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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류외향 작품론/이성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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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외향 작품론|
화염을 밀어 올리는 순결한 육욕주의
이성혁|문학평론가
1.
지금 이 시대에 시를 쓴다는 행위는 어떤 의의를 갖고 있을까? 일종의 삶을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게끔 홈을 판 자본주의의 시공간 틀에서 벗어나기. 언어의 구성을 통해 삶을 재구성하기 위한 새로운 통로를 마련하는 시도. 현재 필자가 생각하는 시 쓰기의 의의다. 자본주의가 생산하는 동일성의 시간 아래에서 일상적 주체가 구성된다면, 시 쓰기는 특이성의 시간을 창출하는 기회를 제공하여 스스로 자신을 구성할 통로를 열어줄 수 있다. 특이성의 시간은 진정으로 새로운 시간이다. 자본주의 모더니티가 생산하는 시간 역시 ‘새롭게’ 앞으로 나아가지만, 차이 없는 새로움의 반복, 즉 새로움의 동일성에 빠질 뿐이다. 반면 특이성의 시간은 질적으로 새로운 생성을 낳는다.
시 쓰기를 통해 특이성의 시간을 낳기 위해서는 구성된 주체의 죽음을 거쳐야 한다. 코드화된 삶의 형식을 먼저 파괴해야 생성의 시간이 도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무척 고통을 줄 이 파괴의 과정은 시인이 의식적으로 행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삶을 살아가면서 고통을 민감하게 느끼는 자가 시인이 되기 쉬운 이유는, 그가 고통을 회피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민한 시인은 도리어 더 고통을 물고 늘어져 멀리 밀고 나간다. 의식적으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 과정에서 구성된 주체는 파괴되어 해체될 가능성이 생긴다.
구성된 자신을 제거해나가는 이 고통의 과정 자체가 어떤 시인에겐 시의 산출이 된다. 이때 그 고통의 치열성이 시의 공간을 강렬한 온도로 데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시인은 고통 속에서도 새로운 시공간의 창출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끊임없이 꿈꾸고 타진한다. 류외향 시인의 신작시들은 이 새로운 시공간을 발견하려는 열망(그 열망의 좌절도 포함하여)을 드러내준다.
류외향 시인의 첫 시집 꿈꾸는 자는 유죄다는 삶 곳곳에 뚫려 있는 검은 구멍들-죽음과 통해 있을-과 마주선 자의 서정을 주로 보여주었다. 시집 전체에서 느낄 수 있는 외로움과 쓸쓸함의 정서가 시인을 그 검은 구멍에로 이끌었던 것 같고, 그 정서는 구멍에 다가갈수록 더 통렬한 서정을 이루어내었다. 시인은 종종 빙하기로의 도약을 통해 검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의 아득함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전체의 정조는 시인에게 엄습해오는 쓸쓸함과 슬픔 더 나아가 회피하지 않고 죽음과 맞닥뜨리려는 데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한데 지금 발표되는 신작시들은 현대의 일상적 시공간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공간을 창출하려고 적극적으로 시도한다. 비록 환영을 통해서이지만, 그는 모든 것이 다 타오르는 ‘화염의 시간’에 접근하고자 한다. 그 시간은 ‘수십억 겹의 세월을 깨고’ 나온 새로운 시간이자 고생대의 시간성이다. 그는 그 ‘근원의 시간’이 텅 빈 시간을 깨고 꽉 차있는 시간으로 현재에 다시 도래하길 바란다. 첫 시집에서 잠시 보여주었던 반모더니티 지향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여 빙하기 이전의 시공간을 좀 더 구체적으로 현재 시간에 구성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2.
류외향 시인은 모더니티의 시간성이 우리네 삶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예민하게 의식한다. 「길의 바닥」은, 길바닥만 볼 수밖에 없는 운전자의 상황을 통해 모더니티적 삶을 전형화한다. “핸들을 잡으면서”부터는, “차량에 몸을 실은 승객이었을 때” 볼 수 있었던 풍경 대신에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이 ‘길의 바닥’만 보아야 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이때 “후시경은 내 몸의 마면주”가 되고 “전조등은 내 몸의 더듬이”가 된다. 도구와 기계들이 나의 감각을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폴 비릴리오가 밝혔듯이 현대의 삶은 속도의 폭력에 떠밀려 자기 소멸을 향해 가는 삶이다. 정신없이 빨라지는 속도를 뒤따라가기 위해, 가련한 육체를 가진 인간은 인공보철물을 지니고 살아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인공보철물-기계-을 달고 사는 사이보그가 된다. 현대인의 속도에 대한 강박적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자동차 역시 인공보철물이다. 또한 달리고 있는 ‘나’에게 인공보철물인 전조등은 그야말로 내 몸의 일부, ‘더듬이’가 된다. 그만큼 나는 자극에 대해 반사작용 하는 기계-곤충-로 퇴행한다.
이 질주하는 삶에서 실재하는 것은 오직 길의 바닥밖에 없다. 우리의 삶은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달리기 위해 달린다. 저 “폐쇄회로이며 뫼비우스의 띠”인 길만이 달리는 자의 좁은 공간이다. 시간을 소멸시키고 있는 질주를, 이 폐쇄적인 뫼비우스 때의 공간은 반복의 늪에 빠뜨린다. 우리는 시간에 대한 제어력을 잃는다. 어떤 사고만이 저 질주를 막아줄 터, 그땐 “제때 멈추지 못해 그리는 스키드 마크”만이 흉측하게 길 위에 자국을 남길 뿐이다. 길바닥은 이제 ‘시커멓게 남’긴 영혼들의 자국들이 널려 있는 끔직한 공간으로 나타난다. 속도 속에서 소멸되어 버린, 그래서 비현실적이리만큼 유령같이 살다 스키드 마크로 남은 저 질주자들의 삶들. 그들을 밟고 달리는 것이 또한 길 위에서 질주일 터, 그래서 그 길 위를 달리는 삶이란 “죽음을 밟은 바퀴의 탄력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질주해야만 하는 모더니티에 의해 튕겨 나가버린 인간들로부터 시적 영감을 얻어낸다. 「뒷모습」에서의, “기울어진 뒷모습”만 보여주는 인간들이 그들이다. 그의 “기울어진 어깨”엔 슬픔이 박혀 있다. 시인은 “아무래도 나는 그의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시인은 그의 얼굴을 마주볼 수가 없다. 어떤 죄책감에 사로잡힐 것 같아서일까? 아니면 그의 슬픔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얼굴의 두 눈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어떤 의미를 강요한다. 자신의 얼굴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낼 것을, 그리고 당신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깨달을 것을 말이다. 하지만 기울어진 뒷모습을 가진 그는 그러한 의미화의 강요를 하지 않는다. 그는 의미화 이전에 그냥 존재한다. 풀과 같은, 또는 ‘고생대 화석’과 같이. 존재성을 드러내는 ‘그의 뒷모습’은 의미화 해도 다시 포착할 수 없는 잉여를 발산한다. 차마 그의 앞으로 갈 수 없었던 더 깊은 이유는 바로 이 풀과 같은 존재로부터 의미를 찾아내어 규정하고자 감히 시도할 수 없었다는 데에 있지 않을까.
그는 무릎에 머리를 묻고 있었다
다시는 일어나지 않겠다는 완강함이
불거진 어깨뼈에 깨알처럼 박혀 있었다
허리가 보이지 않았다
둔부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허리가 없이
무릎에 얹은 두 팔의 힘으로
세상을 견디고 있었다
그를 만지면 고생대 화석의 냄새가 묻어날 것만 같았다
‘그’는 질주를 멈추고 어딘가에서 무릎에 머리를 묻고 앉아 있다. 그가 모더니티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자일 수 있다. 여하튼, 둥글게 무덤처럼 앉아 있음으로써 그는 질주하는 인간과 정 반대의 극에 위치하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직립 보행하고자 하지도 않아서, 달리는 일은 생각도 할 수 없다. 달려야만 하는 모더니티의 힘에 맞서 그는 ‘완강하게’ 다시 일어나지 않고자 한다. 그렇다고 세상을 회피하거나 죽음의 상태로 퇴행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세상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허리가 아닌 두 팔의 힘으로, 무릎에 머리를 묻은 채, 둥근 형체로, 화석처럼 존재하고자 하는 방식으로. 그런데 시인은 이 형체로부터, 모더니티의 직선적 시간과는 반대로 몇억 년 전의 시간-고생대-이 회귀하여 현현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세찬 질주의 세상으로부터, 몸을 둥글게 말아 자신만의 둥근 시공간을 힘겹게 만들어내어 그것을 완강하게 지켜내려는 ‘그’의 뒷모습은 아득한 시공간으로 시인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 아득한 시공간은 「채석강」에서 더욱 신비롭게 드러난다. 「뒷모습」에서의 ‘그’는, 이 시에서 “태생이 외로운 자들의 뒷모습”으로 증식된다. 그 모습은 “무혈혁명처럼 빛과 어둠이 자리를 바꾸는” ‘일몰’의 시간에, 시인을 주저앉게 만든 “암석 덩어리에서” “쏟아져 나”온 빛이 점차 “자리를 내어주고” 갈 때 발견된다. 이때 시인은 어떤 상처들의 시선-“몸 안의 상처들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을 감지한다. 그래서 채석강에서 “허영허영 도망쳐 나오고야” 만다. 아마 시인은, 그 시선을 통해 자신이 “당신의 오래고 오랜 겹”을 밟고 있음을 언뜻 깨닫고는, 그 오랜 세월 동안 겹겹이 쌓인 상처들의 무게를 압도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리라.
이 시에선 ‘당신’이나 “태생이 외로운 자들”, ‘상처’와 같은 시어가 다소 느닷없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꽤 난감하다. 시가 꽤 난해해진 이유는, 우리의 의식을 구성하고 있는 시공간적 틀을 깨며 현현해 오는 어떤 강렬한 실재를, 일몰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채석강에서 시인이 경험하고는, 어떻게든 그 경험을 그 자체로 시인이 표현하고 싶어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억지로 그 의미를 해석해내려고 하지 말고 시를 따라가면서 읽어보도록 하자. “태생이 외로운 자들의 뒷모습”이 현현할 때, 다시 말해 빛이 어둠에 자리를 내어줄 때, “당신이 다녀간 그 찰나”가 나타난다. 빛과 어둠의 교차점에서 시인을 아득함으로 빠뜨리는 찰나의 시간이, 즉 “이리도 어지”러운 ‘환몽의 시간’이 채석강을 감싼다. 이 시공간은 “당신이 꾸는 꿈속”이며 시인은 그 꿈속으로 ‘추락’하여 ‘눈먼 조난자’가 된다.
‘몽유’ 시편들은 ‘환몽의 시간’이 흐르는 ‘당신의 꿈’ 속에서 조난당했을 때의 기록이다. 한데, 시인이 현재 서 있는 이 시공간은 시인의 꿈에 나타난 무엇이 아니라, 범신론적인 신이라 할 ‘당신’의 꿈에 나타난 시공간이라는 데에 주의하자. 그래서 ‘몽유’는 시인이 꿈꾸며 돌아다니는 것을 말한다기보다는 어떤 강렬한 현현이 일어나는 당신-신-의 꿈 시공간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주관적인 환상의 세계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만들어낸 환영적인 현현 속에 시인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그 꿈의 시공간엔 온 지구 ‘몸 안의 상처들이’ 현재화되어 “나를 빤히 쳐다”볼 수 있게 된다.
3.
빛무리와 엉키고 설켜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체위로 불어오는 바람만이
수억만 년 길러온 머리카락을 지상에 드리우며
앙상한 늑골의 흔적을 남길 뿐이었다
길 없는 길은 나를 어디에도 내려놓지 않았다
계속 나아가라는 뜻인지 그만 멈추라는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전언이 세상에 가득했고
손톱 밑에 가득 박힌 시간의 알갱이를 세며 나는
날개를 떼어 놓고 가버린 새들의 근황이 문득 궁금해졌다
위의 시 「몽유-길 없는 길」에서 보여주는 환몽의 시공간은, “사람의 체취가 사라진 들판”, 인간적인 것이 감히 틈입할 수 없는 절대적 우주 공간이다. 이 공간 안에 주름 잡힌 시간의 겹은 엄청나서 시인의 손톱 밑에까지 시간의 알갱이들이 가득 박혀 들어갈 정도다. 아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체위로 불러오는 바람”이 시간의 모래 알갱이를 이끌고 매몰차게 불어와서 시간을 거듭 쌓아 올리는 모양이다. 바람으로 상징화된 비인간적 시간의 힘은 거세고 거세서 모든 것을 소멸시켜 먼지로 만들어버리고는 “앙상한 늑골의 흔적”만을 남긴다. 그리고 이 황량한 공간은 “알아들을 수 없는 전언”만이 표지로 흩날릴 뿐이어서 이곳에 들어온 사람은 계속 나아가야 할지 그만 멈추어야 할지 판단할 수 없다. 시인은 정지하기도, 그렇다고 나아갈 수도 없지만, 바람으로 몰려오는 우주의 시간은 어디에도 시인을 내려놓지 않는다. 새들조차 어디로 날아가야 할지 몰라 “날개를 떼어 놓고”는 없어져버렸다. 바람에 떠밀려 떠다니다가 한갓 먼지가 되어버렸을지 모른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채석강에서 ‘당신이 다녀간 찰나’를 발견하면서 시인은 길바닥만 보며 한없이 질주해야만 하는 모더니티의 시공간에서 환몽의 시공간으로 비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인이 빠져 들어간 환몽의 세계는 광활하고 장대한 비인간적 시공간을 펼쳐놓고, 그 광경에 시인은 압도당하여 어찌 해야 할지 모른 채 “손톱을 뜯으며” 서 있게 된다. 결국 시인은 광대무변한 우주의 시공간을 맞닥뜨리고는 어떤 무엇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다만 “육신을 배반”한 “오체투지의 이파리들”처럼, “오체투지의 뿌리 아래에서” “짐승처럼 잠들고 싶”을 뿐이다. 시인은 부처와 같은 거대한 자연 앞에 몸을 땅에 내던져 낮추고는, ‘이파리’들처럼 그저 존재하기만 하고 싶어한다.
눈앞에 펼쳐진 이 비인간적 세계에 시인은 이파리들처럼 동화될 수는 없는 일이다. 「바람의 지문」에서 시인은 그 동화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고백한다. 바람에 휘어지는 풀처럼 “발목을 접고 무릎을 접고 허리를 내”리지만, 결국 “너무 무거워진 나는 아무래도 휘어지지 않”아서 자신을 “바람도 햇살도 담을 수 없는 외계종족”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시인은 “후손 없는 봉분처럼 웅크”려, “직립의 기억을 잊기 위해 더 오래 외로워야 했다”고 하면서, 뒷모습만 보여주던 ‘그’와 같이 일어서지 않으려는 열망, 직립하지 않으려는 열망을 ‘완강하게’ 버리지 않는다. 왜일까? 시인은 왜 그토록 봉분이 되기를 열망하는 것일까? 봉분에 둥글게 깔린 풀의 모습에서 잊지 못할 어떤 속성을 발견하여 매료됐기 때문이다.
들판 한가운데 묶여 있었다 꽃을 피우지 않는 풀들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디선가 부드럽고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 풀들의 몸을 관통했다 나는 살비듬 냄새를 풍기며 어떤 몸짓으로도 소통할 수 없는 이방인의 눈으로 그 몸속에서 혈류처럼 흐르는 바람을 바라보았다 풀들은 가늘게 떨리며 서로의 몸을 부비고 쓰다듬었다 어디선가 더 큰 바람이 불어왔다 풀들은 휘어지고 휘어지더니 일제히 누웠다가 한꺼번에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오십육억 칠천만의 풀들은 한 몸이 되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것을 그들의 순결한 육욕주의라 불러도 되지 않겠는가
“꽃을 피우지 않는 풀들”, 다만 바람이 “혈류처럼 흐”를 뿐인 풀들의 “일제히 누웠다가 한꺼번에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 “서로의 몸을 부비고 쓰다듬는” 그 “순결한 육욕주의”가 시인을 매료시켰을 것이다. 단순한, 그래서 순결한 육욕은 ‘오십육억 칠천만’의 풀들을 한 몸으로 이어준다. 바람과 어울릴 수 있는, 그래서 서로 부드럽게 엉킬 수 있는 풀들의 장엄한 흔들림은 한 몸으로 이어진 풀들의 대합창이다. 그 풀들과 “어떤 몸짓으로도 소통할 수 없는 이방인”일 뿐인 시인의 마음에는 ‘낭자한 무늬’가 새겨진다.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그 바람을 혈액으로 삼아 살아나가면서 거대한 융합의 장관을 보여주는 저 풀들의 흔들리는 육신에서 시인은, 자신이 가늠하기 힘든, 어떤 생성을 이루어내는 힘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저 풀들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바람이 ‘거센 폭풍’임을 발견하게 되고, ‘낭자하게’ 시달리게 된다. 「몽염-화염」은, 연약한 풀들이 이끌어 올리는 이러한 거대한 힘과 그 강렬함을 더욱 인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몽유-길 없는 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시에서도 시인은 ‘묵언의 들판’ 앞에 서 있다. 그런데 그 들판에서 돌연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열대의 스콜이 지나간 듯 대지가 일순간
제 뜨거움을 밀어 올렸던 것이다
내가 숨통을 틀어쥐고 걸어 나갔던 까닭은
그리고 그곳에서 화염을 보았던 것이다
아무도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들판
불길은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몇 올 남지 않은 음모 같은 풀들이
가까스로 팔을 뻗어 제 종족에게 불길을 건넸던 것이다
“몇 올 남지 않은 음모 같은 풀들”이 깔린 이 들판에서 갑자기 ‘조용하고 부드’러운 화염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풀 속에 내재되어 있던 잠재력이 제 스스로 자신을 밀어 올리고 있다. 풀에서 불로의 생성이라는 사건이 일어나는 ‘스콜’-돌풍-의 시간이 닥친다. 이 시간은 시간 아닌 시간, 풀의 시간과 불의 시간 ‘사이’의 섬광 같은 시간이다. 이 ‘사이시간’은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돌연하게 분출하는 화염-불꽃-의 시간이다. 이 화염의 시간을 통해 풀은 “가까스로 팔을 뻗어 제 종족에게 불길을 건”네어 한 몸이 될 수 있는 연결의 힘을 보여준다. 봉기하는 민중처럼 풀은 순식간에 다 같이 불이 되어 ‘불길’을 만든다.
현재에는 없지만, 미래에 도래할 어떤 거대한 민중을 시인은 열망하고 있는 걸까? 지금 잠재적으로 들끓고 있는 어떤 민중의 이미지를 저 타오르는 풀에서 보고 있는 걸까? 하지만 시인의 상상력은 좀더 근원적인 데까지 이르고 있다. 시인은 저 화염의 시공간을 보면서 “빙하기 이전에 사라진 고대 인류가 그리운 날이었다”라고 쓰는 것이다. 그들은 아마 “스스로 불을 지른” 풀들과 같은 존재일 터, 반면 “전생을 잊어버”린 현대인들은 “천렵에 나서며 모두 빨리 늙고 싶어”한다. 「바람의 지문」에서 시인이 몸을 말아 봉분과 같이 되려고 하고 직립의 기억을 잊으려고 하는 것은, 비록 이 시의 끝부분에서 “스스로 제 몸에 불을 지른” 고대 인류-들판의 풀-와 나 사이에 “주고받을 문답이 없었다/나는 들판의 신기루일 뿐이었다”라며 시인은 동화의 불가능성을 다시 말하고 있지만, 제 스스로 뜨거움을 밀어 올려 불길을 건네는 ‘오십육억 칠천만’의 풀들과 함께 흔들리며 타오르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은 부드러우면서 뜨거운 ‘육욕’을 가진 풀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녀와 물푸레나무」에 등장하는 ‘알몸의 여자’는 바로 시인이 그리워 한 “빙하기 이전 에 사라진 고대 인류”의 한 명 아닐까. “제 뿌리를 들고 뛰어가는 한 그루 나무”와 같은 알몸의 그녀는 현대의 도시 거리를 달리고 있다. 그녀는 자동차로 상징되는 모더니티의 시공간과 어울리지 않는다. “과속 방지턱에서 쿨렁거리는 자동차가 알몸의 그녀와 한통속이라는 건 믿기 어려운 소품이었다”는 것이다. 거리의 행인들 역시 “아무도 그녀와 연루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시인은 말한다. 현대의 인공보철물들은 저 달려가는 알몸의 여자를 판독할 수 없다. ‘바코드판독기’같은 경우는 그녀를 대하자 “단말마를 내지르며 숫자들을 쏟아놓”는다. 거리의 어둠을 빨아들이며 “푸른 멍자국이 소름처럼 돋아오”른 채 달리는 그녀의 맨발 아래엔 거리의 시간이 파열되면서 바람에 날려버리는 중이다. 이 어두운 도시의 질서를 이렇듯 뒤흔들며 지나가고 있는 그녀는 ‘푸른 멍자국’처럼 모욕당한 어떤 원시성이다. 하지만 그녀가 “흐르고 흘러 백두대간 골 깊은 기슭을 적시는 어느 강 상류에 이르”자 시간은 “나락으로 떨어지”며 “뻑뻑”해진다. 그 시간은 도시의 시간, 텅 빈 공허의 시간이 아니라, 나락으로 떨어질 때와 같은 어떤 극한성에 이른, 충만해진 시간이다. 이 타오르는 욕망과 같이 팽팽해진 시간 속에서 그녀는 물푸레나무가 내민 뿌리와 애무한다.
오래 숨구멍을 닫았던 속살들이 싱싱한 대기를 향해 발기했다 뿌리는 그녀를 어루만지다 온몸을 휘감았다 분홍빛 유두가 활짝 열렸다 사위가 서서히 밝아졌다 빛의 진원지는 그녀였다 그녀는 맨발로 일어나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몸속에서 푸른 물빛이 풀어져 나왔다 캄캄한 산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산중의 모든 것은 그녀와 연루되어 있었다 당신도, 그러했다
푸른 멍자국이 푸른 물빛으로 풀어진다. 그녀는 빛의 진원지가 된다. 새벽을 불러오는 자가 되며 산중의 모든 것이 연루되는 산의 뿌리, 새 생명의 모태가 된다. 스스로 자기 몸을 불사를 수 있는 빙하기 이전의 고대인들은 알몸의 여자처럼 현대 도시와 불화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지구의 잠재력을 품고 있는 저 깊은 산 속에서는 모든 것과 몸으로써 교감하고 새로운 생성을 이루어낼 수 있다. 시인은 새로운 생성을 이루어낼 이 알몸의 여자가 부활하기 원한다. 그 여자라면 모든 것을 수치화하여 계산하는 도시의 바코드 판독기를 파괴하면서 순결한 육욕의 세계를 다시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시인은 기대한다.
시인은 도시와 알몸의 여자를 물과 기름의 관계로 놓는다. 이 시에서 시인의 반모더니티 지향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난생을 만나다」는 시인의 반모더니티를 더욱 과격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수십억 년 동안 얼음에 묶여 있던 자연의 비인간적 생명이 다시 이 지구상에 개화하기를 소망하면서 도시의 멸망마저 반기고 소망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가령, 뉴올리언스에 닥친 태풍 카트리나에 의한 재해를 시인은 달리 해석한다. 그 사건을 “바다의 양수가 쏟아졌”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즉, 태풍은 지구가 새로운 생명을 막 낳으려는 신호다. 시인은 어서 어서 양수가 더 쏟아지고 새로운 생명이 출산되어 인간에 의해 학대받은 지구가 새로운 생명체에 의해 운영되길 빈다.
“빙하가 녹고 바닷물이 넘치고 넘쳐” 이곳에도 빙하 위의 펭귄들이 “이 작은 별의 분노와 울음을 타고 너울너울 건너왔으면 좋겠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리고 빙하가 녹아 바다가 해안 도시를 덮어나가고, 출산한 바다는 알들을 해안가에 쌓아놓아 “수십억 겹의 세월을 깨고 나온 새끼들이/이 해안을 새까맣게 뒤덮”게 되기를 바란다. 그때엔 ‘알몸의 그녀’와 같은 빙하기 이전에 사라진 인류, 불을 품고 있는 풀과 같은 인류는 알-빙하-을 깨며 이 세상에 발을 내딛고는 대지를 덮을 것이다. 그 인류는 지구의 잠재력일 생명의 “근원을 찾아” 어디론가 떠날 것이다. 시인은 그 행렬에 동행할 수 있겠지만 ‘잠시’만일 것이다. 시인은 아직은 현대인이고 도래하길 바라는 저 세계의 이방인이어서, 이 새로운 인류와 여전히 동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이 원하는 것은 “미처 껍질을 깨지 못한 알 하나 발견하여”, 시인으로서 “난생의 비밀을 엿보”는 것, “껍질 밖으로 순결한 배꼽 내민 당신을” 만나보는 것이다. 「채석강」에서 얼핏 본 ‘당신’을, “어미도 아비도 없는 당신”을 말이다. 이때 태어나는 시는 온 우주의 힘을 순결한 배꼽 안에 모아두고 태어난, 우주 자체일 당신의 비밀에 대한 비의적인 기록이 될 것이다.
4.
여기까지 읽어보니 류외향 시인의 세계가 요즘 젊은 시인이 보여주는 세계에 비하여 상당히 웅대하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모더니티에 대한 극단적인 거부와 그로부터의 탈주는 전 우주적 규모로 전개된다. 그리하여 비인간적 세계의 도래를 상상할 정도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류외향 시인 특유의 특이한 시공간이 창출된다. 시인이 발견한 ‘당신의 환몽’ 세계의 시공간엔 바람을 혈류로 삼고 제 뜨거움을 스스로 밀어 올리는 풀과, 물푸레나무의 뿌리와 애무하며 모든 것의 모태가 되는 ‘알몸의 여자’와, 빙하기가 녹으면 대지를 뒤덮을, 그리고 그때 근원을 찾아 여행해 갈 “빙하기 이전에 사라진 고대 인류”가 존재한다. 이들은 지금 환몽으로써, 하나의 잠재력으로서 존재하고 있지만 그 잠재력은 새로운 세계를 일으켜 세울 정도로 강대하다. 그때 어떤 생성의 ‘사이시간’을 이 잠재적인 존재들은 창출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보여준 그 환몽의 시공간에 대하여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녀와 물푸레나무」에서 도시와 백두대간 깊은 골짜기가 알몸의 여자를 중심으로 대조되고 있는데, 이런 도시와 생명력의 대립은 너무 추상적이지는 않는가?. 그리고 반모더니티의 세계가 모더니티와 추상적으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시인이 새로이 생성시키려 한 환몽의 시공간은 모더니티의 삶이 강요하는 시공간을 비틀고 무너뜨릴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한편, 「난생을 만나다」에서는 도시의 멸망이라는 묵시론적 희망도 보여주고 있는바, 그 과감함이 돋보이긴 하지만 탈주와 생성은 비루한 도시의 삶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시인은 어떤 시적 순간을 포착하여 그 시공간에서 몽유하면서 새로운 인류와 대지의 도래의 희망과 가능성을 보여주려고 하고 그 이미지를 찾아내려고 했다. 이러한 시인의 작업은 특이한 것이고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온 우주가 갖고 있는 잠재적인 것을 시적으로 구성하면서 표현해낸다는 점에서 그 의의 역시 매우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대지의 힘을 끌어올려 모더니티의 불모성을 치유하고 새로운 세계를 도래케 하려는 시도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희망으로서 숙고되어야 하고 추구되어야 한다. 꿈과 희망의 형상화는 언제나 시에서 소중한 것이다. 또한 극단성 자체가 모더니티의 산물이기에, 그리고 반모더니티 역시 모더니티의 산물이기에, 류외향의 시는 모더니티의 선상을 벗어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시는 모더니티에 대항하는 모더니티인 미적 모더니티를 보여준다. 모든 인간과 사물들을 동일한 척도의 가치로 환원시키면서 공허한 새로움의 동질적 시간을 강요하는 자본주의에 맞서, 진정으로 새롭고 자유로운 시간성을 생성시키는 것이 미적 모더니티라면, 미적 모더니티는 근대를 극복할 수 있는 시간성을 확장시킨다는 실천적 의의를 갖는다.
하지만 류외향 시인이 보여준 환몽의 미적 시공간은 모더니티와의 ‘교전’ 속에서 생성되는 것 같진 않다. 그의 시에서 모더니티와 환몽이 (갈등 속에서라도) 서로 교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자칫 교전의 치열성을 잃고, 잠재성의 ‘표현’에만 천착하여, 현대에 그 잠재성이 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내는 데 등한시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때엔 시인이 그려낸 환몽이 자칫 공허로 빠질 위험에 처하게 된다. 물론 시인이 형상화 한 환몽은 시인의 주관적인 꿈이 아니라 신, 또는 지구의 근원적 생명이 꾸는 것이기에, 상처받은 생태계의 상처와 희망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상황을 마련해주었다. 그래서 그 환몽은 주관적인 공허에로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지구-신의 생태적 환몽은 모더니티와의 긴장을 더욱 잃게 될 위험에 노출된다. 비인간의 근원을 가진 세계가 꾸는 환몽이기 때문에, 얽히고설킨 현대의 삶과 동떨어진 상들만을 보여주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면 그 환몽은 현실 비판의 날카로움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염려의 말은 별 영양가 없는, ‘평자’라는 직업의식이 낳은 괜한 첨언일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해도, 시인이 훌륭하게 이미지화 한 스키드 마크에 대한 생각이 지금 필자의 머리에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죽음의 선이 삶의 선으로 어떻게 전환될 수는 없을까? 이에 대한 탐구와 형상화를, 류외향 시인의 시가 앞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었으면 한다고, 다른 방향으로의 탈주와 생성도 실험해보라고 독자로서 말한다면, 건방진 월권행위는 아니라 믿는다
이성혁․
1999년 ≪문학과 창작≫, 2003년 <대한매일> 신춘문예로 등단
․평론집 불꽃과 트임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세명대 출강 중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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