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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시)/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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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계절 작품읽기|【시】
김왕노 「친구는 욕하다 잠이 들고」
(≪리토피아≫ 2005년 여름)
연옥(煉獄)의 도시, 서울에서 살아가는 법
강경희(문학평론가)
친구는 맥주로 눈이 풀려 그렇게 욕하다 홀 한편 의자에서 잠들고
방금 지하 1층 사막이란 카페에서 휘청거리는 발로 지상으로 올라와
피닉스 맥주집까지 온 우리는 잠든 친구와 함께 어디로 가야 하나
불사조가 사는 나라는 어디 있는가?
그간 이야기는 진부했고
가슴에서 비수같이 품었다 꺼낸 이야기도 이제 재탕에 불과하다
누가 사랑하기 위해 꽃등 켠다는 밤
친구는 욕하다 잠이 들고 3차 4차 5차 갈 곳은 어디 있나
큰 부도 내고 달아났다는 친구를 어제는 학동사거리에서 만났고
믿어달라며 구호를 외치던 시대도 결국 부도를 내고 있다
친구는 욕하다 잠이 들고 그래 서울의 밤은 예나 지금이나 불온하다
간발의 차이로 놓쳐 버린 막차는 종착지에 이르러 시동마저 껐을 것이다
깨워도 자꾸 욕하다 잠드는 친구는
결국 외면하고 싶은 서울의 사랑과 서울의 밤과 서울의 남산으로부터 더 멀리 떠나려
서울에서 내린 닻을 잠 속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누군가 나타샤를 사랑하는 밤에는 펑펑 눈이 내린다는데
누구를 사랑해야 이 밤 별빛이라도 사르르 내릴까?
친구는 욕하다 잠이 들고 잠든 친구를 떠메고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아픈 죽지마다 새살로 돋아나는 울음을 퍼덕여
이 밤 우리는 시베리아나 더 깊은 내륙으로 떠나가는 철새 무리여야 하나
친구는 욕하다 잠이 들고
―「친구는 욕하다 잠이 들고」 전문
서울에 살기 위하여
오늘도 우리의 술잔을 깨끗이 하겠습니다
빵이 넉넉할 때는 물이 없고
물이 넉넉할 때는 빵이 없고
서울의 평화를 위하여
오늘도 우리의 술잔을 깨끗이 헹구겠습니다.
날 저무는 거리의 창문을 닫으며
사람들이 하나 둘 낙엽으로 떨어질 때
이제는 사랑할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무사히
서울에 살기 위하여
달빛 아래 오줌 누는 사내를 따라가서
오늘도 불 꺼진 술집의 술병으로 뒹굴겠습니다
―정호승 「서울에 살기 위하여」
(서울의 예수,1982,민음사)
김왕노의 「친구는 욕하다 잠이 들고」를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정호승의 서울의 예수」를 다시 보게 됐다. 서울의 예수가 출간된 지 23년이 지났다. 세상은 급속도로 변했다는데, 어찌된 일인지 내게 있어 서울은 좀처럼 달라 보이지 않는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닌가. 정호승과 김왕노가 보았던 ‘서울’은 너무나 닮아 있다. 2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서울은 여전히 벌겋게 취해 있다. 그들에게 있어 술을 마시는 행위는 삶의 고통과 직결된다. “오늘도 무사히/서울에 살기 위하여//달빛 아래 오줌 누는 사내를 따라가서/오늘도 불 꺼진 술집의 술병으로 뒹굴겠습니다”라는 정호승의 말은 삶의 비극적 아이러니를 확인시켜 준다. 이러한 서울에서의 삶의 방식은 김왕노에게서도 지속된다.“맥주로 눈이 풀려 그렇게 욕하다 홀 한편 의자에서 잠”이 든 친구를 데리고 “3차 4차 5차 갈 곳은 어디 있나”를 찾는 한 중년 사내의 푸념은 여전히 서울이라는 도시의 불온성을 보여준다.
20여 년이란 시간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여전히 삶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공간으로 존재한다. 그 고통의 실체를 김왕노는 보다 직설적 토로한다. “큰 부도 내고 달아났다는 친구를 어제는 학동사거리에서 만났고/믿어달라며 구호를 외치던 시대도 결국 부도를 내고 있다”라는 말처럼 그는 삶을 추락시키는 원인이 바로 물질 지상주의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돈으로 인간의 모든 가치가 환원되는 사회에선 존엄하고 숭고한 이념마저 변질될 수밖에 없다. 꿈과 낭만이 사라져버린 공간인 서울은 그저 “비수같이 품었다 꺼낸 이야기도 이제 재탕에 불과”한 낡은 유물인 것이다. 현실은 그저 진부한 삶만을 반복할 뿐이고, 한때 꿈꾸었던 야망도 헛된 몽상임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서울에서는 결국 모두가 패배자이며 모두가 희생양일 수밖에 없다. 잔인한 삶의 방식을 강요하는 도시, 술에 취해 휘청거리며 생의 고통을 잠시 잊는, 견디게 하는 망각의 늪, 술로써 모든 것을 배설해야만 되는 공간, 그곳이 바로 ‘서울’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삶이 만들어놓은 이 거대 도시 서울에서 시인은 우리 모두가 불구화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병든 존재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온한 공간인 서울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흥미롭게도 정호승과 김왕노에게 있어 그것은 ‘사랑’이라는 말로 연결된다. “사람들이 하나 둘 낙엽으로 떨어질 때/이제는 사랑할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는 정호승의 고백은 ‘삶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는 생의 낭만성을 확인시켜 준다. 김왕노는 어떠한가? “누군가 나타샤를 사랑하는 밤에는 펑펑 눈이 내린다는데/누구를 사랑해야 이 밤 별빛이라도 사르르 내릴까?/친구는 욕하다 잠이 들고 잠든 친구를 떠메고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듯이 그 또한 ‘사랑’을 찾는다. 백석이 그랬듯이 그 또한 현실의 괴로움을 잊을 수 있는 낭만적인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꿈꾸던 사랑이 더 이상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없는 환각과도 같은 것임을 알고 있다.
김왕노의 고뇌는 이처럼 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한다는 것 그 사이에서 존재한다. 즉 “어디로 가야하나”말은 방황인 동시에 “어디로 가야만 한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술에 취해 잠든 친구는 세상을 욕하고, “결국 외면하고 싶은 서울의 사랑과 서울의 밤과 서울의 남산으로부터 더 멀리 떠나려/서울에서 내린 닻을 잠 속으로 끌어올”리고 있지만, 술에 취한 친구를 “떠메고” 가야만 하는 화자에는 깨어있기에 ‘어딘가’ 가야만 하는 것이다.
삶의 고뇌를 망각하고 외면할 수 없는 자, 깨어있는 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고통과 대면하는 행위이다. “아픈 죽지마다 새살로 돋아나는 울음을 퍼덕여”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듯이 그는 잠들지 못했기에, 잠들 수 없기에, 자신의 상처를 끌어안고 어디론가 가야만 하는 것이다. 불온함으로 가득 찬 서울의 거리, 휘청이고 쓰러지고 끊임없이 추락하는 서울의 밤, 이 연옥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그는 스스로에게 “이 밤 우리는 시베리아나 더 깊은 내륙으로 떠나가는 철새 무리여야 하나”라고 묻는다. 이 물음은 궁극적인 삶의 해답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삶은 여전히 괴로울 것이며, 꿈꾸던 사랑을 끝내 실현할 수 없을지도 모르며, 희망의 좌표를 보여주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쓸쓸히 혼자 소주를 마시며, 아직 오지 않은 나타샤를 기다리는 백석이 아름다운 이유는 가난함 속에서도 사랑을 잃지 않고, 사랑하는 이를 한없이 기다릴 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절망의 서울 공화국을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하는 이유는 가혹하고 잔인한 현실 속에서도 건강함이 남아있는 희망의 대지를 꿈꾸고자 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기에 아직 잠들지 말고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깨어서 잠든 친구를 “떠메고” 가야만 할 것이다.
강경희․
1967년 서울 출생
․200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숭실대, 호서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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