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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신작단편/이재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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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단편|
키스
이 재 웅
영태는 침대 시트 위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는 지금 이불 안의 따뜻한 온기와 달콤함에 취해 있었다. 동시에 삭막하고 우울한 기분에 빠져 있기도 했다. 햇볕이 창의 커튼 사이를 헤집고 들어와 그의 뺨에 어렸다. 커튼이 흔들릴 때마다 햇볕도 흔들렸다. 그는 그것이 간지러워 즐겁기도 했고, 귀찮기도 했다.
옆자리가 부스럭거렸다. 연희가 잠에서 깬 것이었다. 그는 실눈을 뜨고 무엇엔가 홀린 듯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연희는 몸을 뒤척였다. 이내 잠잠해졌다.
“지금 몇 시야?”
연희는 물었다. 본래부터 허스키한 목소리가 더 무거워져 있었다. 영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손끝 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잠시 후 연희는 몸을 돌려 한 팔로 영태의 가슴을 포옹하듯이 껴안았다. 그리고 옹알이하듯 말했다.
“개새끼, 방구 뀌는 개새끼. 난 피자가 좋아, 술도 좋아. 호빵. 덜커덕 끼룩끼룩.”
그녀는 가끔 너무도 평온하고 행복해서 오히려 그것을 떨쳐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때 그런 행동을 하곤 했다.
그녀는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 잠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해봐.”
영태는 잠자코 있었다.
“너도 해봐. 빨리.”
그녀는 영태의 어깨를 흔들었다. 영태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비 온다. 번개치구.”
그러자 연희는 웃었다. 그리고 엉성한 악당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말했다.
“널 구워 먹어 버릴 테다.”
“젖꼭지.”
영태는 말했다.
“네 꼬추.”
연희는 말했다.
“피아노 소리.”
영태는 다시 말했다.
“비명소리.”
연희도 말했다.
“삐뽀삐뽀.”
“동그라미.”
“텔레비전.”
“루돌프 사슴 코.”
연희가 그렇게 말해놓고 격렬하게 웃었다. 그리고 행복에 겨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영태의 상체를 꼭 껴안았다. 영태는 답답함을 느꼈다. 동시에 그녀의 젖가슴이 그의 옆구리에 닿자 감미롭고 따뜻한 성욕에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더 해봐.”
연희는 속삭였다. 영태는 침묵했다.
“더 해봐.”
연희는 칭얼댔다. 아기 같았다. 그것은 그녀의 애교였다. 영태는 그것이 역겹기도 했고 서글프기도 했다. 그의 머리와 가슴 속에는 모래바람이 부는 듯했다. 뭔가가 끊임없이 서걱거렸다. 그는 딱딱하고 뜨거운 관 속에 누워 있는 것만 같았다. 몸을 뒤척였다. 옆으로 누웠다. 연희는 이제 그의 등에 달라붙었다. 거대한 거머리 같았다.
“나는 네가 좋아, 나는 네가 좋아, 나는 네가 좋아, 나는 네가 좋아.”
연희는 등 뒤에서 그를 껴안은 채 노래 부르듯 속삭였다. 영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바람을 탄 깃털처럼 붕 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성은 이제 막 제조된 수술용 메스처럼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는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실 한 가닥에 의지해 높은 빌딩에 매달려 있는 기분이었다.
“무슨 일 있어?”
연희는 그의 등에 몸을 더 밀착하며 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 순간 등 뒤의 연희의 육체가 차차로 차가워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다시 뜨거워졌다. 그녀의 손이 사타구니 사이로 들어왔다. 그의 성기를 감싸듯이 쥐었다. 만지작거렸다. 영태는 거대한 해머가 목덜미를 내려치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폭발했다. 그는 이불을 신경질적으로 걷어 제꼈다. 벌거벗은 채 일어서서 둥근 테이블 앞으로 갔다. 의자는 넘어져 있었다. 그는 의자를 바로 세웠다. 의자에 앉았다. 연희가 조금 놀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그녀는 물었다. 영태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고 그저 테이블 위의 담배갑만 뒤적였다. 그는 담배를 뽑아 태웠다.
연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냉정한 이성을 되찾고 차가워진 음성으로 말했다.
“나도 담배 좀 줄래?”
영태는 테이블 위에 놓여진 담배 갑에서 다시 담배를 꺼냈다.
“불도 붙여 줘.”
연희는 다시 말했다.
영태는 그렇게 했다. 그 다음 그것을 연희에게 가져다주었다. 다시 의자로 돌아왔다. 연희는 이불로 몸을 감싸고 드러누워 담배를 피웠다. 잠시 두 사람은 말을 잊었다.
영태가 연희를 만난 것은 삼년 전이었다. 그때 두 사람은 모두 고등학생이었고, 집에서 가출한 상태였다. 연희는 친구의 작은 원룸에 얹혀 지내고 있었고, 영태는 도시 외곽의 버려진 집에서 살았다. 두 사람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처음 만났다. 영태가 겨우 자리를 얻어 출근한 첫날, 연희도 출근했던 것이다.
처음 며칠간은 심드렁한 사이였다. 그러다가 일을 끝내고 술자리를 갖는 시간이 조금씩 많아졌다. 술자리 멤버는 거의 동일했다. 연희, 연희의 친구, 그리고 영태였다. 아주 가끔 광성이라는 친구가 함께하기도 했다. 그는 연희 친구의 남자친구였다.
그들은 돈이 좀 넉넉할 때에는 신분을 속이고 술집에서 술을 마시곤 했지만, 그럴 사정이 못 될 때에는 공원이나 연희 친구의 원룸에서 마셨다. 때때로 길거리에서도 마셨다. 그러던 어느 날, 연희는 영태에게 말했다.
“그 년이 나를 못살게 굴기 시작했어.”
“왜?”
영태는 물었다.
“내가 딱 한 달만 지낸다고 해놓고선, 석 달 동안 꼼짝하지 않으니까.”
그날 두 사람은 싸구려 여인숙에서 함께 잤다. 그리고 다음 날 연희는 작은 짐가방을 들고 영태의 집 앞에 나타났다.
“당분간만 지내게 해줘. 돈을 벌면 내 방을 구해서 나갈 테니까.”
영태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두 사람은 열여덟 살 늦겨울에 동거를 시작했다.
“무슨 생각하고 있어?”
연희는 물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어.”
영태는 말했다.
“넌 벌써 담배를 두 대째 피우고 있어. 그건 알아?”
연희는 다시 물었다. 그제야 영태는 손에 쥔 담배를 살폈다. 그것은 앞부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재떨이의 구겨진 담배꽁초에서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영태는 손에 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이리 와.”
연희는 이불을 펼치며 말했다.
“이 방은 너무 추워. 밖은 더 춥구.”
하지만 영태는 그녀 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그저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나 이번 주부터는 일을 하게 될 것 같아.”
잠시 후, 연희는 다시 이불로 몸을 꽁꽁 감싸며 말했다.
“진숙이 언니 있지? 그 언니가 자기 일하는 술집에 내 서빙 자리를 알아봐 준댔어.”
“잘됐구나. 그거 잘 됐어.”
영태는 읊조리듯이 말했다.
“일을 하게 되면, 이방 보일러에 기름부터 사서 넣자. 쌀도 좀 사고, 반찬도 좀 사고. 아마 가불도 될 거야. 진숙 언니 말이 그 집 술집 주인이 꽤 사람이 좋대.”
그녀는 영태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물었다.
“거긴 안 추워?”
“견딜 만해.”
“난 추워. 저기 전기난로 좀 이쪽으로 가져다 줘.”
영태는 일어섰다. 그리고 밤새 한쪽에 세워놓은 전기난로를 침대 시트 옆까지 가져다주었다. 그 다음에는 옷을 입었다.
“어디 갈 거야?”
연희는 물었다.
“컵라면 사러. 물도 좀 사고.”
영태는 대답했다. 그리고 점퍼를 걸친 다음 현관 쪽으로 갔다. 밖으로 나섰다. 이웃의 집들은 흰 눈에 덮여 있었다. 햇볕은 눈 위에서 눈부시게 부서졌다. 거리는 사람들의 발자국과 자동차들의 타이어 자국으로 지저분했다. 그는 걸었다. 바람은 없었다. 가끔 작은 새들이 지저귀면서 깡마른 가로수와 전신주로 옮겨 다녔다. 그는 모퉁이를 돌았다. 영태가 월세 들어 사는 집의 주인 아낙이 팔짱을 끼고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다. 영태는 두 달째 방세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좁은 벽 틈으로 숨어들었다. 기다렸다. 주인 아낙은 미끄러운 길에 대해 투덜거리면서 지나쳐갔다. 영태는 벽 틈에서 나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언덕을 걸어 올라갔다. 언덕 끝에 섰을 때 시야가 확 트이고, 눈에 덮인 세상이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눈에 반사된 햇볕 때문에 눈이 아팠다. 영태는 놀라운 충격에 휩싸인 듯 한동안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평온하면서도 잔인한 무엇인가가 그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구멍가게가 멀리 보였다. 그는 그곳으로 갔다.
최씨가 구멍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최씨는 예순이 넘은 늙은 홀아비였다. 영태는 넉 달 전 이사 온 이후 줄곧 이 구멍가게를 이용해 왔고 두 사람은 인사 정도를 나누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최씨는 팔 없는 털조끼를 입고 낡은 나무 책상 앞에 앉아 담배를 태우며 가게 앞 큰 길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큰길 위로 가끔 자동차들이 지나쳐 다녔다.
영태는 곧장 진열대 사이로 갔다. 컵라면 두 개를 골랐다. 냉동고 앞으로 갔다. 생수를 하나 들어올렸다. 그는 그것들을 들고 다시 최씨 앞으로 갔다. 최씨는 그제야 자세를 바로 잡고 영태를 올려보았다. 그는 잠시 놀란 표정이 되어 물었다.
“무슨 일이 있나?”
“아니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
영태는 대답했다.
“자네는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영태는 얼굴을 훔쳤다. 손바닥에 물기가 배어났다.
“햇볕 때문이에요. 눈에 반사된 햇볕은 너무 강렬하니까요.”
영태는 말했다.
“게다가 날씨도 너무 추워요. 추운 날에는 눈물이 나기 마련이에요.”
최씨는 검은 비닐봉지에 영태가 가져온 물품들을 담았다. 그것을 건네주며 그는 말했다.
“그렇지, 눈물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지.”
영태는 말없이 돈을 건넸다. 거스름돈을 받았다. 가게를 나섰다. 걸어 내려왔던 언덕길을 다시 되짚어 걸어올라 갔다. 이제 바람이 언덕 끝에서 불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영태는 고개를 숙였다. 언덕을 넘어섰다. 그때 어디에선가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영태는 멈춰 섰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택가는 너무 고요했고, 하늘에서는 노랗고 따뜻한 햇볕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정말 비명소리를 들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바람이 만들어낸 환청이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는 계단을 올라 현관문 앞에 섰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냄새들 ― 구린내, 담배 냄새, 흐물흐물한 생선이 타는 냄새, 그리고 땀 냄새와 썩어가는 세월의 냄새가 코끝에 어렸다. 영태는 현관에 잠시 서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낡고 조잡한 가구들, 방구석에 몰려 있는 며칠씩 반복해 신은 양말들, 그리고 속옷들. 먹다 남긴 인스턴트식품들은 방치된 채 썩어가고 있었다. 옷들은 벽에 힘을 잃은 유령들처럼 걸쳐있었다. 식기 위에 걸레가 담겨 있었고, 한 달 이상 손을 대지 않은 주방의 싱크대에는 더러운 그릇들이 곧 허물어질 듯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연희는 이불로 몸을 감싼 채 길거리에서 주워온 침대 시트 위에 배를 깔고 앉아 오래된 의류잡지를 들추고 있었다. 영태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심한 혐오감에 사로잡혔다. 그의 분노는 가슴 밑바닥에서 계속 폭발하고 있었고, 그는 그것을 억제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거기서 뭐해?”
연희가 고개를 돌려 묻고 있었다. 그제야 영태는 신발을 벗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곧장 전기포트에 물을 담아 콘센트에 꽂아두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는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어지고 어색해져서 쉽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오늘 왜 그래?”
연희가 물었다.
“왜?”
영태가 물었다.
“왜냐구? 그야 너답지 않으니까 그렇지. 넌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행동하잖아.”
“그렇지 않아. 난 아무 문제없어. 단지 몸이 좀 피곤할 뿐이야. 그건 아마도 잠을 잘 못 잤기 때문일 거야. 난 깊이 잠들지 못했어.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사람은 깊게 잠들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는 거야.”
영태는 대답했다. 연희는 침묵했다. 잠시 후 그녀는 말했다.
“이리 와. 내가 사랑해 줄께.”
영태는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결국 그녀에게로 갔다. 그녀 옆에 조용히 누웠다. 연희가 그런 그를 이불로 감쌌다. 영태는 부드러운 피곤과 함께 어떤 고통을 느꼈다.
두 사람이 동거를 시작한 이후, 연희는 여러 번 가출을 했었다.
처음 가출을 했을 때 그녀는 일주일 안에 돌아오겠다는 쪽지를 남겼었다. 영태는 그 말을 믿지도 않으면서 기다렸다. 일주일이 지나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영태는 한 달 후 시내의 거리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예전 그녀의 여자친구와 함께 있었다.
“곧 돌아갈게.”
그녀는 말했다. 영태는 다시 일주일을 기다렸다.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영태는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녀의 여자 친구 집에서 광성이와 벌거벗은 체 함께 누워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여자 친구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가고 없었다.
“돌아가자.”
영태는 말했다. 그녀는 옷을 차려 입었고 영태를 뒤따랐다. 두 사람은 걷고, 시내버스를 타고, 다시 걸어 집에 돌아왔다. 방안에 들어서자 연희가 물었다.
“날 가만두지 않을 거지?”
영태는 말했다.
“응, 나는 너를 때릴 거야.”
그는 정말로 그녀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는 울면서 소리쳤다.
“나쁜 새끼, 그래 실컷 때려! 이게 마지막일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넉 달을 그와 함께 보냈다. 그 넉 달 동안 영태는 이제 그녀가 그의 곁에 영원히 머무르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넉 달이 지난 어느 날 그녀는 다시 그를 떠났다. 이번에는 쪽지도 남기지 않았다. 영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가 그녀를 구속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와 섹스를 나누었지만 사랑을 맹세한 것도 아니었고, 미래를 약속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자유로울 권리가 있었다. 그것은 영태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영태는 그녀에 대해 어떠한 확신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녀는 그가 함께하기에 벅찬 상대였다. 그녀는 꽤나 미인인데다가 영원히 훼손되지 않을 듯한 명랑함과 애교가 있었다. 대단히 사치스럽기도 했고, 인생에 대한 어떠한 확실성도 없으면서 하루하루를 무척 충만하게 살아내는 힘도 지니고 있었다. 영태는 그런 그녀 앞에서 주눅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는 그녀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방황했다. 술을 마셨다. 누군가와 싸워 경찰서에 가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는 그녀를 잊을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잊었다. 그는 그녀와의 시간을 완전히 지워버리기 위해 다른 도시로 이사를 떠났다. 영세한 목재소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런데 그 해 가을, 동료들과 함께 간 술집에서 그는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홀 서빙을 하고 있었다. 영태는 그녀에게서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고, 그녀도 그런 듯했다. 두 사람은 평범한 손님과 종업원처럼 행동했다. 그 자리에 있던 동료들조차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 채지 못했다. 영태는 태연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날 밤, 그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이튿날 그는 다시 그 술집에 찾아갔다. 이번에는 혼자였다. 그녀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난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아. 나랑 함께 갈래?”
그는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카운터에 있는 술집 주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이 내 애인이야.”
그 술집 주인은 마흔은 족히 돼 보였다.
그녀는 술을 가져다주었다. 영태는 술을 마셨다. 그리고 한 시간 후 술집을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무엇이든 때려 부수고 싶었지만, 집안에 부술만한 물건이 별로 없어 그러지 못했다. 그는 잠자리에서 뒤척이다가 새벽녘에 밖에 나갔고, 공중전화부스 하나를 부셔놓았다. 그는 집에 돌아오면서 다시는 그녀를 찾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다음 날 그는 그 술집에 다시 갔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렇게 했다. 이제 그는 밤마다 그 술집에 갔고, 연희가 술을 가져다주면 얌전히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연희가 그에게 말했다.
“네가 살고 있는 집 주소를 알려줘.”
영태는 그렇게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그녀는 그의 집을 찾아왔다. 무척 고급스런 옷을 입고 있었고, 양손에는 큰 트렁크 가방을 두 개나 들고 있었다.
“그 자식이 나를 차버렸어.”
그날 밤, 영태는 그녀의 배위에서 헐떡거렸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녀는 말했다.
“병원에 같이 가줘.”
“어디가 아파?”
영태는 물었다.
“난 아기를 가졌어.”
“난 항상 콘돔을 쓰거나 질외사정을 했잖아.”
“그건 네 아기가 아니야. 그 남자의 아기야.”
영태는 온몸이 차갑게 굳어버리는 듯했다.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그는 매정하게 말했다.
“그럼, 그건 네가 알아서 해. 내 아이도 아니잖아.”
“하지만 누군가가 수술동의서를 써야 해. 게다가 난 겁이 나. 네가 함께 가주면 훨씬 덜할 거야.”
결국 영태는 그녀를 따라갔다. 도시 외곽에 있는 작고 낡은 산부인과였다. 깡마르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늙은 여의사가 그들을 맞이했다. 간호원은 두 명이었다. 대기실 한쪽으로 긴 복도가 있었는데, 복도 양편으로 수술실과 환자실, 그리고 휴게실이 있었다. 늙은 여의사는 연희를 데리고 수술실로 갔다. 영태는 기다렸다. 한참 후에 여의사가 나왔다. 그녀는 영태를 원장실로 불렀다. 영태는 갔다. 그녀는 몇 가지 조언을 해줬고, 약 처방전을 써줬다.
“삼십분 정도 있어야 움직일 수 있을 거예요.”
영태는 다시 대기실로 나왔다. 다시 연희를 기다렸다. 한 시간이 다 되어서야 연희는 긴 복도를 걸어 나왔다. 무척 지친 듯했고, 현기증을 느끼는 듯 조금씩 비틀거렸다. 영태는 그녀를 업고 산부인과를 빠져나왔다. 거리로 나섰다.
“토하고 싶어.”
그녀가 말했다. 영태는 그녀를 길에 내려주었다. 그녀는 길거리에 쪼그리고 앉아 헛구역질을 했다. 가을 오후의 붉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것도 토하지 못했다. 영태는 다시 그녀를 업었다. 그녀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말했다.
“다시는 너를 떠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육 개월 후 그녀는 다시 그의 곁을 떠났다.
영태는 침착했다. 그는 오랫동안 그 일을 예상해 왔던 것만 같았다. 그녀 때문에 달라질 것은 없었다. 무엇인가 새로운 계획을 세우거나 각오를 다질 필요도 없었고, 이사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그녀가 남기고 간 물건들, 사용한 칫솔, 약간의 생리대, 몸을 감싸던 목욕타월들과 속옷 따위를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는 그것들을 치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매일 목재소에 출근했고, 밤이면 연희가 근무했던 술집에 가서 술을 마셨다. 이미 그곳에는 연희보다 어린 아가씨가 홀 서빙을 하고 있었다. 영태는 어느 날 새벽, 문을 닫고 퇴근하는 술집 주인의 뒤통수를 돌로 내려쳤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연희가 영태 앞에 나타났다.
“난 네가 이사를 가버렸으면 어떻게 하나 싶었어.”
연희는 현관문 앞에 서서 말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이미 겨울의 태양이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햇볕에 드러난 연희의 얼굴은 몰라보게 초췌했다. 몸은 살이 부푼 듯이 올라 있었다. 얇은 스커트 밑으로 드러난 다리는 멍투성이였다. 그녀는 십년 정도는 더 늙어보였다. 영태는 그렇게 변해버린 그녀의 모습이 놀랍기도 했고 불쌍하기도 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는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연희는 그의 곁을 지나쳐 방안으로 갔다. 테이블 앞에 앉았다. 테이블에 엎드려 어깨와 등을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너무도 익숙해진 몸짓으로 사랑을 나누었다. 영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연희도 말하지 않았다.
연희는 차츰 활기를 되찾아갔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듯한 특유의 명랑함으로 웃고 떠들고 애교를 떨었다. 그녀는 언젠가 자신의 계획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녀와 영태가 벌어들여야 할 돈, 구입해야 할 집과 자동차, 낳고 길러야 할 자녀들의 수, 말년을 위한 작은 가게 등등. 영태는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것이 즐겁기도 했지만 이해할 수 없게도 화가 나기도 했다. 그는 그녀가 들려주는 미래의 계획이라는 것이 조금도 실감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느 날에는 그 반대의 심정상태가 되어서 눈물이 날 정도로 들뜬 기분이 되거나 깊은 안식을 느끼기도 했다. 그때의 그는 길을 잃은 채 아늑하고 따뜻하며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운 산 속을 거닐고 있는 기분이었다.
“지금 자고 있는 거야?”
연희는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물었다. 영태는 똑바로 누운 채 천천히 눈을 떴다. 연희가 그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불쾌하고 징그럽게 느껴졌다. 한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밀쳐내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지금 또 무슨 생각을 했지?”
연희는 물었다.
“아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어.”
영태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연희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불안이 눈가에 어렸다. 영태는 어떤 슬픔에 잠겨서 그녀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넌 너무 지쳐 보여.”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턱 밑에 키스를 하더니 한 손으로 그의 가슴을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바닥이 휩쓸고 간 자리마다 고통의 열기가 피어올랐다. 쾌락의 소름이 끼쳤다. 그녀의 손은 더 아래로 내려갔다. 갈비뼈 밑을 지나 배로, 그리고 배꼽 밑으로 내려갔다. 영태는 몸이 뜨거워졌다. 그녀의 손이 성기 주변을 맴돌았다. 영태는 증오와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 환멸로 가득 찬 욕탕 속에 몸을 누이는 기분이었다. 그는 꽥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는 곧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고, 몸을 돌려 그녀를 침대 시트에 처박듯이 내리눌렀다. 그녀가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넌 너무 거칠어.”
영태는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내려다보며 한 팔로 지그시 그녀의 가슴을 눌렀다.
“숨이 막혀. 손목도 아파.”
그녀가 여전히 웃으며 콧소리를 냈다. 그녀의 두 눈은 어떤 기대에 들떠 있었다. 손목을 빼내려 했다. 영태는 그녀의 손목을 더 단단히 움켜쥐었다. 가슴을 점점 더 세차게 내리 눌렀다. 그의 두 눈은 잔인한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었다. 연희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영태의 두 눈 속에서 그녀가 이제껏 보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찾아보려 했다. 이제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지고 대신 어떤 공포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핏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발버둥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영태는 더욱 더 그녀를 강하게 옥죄었다. 그녀는 발을 바둥거렸다. 아직 자유로운 또 다른 손으로 영태의 옆구리를 밀치려 했다. 고함을 내지르려 했다. 영태는 이제 가슴을 누르던 손으로 그녀의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고함은 신음소리가 되었다. 그녀는 이제 절대적인 공포에 직면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거친 숨을 내쉬려 했다. 그게 여의치 않자 도리질을 하려 했다. 하지만 영태는 더욱 더 강하게 그녀를 밀어붙였다. 그녀는 이제 영태가 원하는 바를 완전히 알아챈 듯했다.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그제야 영태는 두 손을 거뒀다. 그녀는 영태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개새끼.”
그녀는 울면서 말했다.
영태가 그녀의 뺨을 때렸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 시작하자.”
“꺼져버려, 이 개새끼야.”
그녀는 눈물을 폭포처럼 쏟아내며 말했다. 얼굴은 곧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었다.
“사랑해, 이제 영원히 내 곁을 떠나지 마.”
영태는 말했다.
“꺼져! 꺼져!”
연희는 소리쳤다.
영태는 다시 그녀의 뺨을 때렸다. 그녀가 발작적으로 손과 발로 영태의 몸을 두드렸다. 영태는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어갔다. 강제로 키스를 했다. 연희는 더욱 더 발버둥쳤고, 그를 침대 시트 밖으로 밀어냈다. 온갖 욕설을 비명소리처럼 퍼부어댔다. 영태는 일어났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연희는 여전히 욕설을 퍼부어댔다. 영태는 그녀의 욕설에 떠밀리듯 밖으로 나섰다. 겨울해는 높은 빌딩 숲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구름도, 바람도 없었다. 눈 위에서 반사된 햇볕 때문에 영태는 눈을 잘 뜰 수 없었다. 그의 가슴은 텅 비어버린 듯했다. 영태는 현기증에 휩싸인 기분으로 계단을 하나 둘 밟아 대문 앞까지 내려왔다. 대문을 열고 거리로 나섰다. 그는 이제 연희가 그의 곁을 떠날 것이며,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사랑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고, 그가 누군가를 사랑하지도 사랑할 수도 없는 존재라는 것도 알았다. 그는 한없이 펼쳐진 눈길을 따라 자꾸만 걸어갔다.
이재웅․
2001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장편소설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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