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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서평/백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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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4,663회 작성일 08-02-26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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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동호 시집 󰡔한 쌍의 새가 날아간다󰡕
김동호





실낙원(失樂園) 또는 신낙원(新樂園)에 대한 꿈

백인덕|시인





1.
산업사회 이전과 이후의 인간형의 변화를 표현하는 사회학적 개념으로서 ‘원형적 인간’과 ‘부채꼴 인간’이라는 것이 있다. 산업사회 이전, 대체로 농경사회의 인간은 ‘원형적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의식의 측면이 아니라 그 역할과 기능의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한 명의 농부는 그 자신이 주요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농기구수리공, 자녀들의 교육자, 집안의 대표, 공동체의 의사 결정자 등등의 역할을 모두 자연스럽게 수행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산업사회 이후의 인간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하나의 전문적인 역할에 의지하여 살아가게 된다. 원형에서 분리된 ‘부채꼴’의 형태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서울시의 교통문제는 심각하지만, 나는 매일 그것을 체험하며 살지만, 그 해결책은 언제나 교통전문가들의 몫일 뿐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이처럼 현대인이 ‘부채꼴 인간형’이 되었다는 것은 현대 사회의 인간 소외나 파편화 등을 다룰 때 더 적합한 개념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형이 결국은 ‘전문가 사회’를 낳았다는 점에서 우리 시의 현장에서도 적용이 가능할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극한 대립, 또는 민주/반민주의 정치, 경제적 이원 대립 상황이 해체된 이후 우리 시가 눈을 돌린 것은 거시적/미시적 차원에서의 ‘생존의 조건’이라는 문제였다. 이러한 시각의 전환은 지난 이십 여 년 간 문명비판적 시, 생태적 상상력의 시, 여성주의 시, 몸에 대한 관심, 언어에 대한 회의 등 다양한 갈래로 전개되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적 변화는 그 나름대로의 성과가 작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만큼의 문제점을 노정한 것도 또한 사실이다. 문제는 대략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하나는 전문가 사회라는 현대적 특성과 맞물려 시가 일상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버린 특정 지식의 영역으로 바뀌어버렸다는 것이다. 시는 그 자체로 특정한 발화의 형식이다. 그러므로 시는 그 자체로 위상적, 장르적, 제도적 특성을 부여받는다. 그런데 한술 더 떠서 시가 특정한 문제를 다룰 때 고도의 전문적 개념을 시로 소화시키지 못함으로써 더욱 접근하기 어려운 ‘학문’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생태학적 상상력이나 여성주의 시에서 이러한 일단을 발견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의도의 유무를 떠나 시가 대중문화를 향해 열림으로써 시적 개념이 통속성을 옹호하는 상업적 개념으로 변형되어 유통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은 몸과 언어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시들 속에서 그 일단을 발견할 수 있다.
서두가 좀 장황했다. 그러나 이러한 장황함은 김동호 시인의 새 시집, 󰡔한 쌍의 새가 날아간다󰡕를 바로 읽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경로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이 시집은 이른바 시적 기교에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고, 무슨 ‘주의’니 ‘이념’이니 하는 것에 의탁하지도 않고 있다. 그렇다고 이미 완전히 물화되어 버린 자연에 대한 동경이나 희원도 담고 있지 않다. 심지어 초탈이나 초월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 시집의 주요 모티프는 ‘사람’이며, 그것도 매일 쓰레기를 만들어내고, 보잘것없는 욕망에 시달리면서 그 사실을 반성하는 동시대의 일상적 인간이다. 바로 이러한 인간군상과 삶의 모습을 그리면서 김동호 시인은 오늘날의 문제와 그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2.
전체 4부로 이루어진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문제 삼고 있는 핵심은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린 삶, 생활의 흘러넘침이다. 이 시집에서 사용되는 ‘자연스럽다’는 개념은 말 그대로 ‘욕망’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배고프면 음식을 찾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면 무엇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왜곡된 욕망, 과잉의 욕망의 노예가 될 때 부자연스러움이 생겨난다. 육류 1kg을 얻기 위해서는 6개월의 시간과 4kg의 곡물이 필요하다. 이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에 지구 한편은 심각한 비만으로 온 나라가 앓고, 다른 반대편은 기아로 떼죽음을 당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적으로 우리의 식단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그것이 선진적이며 문화적이라고까지 여긴다. 이번 시집은 이처럼 당연한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릴 적 뒷산은 큰 냉장고였다
그 속엔 없는 것이 없었다
온갖 과일 야채 구근들
고루 갖추어 저장되어 있었다

커서 바다에 와 보았을 때
바다는 더 큰 냉장고였다
이름 모를 고기들 바다 야채들
끝없이 한없이 저장되어 있었다
바닷가 모래 위에까지!
―「천연 냉장고」 부분

오늘날 이런 ‘천연 냉장고’ 운운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은 시의 끝에서 ‘이런 소리 다시 할 날 있을까’ 하고 묻는다. 물론 없을 것이다. 필자는 현대문명에 대한 두 비유, ‘바벨탑’과 ‘우로보로스의 뱀’ 중에서 후자를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들 개인의 삶이란 문명 전체를 개관할 수도 없고, 책임을 느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모든 행위의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최소한 ‘천연 냉장고’는 후대에 지불해야 할 아무런 대가 없이 사용할 수 있지만, 오늘의 ‘대형 냉장고’는 반드시 무엇인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쯤은 자각해야 할 것이다.
이번 시집에서 김동호 시인은 문명, 문화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온갖 부자연스러운 행태들에 대한 비판을 쏟아낸다. 그 비판은 시인의 감정적 대응이 그대로 표출되는 직접적인 형태로, 또 때로는 민담들을 이용한 간접적인 형태로 그려진다. 그 비판의 대상도 일상적인 미시적 탐욕에서부터 이데올로기라는 미명 아래 자행되는 국가적 탐욕에 이르기까지 파장이 매우 넓다. 우선 미시적인 것들을 살펴보면

참배아가씨 참치아가씨
참조개아가씨……
모두모두 아슬아슬 간 녹게 벗겨
주린 놈들부터 혼 빠져나가게 하라

상업주의 시대
商魂 말고 무슨 혼이 또 필요하랴

상품가치 없는 것은 존재가치 없는 것
성형수술 지방수술 중앙수술……
빨리빨리 수술해서 구매욕구 북돋우는
상품들 되게 하라
―「1996. 6. 14.」 부분

이 시에 나타나는 것처럼 개인으로서 우리가 살아야할 시대는 한마디로 ‘상업주의 시대’, ‘황금만능주의 시대’일 뿐이다. 이 시대는 “독재의 시대 去하고/황금만능의 시대 來하여/온천지가 돈 돈 돈……/돈이 마돈나인 시대엔 돈이/神劍같다//그 劍을 기리기 위해/아름다운 선남선녀들이 지금/구름처럼 몰려들고 있”(「신神劍」)는 시대다. 표면적으로 시인은 이처럼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문화적 천박성을 비판하고 있다. 이런 비판의 기저에는 대중문화에 대한 일말의 부정적 인식이 깔려 있다. 그것은 앞의 시에서 ‘선남선녀들이 지금/구름처럼 몰려들고 있다’는 표현이나 “옛날엔 범虎이 무서웠다/지금은 범汎이 무섭다”(「2000. 10. 18」)라는 표현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대중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몰려듦이다’라고 조소했던 리비이스의 말을 다시 듣는 듯하다.
그러나 이처럼 오늘날 인간이 처한 모순된 상황을 한낱 외적 조건으로만 치부해 버린다면 이는 진정한 문제 제기가 될 수 없고, 단지 비판을 위한 비판에 머무를 위험이 매우 크다. 이러한 문화적 조건을 형성한 것이 결국은 우리 자신이고, 보다 구체적으로 충실한 생활인으로서의 나 자신이었음을 자인하는 용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연초록 초승달은
날이 밝기가 무섭게 가버리고
매연 소음은 아침부터
빚쟁이처럼 문밖에서 기다리고……

아들아, 지금 생각하면 우리는 그날
개집으로 이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금은보석으로 메끼한 개 목걸이 목에 걸고
조금 더 큰 개집, 조금 더 화려한 개집으로
끌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개 목걸이 목에 걸고」 부분

시인은 생활인으로서 충실했던 지난날을 ‘조금 더 큰 개집’으로 끌려가고 있었던 시간이라며 뼈저린 반성의 심정을 토로한다. 그래서 ‘아들아’라는 호명은 이러한 삶의 반복을 바라지 않는 염원이 담긴 절실한 부름으로 들린다. 내 삶의 허위가 밝은 곳에서 낱낱이 들추어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더 큰 차원에서의 사유를 시작할 수 있다. 김동호 시인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누구보다도 그들을 사랑하는 양계장 주인들이 발발 떨고 있다. 떨면서 하는 소리 : “너희와 우리 물론 가까워야 하지만 병을 나눠 가질 정도로 가깝기를 원하지는 않았는데“

저들의 볼멘소리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오늘도 월남 대국 중국 일본 한국 - 무섭게 번지고 있는 변종 조류독감 바이러스

다른 대륙에선 그 바이러스
넘어올까 봐 전전긍긍하고 일부 어른들 사이에선
‘결국 우리가 가깝지 말아야 한다’는 새 이데올로기가 움트고
―「2003. 12. 31」 부분

이 시는 몇 년 전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조류독감 바이러스’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이웃하지 않을 수 없어서 죽어가는 오리들과, 국제 협력이니 다자간 교류니 온갖 미명으로 서로를 치켜세우다 자국의 이익 앞에서 냉담하게 등을 돌리는 인간의 행태가 대비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조화나 공존과는 무관한 존재에 불과한가? “자연의 곡선 따라/집 짓고 마을 만들고 길 내어/의좋게 살아가는 원시인들의 삶/차라리 아름다웠다”(「2001. 9. 11」)고 시인은 생각한다. 9. 11 테러를 부른 것이 하늘로만 치솟으려는 인간의 왜곡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시인의 판단은 그의 비관적 문명관을 여실히 드러낸다. 결국 시인은 오늘날의 인간이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고유의 가치, 이를테면 ‘자연스러움’을 상실했음을 가장 큰 문제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3.
김동호 시인의 이번 시집을 현대 문명 비판이라는 너무 무거운 의미로만 읽어내려 한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시집 구석구석에는 이러한 비판/비관과 맞서는 사랑/희망의 전언들이 가득하다.

내가 존경하는 것은
석가 예수 공자뿐만 아니다

기생충에 감염된 말벌
혹시라도 형제들에게 전염될세라
무리에서 떨어져 추운 밤을
혼자 새우는 저 말벌도 존경한다

내가 존경하는 것은 大詩人의
경제적 천사적 언어구사만이 아니다
피보나치 數列로 씨를 배열
작은 면적 속에 가장 많은 말씀을
박아 넣는 해바라기도 존경한다

내가 존경하는 것은
오디세이의 大항해만이 아니다
태평양 넓은 바다에 나가 신나게
걸판지게 한바탕 놀고 어른 되어
설악산 母川으로 되돌아오는 연어들
한강 상류로 회귀하는 장어들도 존경한다

내가 존경하는 것은 맨발로
불가마를 걷는 도사만이 아니다
펄펄 끓는 물에서 사는 미생물
영하의 온도, 높은 수압에서도 사는 미생물들
산소 없이도 살아가는 바이러스도
존경한다 존경한다 존경한다
―「내가 존경하는 것은」 전문

이 시는 김동호 시인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자기만을 탐색하는 눈, 인간 중심적 사유를 넘어섰을 때, 우주 혹은 생명이 드러내는 경이가 잔잔하게 그려지고 있다. 이 작품에서 비록 ‘내가 존경하는 것은 ~만이 아니다’라는 한정적 어법으로 인간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지만, 그는 다른 시에서 “그러나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이곳의 地名!/이곳이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비무장지대가 아닌가!!/50년간 죽었던 땅이 이렇게 진실로 살아 있는 땅이 되어 있을 줄이야!!! 세계에서 가장 잔혹했던 전쟁의 터가 지상 최대의 평화의 터가 될 줄이야!!!!”(「新樂園」)라며 인간적 행위가 배제된 자연의 치유능력을 감탄하고 있다. 따라서 시인의 문명관은 지극히 비관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세기가 바뀌고, 세계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변화해 간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인으로서 이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이 편차가 불안을 낳고, 불안이 까닭 모를 탐욕을 낳고, 탐욕이 지옥을 형성하고, 지옥에서 빠져나오려 우리는 야차처럼 변해간다. 이 끔직한 악순환 속에서 ‘말벌, 해바라기, 연어, 장어, 미생물, 바이러스’와 같은 경이와 똑같은 생명인 우리 ‘인간’이 ‘자연스럽게’ 조화되는 순간은 올 것인가? 시인의 질문이 긴 여운을 남긴다.
|서평|

:공선옥 연작소설 󰡔유랑가족󰡕
:전성태 소설 󰡔국경을 넘는 일󰡕



황폐한 삶의 끝은 어디인가

김동윤|문학평론가





1.
공선옥의 연작소설 󰡔유랑가족󰡕(실천문학사)과 전성태의 소설집 󰡔국경을 넘는 일󰡕(창비)은 지난봄의 우리 소설계에서 단연 손꼽히는 성과들이라 할 만하다. 이들 소설집은 신세기 초입에 들어선 한국사회의 단면을 매우 예리하게 포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기법이나 짜임새에서도 튼실한 면모를 지님으로써 수작의 자리에 선 것으로 평가된다.
이 두 소설집에서는 사회 곳곳의 황폐한 삶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강렬하게 부각된다. 철저히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 한때의 영광에서 아득히 멀어져간 이들, 역사의 한 귀퉁이에 웅크려 있는 이들, 그래서 더욱 초라하고 허기진 인물들이 안타까이 몸부림친다. 60년대 생 작가들인 공선옥과 전성태는 그것이 바로 우리시대의 초상임을 진솔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
「꿈을 모두 함께 나눈다면」이라는 박노해의 시구에도 나오듯이, ‘고르게 부자인 삶의 꿈’처럼 인간사회에서 이루어내기 어려운 과제는 없다고 했던가. ‘가난’이란 언제 어디에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난을 심각한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빈부 차이의 심화 현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것은 공동체의 붕괴를 필히 수반하는 것이어서, 사회의 정신적 황폐를 초래하는 주범이 된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앞뒀다고 떠들어대는 한국사회에도 빈곤인구가 600만 명에 달한다니, 여기에 문학적 관심을 두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그 당연한 관심을 보이는 작가는 드문 편이다.
공선옥 문학은 어느덧 이 시대 빈궁문학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는 등단 이후 줄곧 독자들에게 정녕 가난을 아느냐고 묻고 있다. 여성문제를 이야기할 때도, 생태주의를 강조할 때도, 민주화를 부르짖을 때도 가난은 항상 동행한다. 가히 집요하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결코 동어반복은 아니다. 집요하면서도 동어반복이 아니라는 것, 이는 공선옥이 제 색깔을 뚜렷이 갖춘 매력 있는 작가임을 의미한다.
󰡔유랑가족󰡕은 ‘공선옥표’(경향신문 조장래 기자의 표현)의 이미지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으면서 신제품으로서의 효과도 분명한 작품이다. 아니, 이번에야말로 ‘공선옥표’의 위력을 제대로 보여주었다고 말하는 게 적절하리라고 본다.
일반적으로 ‘유랑(流浪)’이라는 말은 다소 낭만적 어감을 갖기도 한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다는 뜻이되, 그 자체에서 현실과 고통의 냄새는 잘 배어나지 않는 낱말이다. 어찌 보면 유랑의 주체가 그것을 즐기는 듯한 인상도 준다. 하지만 󰡔유랑가족󰡕에서 작가는 그런 인상을 확실히 불식시킨다. 너희가 유랑을 아느냐, 유랑의 참맛 좀 볼래, 하고 나섰다. 곡성→광주→서울→광주→곡성→여수→춘천→전주로 적잖이 옮겨가며 살아온 유랑작가로서.
󰡔유랑가족󰡕은 「겨울의 정취」․「가리봉 연가」․「그들의 웃음소리」․「남쪽 바다, 푸른 나라」․「먼 바다」 등 다섯 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연작소설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한’의 시선과 발걸음에 의해 하나로 꿰어지는 이 연작들에는 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산중에서 바다로, 농어촌에서 도시로 기약 없이 떠돌아다닌다. 살기 위해서, 연명하기 위해서.
“보푸라기가 우수수 일어난 얇은 스웨터 차림으로 어깨를 있는 대로 옹그리고”(10쪽) 다니는 미정이는 하루 나기도 버거운 외로운 소녀다. 미정이는 어떻게든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저 싫다고 내뺀 엄마는 솔직히 생각하기도 싫다. 맨날 잔소리나 하고 돈 달라고 한마디 하면 있는 인상 없는 인상을 다 쓰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다 싫다. 방학을 하면 미정이는 더 외롭다. 날마다 할머니 잔소리를 들으며 청소며 설거지며 짐승들 먹이 주는 것까지 집안일은 또 혼자 다 해야 한다.”(12쪽) 이런 농촌 아이들에게 더 이상 ‘겨울의 정취’는 없다. 방학 때 뭐하냐는 물음에 아이들은 “탑블레이드 돌리고 테레비 봐요,” “뭐 할 게 있어야 하죠, 시팔. 컴퓨터 하고 싶어도 없으니깐,”(45쪽) 하고 응수한다. 그들이 하고 싶은 건 ‘당연히’ 돈버는 것이다. 힘겨운 삶이 모두 돈 때문임을 벌써 체득한 그들이다. 열일곱 살 기찬이도 “돈이 있으면 재미있고 돈 없으면 재미없는 게 이 세상”(210쪽)임을 일찌감치 알아챈다. 함께 살던 할머니가 죽자 홀로 남겨진 영주의 삶은 더욱 고단하고 처량하다.
미정이 아비 김달곤은 집나간 아내를 찾아 경상도 창원, 강원도 춘천, 충청도 천안, 서울 신림동 등지를 헤매고 다닌다. “그렇게 헤매는 동안 느는 건 술이요, 주는 건 돈이었”(20쪽)으니, 급기야 여관비도 떨어져 노숙해야 하는 신세가 된다. ‘한 건실한 농어민 후계자’가 IMF환란을 맞으면서 뿌리 뽑힌 삶을 살아가는 상황이 된 것이다. 달곤과 함께 아내를 찾아 서울 공사판을 전전하는 기석의 신세도 나을 게 없다. 형수가 가출하고 형이 음독자살하는 바람에 어린 조카를 떠맡은 채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 처지에서, 어렵게 인연을 맺은 조선족 아내마저 도망갔으니 “속이 치받쳐 올라와서 물 한 모금도 넘어가지 않”(79쪽)을 법도 하다.
달곤의 아내 서용자는 어떤가. 아이 둘을 낳고 11년 결혼생활을 하던 용자는 돈 벌려고 집을 나섰다. 얼마간 읍내 식당에서 일하던 그는 “손에 물 안 묻히고 돈 벌 수 있는 자리”(30쪽)를 찾아 서울로 가서 노래방 도우미로 일한다. 용자는 “노래방 아르바이트 생활도 어느덧 이력이 생겨” “살도 보실보실해지고 몸에다 돈을 좀 처발랐더니 자신도 몰라보게 멋쟁이가 되어 있는 것이 꼭 싫지는 않았다.”(31쪽) 그러던 중 카센터에서 일하는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 꿈을 꾼다. “이제 용자는 정말, 다시는 그 생활로, 앞이 보이지 않는 촌구석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83쪽)게 되었다. 허나 어디 용자의 꿈이 호락호락 이루어질 세상이던가. 한편 명화는 흑룡강성에서 전라도의 농촌총각 기석에게 시집온 조선족 여자다. “처녀라고 속이고 결혼을 했는데 그것이 탄로가 날까봐 노상 불안한데다가, 땅 한 마지기 없이 가난한 주제에 애를 낳으라고 들볶는 시부모에, 부모 없는 조카까지 딸린 생활 능력도 없는 남편에, 그곳 전라도에는 명화가 정 붙이고 살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61쪽)기에 서울로 도망쳐 가리봉동 노래방에서 일한다. 흑룡강성의 전남편과 전라도의 현남편이 명화를 찾아 나서지만, 결국 명화는 돈을 노린 칼에 허무하게 스러진다.
미정이 할머니는 기막힌 상황을 견디느라 악밖에 남은 게 없다. “소 끔(소 시세: 인용자 주) 떨어져, 하우스 망혀, 인사들은 발광이 나서 집 나가고, 새끼들은 저 지랄들을 허제,” “누가 내 속을 알 것이여이”(41쪽) 하며 탄식하는 건 당연하다. 손자들을 살갑게 대할 기력도 없다.
이밖에도 시내버스 차장 시절 차에서 떨어져 다친 다리가 썩어가는 가운데 노점상을 하며 ‘무서운 형벌’인 삶을 소주로 달래는 인숙, 세 번째 옥살이를 마치고서 이제 사람답게 살아가려는데 마누라가 딴 놈의 새끼를 낳은 상황에 맞닥뜨린 천보, 불행하게 태어난 아기를 목 졸라 죽이려 하더니 결국 물에 빠져 죽은 연순 등 가난이 만든 참상은 전편에 걸쳐 다양하게 나타난다. “안 웃으면 슬프니까”(39쪽) 억지로 웃으며 그들은 살아간다. 따라서 그들이 살아가는 산천은 ‘상투적으로’(55쪽)만 아름다울 뿐이다.

연작의 마지막 작품인 「먼 바다」에는 수몰지구의 농촌이 나온다. 보상을 노린 주민들의 얄팍한 행태, 빈집을 돌며 고물을 수집하는 모습 등 수몰지구의 전형적인 모습들이 그려진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다 떠난 마을의 황폐한 모습은 시사하는 바 크다.

한때는 찰박찰박 맑은 물이 넘쳐흘렀을 자두나무 아래 우물은 이제 흙으로 메워져 버렸다. 또 한때는 타작마당으로, 잔치마당으로 판판했을 황토마당은 이제 잡풀이 무성하여 대낮인데도 생쥐들이 우글거린다. (……) 사람이 비니 구들장은 저들 스스로 밑으로 꺼지거나 위로 솟구치는 중이었다. 횃대에는 옷이 그대로 걸려 있다. 벽에 박힌 못에는 각종 고지서와 영수증이 꽂혀 있다. 개근상, 정근상, 장려상, 우등상장이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사진첩이 뒹굴고 있다. (……) 이 집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내력이, 역사가 고스란히 흙바닥에 버려져 있다.(247쪽)

유랑가족들의 삶은 이처럼 버려지고 있다. “여기 살았던 사람들의 삶도 수장”(246쪽)되고 있다. “마을 전체가 다 고물”(235쪽)인 수몰지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의 삶도 계속해서 수장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방민호가 ‘모자이크 효과’라고 지적했듯이, 이런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서로 얽히면서 더욱 빛을 발한다. 단순히 여러 곳에서 발생하는 여러 부면의 모습들을 비춰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서로 충돌시키면서 변증법적인 상승효과를 창출해내고 있다. 연작의 양식을 매우 성공적으로 활용했다는 말이다.
공선옥의 소설을 읽다 보면 세상에 대해 냉소를 짙게 느낄 수 있다. 그의 당당함과 우직함은 독자들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만들기도 한다. 공선옥은 영화 「친절한 금자 씨」에 나오는 이영애의 섬뜩한 대사를 고스란히 들려주는 듯하다.―“너나 잘 하세요.” 물론 여기서의 ‘너’야말로 이 사회의 가난을 모른 채 정신적 가난에 희희낙락하는 군상들일 터다.

3.
전성태는 이 시대에서 분명한 위상으로 의미 있게 자리매김되어야 할 작가다. 주지하다시피 첫 소설집 󰡔매향󰡕(1999)에서 전성태는, 훼손되는 공동체의 복원을 꿈꾸며 남도방언 특유의 맛깔을 구현해내는, 현실을 저변에 깔고서 해학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젊은 작가로서 믿기기 어려운 역량을 과시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소설집인 󰡔국경을 넘는 일󰡕에서 그는 기존의 전통성과 해학성 등을 입증하는 가운데 다양성의 세계로 영역을 넓혀간다. 독특한 소재들을 등장시키면서 공동체 또는 집단 속 개인의 처지들을 예리하게 들춰낸다.
「소를 줍다」와 「환희」는 󰡔매향󰡕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소를 줍다」는 김유정에서 이문구를 거쳐 전성태로 이어지는, 농촌소설의 해학성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다. 소를 줍는다는 상황 자체부터 가히 해학적이다. 동명(동맹)이네는 가난하여 남의 소는 키워주면서도 제 소를 키울 능력이 못 된다. 그런데 동명이가 불어난 강물에서 떠내려 오는 물건들을 줍던 중에 암소를 줍는 행운을 잡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건져낸 소를 두고 갖가지 일들이 남도방언의 질박함과 더불어 전개된다.

“소한테 덜컥 짝부텀 맺어주믄 어짠디야.”
“아, 이 짐생이 서방 호적에 올려놓고 사는 짐생이여?”
아버지는 발끈했다.
“아니, 어찧게 될 중도 모르는 소라 내 하는 말이시.”
“걱정 말어. 주인이 갈래붙인 돈까지 토해내겄제. 그란다고 불두덩이 뻘건 걸 기냥 냅둬.”(104쪽)

주운 소를 키우다가 새끼까지 배게 했건만 대여섯 달이 지나 소 주인이 나타나고 말았다. 결국 소를 돌려주게 되자, 없는 돈을 끌어 모으고 빚을 내어 사려고도 해 봤지만 허사였다. 그런데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은 그저 한바탕 웃어넘길 소동이 아니다. 누구보다도 소를 잘 키우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빈농이어서 제 소를 갖지 못한 데 따른 설움, 행운이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리 쉽게 오는 것이 아니라는 비감함 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성태 소설의 매력이다.
「환희」는 「소를 줍다」에 비해 해학성은 약화되었으되 비극성은 좀더 강화된, 활로가 막힌 농촌현실의 사회적 의미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술주정뱅이 남편을 두고 “죽음이 판치는 세상”(212쪽)인 광주로 떠난 어미, “살기가 너무 고돼서”(214쪽) 술 마시고 난동을 부리고 걸핏하면 자살을 시도하는 아비(재식), 그 사이에서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곱사등이 딸을 등장시키며 ‘죽음’의 ‘환희’를 추구한다. 말하자면 한 가정의 꽉 막힌 현실은 우리 농촌의 황폐한 현실과 다름없으며 그것은 80년 5월 광주의 정치적 상황과 그 맥이 이어져 있다는 전언이다. 작가의 농촌공동체에 대한 탐구가 사회현실에 단단한 끈을 대고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퇴역 레슬러」와 「사형(私刑)」은 영광의 뒤안길에 선 노인들의 이야기다. 「퇴역 레슬러」의 주인공은 결정적인 순간에 박치기로 상대방을 제압하며 삼천 번에 걸친 경기를 치렀던 레슬러 영웅이었으나 노쇠하여 간병인의 도움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그는 뇌가 굳어가는 후유증 속에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거나 왜곡해 기억하는 고통을 겪는다. 조국 근대화시대의 성공신화를 일궈내며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되었던 그는 끝내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이불자락을 꽉 깨물”(57쪽)고 흐느끼고 만다. 「사형」에는 퇴역 장군이 등장한다. 그는 한국전쟁 중에 학도병으로 입대해 전쟁 막바지에 장교가 되고 월남전에 대대장으로 참전했으며 준장으로 예편한 인물이다. “전쟁의 화신”(170쪽)으로 일컬어졌던 그였지만, 군복을 벗는 순간 “초라한 낭인”(173쪽)으로 전락한다. “이 돼먹지 못한 사회는 영광이라는 걸 몰라. 세상이 온통 군기가 빠졌어.”(182쪽) 하며 분통을 터뜨리던 그는 “군인이 총도 없이”(196쪽) 초라하게 죽는 신세가 된다. 군대라는 조직 속에서 개인성을 몰각한 삶을 살았던 그는 황폐한 삶을 마감한 것이다. 이들 레슬러와 장군은 집단과 조직의 논리에 적극 순응함으로써 숭앙되었으나 결국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전체주의적인 집단과 조직은 작가가 복원을 꿈꾸는 공동체와는 전혀 이질적인 세계인 것이다.
「한국의 그림」과 「연이 생각」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의 민주화 정국과 관련되는 작품이다. 「한국의 그림」은 ‘걸개그림’의 개척자로 불리는 주인공을 형상화하고 있으며, 「연이 생각」은 1990년대 초반 분신정국의 끝자락에 개인적인 이유로 연못에 투신한 여학생의 이야기다. 역사의 큰 물줄기에 가려진 소박한 개인의 진실들에 작가가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존재의 숲」은 전성태의 작가적 고민과 지향점이 함께 묻어나는 작품이다. 무명 개그맨이 웃음의 소재를 찾아다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해학성이 견지되고 있고, 여꼴댁 등 농촌사람들의 이야기가 흥미 있게 그려진다는 점에서 공동체의 복원에 대한 염원이 반영되어 있다. “인근에 골프장이 새로 들어서서 주민들이 봄부터 거기에 잔디 심는 일을 다니고 있다는 거였다. 골짜기는 저녁 무렵이나 되어야 사람 사는 동네같이 시끄러워졌다.”(19쪽)거나 “고씨는 골프장에 일 나가기 전 아침시간을 이용해 조금씩 참깨를 베어냈다. (……) 고씨는 추수가 늦어졌다고 속상해했다.”(24쪽) 등의 대목에서 보면, 공동체적인 삶을 지향하는 전성태다운 인식이 여전히 확고함이 감지된다. 특히 여기서의 창작에 대한 태도는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이다. ‘나’는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 해학을 어떻게 얻는지를 묻는데, 점쟁이는 “캄캄한 삶을 밟아야겠지요. 그러면 말이 자연히 따르지 않겠소? 요새 사람들, 캄캄한 이야기를 싫어할 것 같지만 실상은 없어서 못 듣는 것이리다.”(13쪽)라고 답한다. 캄캄한 삶을 밟는 일, 헛것까지도 꿰뚫어보는 일, 남의 얘기를 절실하게 받아들이는 일―작가의 창작 태도는 이렇듯 진지함과 성실함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메시지이자 스스로에 대한 다짐일 터다.
그런데 표제작인 「국경을 넘는 일」의 경우, 마뜩치 않은 부분이 있다. 분단국가 국민의 피해의식을 드러낸다거나 독일인과 일본인의 의식과 대비시키며 소설을 전개해 나간다는 데에 의미가 있긴 하지만, 그다지 성공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나 생각한다. 여행지에서의 우연한 체험을 바탕으로 문학적 형상화를 시도하는 것은 그리 즐겨할 일이 아니다. 대개 여행지에서의 우연한 만남이란 필히 헤어짐을 기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던가. 바람 같은 것에 작가가 기대는 것은 경계해야 할 줄 안다. 소설에서 그것이 하나의 에피소드 정도로는 요긴하게 작용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중심에 두고서 사회적․문학적 의미를 도출한다는 것은 무리한 발상이어서 도식적으로 흐르기 쉽다.

4.
덧붙여 주목해 볼 점은, 공선옥과 전성태의 작품에는 농약자살모티브가 적잖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농촌을 무대로 하는 작품들이 주종을 이루는 데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단지 그렇게만 보아 넘길 일은 아니다.
공선옥 연작의 경우 「가리봉 연가」에서 곡성의 소년가장인 경수의 어머니는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아버지 때문에 제초제를 마셔버리며, 숙희 아버지(기석의 형)는 IMF 나고 형편이 어려워지자 아내가 집을 나가는 바람에 제 무덤을 제가 파고 술에다 농약을 타서 마시고 죽는다. 「그들의 웃음소리」에는, 자살모티브는 아니지만, 영주 할머니가 맹독성 농약을 뿌리다가 죽을 뻔했다는 언급도 있다. 전성태의 작품에서도 농약자살모티브는 등장한다. 등단작인 「닭몰이」(1994)에서도 폐병을 앓다 농약을 마시고 죽은 상구가 나왔으며, 「매향」(1997)에서도 할멈이 박복한 신세 때문에 하루에도 댓 번씩 농약병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한다는 대목이 있었는데, 이번의 「환희」에서는 재식이 농약 먹어 죽겠다고 수차례 소동을 벌인다.
농약은 농사를 짓는 데 유용한 도구다. 유기농이니 생태농업이니 하는 것은 사실 가난한 농투성이들과는 별 상관이 없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흩뿌려지는 농약보다 많이 땀을 흘러내리며 농약을 쳐야 하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산업화시대를 거치며 후기산업시대에 맞닥뜨린 그들에게는 언제나 절망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그 절망의 끝자락에서 극약처방의 하나가 바로 농약을 마시는 행위다. 갈 데까지 가버린 농촌을 충격적으로 형상화하는 장치로서, 농약을 농작물이 아닌 제 목구멍에 뿌려버리는 것이다. 어느새 농약자살모티브는 IMF구제금융시대를 겪으며 극도로 황폐해진 21세기 한국농촌을 그려내는 데 매우 상징적인 요소로 자리잡고 말았다. 공선옥과 전성태의 소설은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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