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0호 특집/고명철
페이지 정보

본문
|특집|청소년문학, 어디로 가는가?
청소년 문예지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청소년 문예지 창간호에 대한 단상
고명철|문학평론가
1. 독점적 해석에 붙들린 청소년의 문학적 감수성
대학교 강의실의 한 풍경을 잠시 소개해보자. 여기, 윤동주 시인의 「또 다른 고향」에 대한 작품 해석을 하고 있는 문학 수업이 있다. 이 수업에 참여하고 있는 학생들의 대부분은 대학 신입생들이다. 강의자는 학생들이 고등학교 문학 수업의 정규 과정을 이수했다면, 윤동주의 이 시에 대해 별 다른 어려움 없이 수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사실 거의 모든 학생들이 「또 다른 고향」을 고등학교 문학 수업을 통해 접해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학생들은 대학의 문학 강의 시간에서까지 이 시를 다룬다는 게 못 마땅하다. 이미 다 배운 시를, 대학에서 또 다시 배운다는 게 대학생으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측면도 없지 않기에 그렇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신입생들이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이 이 시에 대해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는지, 윤동주의 「또 다른 고향」은 단일한 해석으로 굳건히 자리매김되고 있었다. 좀 심하게 얘기한다면, 어떤 특정한 해석의 독점적 권력에 예속되어 있다고 할까. 특히 「또 다른 고향」의 다음과 같은 부분에 대해 학생들은 천편일률적 입장을 보인다.
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또 다른 고향」 부분
강의자가 학생들로부터 듣고 싶었던 것은 이 ‘지조 높은 개’와 ‘밤’의 관계를 학생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둘의 관계를 파악하고 있어야, 개에게 쫓기우는 ‘나’의 내면세계를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인 양 ‘개’와 ‘밤’을 적대적 대립 관계로 설정하고 있었다. ‘밤’은 일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개’가 짖어대는 것은, 이 ‘밤’을 몰아내기 위한 “지조 높은” 행동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런 해석이 잘못 되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개’와 ‘밤’의 관계를 꼭 이처럼 적대적 대립 관계로만 인식해야 하는가. 대부분의 학생들이 적대적 대립 관계로 설정하게 된 데에는, 이 시가 쓰여진 시대상황을 기계적으로 작품에 반영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너무 상투적인 문제제기로 인식되지만, 중고등학교 문학 수업에서 일제 시대에 발표된 대부분의 작품들은 일제에 대한 부정과 저항의 입장을 보였다는 해석을 받아들이기 십상이다. 그러다보니, 청소년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그 시기에 발표된 작품들에 대한 천편일률적 입장을 갖게 된다. 상급학교 진학 시험에 대비하기 위한 차원에서 문학 작품을 접하다보니, 이러한 입장을 갖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따라서 청소년들만 나무랄 일도 아니다. 청소년들의 예민한 문학적 감수성과 문학적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지도 못한 채 특정한 해석을 강요받도록 하는 제도권 문학 교육의 총체적 문제점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지금, 이곳’의 청소년 문학 현실이 이렇다보니, 대학에서 「또 다른 고향」에 대한 다양한 문학적 입장을 만나보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또 다른 고향」에서 ‘개’와 ‘밤’을 적대적 대립 관계로만 볼 게 아니라, 매우 친밀한 관계로 역전시켜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와 관련하여 대학에서 문학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강의자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는다.
「또 다른 고향」에서 개는 밤을 배척해야 할 대상, 즉 몰아내야 할 부정적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밤의 시간을 거친 후에야 광명의 아침을 맞을 수 있는데, 그렇다면 밤의 존재를 전면 부정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죠. 밤이 존재해야 아침을 맞이할 수 있지 않습니까? 바로 여기서 개의 존재성이 드러납니다. 개는 분명히 밤의 부정적 세계를 경계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밤의 부정적 세계와 공존해야 합니다. 개는 이러한 이율배반적 양가성을 갖는 존재라는 게 중요합니다. 광명의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밤을 보내야 합니다. 밤을 보내지 않고서 아침은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바로 이 같은 우주의 자연스러운 과정을 개가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없을까요. 말하자면 이 시에서 개는 내일의 아침을 맞이할 생성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되, 어둠의 스러짐, 즉 소멸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닌 카오스적 존재입니다. 이 카오스적 존재인 개가 자신의 이러한 우주적 존재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하기에, 혹 윤동주 시인은 “지조 높은 개”라고 의인화하는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여기서 개가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는 행위에 대한 시적 의미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가령, ‘짖는다’란 기표를, 무엇을 ‘만든다-생성시킨다’란 의미의 ‘짓는다[作]’로 환치시키는 게 가능할 경우, ‘어둠을 짖는다’란 시적 의미는 ‘어둠을 몰아낸다’와 함께 ‘어둠을 만들어낸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개가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 이유는, 시에서 어둔 방에서 힘겹게 자기갱신의 통과의례의 과정에 있는 ‘나’를 도와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나’가 새로운 존재로 갱신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밤-어둠’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개가 이 ‘어둠-밤’을 적극적으로 만들어주어야 하는 조력자의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학생들에게 이러한 의견을 내놓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양한 입장이 봇물 터지듯이 속속 제출되었다. 학생들의 문학적 감수성과 문학적 상상력을 조금만 자극하면, 강의실은 이내 풍성한 문학 토의(혹은 토론)의 활기로 뜨거워진다.
내가 청소년 문예지를 점검하는 자리에서 대학 문학 수업의 풍경으로부터 말 머리를 열게 된 것은, 작금의 청소년들이 중고등학교 시절에 그들의 끼 넘치는 문학적 상상력을 발산시켜줄 수 있는 어떤 계기가 부여된다면, 대학 문학 수업의 풍경이 황량해지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학 문학 수업의 질적 향상을 위해 청소년에게 제대로 된 문학 수업이 필요하다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게 결코 아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청소년 시절의 그 창의적인 문학적 감수성과 문학적 상상력이 발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방편으로 전락한 청소년의 문학, 온갖 시청각 문예지 속에서 관심 밖으로 내몰리고 있는 청소년의 문학, 문학상업주의에 의해 대량 생산되고 있는 환타지물로 대체되고 있는 청소년의 문학 등이 득세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청소년 문학은 곤경에 처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 문예지의 중요성은 환기되어야 한다. 청소년 문예지는 청소년 문학은 물론, 청소년의 문화 전반에 이르기까지 청소년 문화를 구축시켜주는 문화적 인프라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껏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이렇다할 문예지가 없다가, 최근 전국에서 청소년 문예지가 속속 창간되었으며, 그동안 등한시했던 청소년 문학에 대해 사회적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나는 이 글에서 잇따라 발간되고 있는 청소년 문예지의 현황을 점검해보는데, 논의의 초점은 청소년 문예지의 편집과 기획의 문제점에 맞추기로 한다.
2. 청소년 문예지의 편집 방향
현재 전국에서 발행되고 있는 청소년 문예지는 모두 9종이다. 제주와 강원을 제외한 전국에서 청소년 문예지를 발행하고 있는데, 그 목록을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다≫(충북국어교사모임):충북
•≪미루≫(대전충남작가회의/도서출판 심지):충남
•≪전북청소년문학≫(전북청소년교육연구소):전북
•≪다도해 푸른작가≫(목포작가회의):전남
•≪상띠르≫(심미안):광주
•≪푸른 나무들≫(문예미학사):대구․경북
•≪통통≫(도서출판 불휘):경남
•≪문학아(我)≫(문경주니어):경기
•≪푸른 작가≫(민족문학작가회의/문학동네):경기
전국 지방 행정 단위별로 청소년 문예지가 발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9종 중 ≪푸른작가≫를 제외한 8종은 지난 해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문화관광부로부터 문학창작활성화를 위한 국고보조금을 지원받아 청소년 문예지 발간 지원 사업을 시행한 결과 2004년 12월에 발행되었다. 이후 반년간지로 발행될 예정이라고 한다.
청소년 문예지의 잇따른 발행은, 점차 불모화되고 있는 청소년 문학의 현실을 염두에 둘 때 이만저만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청소년 문학에 대한 여러 어려움을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우두망찰 방관자의 자세로서 지켜볼 게 아니라, 장단기적 현안을 중심으로 내실 있는 실천을 다 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말하자면 청소년 문예지는 청소년 문학의 대지에 물꼬를 터주는 역할을 맡은 셈이다. 동시에 청소년 문화의 흐름을 새롭게 형성시켜주고 그 동향을 섬세히 감지해내는 바로미터 역할을 맡는다. 또한 청소년 문예지는 청소년들이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과 쟁점들을 포괄하는 청소년의 언로(言路) 역할까지 맡는다. 이 점에서 청소년 문예지는 기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문예지와 비교했을 때 손색이 없는 특징을 지닌다. 다만, 그 주된 대상이 청소년이기에, 청소년 문학과 청소년 문화를 중심으로 한 내용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게 다른 점이다.
그렇다면, 현재 발행된 청소년 문예지들은 어떠한 방향성을 담아내고 있을까. 청소년 문예지들의 창간호를 중심으로 살펴보았을 때 주목되는 것은 ≪상띠르≫와 이다≫에서 특집으로 다루고 있는 청소년 문학의 현실에 대한 점검이다. 두 문예지 모두 설문지 조사를 하였고, 조사 결과를 분석해내며, 문학에 대한 청소년의 의식과 실태를 상세히 검토하고 있다. 비록 두 지역에 국한된 설문지 조사이지만, 현재 청소년 문학의 실상을 가감 없이 드러내주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의 청소년 문학을 이해하는 데도 시사하는 바 크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두 문예지의 분석에서도 언급했듯이, 문학에 대한 청소년들의 관심이 의외로 높다는 결과를 알 수 있다. 가령, ≪이다≫의 경우 <영상 세대, 문학을 말한다>라는 주제 아래 설문지 조사를 하였는데, 그 중 ‘문학과 영상 중 청소년 시기에 더욱 많이 접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은?’이라는 항목에 대해 문학이라고 응답한 학생이 전체의 62.4%로, 영상이라고 응답한 학생의 20.5%보다 훨씬 높은 비율을 보인다. 그리고 ≪상띠르≫의 경우 <청소년 문학교육의 허와 실>이란 주제 아래 설문지 조사를 하였는데, 그 중 ‘청소년 문학에 관한 좋은 매체가 있다면 읽어볼 의사가 있느냐’는 물음에 66%의 학생이 그렇다는 응답을 하고 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설문지 조사를 하였으되, 청소년들이 문학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흔히들 청소년들을 영상세대라고 치부하여, 문학을 멀리할 것이다라는 생각이 대단히 잘못된 편견에 불과하다는 게 이번 조사에서 여실히 입증되었다. 특히 이러한 조사를 직접 하였고, 그 내용을 분석․정리한 한 청소년이, “아무리 우리가 영상세대라 하더라도 결국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고 세계를 바르게 인식시키는 것은 문학이다. 무조건 ‘책은 싫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책에 있는 매력을 찾아야 한다.”라는 발언은 문학에 대한 청소년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제, 청소년 문예지가 역점을 두어야 할 과제는 문학에 대한 청소년의 욕망을 어떻게 충족시켜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청소년 문예지를 내실 있게 발행하기 위해 문학에 대한 청소년의 생각을 검토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청소년 문예지에 대한 편집 방향이 명확히 설정되어야 한다. 기성 문인들 중심의 문예지가 아니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청소년 문예지’라는 점을 가볍게 인식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특히 우려되는 것은, 혹시 청소년을 성인의 시각으로 계몽하려고 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현재 각 청소년 문예지의 편집위원 체제는 대동소이한데, 선생님 편집위원과 학생 편집위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행여나 이들 편집위원 체제에 위계 관계가 성립됨으로써, 선생님이 학생 위에 군림한 채 학생을 선생님의 시각에 의해 계몽하려고 하는 것은, 청소년 문예지를 편집하는 데 대단히 경계해야 할 점이다. 말하자면 청소년 문학을 성인의 시각에 의해 계몽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청소년 문학을 훈육시키는 차원으로 인식해서도 안 된다. 선생님은 어디까지나 청소년 문예지의 편집을 담당하는 한 역할에 불과할 뿐이지, 문예지 전체의 편집권을 결정짓는 문예지 권력자가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다≫의 창간사에서 말하고 있는 한 선생님의 의견은 경청할 만하다.
문예지 <이다>의 주인은 우리들 청소년입니다.
할머니가 구수하게 풀어놓는 얘기보따리처럼 우리들의 이야기를 알콩달콩 풀어놓았습니다.
학교이야기, 친구이야기, 사랑이야기, 사는이야기, 그리고 꿈……
그러고 보니 버릴 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반에 목소리 큰 아이, 아무데나 나서는 아이, 늘 졸기만 하는 아이, 허풍쟁이, 뜬구름 잡는 아이들이 여기에 다 모였습니다. 모두가 눈물나도록 소중한 우리들입니다.
사람들이 잘 알아주지 않아서 그저 공허한 울림으로 사라지고 말지 모르는, 서툴지만 꿈이 묻어나는 이야기들을 별을 주워 담는 심정으로 하나씩 담아서 이제 첫 이야기를 펼치려 합니다.
청소년의 다양한 사연들을 소중히 담아내고자 하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다음 장에서 문예지의 편집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겠지만, 여기서 짧게 언급하자면, 청소년 문예지는 어디까지나 기성 문학인들의 문예지가 아니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문예지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고자 한다. 청소년들의 일상과 욕망에 귀를 기울이고, 자연스레 그들의 감성과 인식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해야 한다’라는 목적성을 띤 훈육은 청소년 문예지를 편집하는 데 정말 경계해야 할 요건이다. 또한 기성 문예지를 흉내 내는 것도 썩 바람직하지는 않다. 청소년들의 문학적 감수성과 문학적 상상력을 기성 문예지의 틀로 재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혹 청소년 문예지를 장차 예비 문학인을 양성하기 위한 예비 문인 양성소로 협소하게 파악하고 있다면, 이것은 매우 위험스러운 생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소년 문예지는 예비 문인 양성소뿐만 아니라 청소년의 문화적 토양을 기름지게 할 수 있는 자양분을 제공해주는 문화터전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 문예지에 거는 기대가 큰 것이다.
3. 청소년 문예지의 독특성을 살리는 기획
청소년 문예지도 문예지이듯, 그 문예지의 독특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기획이 절실히 요구된다. 매호 참신한 기획을 통해 청소년들의 문학적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청소년 문학의 지평을 확산하고, 청소년들의 문학에 대한 문제의식을 갈고 다듬을 수 있는 기획이 필요하다.
창간호를 대상으로 살펴보았을 때, 기획의 참신성이 돋보이는 문예지들을 만날 수 있다. 가령, ≪미루≫에서는 ≪미루≫가 창간되는 과정이 일기처럼 기록된 꼭지가 있는데,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잡지를 발행한 게 아니라 여러 구성원들이 함께 동참한 결과물이라는 점을 자연스레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창간 이후 ≪미루≫에 적극적 관심을 갖게 한다. 다른 문예지 창간호와 비교했을 때 참신한 기획으로 돋보인다. 또한 「우리들의 이슈: 성적 소수자에 대하여」란 꼭지를 두어, 청소년 문예지가 문학 위주로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사회의 첨예한 문제점들을 청소년의 시각에 의해 비판적으로 검토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한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기획의 참신성은 ≪미루≫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이다≫인 경우 <재미있는 국어시간>이란 꼭지 아래 ‘부모님 전기문’, ‘자서전 쓰기’, ‘시 패러디’ 등으로 나뉘어 학생들의 다양한 글쓰기를 소개하고 있다. 청소년 문예지는 문학적 능력이 탁월한 청소년들만을 대상으로 한 잡지가 아니라는 점에서, 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평범한 학생들이면 누구나가 주인의식을 갖고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다≫의 이와 같은 기획은 청소년 문예지의 편집 방향을 성찰하게 한다.
그런데, 각 청소년 문예지마다 정성을 들여 기획을 하고는 있지만,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약간의 차이를 가질 뿐이지, 대개 비슷한 기획으로 이루어져 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거의 모든 문예지에서 고등학교 문예동아리를 탐방하여, 그 동아리의 활동을 소개하는 취재성 글로 채워져 있다. 게다가 해당 지역 문인을 탐방하여, 그 문인과의 좌담 혹은 대담 형식의 글이 반드시 한 꼭지를 이루고 있다. 이런 기획을 이해 못하는 바 아니다. 문학에 대한 분위기를 돋구기 위해서도, 일선 고등학교 문예동아리의 활동을 적극 소개하는 것은 필요하다. 또한 해당 지역에서 문학적 성과가 탁월한 문인을 찾아가, 문학에 대한 소중한 얘기를 듣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러한 기획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좀더 고민한 끝에 이러한 기획에 머무르지 말고, 다른 형태의 기획은 없을까. 특정한 대상을 정하여 취재하는 기획이 아니라, 청소년 나름대로의 도발성과 참신성이 뒷받침된 기획, 말이다.
이렇게 기획에 중요성을 두는 이유는, 문예지의 기획은 곧 문예지의 결과물이며, 문예지를 만들어가는 문화적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푸른 나무들≫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우선, <특집 Ⅰ, Ⅱ>가 모두 기성문인들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청소년 문예지의 특집이 모두 기성 문인의 글로 채워져 있다는 것은 여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청소년 문예지의 특징을 크게 훼손시킨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렇다고 청소년들의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푸른 나무들 학생 글마당>이란 꼭지에 학생의 글이 실려 있는데, 어딘지 기성 문인들의 글에 들러리를 선 듯한 느낌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더욱이 청소년의 시인 경우, 모두 백일장에 입상한 작품들로만 채워져 있다. 이것은 너무나 안일한 기획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청소년 문예지는 문학적 재능이 탁월한 문재(文才)들만의 활동 공간이 아니다. 이렇게 문재들의 공간으로만 채워질 경우 문학에 관심을 갖는 불특정 다수의 청소년들은 청소년 문학과 청소년 문예지를 외면할 수밖에 없다.
≪푸른 나무들≫의 창간호는 이렇게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무엇보다 청소년 문예지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청소년 문예지들은 ≪푸른 나무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다고 다른 문예지들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청소년 문예지는 청소년 문화의 전반에 대한 어떤 밑거름이 되어야 하는데,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청소년의 문학적 역량 혹은 글쓰기 역량에만 초점을 두다보니, 정작 숲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청소년 문예지는 청소년의 글솜씨만을 자랑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청소년 문예지가 각 지역에서 발행된다는 것은, 지역의 청소년 문화를 새롭게 일구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 문화적 의의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 학교 제도권 교육의 울타리 안에서만 청소년을 옭아맬 게 아니라 학교 바깥의 지역적 현안들과 밀접히 연동시키는 문제의식을 길러냄으로써 지역 사회와 소통하는 청소년 문예지로서의 위상도 확보할 수 있다. 기성인을 대상으로 한 잡지와 구분되는, 청소년의 독특한 관점에 의한 지역 사회의 현안을 점검해보면서, 청소년의 도전적인 언로(言路)를 확보해내는 것 또한 청소년 문예지의 역할로서 기대되는 것 중 하나가 아닐까. 우리는 너무나 청소년을 보호의 대상으로 파악하거나, 미성숙한 개체로서 파악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적 물음을 던져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청소년 문예지는 그 어느 창간호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청소년 문학의 예민한 지점을 좀더 논쟁적으로 접근할 필요도 있다. 청소년을 위한 문학 교육, 청소년을 위한 문학적 인프라, 청소년 문학의 사각 지대 등 청소년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과감하게 열어젖힐 수 있는 도발적 기획이 절실히 요구된다. 지금처럼 시, 소설, 희곡, 시나리오, 수필, 서평 등 몇 가지 영역으로 인위적으로 나누어진 글쓰기에 국한될 경우 청소년 문학은 정태화될 따름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까지 낯익은 형태가 아닌, 또 다른 청소년 문예지를 접하게 된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사이버 문학광장 ≪글틴≫(http://teen.munjang.or.kr/)이 그것이다. 국내 유일의 청소년 전용 문학관인 ≪글틴≫은 기존의 활자 매체로 담아낼 수 없는 것들을 소화해내고 있다. ‘글틴’이란 ‘글쓰며(혹은 글 읽으며) 노는 청소년’의 준말로서, 청소년들이 이곳 싸이트에 접속하여 다양한 꼭지에 들어가 직접 글쓰기와 글읽기에 참여하는 공간을 제공해준다. 인터넷의 속성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글틴≫은 무엇보다 쌍방향적 의사소통 구조를 구축하여, 네티즌의 자발적 참여 속에서 청소년의 문학적 감수성과 문학적 상상력을 효과적으로 끌어냄은 물론, 청소년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모색하게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쓰면서 뒹굴뒹글>, <읽으면서 뒹굴뒹굴>이란 꼭지 아래 다양한 개별 꼭지가 구성되어 있어, 청소년들의 문학에 대한 다양한 욕망을 충족시켜준다. 특정 주제에 대한 자발적 글쓰기에 대해 해당 전문가 선생님들의 성실한 댓글과 우수작에 대한 월별 평가와 심사는 청소년의 관심을 모으고, 동영상을 통해 소설과 시를 감상할 수 있게 한 것은, 인터넷 잡지인 웹진의 특성에 부합되는 기획이다. 시청각 기능을 모두 활용한 게 웹진이듯, 청소년의 급변하는 문화적 감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웹진의 기획 또한 부단히 참신해야 할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초심이다. ≪글틴≫은 어디까지나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 청소년 문예지다. 즉 청소년 문예지라는 본질적 속성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점은 오프라인과 다를 바 없다. 우려되는 것은 문학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인터넷의 현란한 정보 기술만 존재해서는 곤란하다. ≪글틴≫이 올 5월에 창간을 했으니, 앞으로의 행보를 지켜볼 일이다.
이렇게 ‘지금, 이곳’의 청소년 문예지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에서 잇따라 창간되며, 최절정기를 맞이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만큼 청소년 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안일한 기획에서 벗어나 도전적이고 참신한, 청소년의 주체가 되는 문예지의 기획력을 각 문예지의 편집진으로부터 기대해본다.
4. 청소년 문예지에 오롯이 자리한 ‘좋은 글’
≪문학아≫의 권두언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좋은 글이란,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이며, 그것을 서로 나누며, 틀어진 것은 바로잡고, 반듯한 것은 함께 나누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내다볼 수 있는 글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고두고 새겨볼 내용이다. 각 청소년 문예지의 창간호 속에 오롯이 자리하고 있는 청소년들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좋은 글’이란 어떤 것일까, 하는 상념에 젖어보았다. 비록 서로 다른 지역에서 발행되고 있지만, 각자의 삶의 대지에 뿌리내린 청소년의 진솔한 글들은 하나같이 ‘좋은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성 문인을 대상으로 한 문예지를 접하다가, 청소년 문예지를 접하면서, 때로는 놀라기도 하면서, 때로는 내 스스로에게 던지는 반성의 물음에 맞닥뜨리기도 한다. 다양한 문학적 분식(粉飾)에 미혹되어 있는 내게 청소년의 때묻지 않는 문학적 감수성과 문학적 상상력은 ‘좋은 글’로부터 어느새 멀어져 있는 내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다. 청소년들의 글에는 아직 세계와 타협을 하지 않는, 그들만의 싱그러운 기운이 넘쳐흐른다. 그들만의 내밀한 사연을 친구와 선생님, 가족과 나누어 가지려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들의 삶을 돌아보며, 우리의 삶을 내다본다.
끝으로 한 가지를 제기하자면, 간행된 청소년 문예지에 실린 글인 경우 모두 제도권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로 국한되어 있는데, (그것도 중학생보다 고등학생에 편중되어 있는데)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하는 청소년을 위한 공간도 확보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소외된 청소년까지 그 범위를 확대하여, 청소년 문예지가 그들의 고민과 아픔도 외면하지 않는, 하여 서로의 상처를 위무해줄 수 있는 문예지의 사회적 역할도 다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청소년 문예지는 그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거듭 강조하건대, 기성 문인의 문예지의 틀을 답습해서는 안 된다. 청소년 나름대로의 자율성과 독특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제도권 안팎을 넘나드는 청소년 문예지에 대한 기획을 요구하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청소년 문예지가 발행되었고, 이제 이들 청소년 문예지를 통해 청소년의 문화가 우리 사회에 싱그러움을 안겨다주길 기대한다.
청소년 문예지의 미래에 대한 밝은 내일을 다 함께 모색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고명철․
1970년 제주 출생
․저서 칼날 위에 서다 ‘쓰다’의 정치학 등
․현재 광운대 교양학부 교수 ․본지 편집위원
- 이전글20호 특집/한기호 08.02.26
- 다음글20호 권두칼럼/장종권 08.02.2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