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0호 젊은시인 집중조명/류외향
페이지 정보

본문
류외향
난생을 만나다
그날 바다의 이름을 가진 도시가 수런거렸어
뉴올리언스를 방문한 카트리나가 그곳에서 오래 묵고 있을 때였지
해안선이 와글와글 몰려오고
방파제 위로 바다의 양수가 쏟아졌어
남아프리카의 뜨거운 해안에는 펭귄이 산다는데
이곳에도 그들이 왔으면 좋겠어
빙하가 녹고 바닷물이 넘치고 넘쳐
이 작은 별의 분노와 울음을 타고 너울너울 건너왔으면 좋겠어
길이 너무 멀면 바다거북의 등을 타고 와도 좋겠어
거북과 함께 눌러 살며
난생의 설화를 들려주었으면 좋겠어
그런 날이면 바다가 황금의 밀밭처럼 고요해지고
파도는 이따금 잠투정하는 아이처럼 몸 뒤척이며
수평선에 걸린 배를 슬쩍 들어올려 저 바깥으로 떨어뜨리겠지
그런 날이면 수십억 겹의 세월을 깨고 나온 새끼들이
이 해안을 새까맣게 뒤덮겠지
근원을 찾아 떠나는 그들의 여행에
나 잠시 동행할 수도 있겠지
그런 날이면 파도가 씻고 간 모래톱에서
미처 껍질을 깨지 못한 알 하나 발견할 수 있겠지
그 알 하나 품어볼 수 있겠지
내 품 안에서 일어나는 균열로 아득해지다가
끝내 난생의 비밀 엿볼 수 있겠지
껍질 밖으로 순결한 배꼽 내민 당신을
나, 그때 만날 수 있겠지
어미도 아비도 없는 당신을
그녀와 물푸레나무
어둠 속에서 알몸의 여자가 튀어나왔다 알몸의 진원지가 승합차거나 여인숙이거나 상관없다 어둠을 가장한 스크린일 수도 있다 그것을 퍼포먼스라고 하기엔 거리는 너무 건조했고 과속방지턱에서 쿨렁거리는 자동차가 알몸의 그녀와 한통속이라는 건 믿기 어려운 소품이었다 그녀는 색깔이 지워진 채 거리를 달렸다 까만 머리칼과 까만 유두와 까만 거웃이 어둠을 빨아들이자 푸른 멍자국이 소름처럼 돋아 오르며 진저리쳤다 맨발 아래에서 파열하는 시간이 척추를 타고 올라와 귀 언저리에서 바람 소리로 흩어졌다 행인들은 모두 그녀를 목격했으나 아무도 그녀와 연루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24시간 편의점 앞을 달려갈 때였다 바코드판독기가 단말마를 내지르며 측정불능의 숫자들을 쏟아놓았고 대형 유리에 제 뿌리를 들고 뛰어가는 한 그루 나무의 실루엣이 어리다 사라졌다
그녀의 알몸에 부딪쳐
죽고
죽고
죽은
시간들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어둠 속에서 알몸의 여자가 튀어나왔다 다시,라고 말할 수 없다 알몸의 진원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는 흐르고 흘러 백두대간 골 깊은 기슭을 적시는 어느 강 상류에 이르렀다 그녀는 검은 물소리 위를 걸었고 첩첩이 둘러싸인 산등성이의 무한 어둠 속을 걸었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뻑뻑한 시간은 그러나 따스했다 그녀는 마음을 뉘였다 한 그루 물푸레나무가 뿌리를 내밀었다 뿌리 끝마다 달린 눈들이 그녀의 알몸과 마주쳤다 오래 숨구멍을 닫았던 속살들이 싱싱한 대기를 향해 발기했다 뿌리는 그녀를 어루만지다 온몸을 휘감았다 분홍빛 유두가 활짝 열렸다 사위가 서서히 밝아졌다 빛의 진원지는 그녀였다 그녀는 맨발로 일어나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몸속에서 푸른 물빛이 풀어져 나왔다 캄캄한 산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산중의 모든 것은 그녀와 연루되어 있었다 당신도, 그러했다
몽유
―길 없는 길
작열하는 태양쯤이라고 해 두자
어디선가 맹렬하게 달려드는 빛무리가 있었고
사람의 체취가 사라진 들판이 있었고
길 없는 길 앞에서 손톱을 뜯으며 내가 있었고
선한 눈매를 잃은 식물이 티벳 고원의 순례자처럼
땅을 기어가는 동안에도 바람은 불었다
오체투지도 감동이 없는 계절이었다
빛무리와 엉키고 설켜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체위로 불어오는 바람만이
수억만 년 길러온 머리카락을 지상에 드리우며
앙상한 늑골의 흔적을 남길 뿐이었다
길 없는 길은 나를 어디에도 내려놓지 않았다
계속 나아가라는 뜻인지 그만 멈추라는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전언이 세상에 가득했고
손톱 밑에 가득 박힌 시간의 알갱이를 세며 나는
날개를 떼어놓고 가버린 새들의 근황이 문득 궁금해졌다
너는 어쩌자고 여기 왔느냐
손때조차 풍화되어 버린 낡은 지폐 같은 이파리들이 물었다
짐승처럼 잠들고 싶었다
헐거운 육신을 배반하고 오체투지의 이파리들 사이에서
들쥐처럼 잠들고 싶었다
검붉은 핏빛 태생을 배반하고 오체투지의 뿌리 아래에서
곰처럼 잠들고 싶었다 그 옛날처럼
다시는 깨지 않아도 좋을 잠 속에 오래 누워 있고 싶었다
몽유
―화염
아지랑이를 보았던 것이다
저 묵언의 들판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슬리퍼를 신은 채 걸어 나갔던 까닭은
열대의 스콜이 지나간 듯 대지가 일순간
제 뜨거움을 밀어 올렸던 것이다
내가 숨통을 틀어쥐고 걸어 나갔던 까닭은
그리고 그곳에서 화염을 보았던 것이다
아무도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들판
불길은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몇 올 남지 않은 음모 같은 풀들이
가까스로 팔을 뻗어 제 종족에게 불길을 건넸던 것이다
개들은 스스로 짝짓는 법을 잊고 제 종족의
형형색색의 육질을 씹으며 비대해져 갔다
사람들은 하천에 사육된 물고기를 풀어놓은 뒤
천렵에 나서며 모두 빨리 늙고 싶어했다
전생을 잊어버리지 않는 건
식물이라는 종족뿐이었던 것이다
빙하기 이전에 사라진 고대 인류가 그리운 날이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들의 언어가 그리운 날이었다
스스로 제 몸에 불을 지른 그들과 나
사이에 주고받을 문답이 없었다
나는 들판의 신기루일 뿐이었다
뒷모습
그의 어깨는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고집스런 외줄기 등뼈를 따라 올라가면
능선이 양 옆으로 뻗어 있다
오른쪽은 부드럽고 실팍하나
왼쪽은 가파르고 헐벗었다
그의 기울어진 뒷모습을
사랑했다가 사랑하지 않았다가
다시 사랑하게 되는 동안
눈 속에 티끌이 들어가 잠시 감았다 뜨니
그는 무릎에 머리를 묻고 있었다
다시는 일어나지 않겠다는 완강함이
불거진 어깨뼈에 깨알처럼 박혀 있었다
허리가 보이지 않았다
둔부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허리가 없이
무릎에 얹은 두 팔의 힘으로
세상을 견디고 있었다
그를 만지면 고생대 화석의 냄새가 묻어날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나는 그의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온통 뒷모습뿐이었다
그의 기울어진 어깨에 박힌 슬픔을
닦아내는 일은 너무 늦어 버렸다
살 한점 붙어 있지 않은 그의 갈비뼈가
하늘에 두둥실 떠 흘러가고 있었다
바람의 지문
들판 한가운데 묶여 있었다 꽃을 피우지 않는 풀들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디선가 부드럽고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 풀들의 몸을 관통했다 나는 살비듬 냄새를 풍기며 어떤 몸짓으로도 소통할 수 없는 이방인의 눈으로 그 몸속에서 혈류처럼 흐르는 바람을 바라보았다 풀들은 가늘게 떨리며 서로의 몸을 부비고 쓰다듬었다 어디선가 더 큰 바람이 불어왔다 풀들은 휘어지고 휘어지더니 일제히 누웠다가 한꺼번에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오십육억 칠천만의 풀들은 한 몸이 되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것을 그들의 순결한 육욕주의라 불러도 되지 않겠는가 너무 무거워진 나는 아무래도 휘어지지 않았다 바람도 햇살도 담을 수 없는 외계 종족이었다 햇살은 따스했으나 나는 서늘했다 바람은 부드러웠으나 나는 거센 폭풍에 시달렸다 내 마음의 낭자한 무늬는 누가 읽고 가겠는가 발목을 접고 무릎을 접고 허리를 내렸다 후손 없는 봉분처럼 웅크린 나는 직립의 기억을 잊기 위해 더 오래 외로워야 했다
길의 바닥
차량에 몸을 실은 승객이었을 때
내가 본 것은 풍경이었다
논이거나 밭이거나
배꽃이거나 복숭아꽃이었다
때때로 바다의 싯푸른 등살이 그리워 달려가면
고요한 물빛이 있었다
차량에 몸을 실은 내가 핸들을 잡으면서 본 것은
길의 바닥이다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다
후시경은 내 몸의 마면주*였고
전조등은 내 몸의 더듬이였다
무수한 표지들이 출몰했다 사라지는
이 길은 폐쇄회로이며 뫼비우스의 띠다
뭉개지고 뭉개져서 어느 종족의 내림인지
알 길이 없는 둥근 사체
몸의 반은 극락에서
몸의 반은 지옥에서
마지막 숨을 놓으며 길의 바닥에
뜨거운 피 남기는 기다란 사체
길의 바닥을 보며 달리는 것은 이렇듯
죽음이 명확해지는 일이다
그리하여 더욱 명확하게 알게 된다 삶이란
죽음을 밟은 바퀴의 탄력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제때 멈추지 못해 그리는 스키드 마크처럼 길의 바닥에
영혼을 시커멓게 남기는 것임을
*馬面冑:말얼굴가리개를 일컫는 용어.
채석강
일몰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다녀간 흔적을 밟는 동안 내내 어지러웠습니다
오랜 세월 겹겹이 쌓인 흔적들 중에서
당신의 발자국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 발자국을 들여다볼 때마다
암석 덩어리에서 빛이 쏟아져 나와
종내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무혈혁명처럼 빛과 어둠이 자리를 바꾸는 시간
그처럼 당신이 자리를 내어주고 간 이곳에서
태생이 외로운 자들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몸 안의 상처들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오래고 오랜 겹을 밟다가
허영허영 도망쳐 나오고야 말았습니다
채석강이 나를 토해 놓고야 말았습니다
환몽의 시간 속에서
당신이 다녀간 그 찰나를 보았습니다
당신이 꾸는 꿈속으로
이제 겨우 한 발을 내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리도 어지럽겠지요 필시
나는 당신의 꿈속으로 추락하는
눈먼 조난자입니다
류외향․
1996년 <매일신문>, 1999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 꿈꾸는 자는 유죄다
- 이전글20호 류외향 작품론/이성혁 08.02.26
- 다음글20호 신작단편/이재웅 08.02.2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