가 선택한 삶 자체에 불행이 내포되어 있었다고 보는 게 정확하겠다. 정확한 시간에 일어나서 강의 준비를 했다고 하더라도, 최저 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그’의 수입이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돈으로는 출산 이후 줄곧 사직을 권고 받아 온 아내의 스트레스를 해소해 줄 수 없으며, 세 식구가 딸린 한 가정의 가장 노릇을 온전하게 수행할 수 없다. 어찌됐든 간에 ‘그’는 무능력한 남편, 가장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그’는 ‘최소 비용에, 최대 효과’를 추구하는 자본주의 세계의 맨 끄트머리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자주 시계를 들여다보더라도, 아무리 몇 개의 알람을 준비하더라도.
3.
하루 동안의 우여곡절 끝에 다시 밤이 찾아오고, 고단한 남편과 아내는 잠이 든다. 아내는 또 도둑이 들까봐 “문고리에 있는 똑딱이 자물쇠를 눌러 잠”근 후 잠자리에 든다. ‘그’는 공부방(한때는 자신만의 공간이었던)으로 들어가 두 개의 책상 사이에서 잠이 든다. 한 개는 아내의 책상이고 또 하나는 ‘그’의 책상이다. 아내의 책상에는 교대 입학에 필요한 수능시험 서적들이 쌓여있고, ‘그’의 책상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노트북이 없다.(남편이 교수가 되는 것보다 자신이 교사가 되는 게 빠르다고 판단한 아내는, 교대입학을 목표로 하여 수능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는 “어느 책상에 앉을까” 생각한다. 어느 책상에도 선뜻 앉을 수가 없다. 각각의 책상은 현실적인 삶과 이상적 삶에 대한 암시일 것이다. 현실적인 삶도 무시할 수 없지만, 이상적인 삶도 간단히 버릴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아마도 ‘그’는 자신의 책상을 고수할 터이지만 미래가 밝지만은 않다. 오늘은 학위논문 자료가 담겨있는 노트북을 도둑맞지 않았는가. 어찌 노트북뿐이겠는가. 견고한 철망을 뚫고 노트북을 집어 갔던 도둑이 다음에는 무엇을 가져갈지 어찌 알겠는가. ‘그’는 또다시 “경계”에서 불안하게 잠드는 수밖에. 그 “경계”는 아내의 책상과 그의 책상으로 상징되는 이상과 현실의 경계일 것이며, 또한 창문 안과 밖으로 비유된 세계와 자아의 경계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은 삶이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듯하다. 결코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불편하고 불안하게 “경계에서 잠”드는 수밖에. 마치 ‘그’와 아내가 자주 잠에서 깨어나듯이, 아이가 깊이 잠들지 못하고 계속 뒤척이듯이.
불편하지만 버릴 수도 없는 삶! 참으로 지당한 이야기이고, 한편 지긋지긋한 말이기도 하다. 이 소설이 다소 지루하게 읽힌다면, 작가가 지긋지긋하지만 지당한 삶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경계에서 잠들다」는 요즘 소설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환상이나 망상, 요설 따위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리얼’한 이야기이다. 삶의 중력을 소거하고 무중력의 자유를 만끽하는 요즘 소설과 달리, 아내와 자식의 무게 때문에라도 ‘그’는 결코 무중력의 공간으로 날아갈 수 없는 듯하다. 소설을 읽으며 독자가 답답함과 갑갑함을 느낀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에 대한 정직한 감정 아닐까.
정재림․
200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한국예술종합학교 및 극동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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