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19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시)/권경아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44회 작성일 08-02-26 23:23

본문

|지난계절 작품읽기|【시】


안현미 「고생대 마을」
(≪시와사상≫ 2005년 여름)

이 땅의 카나리아들을 위하여

권경아(문학평론가)


해발 855m 푯말 꽂힌 추전역에 내려 나의 ‘폭풍의 언덕’을 찾아갈 때, 그때 고갯마루에서는 바람을 불러 어떤 힘을 주물럭주물럭 만들고 있는 풍차 같은 사내도 있었을 테지만 내가 사로잡힌 건 풍차도 바람도 아니고 그걸 품고 기른 5억 8000만 년 된 막장의 어둠이었어 그러니까 내가 찾아가는 건 ‘폭풍의 언덕’이 아니라 ‘폭풍의 무덤’이었던 거지 컹컹 사납게 울부짖는 어둠 속에서 남인수를 좋아하던 아버지 검은 얼굴로 돌아와 유독가스 탐지를 위해 탄광 속에 둔 카나리아처럼 노래 부를 때 나는 아버지의 희망의 카나리아였는지도 몰라 5억 8000만 년 된 어둠의 고생대 검을 석탄을 캐낼 때 나 아버지가 얼마나 두려웠는지, 어두웠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카나리아였지 나 이제 아버지 무덤 앞에서 중얼거리지 아버지 그 두려움을, 불꽃같은 어둠을 아버지라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결국 두려움도, 어둠도 피붙이 같겠지요 ‘한때는 산업전사라 불리웠고 또 한때는 폭도라 불리웠던’ 우리들의 아버지!
―안현미 「고생대 마을-사북」

안현미의 시를 대할 때에는 항상 어떤 ‘긴장’이 있다. 여기서의 긴장은 시에서 느껴지는 신선하고 독특한 시적 긴장감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의 시를 대하기 전에 그의 독특함을 예견하고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한다는 의미에서의 독자가 느끼는 긴장이다. 이는 그의 시가 모호하면서도 선명하고, 난해하면서도 강렬한 흐름을 감지하게 하는 팽팽한 낯선 시적 감수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이로 인해 독자는 그의 시를 대하기 전에 이미 그의 낯선 독특함을 읽어낼 태세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생대 마을」에는 이러한 모호하고 낯선 난해함이 아닌 친숙한 시적 감수성이 보여주는 긴 여운이 있다. 안현미의 그 어떤 시보다도 비교적 단숨에 읽히는 이 시에 시선이 멈추는 것은 아마도 이 시가 느끼게 하는 희미한 여운 때문이리라. 짠한 마음 없이 아버지, 어머니라는 말을 떠올릴 수는 없을 것이다. 가까운 듯하면서도 너무도 멀고, 먼 듯하면서도 너무나도 가까운,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누구나 가슴 한켠에 묻어두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안현미의 「고생대 마을」은 이러한 이 땅의 아버지, 어머니들에 대한 시이다.
시인은 5억 8000만 년만큼이나 오래된 어둠이 묻혀있는 고향, 사북에 당도한다. 바람이 부는 고향 마을을 “‘폭풍의 언덕’이 아니라 ‘폭풍의 무덤’”이었다고 토로하는 의식 밑바닥에는 시인이 고향 마을과 아버지를 어둠으로 인식하는 두려움이 깔려있다. 그러나 막장에서 돌아온 검은 얼굴의 아버지를 보면서도 그가 느꼈을 더 큰 두려움과 어둠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시인은 고백하고 있다. 5억 8000만 년이나 된 어둠의 검은 석탄을 캐내며 5억 8000만 년만큼이나 깊은 어둠과 두려움을 느꼈을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기술이 발달하기 전, 광부들은 탄광 속으로 들어갈 때 카나리아를 새장 속에 넣어갔다. 카나리아는 나쁜 공기나 환경에 약한 새이기 때문에 탄광 속의 유독가스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즉 카나리아는 위험을 감지하는 신호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카나리아는 우리들의 아버지였다. 어둠 속에서 어둡게 “검은 얼굴”로 돌아오는 아버지는 바로 우리에게 어둠과 위험을 경고하는 한 마리 카나리아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어두운 검은 얼굴을 보며 우리는 어둠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감지하고 어둠에 다가가지 않았다. 그가 5억 8000만 년이나 된 검은 석탄을 캐낼 때 얼마나 깊은 어둠에 그가 휩싸여 있었는지, 얼마나 큰 두려움으로 공포에 떨었는지는 모른 채.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의 존재를 언제나 아버지 어머니로서만 인식할 뿐, 그들도 한때는 평범한 소년 소녀였던 한 인간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잊고 살아간다. 기쁨과 환희는 물론 슬픔과 공포로 몸을 떨었을, 우리와 같은 나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아버지가 위험을 감지하는 카나리아였다면 그에게 우리들은 희망을 감지하는 카나리아였음을 시인은 뒤늦게 깨닫는다. 우리들에게서 희망을 읽어내며 어둠을 감수했을 삶을 이제는 이해하기 시작하지만 왜 깨달음은 항상 뒤늦게 찾아오는지.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시인은 “그 두려움을, 불꽃같은 어둠을 아버지라 생각하기로 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두려움도, 어둠도 피붙이” 같을 것이다. ‘피붙이’라는 말이 지닌 가슴 아리면서도 끈끈한 그 무엇. 아버지의 어두운 삶을 딛고 일어서며 어둠과 두려움까지 끌어안으려는 의지, 이것이 아버지가 보고자 했던 “희망의 카나리아”의 몸짓이 아닐까.
“‘한때는 산업전사라 불리웠고 또 한때는 폭도로 불리웠던’ 우리들의 아버지!”라는 구절에서 굳이 자본주의화 과정의 병폐나 부조리를 읽어내지 않아도 좋다. 이제는 그들의 삶을 되돌아볼 때이다. “희망의 카나리아”는 우리들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들이 우리의 “희망의 카나리아”인지 모른다. 항상 우리들 곁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멀기만 하던 우리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들, 짙은 어둠을 견디며 우리의 “희망의 카나리아”가 된, 이 땅의 모든 카나리아들을 위하여!


권경아․
2003년 ≪시와세계≫로 등단

추천1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