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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특집/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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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청소년문학, 어디로 가는가?
무협소설이 갖는 매력
―김용 소설을 중심으로
김남석|문학평론가
1. 무협소설과 본격소설
한 저명한 교수이자 평론가와 무협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상당히 놀랐는데, 이유는 그 평론가가 무협지 광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는 당일 아침에도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하는 김용의 <의천도룡기>를 보고 나왔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기억도 있다. 예전에는 국문과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로 무협지 대필을 한 것 같다. 많은 저명한 학자들이 국문과를 다니던 시절, 혹은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에 그런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밀스럽게, 물론 이름은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고.
이런 사실도 있다. 평단에서 깐깐하기로 유명한 평론가인데, 사석에서는 무협지에 대한 엄청난 열혈 팬임을 자부한다. 그는 무협영화에 대한 일종의 광적인 열의를 지니고 있지만, 한 번도 무협지가 좋은 문학일 수 있다는 언급은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세 가지 사례는 모두 상대방을 고려해서, 익명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이것이 무협지를 다루는 어려움 중 하나이다). 익명으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니, 이제 내 이야기를 해보겠다. 나는 무협지를 어린 시절에 읽었다. 남들이 다 그렇듯, 김용의 무협소설부터 읽기 시작해서 표지와 장정이 지저분한 삼류 무협지도 꽤 읽었다.(그 후 관심이 뜸해졌지만, 판타지 무협에 대해 알기 위해서 전동조의 묵향 정도는 읽었다.)
나는 무협지를 읽다가 본격문학을 공부하러 국문과에 진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에는 어려움을 느꼈다. 손쉽게 읽히는 무협소설과, 현실의 고통을 다룬 어두운 색깔의 본격소설. 본격소설에 지치면 자연스럽게 무협소설로 도피했고, 그 도피 기간과 횟수는 점차 줄어들었지만, 지금도 가끔은 끊은 담배 생각이 나듯 그 시절을 생각하곤 한다.
내가 무협소설에 대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평론가로 등단한 직후였다. 평론가들의 세계는 고상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들은 어려운 이론으로 문학을 재단하고, 어려운 이론으로 남을 제압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그 어려운 이론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런데 가끔 심심풀이 식으로 무협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분위기가 달라졌다. 마치 고해성사라도 하듯 그들은 너도나도 무협지를 읽었다고 고백하면서, 마치 그러한 고백을 현재의 영광됨을 뒷받침하는 지난날의 가난 정도로 여기는 눈치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무협소설이 왜 필요한지, 왜 그때 무협소설을 읽고 즐거워했는지, 그런데도 왜 무협소설은 본격문학에 미치지 못하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아니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더욱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의 중요한 기능이 현실로부터의 도피임을 감추고 싶거나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2. 현실로부터의 도피
무협소설을 읽는 첫 번째 즐거움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이다. 고상한 말로 하면 ‘불편한 현실에서의 망명’이다. 무협소설은 꿈과 환상의 문법을 따른다. 비록 출발은 비루하지만 곧 세계적인 영웅이 될 어떤 인재의 이야기이다. 그 인재는 우수한 가문과 혈통을 지니고 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좋은 품성과 소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에는 미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멋진 로맨스의 기회도 제공 받는다. 돋보이는 검술대회에 나가 당당히 세계의 지배자들을 물리치는 야망을 쟁취하기도 한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현실은 비루하다. 가난하고 초라하고 뜻하는 모든 일들을 제대로 이루기 힘들다. 청소년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학교라는 울타리에 종속되어야 하고, ‘입시’라는 멀고 먼 지옥의 불길이 기다리고 있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이 적지 않다. 이것도 형편이 나은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형편이 더 안 좋은 아이들은 가난과 결핍과 차별과 모순과 불균형과 초라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은 어쩌면 돈을 벌어 자신의 생계를 유지해야 할지도 모르고, 아무리 노력해도 뛰어난 아이들의 근처에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적게 가진 것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청소년기는 풍족하면 풍족한 대로, 불우하면 불우한 대로 현실의 무게에 짓눌리기 마련이다. 그때 어떤 형태로든지 현실도피가 필요하지 않을까. 베텔하임은 전래동화의 마녀가 사실은 어머니의 분신이라고 말한다. 다정다감하기만 한 어머니가 어느 날 끔찍한 꾸지람으로 괴롭힐 때(?) 아이는, 두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인정할 수 없어 잠시 어머니가 떠나고 그 자리를 마녀가 대체한 것으로 이해한다고 한다.
청소년기의 아이들에게 세상은 마녀로 변한 어머니 같은 것이 아닐까. 아이들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대응할 하나의 전략을 세워야 한다. 그들은 도망간다. 현실은 거칠지만 그 현실 넘어, 혹은 그 옆에 현실이 아닌 어떤 부드러운 세상이 있다고 믿고 싶어진다.
성급한 추정일지 모르지만, 아이들이 인터넷과 전자 게임과 철 이른 성애에 매몰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가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무협소설은 그러한 아이들이 즐겨 택하는 탈출구 중 하나이다. 그 속에서는 반에서 꼴찌를 하는 아이도, 다른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도, 모두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주인공의 내적 심리와 성장 과정에 자신의 현실을 겹쳐 투사하는 것일 테지만, 그들에게는 그러한 어려운 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젊은 날의 망명지가 필요했고 가끔은 그것이 무협소설이었을 뿐이다.
3. 비틀린 주인공을 보는 하나의 시선
환상 중독은 단지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가령 허균의 홍길동전이나 김만중의 구운몽은 조선시대의 ‘환상소설’이었을 것이다. 김만중의 구운몽을 읽는 것은, 인생무상을 배우기 위함이 아니다.(요즘 학생들에게 물으면 열이면 열 ‘인생무상’이라고 대답한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차라리 이 소설을 안 가르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고 고민한다.) 이 소설의 대부분은 복 많은 남자가 인생의 향락을 누리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소설에서 인생무상을 논하는 대목은 처음과 끝의 일부에 불과하며, 무엇보다 그 주제가 이 소설의 매력을 가늠하는 중요한 요소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당대의 민중들은 양소유의 화려한 삶을 통해 결핍된 현실의 고통을 잊고, 어려운 현실에서 도망갈 도피처를 구경한 것이다. 무협소설의 기본적인 직능은, 18세기의 구운몽이나 20세기의 ‘스타크래프트’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본격문학은 이러한 무협소설에 문제가 있음을 알려준다.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 현실이 고통스럽다고 해도 그 안에서 살아야 하며, 망명 기간이 아무리 달콤하다고 해도 귀환의 순간은 반드시 도래한다. 본격소설은 현실로 귀환할 때 우리가 다시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을 일깨우는 문학이다.
우리나라의 현대소설은 달콤한 진리를 가르쳐주는 경우가 드물다. 나는 지금 해피엔딩이냐 권선징악이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설 속의 사회, 인물, 사건들은 기본적으로 우울함을 정조로 한다.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확대하고 부각하고 있기 때문에 똑바로 직시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문학을 전공하지 않는 나의 친구들에게 한국의 내로라하는 단편소설을 보여주면 그들은 어렵다거나 우울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소설 속에 자신들의 삶보다 더 어렵고 고통스러운 현실이 숨어 있는 것을 목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본격문학을 꺼려한다.
하지만 또한 그래서 우리는 본격문학을 읽어야 한다. 현실에서의 어려움을 예비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가 겪는 고통과 좌절감이 과연 우리만의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어떤 측면에서는 고통에 면역되고 그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나 대안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본격문학을 외면할 수 없다.
그런데 만일 무협소설 속에서 본격문학의 특성을 가진 소설이 있다면 우리는 이러한 소설을 높게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김용의 무협소설은 일정한 해답을 제시한다. 그 중에서 사조영웅전과 신조협려를 보자. 이 두 소설은 1980년대에 우리나라에 무협소설 열풍을 몰고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영웅문 1부와 2부로 번역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책을 안 읽기로 유명한 안방마님들도 곽정과 황용, 양과와 소용녀의 이름을 알게 해준 작품이라고 널리 회자되었다.
다시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자면, 신조협려는 가장 고통스럽게 읽었던 무협소설이다. 가끔 이 소설이 생각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책 읽는 고통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아 억눌러 참을 때가 많다. 왜냐하면 양과의 삶이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무협소설 주인공의 삶과 다르기 때문이다.
무협소설 주인공은 중국의 슈퍼맨들이다. 그들은 출생이 고귀하고 능력이 뛰어나고 행운이 잠재하며 언제나 기회와 위기를 통해 성장한다. 그러나 양과는 그렇지 않다. 아버지는 민족 반역자에 패륜아였으며, 양과의 능력이 뛰어나지만 행운이 항상 함께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쪽 팔을 잃었고,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남자에게 강간당했으며, 그것도 16년이나 떨어져 살아야 했다. 그들의 사랑은 주위로부터 인정받지 못해 항상 떳떳하기 힘들었다.
양과의 심성에도 문제가 적지 않다. 어려서부터 고아로 자랐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했고, 지나치게 영악해서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용인되기 어려운 편협한 사고와 고집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양과는 좀처럼 영웅의 상으로 격상되기 힘들다. 한국판 번역 제목을 비튼다면 ‘가장 영웅답지 않은 인물’이 아닐까 한다.
환상의 문법을 기대하는 무협소설에서 양과를 따라 여행한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것은 현실에서 갖았던 약점과 두려움과 콤플렉스를 고스란히 지니고 여행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양과의 삶이 결론적으로 해피엔딩이라고 할지라도, 그 과정을 따라가는 고통마저 상쇄되는 것은 아니다.
4. 불완전한 영웅들이 일깨우는 생의 위안과 성장의 고통
사조영웅전의 곽정도 평범한 영웅 축에 속한다. 비록 양과만큼 간난신고를 겪는 유형은 아니지만, 곽정은 보기 드물게 아둔한 주인공이다. 무협소설의 주인공이 대개 똑똑하고 영준한데 비해 곽정은 미련하고 외모도 그리 뛰어나지 않다. 그는 가르쳐 준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는 둔재이다. 많은 무협소설을 읽고 난 이후에 안 사실이지만, 이러한 주인공은 거의 없다. 다시 말해서 곽정 역시 비틀린 영웅 측에 속한다. 그 역시 영웅답지 않은 영웅이다.
두 사람은 무협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큰 환상을 심어주지는 않지만, 반급부로 누구도 영웅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누구도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고, 나름대로 목표한 것에 도달할 수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이러한 이유로 김용의 소설들은, 열등감과 자격지심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에게 무의식적인 위안이 될 수 있다.
나는 신조협려와 사조영웅전이 본격문학의 어떤 지점과 무협문학의 장점을 고루 갖추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가독성, 흥미진진한 설정, 현실로부터의 망명과 같은 덕목은 무협문학이 지니는 장점이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는 인생의 고통과 사랑의 아픔이 있다. 세상에 대한 열등감과 자신에 대한 자격지심이라는 만만치 않은 문제의식도 담겨 있다. 성장통을 유달리 심하게 앓는 현대 청소년들에게 위안과 함께 만만하지 않은 삶의 고통 또한 암시한다.
이것은 많은 무협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항은 아니지만, 이러한 요소들이 발견된다면 그 무협소설은 본격문학만한 가치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나의 견해로는 청소년기의 도피와 망명은 어쩔 수 없는 필연이다. 그렇다면 그 필연이 막연한 도망에 그치지 않게 해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무협소설이 그들이 택하는 도피의 한 방식이라면, 현실의 고통도 함께 가져가는, 아니 현실의 고통도 잊지 않도록 해주는 이러한 무협소설의 존재는 소중하다고 여겨진다.
5. 갈등의 문학으로서의 무협소설
영화 <두사부일체>는 황당한 영화였다. 두목과 사부와 아버지가 하나라는 발상도 희한하고, 그러한 조폭 세력이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한다는 것도 희한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생각 외로 한국인들에게 호소력 있는 영화로 남았다. 당시 많은 언론과 리뷰는 조폭 신드롬으로 이 문제를 보았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조폭 신드롬을 넘어서는 어떤 매력이 있었다.
그 매력은 무협소설의 매력과 상통한다. 조폭 두목은 폭력을 사용하지만 원칙을 지킬 줄 안다. 선생님에게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조폭이 하는 일이 사회 전체에 해악을 끼치는 일이지만, 그런 조폭마저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약을 지킨다는 논리는 그렇지 않은 현실(가령 교육자가 더욱 조직폭력배 같은 폭력을 휘두르는 상황)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위로를 던져주었다.
무협소설의 기능은 이러한 위로도 포함하고 있다. 무협소설의 주인공들은 무력과 폭력을 사용한다. 그것으로 남을 제압하고 때로는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원칙을 절대적으로 신봉한다. 의리와 신의이다. 그들은 이러한 덕목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잃어버린 가문의 영광을 일으키고, 자신을 가르친 사문(사부)의 위명을 드높이고, 철 천지 원한을 갚고, 무림을 위기에 빠뜨린 악당들을 응징하는 것 등이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이다. 대개 그러한 임무는 주인공에게 사명으로 전달되며, 많은 사람들이, 주인공이 사명을 완수하는 것에 찬동한다.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정의를 무협소설에서 목격하는 것은 통쾌함을 전해준다. 현실에서 좀처럼 지키기 어려운 신의와 의리를 위해 목숨을 거는 행위는 삶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이다. 통쾌함과 일관성은 무협소설을 읽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문제는 무협소설의 주인공들이 맡은 임무란 크건 작건 간에 개인적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주인공들이 고민하는 상황 자체에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민하지 않는다. 이거냐 저거냐의 갈등 속에서 고민하는 포즈만 취하기 마련이다. 고민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살아있다는 느낌보다는 평면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다시 김용의 소설을 보자. 김용의 소설이 여타의 무협소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인공들이 갈등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키워준 사람과 자신의 조국 사이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나라와 자신이 세워야 할 나라 사이에서, 꽤 진지한 고민을 한다. 곽정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을 버린 나라를 위해 자신을 키워 준 징기스칸을 배신한다. 장무기는 사랑하는 연인이지만 이별을 감수하며 자신의 의무에 매달린다. 소봉은 자신의 조국과 길러준 친구 사이에서 갈등한다.
김용의 무협소설이 가치 있다고 인정되는 이유는 개인의 입신양명을 넘어서는 ‘확대된 영웅상’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본격소설은 우상을 세우기보다는 우상의 약점을 꼬집고, 영웅을 보여주기보다는 민중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익숙하다. 그것은 근대소설의 기본적인 직능이 비판적 이성에 있고, 고전소설의 문법을 타파하면서 본격소설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본격소설은 분명 시민과 합리의 양식이다.
하지만 그러한 소설 양식이 모든 경우에 유용한 것은 아니다. 가령 청소년들은 근대의 양식을 얻는 대신, 세상을 파악하는 단순하지만 유용한 하나의 문법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적들과 싸워야 하는 청소년기에, 그 적들을 통칭할 수 있는 이름인 ‘악’을 빼앗긴 셈이다. 이제 청소년들에게 세상은 선과 악이 아닌, 모두 착하지 않고 누구도 악하지 않은, 약간은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변하고 만다.
무협소설의 두 번째 매력은 여기에 있다. 무협소설은 선과 악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정리하는 하나의 방식을 제기한다. 이러한 방식은 단순하고 그래서 자질구레한 오류로 가득하지만, 그래서 어지러운 현실을 통어할 수 있는 하나의 요령이 되기도 한다. 청소년기에는 이러한 이분법도 필요하다.
김용의 소설이 주목되는 것은 선과 악의 이분법을 제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존의 무협소설 문법처럼 김용도 선과 악의 이분법을 따르면서도, 그 안에 필연적인 갈등을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사조영웅전의 곽정이 징기스칸으로부터 나라를 구하는 장면은 이러한 갈등을 부각시킨다.
곽정은 어릴 때부터 자신을 키워준 징기스칸을 도와 송나라를 괴롭혀 온 금나라를 패망시킨다. 하지만 그 이후 그는 선택의 기로에 처한다. 송나라마저 패망시킬 것인가, 아니면 어머니를 잃을 것인가. 사실 곽정의 어머니를 인질로 곽정을 위협하는 것은 김용답지 않은 얕은 수였다고 생각한다. 곽정이 가지고 있는 한족에 대한 충성심, 그러니까 송나라에 대한 열정에 호소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곽정은 한족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한 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몽고에서 자랐고, 그를 키운 것은 8할이 몽고이다. 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족으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이러한 조건들을 제외하고라도 굳이 그가 한족을 받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곽정의 가치관은 확고하게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한족이기 때문에 한족을 위해야 한다는 막연한 상태였을 뿐이다.
그런데 선택의 기로에 처하는 순간 곽정은 내면의 갈등을 딛고 단안(斷案)을 끌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작품에서 곽정이 징기스칸의 대군을 막아 송을 보전한다는 줄거리는 사실상 중요하지 않다. 고민하지 않았던 곽정이 고민하게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무협소설의 주인공도 자신의 진로와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 의미 있다. 그것이 개인적인 입신양명이나 흔한 삼각관계 류의 사랑싸움이 아니어서 더욱 좋았다.
김용이 만든 곽정 내면에 처음부터 갈등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상황이 그 갈등을 부각시켰고, 선택을 통해 가치관을 정립하게 만들었다. 사조영웅전은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다른 말로 하면 무협소설이 아닌 현실에서도 유용한 갈등을 내재했다는 점에서 일반 무협소설과는 다르다. 의미 있는 갈등은 좋은 문학의 요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6. 중독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무협소설은 중독성이 강하다. 한 번 무협소설에 빠져들면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고 무협소설을 연속적으로 탐독하게 된다. 무협소설이 거칠지만 하나의 서사적 문법을 형성한다고 할 때, 이러한 반복 독서는 흥미로운 측면이 있다. 이것은 베텔하임이 말한 전래동화의 역할로 설명 가능할 것이다. 베텔하임은 아이들이 어떤 특정한 동화를 반복해서 들려달라고 요구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실제 삶에서 쉽게 발견된다. 어떤 아이는 미운 오리 새끼 이야기를, 어떤 아이는 헨젤과 그레텔의 이야기를 잠들기 전에 듣고 싶어 한다.
베텔하임의 분석 결과는 이러한 동화들 속의 특정 요소가 아이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자신을 미운 오리라고 여기는 아이는 그 이야기를 통해 언젠가 화려하게 비상할 기회가 올 것임을 암시받게 되고, 버려짐에 대해 걱정하는 아이는 그러한 어려움을 지혜로 극복할 길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무협소설을 읽은 아이들은 무협소설이 추구하는 어떤 서사적 지향을 마음속에 간직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단 그것은 현실에서 결핍된 요소를 채우려는 욕망으로 뭉뚱그려져 이해될 수 있다.
반복을 통해 이러한 충족은 어느 정도나 성취되는 것일까. 무협소설의 초기 중독 증세에서 반복(적 읽기)은 어느 시기까지는 식상함 없이 마음의 충족으로 다가온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의 작품, 하나의 작가, 한 번의 독서만으로 부족과 결핍이 미처 매워지지 않기 때문에 반복적인 텍스트라고 해도 계속 탐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반복이 한계에 이르는 상황도 도래하기 마련이다. 소설 문법의 미세한 변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한계는 틀림없이 찾아온다. 전동조의 묵향 같은 소설은 이러한 한계에서 탄생한 소설인 것 같다. 사람들은 묵향을 판타지 무협의 시초를 열거나 혹은 판타지 무협의 유행을 선도한 작품으로 간주한다. 진위를 정확하게 따지기는 힘들지만 대체로 옳은 지적일 것이다. 하지만 묵향이 무협소설에 판타지 소설을 가미했기 때문에 독특한 것은 아니다.
나의 견해로는 무협소설의 문법이나 판타지 무협의 문법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묵향에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인공의 행색과 무공 수련 방식 그리고 성장 과정이다. 기본적으로 주인공 묵향은 어리지 않다. 무협소설의 주인공은 대개 청소년기의 남자이고, 나이가 많다고 해도 성장 과정상으로는 대개 어른이 되기 직전이다. 다른 말로 하면 김용 이후의 무협소설은 성장소설의 외피를 덮어썼다.
그런데 묵향은 상당한 나이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기연과 행운에 의해 성장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무공 수련 방식도 크게 다르다. 김용 이전의 무협소설은 무공 수련 과정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용 이후부터는 주인공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무공을 수련하고, 어떻게 독립된 개체(완성된 고수)가 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청소년기의 독자들은, 미숙한 주인공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성장통(成長痛)을 납득하고, 초절한 고수(성숙)로의 완성을 관찰하여 자신의 삶에서도 긍정적인 결말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반면 무협소설의 반복적 탐닉을 통해 이러한 과정은 무화되기 일쑤이다. 특히 무공을 익히는 과정은 더 강한 무공, 더 신기한 인연 등으로 인해 과장되기 십상이고, 그로 인해 현실의 성장통과는 그 궤도를 달리하는 경우가 점증한다. 전동조의 묵향은 성장통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 희귀한 사례에 해당한다. 전동조는 시시한 사부, 기연 없는 수련 과정, 묵상, 그리고 오랜 시간을 통해 정상적인 상궤로 진입하는 성장과정을 선보인다.
정리해서 말하면, 묵향은 대단한 인물이지만, 그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성장 기회(우연)를 틈타 얻어낸 어부지리가 아니다. 묵향은 혼자서 묵상하고,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가르침이지만 마음에 새기고, 현실에서 경험하여 검증하고, 시간을 기울여 한 가지 문제에 매달리고, 남에게 과시하기보다는 혼자서 실력을 쌓아 대단한 자신(고수)을 이룬다.
이러한 성장 과정은 무협소설에 탐닉해 본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신선해 보인다. 묵향이 여타의 작품과 다른 이유가 무공을 닦는 방식 즉 성장의 방식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물론 묵향은 나중에 엄청난 비급을 보고 뛰어난 무기를 갖게 되지만, 그것은 성장이 끝나고 난 이후이다. 그리고 그러한 외부의 도움은 그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도움이 되는 종류의 것이었다.
김용의 무협소설은 성장소설의 과정을 닮아 있다. 기연을 만나고 좋은 사부를 만나고 조력자를 만나고 신의와 책임을 다할 문제를 만나는 것은, 어린 아이가 세상에 나가 세상의 문제들을 만나면서 그 해결 방안을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의미 있는 성장의 비유가 될 수 있었고, 긍정적인 측면에서 성장소설의 장점을 취득하게 되었다.
김용의 무협소설 이후, 무협소설의 창작 판도는 성장소설의 성향을 닮아갔다. 그래서 더 많은 기회를 주인공에게 주기 위한 아이디어가 고안되었다. 더 훌륭한 무공과 더 뛰어난 무기와 더 신기한 재화와 더 매력적인 여인들이 만들어졌다. 무협소설을 탐닉한다는 것은 그렇게 주어지는 외부의 도움을 확인하는 행위였지만, 지나친 반복은 이러한 도움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러한 도움이 거의 없다고 느껴지는 현실에서의 적응을 어렵게 하는 부작용도 낳았다.
전동조의 소설이 신선한 것은, 그러한 외부로부터의 도움보다는 개인적인 성찰의 힘을 앞세웠기 때문이다. 묵향의 사부는 일류가 아니었고, 묵향이 성장기에 익힌 무공은 최고가 아니었다. 어떤 것도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 무협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도움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수련도 중요하다는 매우 간단한 진리를 보여준 셈이다.
7. 무협소설이 갖는 매력
‘무협지’와 ‘무협소설’은 어감이 다르다. 과거 만화방에서 빌려주던 안 좋은 종이질의 무협지는 문학의 고고한 정신과는 거리가 먼 삼류문학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고급음식만이 아니라 불량음식도 우리에게 필요하듯이, 저질의 삼류문학으로 취급되었을 시절에도 무협지는 필요했다.
이제, 무협지는 깨끗한 장정과 공개된 서명으로 인해 ‘무협소설’의 어감을 확보하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무협소설은 교보문고의 한 귀퉁이에서 팔리기 시작했다. 김용의 무협소설을 별도로 한다고 해도 이러한 변화는 삼류문학의 환골탈태에 해당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무협소설이 갖는 하드웨어적인 진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적인 진보이다.
김현은 본격문학을 평하는 평론가치고는 과감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무협지는 왜 읽히는가」는 제목으로 무협소설의 인기 이유를 분석한 바 있다. 부분적으로 상당히 옳은 지적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김현이 무협소설을 다루는 방식은 기존의 시각을 탈피하지는 못했다. 일회성으로 논의하는데 그쳤으며, 취미 이상의 진지함을 내비치지 않았으며, 자신의 분석과 연구가 소외된 문학 장르에 대한 시혜의식의 발로임을 숨기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읽지만 드러내놓고 평론할 수 없는 입장과 다를 바 없다. 나 역시 이 범주에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무협소설이 갖는 매력이라는 글을 쓰는 것은 청소년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청소년기는 풍족하든 풍족하지 않든, 우수하든 우수하지 않든 간에 어둡고 불안하고 막막한 시기이다.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현실의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들은 도피해야 한다. 그것은 필연이라고 생각된다.
도피인 만큼 반드시 밝고 희망차고 긍정적인 공간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알려지지 않은 공간, 대책 없는 불량성이 만연한 공간, 정상적인 질서가 전도된 공간일 가능성이 더욱 높다. 인류사의 어떤 시기에서는 우리가 찬양하는 ‘훌륭한 문학’들이 그 도피처로 기능했었지만, 작금에는 불행하게도 그 빈도수와 확률이 낮아졌다. 인터넷․포르노․전자게임․자극적인 동아리 활동 등으로 다양하게 변모되었고, 문학을 선택하는 이들도 본격문학인 경우보다는 대중문학인 경우가 많다. 인터넷 소설, 드라마 대본, 팬 픽션, 만화, 그리고 판타지 무협소설이나 무협소설 등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무협소설은 예전만은 분명 못하지만, 꾸준히 그리고 강력하게 인기를 모으는 망명지이다. 그 이유는 현실의 압력으로부터 도피할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어지러운 현실을 함부로 재단할망정 명확하게 가늠선을 제공하는 선과 악의 대결, 폭력일망정 사회의 부조리를 처치하려는 힘과 의지, 그리고 성장 과정에서 겪는 고통에 비견되는 무공 수련 과정 등을 대리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문학이 복잡하듯이 이러한 효과 역시 함부로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러한 도피와 제한된 효능이 어떤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무의식적인 의지로부터 출발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적당한 선에서 그친다면 독보다는 약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무협소설 역시 대개의 많은 탈출구가 그렇듯이 중독성이 심하다. 반복적인 탐닉을 불러오고, 어느 한계를 넘으면 그 탐닉은 약보다는 독으로 기능한다. 그때는 그 폐해가 제법 심각한데, 그렇다면 우수한 무협소설을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 무협소설의 장점과 단점을 정확하게 연구하여 그 결과를 숙지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일방적으로 약만 되고 또 일방적으로 독만 되는 것은 없다.
무협소설의 구체적 측면과 연관지어 내가 할 수 있는 지적은, 그려진 주인공이 영웅이되 현실의 고뇌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완벽한 인물도 내면에 고통을 지닐 수 있음을 알려주어야 한다. 양과는 외팔이었고, 그의 가문은 반역자였으며, 아내로 택한 여인은 신분과 관습에 의해 지탄받는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양과는 어려움을 딛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다. 그에게 영웅의 칭호가 주어질 수 있다면, 우리처럼, 일반 사람들처럼 고통을 딛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영웅도 갈등을 해야 하고, 선택의 기로에 서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무협소설의 원칙이 행운과 보상과 청산과 성취라면, 갈등과 선택은 현실의 원칙이다. 곽정은 자신의 마음속에서도 확실하지 않은 어떤 가치관을 선택해야 했다. 그 선택을 통해, 외부로부터 막연하게 주어지던 기연과 도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영웅이라면 현실인의 선택을 납득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성장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무협소설은 그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고뇌하는 아이들에게 꿈과 환상과 낭만의 세계를 알려주면서도, 아울러 그 안에도 고뇌와 선택과 갈등과 고통과 묵상과 자기 수련이 필요함을 넌지시 알려주어야 한다. 그 방식이 너무 고답적이면 안 된다. 만일 그렇다면 청소년들은 아마 무협소설을 또 다른 본격소설로 취급할 것이고, 고답적이지 않은 다른 장르로 탈출구를 이전할 것이다. 그러니 무협소설은 어떤 범위 내에서만 본격소설의 장점을 취해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해 놓고 보니, 이러한 요건을 충족할 수 있다면, 꼭 무협소설이 아니어도 된다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을 뒤집어놓고 보면, 지금의 청소년들이 무협소설에 탐닉하게 된 것은 무협소설 자체 내의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본격소설이 덜 매력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본격소설의 고고한 수세는 이제 오늘날의 문학 정신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무협소설이 왜 읽히고 왜 인기가 있는지를 작금의 문학은 참조할 필요가 있다. 또 무협소설이 왜 읽히고 왜 인기가 있는지를 궁리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왜 본격문학이 중요한지도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다. 청소년들에게 무협소설이 당당한 문학의 일부로, 무협소설을 읽는 것이 본격소설을 읽은 것과 다르지 않을 자부심을 주는 시간이 도래했으면 하는 마음 가득하다. 또한 한편으로는 우리의 본격소설 중에 무협소설처럼 자연스럽게 읽히고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도 양산되기를 기대해 본다. 문학은 의미만큼 재미도 중요한 것이니까.
김남석․
1973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학위
․199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여자들이 스러지는 자리」로 등단
․저서 비평의 교향악 등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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