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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2005년 가을호) 구용 시비 제막식을 마치고/이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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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용 시비 제막식을 마치고|
바람의 끝과 시작
――丘庸 詩碑에 붙여
이재식|시인
1.
사실 나는 구용 선생님과 인연이 별로 없다. 별로 없다는 것은 조금 있다는 말이 되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없다는 쪽에 가깝다. 구용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84년도 봄쯤으로 기억된다. 그때 두 아이의 아버지인 늦깎이 대학생이었다. 시에 관심이 많아 추천이나 좀 받아볼 요량으로 서대문 우체국 뒷골목에 있었던 ≪현대시학≫ 전봉건 선생님을 찾아 들락거리던 어느 날이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밟고 누군가가 사무실로 올라오는 기척이 났다. 잡지사래야 인쇄업을 하고 있던 신현기 씨와 한 사무실을 사용하고 있는 터여서, 전봉건 선생님 책상과 신씨 책상이 놓인 공간은 손님을 맞기에는 턱없이 좁았다. 소리 없이, 그러나 잔잔한 미소와 함께 사무실에 들어선 사람은 옷차림부터 머리칼까지 꾸밈새 없이 자연스러웠지만, 겉모습과는 달리 그 분에게서 풍기는 분위위:황금찬, 임강빈/아래:조건상, 김동호기는 어떤 위압감 같은 것이었다. 김구용 선생님이었다. 넥타이도 매지 않았고 세련된 옷차림도 아니었으며 도시보다는 농어촌에서 더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날카로운 눈매와 이지적인 이마, 꾸밈없이 밀어 올린 머리 스타일에서 도시의 전형적인 지성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얼른 일어나 앉았던 의자를 내 놓았다. 공간도 좁거니와 따로 마련된 의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의자래야 등받이도 없어 엉덩이나 겨우 걸칠 만한 것으로, 네 개의 쇠다리 위에 빨간 비닐로 덮은 동그란 것이다. 전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인사를 드렸으나 그것으로 그뿐, 내 존재는 곧 잊으셨을 것이다. 구용 선생님과 나와의 인연이라는 것은 한 번의 악수가 전부였으니 인연이라는 말조차 무겁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 후 성균관에서 수학할 때 들은 이야기로는 선생님께서는 술이 거나해지면 제자들의 볼에 입을 맞추는 등 특유한 방식으로 애정 표현을 하셨다는 사실을 귀동냥했을 뿐이다.
이처럼 선생님과의 인연이 일천한 내가 선생님에 관련된 글을 쓴다는 것이 아무래도 걸맞지 않다는 생각이 가시지 않지만 이상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고 싶다는 근지러움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2.
작년부터 구용 선생님 시비건립에 관한 이야기를 이지엽 교수와 조건상 선생님을 통해 들으면서 나는 부끄러움과 부러움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어린이처럼 죄송하고 부끄럽다는 것은, 나를 문단에 올려주신 전봉건 선생님에게 그러하다는 말이다. 타계(1988년)한 지 20여 년이 다 되어가건만 볼만한 시비 하나 세우지 못했다는 자괴지심 때문이다. 그러니 세상엔들 부끄럽지 않으랴. 작품의 완성도는 차치하고라도 전 선생님은 평생 시만을 쓰며 살다 가셨다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1950년대 함께 활동했던 다른 문인들과는 달리 피난민으로서의 척박한 세상을 살면서 공부를 다 못 했다. 그래서인지 학교에 재직할 기회가 없었던 전 선생님은 제자를 키우지 못했다. 시 쓰기를 업으로 해 온 시인이 명을 달리한 지 오래되었으나 그를 기릴 만한 시비 한 점이 없다는 이유를 나는 제자 부재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구용 선생님이 부러웠다. 바쁜 와중에서도 지방을 몇 차례나 오르내리며 마치 자신이나 가족의 일처럼 성심성의를 다하는 이지엽 교수와 조건상 선생님을 지켜보며, 봄날의 햇살처럼 맑고 따사로운 사제간의 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비건립에 마음을 보태고 정성을 보낸 사람들이 어찌 두 사람뿐이겠는가. 학교 버스 두 대에 거의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제막식에 참석한 백여 명의 사람들 중에는 제자들과 문인, 생전의 막역한 친구들과 가족들이 먼 길을 동행했다. 이들 모두가 선생님에 대한 사모의 정으로 시간을 쪼갠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정승 집 개가 죽으면 사람들이 문전성시지만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없다.’는 말은 이제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생전 선생님께서 사람들에게 베푼 자애와 덕망의 작은 열매일 것이다.
3.
百潭寺. 나는 설악산이나 속초를 가는 길목에서 백담사 앞을 여러 번 지나쳤다. 함께 간 일행과 일정 때문에 늘 아쉬움만 남아 있다가 2003년 6월 학교 수련회 과정에 백담사 방문을 우겼던 것은 나였다. 초입으로부터 사천왕을 만나기 위해서는 산길 6km를 가야 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약 3km지점에서 하차시켰다. 거기서부터 걸어가란다. 일행들의 불만들이 터져 나온 것은 그때부터였다. 6월이라고는 하나 여름같이 햇살이 따가운 날씨였다.
‘젠장, 절 구경 하려다가 고생만 하겠네.’
‘이 사람, 부처님 만나려면 이 정도 수고는 견뎌야지.’
산길을 걷노라니 계곡에서 재잘대는 물소리도 정겹거니와 갓난이의 눈망울만큼이나 맑은 물은 살아오면서 더께 진 영혼의 때(垢)를 씻어주는 듯했다. 산길은 따가운 햇살과 언덕을 오르내리는 걸음으로 등에 땀이 배었으나 가끔씩 불어온 바람은 주변의 환경처럼 달콤했다.
떠들고 웃는 사이 산길은 끝나고 우리는 절 경내로 들어서며 이마의 땀을 씻었다. 산길 3km는 나이 든 선생님들에게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구용 선생님의 시비건립 행사 때에는 버스 노선이 달라졌다. 언제부터였는지 묻지는 않았지만, 예전과는 달리 버스가 절 입구까지 일행을 태워 와 쉽게 행사장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관혼상제에는 날씨가 큰 부조라더니, 날도 맑고 버스도 노선을 연장 운행하는 것은 선생님의 홍복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절치고 명당 아닌 곳이 드물다더니 풍수지리에 무뢰한이 내 눈에도 요지임이 분명했다. 어찌 보면, 서울을 축소해 놓은 형국이랄까. 서울의 8악(八岳)처럼 산들이 절을 에워싸고 있고 한강을 연상시키는 계곡천이 본당(本堂)과 사천문 사이를 관통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나무다리였는데, 그래서 주변 경관과 더불어 더욱 운치가 있었다던데, 전모 대통령이 근심한다며 이 절에 와 어쭙잖은 코미디 한바탕을 벌이고 간 후, 다리는 시멘트로 재축되었다. 만약에 만해선사가 아직도 이 절에서 수행 중이었다면, 노략질해서 모은 돈으로 시주 받아 다리를 고쳤을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니 전모 씨라도 인간이기 때문에 사람대접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을까.
구용 선생님의 시비는 갓 시집온 새색시처럼 쓰개치마를 머리까지 덮은 채 고요했다. 본당 입구의 계곡천 옆에 제법 널찍한 터를 잡고 다소곳하게 그러나 든든히 버티고 선 시비는 긴 여행에서 막 돌아 온 행자 같았다. 그런데 시비 위치에 대한 내 개인적인 생각은 그리 만족하지 않았다. 그 자리는 후미진 곳도 아니며, 길손들의 발길이 뜸한 곳도 아니었다. 내가 못마땅한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의 시비와 함께 있다는 것이 꺼림칙했다는 말이다.
도대체 요즈음은 상식적으로 이해 못 할 일들을 가끔 목격힌디. 두 눈을 번듯이 뜨고 있는 시인들도 전집(全集)이라는 시집을 묶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전집이란 글자 그대로라면 모두 묶었다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앞으로는 단 한 편의 시도 쓰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던가. 그런데 더욱 괴이한 것은 그 분들도 계속해서 시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비 건립도 같다. 그것은 구용 선생님처럼 당신 사후에 후학이나 제자들에 의해 세워져야 하건만 선생님의 시비 옆으로 살아 있는 시인들의 시비가 즐비했다. 우리의 근세사에서, 백성들을 수탈하여 부친의 공덕비를 세웠다는 고부군수 조병갑을 빗대는 것은, 문단 말석이며 3류 시인인 내가 입에 올릴 일은 아니라하더라도, 왠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좀더 새로운 곳에 세울 수는 없었을까’를 생각하다가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욕심이었다. 문제의 시비들 다른 편에는 해우소가 있었고 그 밖은 절의 본당이었기 때문이다. 본당 앞에는 만해 시비가 시인의 상과 함께 서 있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세울 곳이 없는 일이고, 아무리 이지엽 교수와 오현 스님의 사이가 막역하다 해도 만해 시비 옆으로는 말을 꺼낼 수 없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득불 그 자리가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짐작케 했다.
막(幕)이 벗겨지고 구용 선생님의 명징한 영혼이 깃든 것 같은 시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찌 보면 동박새의 가슴과 머리 형상 같기도 하고, 달리 보면 반은 벗은 채 불복(佛複)을 걸친 고승의 합장 같기도 했다.
“물소리 바람 소리를 들으며 낮에는 구름과 더불어 놀고 밤에는 별들이 내려와 함께 소곤거릴 것.”이라는 덕담과 “사랑도 자비도 같은 맥으로 짚어 엘리엇을 불교로 읽었다.”는 선생님의 넓은 세계관은 그대로 작품에 녹아 시적 사유가 매우 심오하다는 평가였다.
나의 옹색한 사고와 가슴으로는 선생님의 시어 하나도 제대로 알아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작은 눈으로 거칠게 살펴본 느낌 끝에는 ‘자유’라는 단어가 연상되었다. 흔히 문학인들에게 수식되는 자유란, 자신의 문학적 양심과 용기에 따라 남을 의식하지 않은 채 거침없이 그 뜻을 말하고 의지대로 행동하는 지성을 일컫는다. 안다는 것은 지식일 뿐이고 아는 것을 실행하는 행동이야말로 지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유 속에는 역마살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도 내포된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자유란, 마음의 우주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 자유란 인간의 선성(善性)에 회귀한 상태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를 버렸을 때 맞이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는, 어디든 거침없이 갈 수 있고 처음 만난 누구와도 스스럼이 없다. 그러므로 이때의 자유란, 물과 같고 바람과 같다 하겠다.
세상의 시작과 끝을 오갈 수 있는 자유는,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으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다. 그 자유는 바람이다. 거침도 없고 한곳에 머물지도 않는다.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집착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바람은 유랑할 뿐 늘 우리 곁에 있다. 그래서 ‘대답은 반문하고/물음은 공간이니’*라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자유인 바람에게서는 세상의 이치도 3차원의 세계도 대답은 다시 반문으로 이어질 뿐, 완전한 대답은 없다. 그러므로 물음이란 없는 것이며 동시에 모든 것이 물음인 것이다.
내가 선생님의 이런 시적 사유에 한 발이라도 다가섰음이 확실하다면 선생님은 사후 바람이 되었음직하다.
이제 바람은 갔지만 간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바람이 시작된 것이다. 선생님의 심오한 시적 세계는 우리들에게 숙제로 남겨진 새로운 바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만날 때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처럼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삼가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김구용 「風味」 부분. **한용운 「님의 沈黙」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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