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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시)/이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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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92회 작성일 08-02-26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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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계절 작품읽기|【시】


박연준 「연애편지」
(문예중앙 2005 여름호)

서늘한 독백, 연애편지

이상숙(문학평론가)


요즈음 연애와 사랑은 다른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사랑은 그냥 서로 좋아하는 고래(古來)의 본능적 감정이고, 연애는 근대적인 사랑의 방식으로서 문화적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이 시에서의 연애는 사랑과 연애를 구분하지 않아도 되는 그냥 ‘사랑’이다. 또 ‘연애편지’는 사랑하는 감정을 편지로 써서 주고받던 사랑의 형식임에는 틀림없으나. 굳이 근대적 사랑으로서의 ‘연애’ 혹은 근대문학 형식으로서의 서간체 ‘연애편지’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연애든 사랑이든 그 매력은 타자를 인식한다는 것에 있다. 연애편지도 마찬가지다. 사랑의 대상과 수신인으로서의 타자가 있어야 한다. 특별한 한 타자에 대한 열정과 애틋한 마음을 전달하는 말이며 글이 연애편지다. 사랑의 마음을 주고받는 연인의 대화가 연애편지이다. 아니다. 어쩌면 연애편지는 대화가 아닐 수도 있다. 사랑이 타자보다는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을 돌보는 자기애의 감정일 수 있듯이, 즉 자신이 아닌 타자에게 온전한 열정과 친밀감을 헌납하는 특별한 행동, 또 그런 특별한 행동을 하는 변화된 자신을 발견하는 설렘과 그 감정에 취하는 것이라면. 타인에게 몰두하고 민감히 반응하는 자신을 세심히 들여다보는 지독한 자기애, 혹은 그 신비한 감정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라면, 연애편지 또한 타자와의 소통을 위한 대화가 아닌 스스로의 감정과 그 감정을 즐기는 자신에게 하는 독백일 수도 있다.
박연준의 「연애편지」(문예중앙 2005 여름호)는 연인에게 보내기 위해 쓰는 달콤한 편지이기보다는 자신 혹은 자신의 사랑에게 하는 독백으로 보인다. 슬프고 고통스러워 보이지만 대상을 관조하는 듯한 담담한 어조로 감정은 절제되고 있다.

1
물속에서 편지를 쓴다
쥐어뜯긴 시간들이 물 위를 떠간다

2
떨어지는 해를 받아먹고 싶어
아니면 슬픔에 축축이 젖은 복숭아 동그란 씨를 삼킬까?
미안해, 실은 방금 전 파란 캡슐을 삼켰어
나는 하늘이 되려나봐
내가 파놓은 네 가슴속 계단이 되려나봐

3
씩씩하게 바람이 지나갔고
엉성한 사랑이 토사물처럼 달라붙었다
거짓말, 씩씩한 건 사랑이 될 수 없다
부화하지 않는 알을 품고 하늘을 본다
밤이 흔들리며 걸어간다
잠들지 말라고 쇄골을 물어뜯는 밤
그가 내 쇄골을 스윽 빼더니
손가락으로 튕기며 논다
어깨가 주저앉은 채로 그를 따라가며
병신 걸음으로 늙는다
자꾸만 내 몸의 이파리가 썩고
나를 옮겨 심고 싶은데,
내가 잠긴 흙 속에는 뿌리가 없다

4
담요를 몸에 두르고 앉았는데
그의 머리카락 한 올이 담요에 묻어 있다
오래 바라보다 옆에 가만히 내려놓는다
머리카락은 등을 구부정하게 하고 옆으로 누워있다
이 가느다란 線 그의 몸이 말하는 線이
오늘 밤 내게 온 슬픔이다

5
하얀 옷을 입은 내가 걸어가고 있다

박연준의 독백이 보여준 풍경을 그대로 따라가 본다. 물 속에 몸을 담근 듯, 사랑의 감정에 취한 나는 말을 건넨다. 너나 그대가 아닌 나에게. 화자는 자신을 ‘나’로 지칭하고 있으며, 사랑의 대상을 ‘너’에서 ‘그’로 바꾸어 부른다. 건네고 받기 위한 편지가 아니라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기억하기 위해 자신에게 쓰는 편지이다. 사랑이라는 몽환적인 감정 상태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그냥 흘러갈 것이다. 시간을 극복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그냥 흘러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그냥 내게 건네는 말이었으므로…….
‘슬픔에 축축이 젖은’, ‘내가 파놓은 네 가슴속 계단’, ‘엉성한 사랑’, ‘씩씩한 사랑’, ‘부화하지 않은 알’, ‘흔들리는 밤’ 모두 불안정한 이상기류 같은 사랑의 감정에 대한 은유이며 배경이다. “쇄골을 물어뜯”는 격정과 “쇄골을 스윽 빼더니/손가락으로 튕기며 노는” 육체적 전율은 모두 사랑하는 이가 누리는 특권이다. 쇄골이 빠져 “어깨가 주저앉은 채로” ‘내 몸의 이파리가 썩’어가는 두려움에 직면하며 ‘뿌리’의 존재를 확인하며 자신을 찾고자 하는 고통 또한 사랑하는 자의 몫이며 특권이다. 담요에 붙은 그의 머리카락 한 올에 골똘해지고 울컥 눈물겨워지는 사랑의 고통 역시 마찬가지다. 머리카락 한 올은 그의 몸이다. 그의 머리카락이 그리는 가느다란 곡선(曲線)을 바라보는 시간은 ‘나’와 ‘너/그’를 관조하는 시간이다. 나보다 더 나처럼 밀착한 존재라고 믿었던 ‘너’는 ‘그’로 객관화되고 구부러진 선으로 대상화된다. 사랑이라는 비정상적인 감정의 격류 속에서 ‘나와 너’가 객관화되고 대상화되는 순간이란 “오늘 밤 내게 온 슬픔”의 순간이라고 한다.
하얀 옷을 입고 걸어가는 나를 지켜보며 이 시는 끝난다. 하얀 옷이라는 풀리지 않은 단서를 남기고 있지만, 객관과 관조의 시선은 나 자신에게까지 적용된 것 같다. 이 시의 마지막처럼 사랑은 어쩌면 쉽게 설명되지 않는 모호한 미답의 감정의 한 부분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물 속을 유영하는 시간처럼 몽환적이고 머리카락 한 올처럼 올연하기도 하고 자신을 타자화시킬 정도로 자신의 감정에 민감해지기도 한다. 너무나 흔한 사랑과 구식(舊式) 사랑의 방식인 연애편지는 박연준의 세련된 감성과 어조, 화법으로 새삼 서늘하게 되살아나고 있다. 자신에게 건네는 서늘한 독백의 순간으로.


이상숙․
1995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평론집 󰡔시인의 동경과 모국어󰡕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추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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