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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신작시/김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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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향지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하나다
물고기 모양 전화기를 바다에서 막 꺼냈다
머리와 꼬리 부분의 송수신 구멍들이
생생하게 반짝이며 두리번거린다
물위 세상은 소리가 많기도 참 많구나
소리가 파도를 타고 곡선을 그린다
아날로그 곡선 한 줄 위에
지느러미가 바닷물을 쳐대는 소리
아날로그 곡선 한 줄 위에
비늘 사이로 물방울이 부대끼는 소리
아날로그 곡선 한 줄 위에
아가미가 힘차게 열리는 소리가 앉아있다
밀려나갔다가 바다 아래로 가라앉고
바다 아래서 다시 위로 살아나는
무한대의 아날로그가 서로에게 다가와
디지털을 만들어낸다
01010101의 디지털은
생의 마디마디를 끊어낸 것이 아니라
무한대의 삶이 모여 이루어졌다고
내 손의 전화기가 울리고 있다
부작용
가늘면서 질긴 기억들을 끊어내는 것은
소리만큼이나 시원했다
귤껍질은 다섯 조각이 나서 차갑게 엎어져버렸다
냉정하게 노려보는 귤껍질의
가라앉은 향기가 맴돌고 있었다
먹먹하고 하얀 기억뭉치들을 품고
아직 이렇게 사랑하고 있다고, 보라며
가는 핏줄이 하얗게 소리 지르기도 했다
날카로운 손길에 짓무른 상처마저
나는 외면하고 싶었다
얇고 단단하지 않은 껍질은
나를 감싸안을 자격이 없지 않냐며
하얀 기억뭉치들이 모래처럼 갈라지는 것도
외면하고 싶었다
그 순간 손에서 본 것은
비벼내도 악착같이 붙어있는 하얀 가루는
내 마음이라니
김향지․
2004년 ≪생각과 느낌≫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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