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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특집/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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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45회 작성일 08-02-26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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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청소년문학, 어디로 가는가?



하위문화의 가능성과 한계
―귀여니 소설의 영화화에 대해


강성률|영화평론가



1. “인터넷 소설=흥행”
지금은 주춤한 면이 있지만, 한때 충무로에서는 인터넷 소설을 영화화하는 것이 커다란 붐을 형성한 적이 있었다. 그때 충무로에서는 인터넷을 뒤지며 인기 있는 소설을 영화화하려고 몸부림쳤다. 아마도 그런 시기의 절정이 2004년이었던 것 같다. 그 해에만 세 편의 인터넷 소설이 영화화되어 개봉되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인터넷 소설의 영화화 경향을 부채질한 것은 <엽기적인 그녀>(곽재용, 2001)였다. 이 영화가 단숨에 전국 5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자 제작자들은 유쾌하고 발랄하고 새로운 감각을 지닌 인터넷 소설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이 보기에 인터넷은 젊고 싱싱한 언어들이 그대로 생존하는 공간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어 등장한 것이 <동갑내기 과외하기>(김경형, 2003)였다. 이 영화 역시 전국 500만 명 이상의 빅 히트를 기록했다. 인터넷 소설을 영화화한 두 편이 연속 홈런을 기록하자 제작자들은 인터넷 소설을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여기에 <위대한 유산>(오상훈, 2003)을 보태졌다. 이 영화 역시 신선하고 새로운 감각으로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무렵이 2003년경이었다. 2003년 충무로의 가장 큰 화두는 단연 인터넷 소설이었다. 세 편이 연속으로 큰 흥행을 기록하자 “인터넷 소설=흥행”이라는 하나의 공식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2004년 <내 사랑 싸가지>(신동엽, 2004), <그 놈은 멋있었다>(이환경, 2004), <늑대의 유혹>(김태균, 2004) 등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인터넷 소설의 영화화는 하나의 대세로 굳어졌다. <그 놈은 멋있었다>가 생각만큼 흥행하지는 못했지만, <늑대의 유혹>의 대박은 아직도 인터넷 소설이 흥행의 핵심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충무로에서 찾는 인터넷 소설은 이미 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이미 알려진 대로 알려진 인기 소설은 거의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된 상황이었다. 2005년에는 <제니, 주노>(김호준) 단 한 편만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이며, 흥행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때문에 지금 인터넷 소설을 영화화하는 작업은 주추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다고 하더라도 인터넷 소설이 주춤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선을 드라마 쪽으로 돌려보면 전혀 다른 상황을 접하게 된다.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는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으며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 <옥탑방 고양이>(2003), <내 이름은 김삼순>(2005), <신입사원>(2005) 등이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는 것을 안다면, 인터넷 소설은 아직도 흥행의 중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2. 10대의 하위문화는 가능한가
그렇다면 인터넷 소설의 무엇이 이토록 엄청난 흥행을 몰고 온 것일까? 자연스럽게 의문은 이렇게 바뀌게 된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대개는 신세대를 그린 발랄한 상상력, 사실적인 대사와 유머러스한 설정, 초반의 코믹과 후반 멜로의 무난한 결합, 신세대 문화를 이해한 연출력, 탄탄한 배급력 등이 결합해 하나의 흐름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원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인터넷을 공유하는 젊은 세대가 그려내는 사실적인 대사와 유머러스한 설정을 가장 큰 이유로 꼽는다. 엽기적인 여자가 등장해 실감나는 대사를 던지면서 착한 남자를 이끌고 다니는 기상천외한 상황, 동갑내기가 과외 선생과 과외 학생으로 나누어 벌이는 신경전, 백수와 백조에 대한 사실적인 설정은 보는 이를 재미 속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인터넷 소설은, 이미 알려진 것처럼 기존의 서사 중심의 주류 소설과는 다름 점이 많다. 에피스드 중심의 구성, 독자와 피드백 하는 상황, 이모티콘을 비롯한 새로운 문자의 사용,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남녀 주인공이라는 설정 등이 공통점을 이룬다. 누구나 경험해 보았겠지만, 기성세대가 인터넷 소설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그들이 에피소드 중심의 인터넷 소설의 흐름에 익숙하지 않고, 문자를 벗어난 이모티콘에 낯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인터넷 세대들의 상상력을 따라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인터넷 소설의 핵심은 새로운 인터넷 환경에 적합한 방식의 소설을 새로운 공간에서 10대들이 직접 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10대들이 열광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정말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인터넷 소설의 문화는 대개 ‘10대 문화’라는 점이다. 물론 인터넷 소설을 읽는 이들 가운데 20대도 많지만, 인터넷 소설을 형성하고 있는 주류가 대부분 10대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귀여니 돌풍의 진원지는 철저하게 10대였다. 때문에 그들을 ‘인터넷 세대’라고 호칭해도 좋을 것 같다. 이 세대는 단지 인터넷을 이용하는 세대가 아니라 인터넷을 자신들만의 문화공간으로 만든 이들이다. 그들은 문자보다는 이모티콘의 감성을 지니고 있는 세대이며,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의사를 충분히, 재미있게 소통하는 세대이다. 핸드폰에서도 엄지를 통해 엄청난 속도로 문자를 보낼 수 있는 그들은 그런 속도로 인터넷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기록한다.
인터넷 소설이 한국의 문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0대가 마침내 자신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자신들의 입으로, 스스로 했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 어떤 문화도 10대가 스스로, 이처럼 폭발적으로 생산한 적은 없었다. 10대가 열광하는 음악도 실은 기성세대가 10대를 소구대상으로 해서 만든 것이었고, 10대가 열광하는 연애시(詩) 역시 기성세대가 10대를 소구대상으로 만든 것이었다. 10대를 소구대상으로 만든 드라마, 영화 역시 기성세대가 10대를 소구대상으로 해서 팔아먹으려고 만든 것이었다. 이런 현상은 흔히 1970년대부터 발생한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10대들의 주머니도 조금은 두텁다는 것을 간파한 문화산업계가 10대를 대상으로 문화상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대중음악이 그러했고, 영화가 그러했다. 물론 만화가 10대를 목표로 한 것은 훨씬 전의 일이지만.
그런데 이렇게 10대를 소구대상으로 문화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했지만, 정작 10대들이 직접 문화상품을 생산한 적은 없었다. 설령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저열한 문화로 평가되거나 불량한 학생들의 이상한 문화로 비판 받아 공론의 장으로 올라오지 못했다. 때문에 그들은 기성세대가 만든, 다시 말해 기성세대가 그린 10대의 삶을 보면서 헛된 꿈을 꾸어야 했다. 가령 1970년대 영화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하이틴영화를 보면, 10대의 문화풍속을 인정하는 듯하지만 결국에는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국가주의적 유신의 유령이 지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국가주의와 결합한 어른(지배층, 기성세대)의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문화가 없었던 10대들은 일방적으로 이런 영화를 봐야만 했다. ㅠ_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터넷 소설이 지닌 의미를 충분히 새겨볼 만 하다. 인터넷 소설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10대가 직접 10대 생활을 솔직하게 재현할 수 있다. 그 속에는 현재 입시 지옥의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10대 후반의 고민과 고통, 그들의 바람이 진솔하게 그려 있다. 그것은 저자의 일방적인 저술이 아니라 독자와 충분히 교감해서 피드백하는 ‘소통의 공간’이었다. 때문에 이 속에는 이전의 문화에서는 도저히 그릴 수 없었던 10대만의 솔직한 생활을 발견할 수 있다. 인터넷 소설이 진정한 하위문화가 될 수 있다면, 아마도 주류 문화와 완전히 단절된 채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간 이런 상황 때문에 가능했다. 다시 말해, 인터넷 소설은 10대가 문화의 생산 주체이면서 동시에 소비의 주체인 문화였다. 기성세대가 도저히 간섭할 수 없는 그들만의 ‘온전한’ 하위문화인 것이다.
때문에 많은 (필자를 포함한(-_-;)) 기성세대들은 인터넷 소설을 읽지 못하겠다고 한다. 서사 중심의 소설에 익숙한 이들은 도저히 인터넷 소설을 읽을 수가 없다. 필자 역시 귀여니의 소설을 끝까지 읽은 적이 없다. 몇 번이나 읽다가 도중에 포기하고 말았다.0_0 그것은 필자 역시 자유분방한 10대 문화와 이미 거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도대체 왜 인터넷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 그토록 많은 인기를 끌었는지, 과연 그런 영화는 기존의 영화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분명 새로운 사건이었다. 인터넷 소설의 영화화 붐이 어느 정도 잠잠해진 지금 뒤늦게 필자가 귀여니의 소설을 영화화한 <늑대의 유혹>과 <그 놈은 멋있었다>를 통해 10대의 문화를 탐구하고자 한다. 이것은 귀여니라는 한 작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10대가 직접 창작한 원작을 영화화해서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물론 소설과 영화는 다른 매체이다. 소설의 장점을 영화가 잘 살렸을 수도 있고, 망쳐 놓았을 수도 있다. 때문에 흥행의 정도는 원작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각색과 연출, 연기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업을 하는 것은 두 영화를 통해 10대의 문화의 특징을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위문화의 가능성을 짚고자 하기 때문이다.

3. 신데렐라 콤플렉스와 뿌리 뽑힌 가족
귀여니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서울에서 제천으로 이사 온 후 혼자된 외로움을 달래려고 인터넷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녀는 일기를 대신해서 소설이라는 형태의 글을 인터넷에 장난 삼아 올린 것이 이렇게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때문에 그녀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은 10대들의 생각을 기성세대가 영화화했다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귀여니의 인터넷 소설에는 대개 10대가 열광했지만, 그것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대부분의 10대 후반과 약간의 20대 초반이 열광했다. 하지만 그들은 공히 10대 소녀가 창작한 원안에 열광했다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렇게 열광했을까?
그것은 아무래도 지옥 같은 입시의 현장에서 10대가 생생하게 기록한 소설이라는 의미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정식 교육을 받은 이들은 누구나 사회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관문을 고통스럽게 통과해야 한다. 그것은 수석을 하는 이에게도, 꼴찌를 하는 이에게도 예외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10대가 지니고 있는 생각을 드러내는 소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10대에게 그것은 현실의 모습이고, 그 시기를 갓 벗어난 20대 초반에게는 향수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귀여니가 자신의 소설에서 시간적․공간적 설정을 고등학교로 한 것은 이렇게 그들의 독자와 연결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귀여니가 그린 고교 시절은 어떤 시절일까? 그녀는 도대체 어떤 시각으로 고교 시절을 그렸기에 그토록 많은 이들이 귀여니 소설에 빠져들었던 것일까? 의문을 좀더 넓히면, 귀여니가 그린 소설의 특징은 무엇이고 독자들은 그녀 소설의 무엇에 그토록 열광한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결국 기성세대의 소설이나 가치관과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제부터 귀여니 소설을 영화화한 두 작품을 통해 의문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귀여니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범생이 없다는 점이다. <늑대의 유혹>의 주인공인 정한경(이청아)은 그리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아니다. 그녀를 좋아하는 반해원(조한선)과 정태성(강동원)도 공부와는 거리를 둔 학생들이다. 특히 반해원과 정태성은 학교에서 가장 싸움을 잘하는 ‘짱’으로서 그들의 생활은 대부분 모범생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 놈은 멋있었다>의 주인공인 한예원(정다빈) 역시 모범생과는 거리가 있고, 그녀를 좋아하는 지은성(송승헌)도 학교에서 싸움을 가장 잘하는 ‘짱’이다. 두 편에서 특이하게도 ‘공부를 잘 하고 품행이 방정한 학생’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귀여니가 바라본 고교 시절은 공부에 찌든 시절이지만, 그녀가 그리는 이상은 모범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탈선에서 쾌감을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교 시절의 남성들에게 가장 신화화된 것은 싸움을 잘 하는 것이다. 여학생이 가장 원하는 것이 공부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미모가 뛰어난 것이라면, 남학생은 ‘맞짱’에서 누구라도 이길 수 있는 실력을 가지는 것이다. 귀여니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모범생을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짱’을 등장시켜 입시 지옥의 고통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자 했다. 많은 이들이 귀여니 원작의 소설이나 영화에 빠져들었던 것은 이 점을 무시할 수 없다. 품행방정한 모범생이 아니라 탈선을 즐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입시교육에 힘겨워하는 짱을 등장시켜 하나의 탈출구 역할을 했던 것이다. 게다가 남녀간의 사랑을 다룸으로써 입시 지옥에 있는 이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었다.
그런데 귀여니의 이런 전략은 고교생들만의 전략이 아니다. 자신을 좋아하는 학생이 학교 짱이라는 점, 또는 두 학교의 짱이 자신을 좋아해서 두 사람이 싸워야 한다는 설정은 이미 기존 영화에서 숱하게 존재했었다. 흔히 대중영화에서 구사하는 액션과 멜로의 결합이 바로 이런 두 상황의 결합에서 발생한다. 한때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홍콩 영화나 1960년대의 청춘영화 역시 이런 전략을 구사했다. 깡패의 의리와 여성에 대한 사랑을 다룬 대중영화는 대부분 이런 전략을 구사한다. 귀여니는 이것을 단지 고등학교라는 공간으로 살짝 바꾸어 놓았을 뿐이다.
여기서 다시 짚고 넘어갈 것은 귀여니가 그리는 남성은 의리와 싸움을 강조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귀여니는 학교 짱을 주인공으로 했다. 그들은 의리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인물이다. 은성이 유독 한성에게만 거리를 두는 것도 남성들만의 의리와 연관된 것이다. 귀여니의 이런 생각은 10대들이 생각하는 남성의 판타지를 그대로 반영한다. 솔직하다고 할만큼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이런 설정은 10대들에게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도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설정 때문에 귀여니의 원작이나 그것을 영화화한 것이 기성세대들에게는 그리 다가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성세대들은 의리나 싸움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둘째, 귀여니 원작의 영화에는 철저하게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있다. 두 편에서 주인공인 여학생은 그리 미모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니며 모범생도 아니다. 좀 냉철히 말하자면, 약간은 어리숙해 보이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여학생을, 한번만 보더라도 빠져드는 뛰어난 외모를 갖추고 있고, 그의 주위에는 항상 ‘똘마니’들이 있으며, 게다가 의리까지 있는 남성이 극진하게 사랑한다. <그 놈은 멋있었다>에서는 지은성은 그를 좋아하는 많은 여학생을 두고 한예원을 사랑하고, <늑대의 유혹>에서는 반해원과 정태성이 어리바리한 정한경 때문에 결투를 벌인다.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는가? 세상에, 신데렐라 콤플렉스도 이런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없다. 귀여니의 원작은 철저하게 이런 설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의 감수성이 여기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10대 소녀의 낭만적 감수성이 그대로 살아난 이런 설정은 입시 지옥에서 꿈꾸는 하나의 낭만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소녀들이 지니고 있는 감수성의 한계라는 측면도 있다. 더군다나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현재 TV드라마에서도 숱하게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10대의 문화가 그들만의 새로운 문화라기보다는 기성세대의 문화와 그리 다르지 않다.
여기서 짚어볼 것은 첫 번째와 두 번째 특징을 고려하면, 두 편 모두 여성적 시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두 편 모두 여고생이 생각하는, 가장 인기 있는 남학생이 어리숙해 보이는 여학생에게 모든 사랑을 바치는 이야기인 것이다. 때문에 이 영화에는 페미니즘적 요소가 없다. 그녀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단지 받기만 하는 수동적 존재이다. 이런 요소 역시 두 편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귀여니 원작의 영화에서 드러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숱한 드라마에서 몇 년 동안 다루었던 ‘출생의 비밀’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두 편 모두 인물들에게 출생의 비밀과 가족의 비밀을 두었다. <늑대의 유혹>에서 정태성과 정한경은 배다른 형제였다. 결국 그들은 사랑할 수 없는 사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서로의 출생을 모르는 것으로 설정해 두 사람의 애틋한 감정을 자극했다. <그 놈은 멋있었다>에서는 출생의 비밀을 그리 심각하게 다루지는 않지만, 지은성의 아버지가 에이즈로 죽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은성이 상처를 입었다는 설정을 마련했다. 은성이 사람들과 스킨십을 꺼리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즉 비밀을 두었던 것이다.
출생의 비밀은 그것을 다루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대개 사랑의 장애물로 작용한다. 열심히 사랑하던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슬픈 이별을 해야만 한다. <겨울연가>의 설정도 마찬가지다. 너무나 사랑하지만 둘은 결국 헤어져야만 한다. <늑대의 유혹>도 그 틀에서 한발도 벗어나지 못한다.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면, 태성과 한경이 남매라는 것을 영화의 중간 정도에서 귀띔해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둘이 사랑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해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한다.
에이즈로 은성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설정은 <그 놈은 멋있었다>에서 가장 큰 모티프이다. 은성이 부모 없이 친척집에 살고 있는 것도, 그가 어린 시절 상처를 받아 사람들과 원만하게 관계하지 못하는 것도, 그래서 그가 탈선의 길로 간 것도 모두 아버지가 에이즈로 죽었다는 설정에서 기인한다. 이런 비밀 때문에 그는 스스로 사실을 숨기면서 혼자 살아가려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텍스트로 다룬 두 편 모두 ‘뿌리 뽑힌 가족’이 배경이라는 점이다. 행복하고 단란한 가족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한번쯤 등장할 만한 유복한 가정의 모범생이라는 설정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존재는 이미 사라졌고 어머니도 미미하게 등장할 뿐이다. 아이들은 친척집에서 자라거나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난다.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자력할 수 있으면 의지할 곳 없이 떠돌고 만다. 10대가 직접 쓴 원작에서 이런 설정이 등장한다는 것은 그들이 가정을 바라보는 시선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귀여니 자신의 환경이 불우했기 때문에 이런 설정을 했다고 할 수 있지만, 수많은 10대들이 두 작품에 열광했고 그것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도 열광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분명 10대들의 공감을 받은 설정이라는 이해가 가능하다. 결국 10대들이 이런 설정에 공감했다는 것은 그들이 느끼는 가정이 뿌리 뽑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 귀여니 원작의 영화에서 드러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두 편 모두 어두운 죽음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늑대의 유혹>에서 한경과 태성의 아버지는 죽었는데, 결국 태성도 죽는다. <그 놈은 멋있었다>에서도 은성의 아버지는 죽었고, 은성이 괴로워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도 자신과 놀던 친구가 익사했다는 죄의식 때문이다. 이렇게 두 편 모두에서 죽음을 그리고 있고, 그 죽음 때문에 주인공들은 괴로워한다.
영화에서 죽음은 정서를 극대화시킬 때 자주 등장한다. 죽음이라는 장벽을 통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슬픔을 고통스럽게 보여주면서 관객들의 동화를 이끌어낸다. 또는 갑작스런 죽음을 통해 영화의 결말을 유도한기도 한다. 그런데 <늑대의 유혹>에서는 약간 다르게 사용된다. 쉽게 예측하지 못한, 태성을 죽게 하는 초강수의 설정을 둠으로써,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괴로워했던 태성의 슬픔에 동화되었던 관객들을 더욱 슬프게 만든다. 그런데 이런 슬픔이 더욱 극대화되는 것은 태성이 죽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한경이 알게 된다는 것이다. 해피엔딩으로 끝맺는 <그 놈은 멋있었다>보다 이중의 슬픔을 지닌 <늑대의 유혹>의 여운이 긴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이 부분에서 흥미로운 것은 아버지가 모두 죽었다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었을 때 이미 주인공의 아버지는 죽었다. 그것도 주인공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죽었다. 태성에게 아버지는 기다리지만 오지 않는 존재이고, 은성에게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게 만든 원인의 제공자였다. 결국 태성과 은성이 방탕한 고교생활을 했던 근본적인 원인을 아버지가 제공한 것이다. 여기서 뿌리 뽑힌 가족의 정서와 아버지의 죽음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정이 파괴된 것은 아버지의 외도와 아버지의 에이즈 때문이었다. 아버지로 인한 충격 때문에 남자 주인공은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거리를 떠돌게 되었다. 그들이 어리숙하지만 착한 여학생에게 깊은 애정을 표시하는 것도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를 그녀들이 달래주었기 때문이다. <늑대의 유혹>에서 태성이 한경에게 애정을 느끼는 것은 어린 시절 자신을 알아준 누나의 애정을 느꼈기 때문이고, <그 놈은 멋있었다>에서 은성이 예원에게 애정을 느낀 것도 유치원에서 남들이 다 피하는 은성의 손을 예원이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4. 약간의 성공, 많은 한계
다시 거론하자면, 귀여니의 인터넷 소설이 지니는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은 10대가 스스로 창작한 것을 10대가 열광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문화 생산의 주체와 소비자가 공히 10대인, 명실상부한 10대의 문화였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기성세대와는 다른 형식의 소설을 통해 완전한 하위문화를 만들었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하위문화가 진정한 하위문화가 되려면 기성세대의 문화와는 다른 변별점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통해 보수화된 기성세대의 문화에 새로운 신선한 흐름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귀여니 원작의 영화는 그리 후한 점수를 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영화에서 그려지는 모습이 기성 문화와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기성 문화에서 숱하게 사용했던 출생의 비밀이라는 설정, 여성들의 영원한 꿈인 신데렐라 콤플렉스, 남성과 여성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거친 남성과 착한 여성의 연애 등은 이미 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었던 요소들이다. 이런 설정은 굳이 10대 문화가 아니더라도 이미 넘쳐나도록 존재하는 기성 문화이다. 결국 귀여니 역시 이런 기성 문화의 세례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귀여니 원작의 두 영화가 기성 문화의 방식만 따른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두 편에는 입시지옥의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인물들의 몸부림이 있다. 10대의 시각에서 그린 뿌리 뽑힌 가정이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기성세대의 죽음을 통해 그 책임을 기성세대에 넘기고 있다. 즉 자신들의 고통이 기성세대에 있다고 항변하는 것이다. 그것이 10대의 감수성으로 진솔하게 그려졌다.
다시 여기서 문제 삼아야 할 것이 있다. 10대가 쓴 원작을 기성세대가 영화화하면서 그들의 시각으로 많은 부분 각색했다는 것이다. 가령, <그 놈은 멋있었다>의 엔딩을 보면, 원작에서는 몇 년 후 둘이 동거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영화에서는 둘이 다시 만나는, 환상적인 장면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서늘한 동거로 끝을 맺은 귀여니의 현실 인식을 기성세대인 감독이 낭만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흔히 인터넷 소설을 영화로 옮길 때 구성이 산만하다는 이유로 후반부에 많은 각색을 한다. 문제는 이렇게 됨으로써 10대가 생산하고 향유했던 인터넷 소설의 특징이 기성세대의 손에 의해 바뀐다는 것이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려면 10대의 이야기를 10대의 손으로 제작해야 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물론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제작비가 투입되는 영화에서는 결국 기성세대인 제작자의 입김이 작용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인터넷 소설처럼 주류 영화판에서 하위문화의 가능성을 찾기는 어렵다. 귀여니 소설을 영화화한 두 편에서도 하위문화의 가능성을 찾기 어려운 것은, 귀여니 자신의 한계도 있지만, 영화 매체 자체의 한계도 있다. 영화에서 하위문화를 꿈꾸는 것이 근본적으로 어려운데, 요즘 한국영화계에서는 더욱 어려워지는 것 같다. 아니 아예 불가능한 것을 꿈꾸고 있는 것인가. ㅠ_ㅠ.


강성률․
1970년 경북 안동 출생
․2000년 ≪민족예술≫에 영화평을 쓰면서 평론 활동 시작
․호서대, 한국기술교대 강사․본지 편집위원

추천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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