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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문화산택/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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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88회 작성일 08-02-26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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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산․책


계급적 갈등은 있지만 투쟁은 없다
―박찬욱 영화의 계급 문제―


강성률(영화평론가)


1. “가장 세계적인 한국감독”
2005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감독을 꼽으라면 대개는 박찬욱 감독을 꼽을 것이다. 그는 2004년 <올드보이>로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면서 흥행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명실상부한 ‘대표’ 감독이 되었다. 임권택, 김기덕, 이창동과 달리 박찬욱은 흥행에도 꽤 크게 성공했고, 강제규, 강우석과 달리 탄탄한 작품성도 갖추었다. 앞 그룹과 뒤 그룹의 감독들에게 조금씩 부족한 것을 그는 두루 갖추고 있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이 지닌 파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씨네21≫이 선정한 ‘2005 충무로 파워 50’에서 그가 5위를 차지한 것에서 드러난다. 쟁쟁한 제작자이거나 배급사 대표인 박동호(CJ), 강우석(시네마서비스), 차승재(싸이더스), 김우택(쇼박스)에 이어 ‘감독’ 박찬욱이 5위에 오른 것이다. 그의 뒤를 보면 더욱 놀랍다. 강제규 감독, 정훈탁 싸이더스HQ 대표, 김동주 쇼이스트 대표 같은 쟁쟁한 이들도 박찬욱에게 밀렸다. 그를 이토록 높게 평가한 것은, ≪씨네21≫의 표현에 의하면, 박찬욱이 “가장 세계적인 한국감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런 감독의 영화세계나 행적이 충무로 주류의 그것과는 무척이나 다르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는 대개 B무비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농후하다. 그 스스로도 B무비를 좋아한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주류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상상력을 지닌 B무비에서 박찬욱은 새로운 영화적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에 의하면, B무비에 나타난, “돈이나 시간이 부족한 것을 참신한 아이디어로 커버하고 넘어가는 그런 모습을 보면 즐겁다. B무비의 걸작에서 보이는 그 시대의 통상적 가치관에 역행하려고 하는 태도”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박찬욱이 “B무비의 전도사”가 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통상적 가치관을 역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박찬욱은 한국에서 가장 좌파적인 민주노동당 당원이다. 나름대로 정치 활동도 열심히 한다. 2002년 대선 때 그는 영화인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민노당의 권영길 후보를 지원하는 TV 광고를 했다. 그 전에는 미군 장갑차에 무참히 깔려죽은 두 여중생의 억울한 죽음에 항의하는 삭발을 단행한 적도 있다. 2004년 총선에서는 민노당 지지를 공식적으로 선언하면서 영화인들을 대거 규합해 민노당 열풍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여기서 차분하게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주류 영화계에서 가장 막강한 파워를 지닌 감독이 가장 좌파적인 민노당을 지지하는 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다시 말해, 박찬욱이 지지하는 민노당의 이념과 박찬욱 영화에 나타난 계급적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동질성과 이질성을 담고 있는 것일까?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상품의 특성을 지니고 있고, 요즘은 더욱더 상품의 일방향으로 가고 있는 상황에서 흥행성을 배제하지 않은, 좌파 성향을 지닌 감독의 영화에 나타난 계급 문제는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IMF 구제 금융 시기가 도래하면서 거덜 났지만 GM이라는 신자유주의의 최상에 있는 그룹에 의해 인수된 자동차 광고에 거액을 받고 출현하는 그의 심정도 알고 싶었다. 그는 막강한 파워를 가진 부르주아 감독인가, 민노당을 지지하는 진보적 감독인가? 필자가 정말 알고 싶은 것은 이것이었다.
그러나 감독은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 그의 언행과 작품이 균열을 일으키든지 일치하든지 그것은 좀더 깊은 분석이 있어야 한다. 한국의 영화평단은 아직 그의 영화에 대해 계급적으로 분석하지 않았다. 게다가 요즘 평단에서는 그 누구도 계급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 이것은 평자들이 부유해서인가, 아니면 계급적 관점이 유행 지난 탓 때문인가? 필자가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아직도, 아니 지금이야말로 계급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2. 죄와 구원, 그리고 폭력
박찬욱은 1992년에 감독 데뷔했으니 데뷔한 지 대략 15년 된 중견 감독이다. 그러나 그가 연출한 영화는 그리 많지 않다. <달은… 해가 꾸는 꿈>(1992), <삼인조>(1997), <공동경비구역 JSA>(2000)(이하 ), <복수는 나의 것>(2002)(이하 <복수>),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2005)(이하 <금자씨>) 등의 장편 6편과 <심판>(1999), <여섯 개의 시선>의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2003)(이하 <찬드라>), <쓰리 몬스터>의 <컷>(2004)(이하 <컷>) 등의 중․단편 3편이 전부이다. 데뷔한 지 10년 된 김기덕이 장편만 10편을 넘긴 것에 비하면 박찬욱은 과작의 감독임에 분명하다. 물론 그가 이렇게 된 데에는 데뷔작의 처절한 실패 이후 거의 5년을 평론 생활을 한 공백에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박찬욱은 영화를 빠르게 만드는 감독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박찬욱 영화의 핵심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박찬욱 영화에 대해 논했지만, 필자가 보기에 가장 정확한 것은 그가 류승완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에 있다. 박찬욱은 자신의 영화 주제를 “죄짓는 행위로의 폭력과 구원받으려고 발버둥치다 저지르는 폭력”으로 규정했다. 여기에 하나 더 첨가하자면, 그의 영화에는 죄의식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박찬욱 영화에는 죄의식을 지닌 인간이 저지르는 구원을 향한 폭력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그렇다. 박찬욱의 영화 속 인물들은 죄의식을 지니고 있다. 영화 속에 그려진 각 인물들은 가족이나 연인, 동료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의식에 젖어 있다. 이런 죄의식은 “죄짓는 행위로의 폭력” 때문에 온 것이며, 다시 그들은 “구원받으려고 발버둥치다 저지르는 폭력”을 일삼게 된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구원을 받으려고 죄를 짓는, 역설적인 폭력을 일삼게 된다는 것이다. 박찬욱 영화가 대개 부조리한 것은 이런 설정 때문이다.
다음을 보자. 의 이수현 병장은 남성식 일병을 지켜주지 못했거나 정우진 소좌를 자신이 쏘았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결국 자살하고 만다.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의식, 이우진은 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의식 때문에 서로에게 복수라는 극단적인 폭력을 행하게 된다. 그것만이 자신들의 죄의식으로부터 구원받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구원받지도 못한 채 죽거나 죽음과 비슷한 삶을 살게 된다. 이뿐 아니다. <복수>의 류는 누나를 보호해주지 못했다는 죄의식으로, 동진은 딸을 보호해주지 못했다는 죄의식으로 극단적인 폭력을 통해 복수하지만 둘 다 죽고 만다. 이런 설정은 <금자 씨> 역시 마찬가지다. 유괴되어 죽은 운모와 버려진 딸에 대한 죄의식이 금자 씨가 무서운 복수를 하도록 만든다. 때문에 박찬욱의 영화에 나타나는 폭력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다.
이런 내용을 다루면서 박찬욱은 B무비에서 영향 받은 스타일을 구사한다. 주류 담론의 금기를 깨는 이야기는 물론이고 그것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상당히 ‘센’ 화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신체 훼손의 강렬한 이미지가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도 이와 관련 있다. 죄의식을 벗어나려는 인물들의 행동은 결국 폭력을 동반하는데, 그런 폭력의 이미지를 박찬욱은 ‘즐기는’ 것 같다. 과하게 보여주지 않아도 될 장면을 지독하게 응시하는 그의 카메라는 주류 영화와 달리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여기서 한번쯤 생각해 볼 것은 박찬욱 영화의 흥행성이다. 원론적으로 보자면, 전복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는 박찬욱 영화는 그리 흥행할 만한 영화가 아니다. 그의 영화는 장르 영화도 아니고, 웰 메이드(well-made) 영화도 아니다. 물론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는 박찬욱 영화 스펙트럼에서 아주 예외적인 작품이다. 이렇게 보면 박찬욱의 영화 가운데 박찬욱 영화의 고유한 특성을 지니면서 흥행에도 성공했던 <올드보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극히 예외적인 작품이다. 이번에 개봉하는 <금자 씨> 역시 크게 흥행할 요소는 많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행을 한다는 것이 박찬욱 영화의 비밀이다.

3. 계급은 희석되고 복수만 남는다
이제 박찬욱 영화에 나타난 계급 문제를 다룰 차례가 되었다. 박찬욱의 영화 가운데 계급 문제가 집중적으로 드러난 영화는 <복수>, <컷>을 들 수 있다. 물론 엄밀하게 따지자면, 다른 작품에서도 계급 문제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삼인조>는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3류 인생 세 사람의 삶을 다루고 있기에 계급 문제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범위를 이렇게까지 넓히다 보면 너무 많은 영화를 다루어야 하는 지경에 빠지게 된다. 때문에 이 글에서는 가급적 직접적으로 계급 문제를 거론한 영화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다만 <찬드라>의 경우 계급 문제보다는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다루었고 영화에 나타난 인식도 직선적이어서 제외하기로 했고, <올드보이>는 계급간의 차이는 명확히 드러나지만 감독의 계급 인식이 약하기 때문에 제외했다.
박찬욱 영화 가운데 계급 문제를 거론할 때 반드시 거론해야 할 텍스트는 <복수>이다. 그 스스로도 <복수>가 계급 문제를 다룬 영화라고 말한다. 가령 최근 <금자 씨>의 개봉을 앞두고 <중앙일보>에 보낸 편지에서도 “3부작을 여는 ‘복수는 나의 것’은 한반도의 분단문제를 소재 삼았던 ‘JSA’에 이어 남한 내 계급 문제를 다루어보겠다는 포부에서 기획됐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의 계급에 대한 관심은 많은 부분에서 드러난다. 다음을 보자. “한국 사회의 계급적 갈등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상업 영화나 TV 연속극은 그런 것이 없는 척하잖아요. 외면하는데, 그런 적대를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지켜보는 것이 불편했던 거죠.”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와의 인터뷰에서 <복수>의 흥행 실패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를 보더라도,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영화감독 가운데 박찬욱은 계급 문제에 관심을 갖고 영화를 만드는 몇 안 되는 감독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스스로 계급 문제를 다루었다는 영화에 나타난 계급 문제는 어떠할까? 영화 <복수> 속으로 들어가 보자. <복수>는 한국영화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영화이다. 송강호라는 당대 최고의 배우를 기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조리한 내용으로 처참한 흥행실패를 기록했다. 흥행에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불친절한 내러티브와 불친절한 이미지의 나열에 있다. 그러나 좀더 들어가면, 이 영화를 통해 박찬욱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제대로 살아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한 경향이 있다.
그가 담고자 했다는 계급 문제를 살펴보자. 류는 중소기업의 보잘것없는 노동자인 데다가 청각장애인이다. 게다가 그는 병을 앓는 누나를 책임져야 하는 소년 가장이며, 출세할 수 있는 ‘학력 자본’도 없다. 이 정도면 가장 낮은 계급임에 분명하다. 류의 여자 친구 영미는 그나마 나은 경우다. 그녀는 부유하지는 않지만, 몸 건강하고 책임질 가족도 없으며, 결정적으로 대학생이다. 학력 자본이 그 어느 자본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대한민국에서 그녀는 대학생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열렬 운동권 학생으로 퇴학당한 신분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학력 자본을 통해 출세를 도모하기보다는 신자유주의 질서를 파괴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결국 류와 영미는 가진 것 없는 사람이거나 자본가의 폭력과 지배에 저항하는 사람인 것이다. 물론 노동자인 류를 운동권 학생 영미가 이끄는 측면이 있다.
이들과 대립하는 위치에 있는 사장 동진은 거대한 자본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영화 속에 표현된 대저택의 이미지와 달리,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현장에 뛰어들어 밤낮으로 일해 성공한 사람이다. 그 스스로도 “나름대로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졸부이거나 대기업의 2세가 아닌, 자립해서 성공한 사람이다. 부인에게 이혼까지 당할 만큼 일에 미쳤기에 자수성가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게다가 그는 나름대로 착하다. 딸이 죽고 난 뒤에는 자신 앞에서 자해한 해고 노동자를 찾아가 그의 아들을 돌봐주기까지 한다.
이런 설정에서 계급 문제가 발생한다. 류와 영미는 누나의 수술비 때문에 동진의 딸을 유괴한다. 재벌해체론자 영미에 따르면, 세상에는 좋은 유괴와 나쁜 유괴가 있는데, 가난한 이들이 부자들의 돈을 유괴를 통해 ‘빌려’(?) 쓰는 경우는 화폐의 가치를 ‘졸라’ 극대화시키는 경우에 속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이 보기에는 유괴를 빌미로 부자들의 돈을 ‘빌려’ 쓰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설정은 <금자 씨>에도 그대로 살아난다. 같은 설정이 두 번이나 등장한다는 것은 감독이 고의로 사용할 만큼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복수>의 설정은 진지한 반면, <금자 씨>의 경우는 유괴범의 변명에 불과한 면이 있다. 하여간 박찬욱은, 아이만 그대로 돌려준다면, 가난한 사람이 유괴를 통해서라도 부자들의 돈을 빼앗는 것을 그리 나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물어보자. 박찬욱은 정말 이렇게 생각할 만큼 과격한 반(反)자본주의자인가? 아니면 B무비의 전복성에 기댄 표현일 뿐인가? 전자라면 그것은 너무나 놀랍고, 후자라면 그것은 영화적 장난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 좀더 설명하자면, 전자라면 자신의 그런 생각이 다른 영화를 통해서도 드러나야 하며, 결국 그런 생각은 민노당을 지지하는 박찬욱의 생각과 일치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극단적인 생각은 처절한 복수를 당함으로써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박찬욱은 단지 B무비의 전복성에 기대에 과격한 표현을 한 것일 따름인가? 이렇게 말하기에는, 박찬욱이 했던 말이나 영화의 과감성이 일치되지 않는 아쉬움이 있다. 이것이 박찬욱 영화의 가장 큰 딜레마이다.
영화를 좀더 보도록 하자. 사건은 갑자기 다른 곳으로 점프한다. 자신 때문에 유괴를 했다고 생각한 누나는 자살해 버리고 누나를 묻으러 간 곳에서 아이도 죽어버린다. 이제 동진의 복수가 시작된다. 딸을 너무도 사랑했던 그는 경찰과의 통화에서 유괴범을 당연히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너무도 단호하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그렇다면 류가 유괴범이 되도록 만들었던 장기밀매 사기범을 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마찬가지이다. 잔인하게 죽이는 것이다. 류는 사기범을 찾아 죽이고, 동진은 영미와 류를 찾아 죽인다. 그리고 마지막에 동진도 영미의 비밀단체원들에 의해 잔인하게 죽는다.
여기서 질문을 해 보자. 도대체 이 영화에는 계급 문제가 들어있는가? 물론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을 보면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이 있다. 노동자 류, 재벌해체론자 영미와 반대편에 있는 사장의 대립각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무슨 문제로 싸우고 있는가? 물론 돈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돈 때문에 발생한 죽음 때문이다. 류는 자살한 누나의 복수를 하려 하고 동진은 죽은 딸의 복수를 하려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슬며시 돈 문제가 빠져 버린다. 아무도 돈가방에는 관심이 없다. 그렇다면 정작 중요했던 돈가방은 어디로 갔는가? ‘그냥’ 사라져버렸다. 누나와 딸이 죽은 뒤에 돈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처절한 복수만 남았을 뿐이다. 그것도 매우 과격하고 위험한 복수만 남았다. 경찰이 눈감아주는 사적 복수가 남아있다.
만약 이 영화가 계급 문제를 다룬 영화라면 (그것이 B무비를 좋아하는 감독의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좀더 섬세한 시선이 들어 있어야 한다. 노동자의 시선을 약하게 그린 것이 흠이 되지는 않지만, 재벌 해체를 외치는 영미를 희화화하거나, 자본가를 착한 사람으로 그려 유괴에 대한 정당한 징벌을 가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박찬욱이 주장한 것과 상치된다. 결국 박찬욱은 자신이 했던 말을 영화에서 다시 ‘전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 복수에 지나치게 할애함으로써 (자극적이기는 하지만) 체계적인 계급 담론을 담아내지는 못했다.

4. 극단적 갈등 상황에 계급이 들어가다
<컷>의 가장 큰 갈등은 계급 문제이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정면 대결을 그리고 있는 영화, 아니 극단적인 방법으로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에게 앙갚음하는 영화이다.
능력 있고 부유하고 착하기까지 한, 남부러울 것 없는 인기 영화감독의 집에 괴한이 침입한다. 그는 아내를 피아노 줄에 묶어놓고 데리고 온 아이를 죽이지 않으면 부인의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겠다고 한다. 이제 감독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이를 죽이지 못하는 감독을 옥죄려고 괴한은 아내의 손가락을 하나씩 자른다. 다급한 상황에 처한 감독은 아이를 죽이려 하지만 정작 죽이지는 못한다. 결국 괴한은 부인에 의해 죽고, 그 부인은 모든 비밀을 알아버린 감독의 손에 죽는다.
그런데 영화의 핵심은 이런 이야기가 아니다. 왜 괴한이 감독의 집에 들어와 부인과 감독을 괴롭혔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도대체 괴한은 누구냐고? 그는 감독의 영화 전편(全篇)에 출현한 엑스트라였다. 엑스트라였기에 가진 것 없고 힘들게 살았던 그는 술에 취해 부인을 때리고 아이를 때리는 무능한 가장이었다. 그런 그가 가진 것 많고 유학파이며, 외모도 뛰어나고, 부자이고, 착하기까지 한 감독에게 ‘사회적’ 앙갚음을 하려 한 것이다. 그는 아침에 부인을 손수 목 졸라 죽인 뒤 차마 아들을 죽일 수는 없어 데리고 와 감독에게 죽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것일까? 그것은 그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복수>에서 팽 기사가 동진이 보는 앞에서 자해를 하는 것도 그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컷>의 엑스트라도 세상의 불합리에 대해 이렇게 나름의 저항을 하는 것이다. “도대체 한 인간이 어떻게 저토록 완벽한 조건을 타고 날 수 있는가, 나는 왜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가, 이렇게 가족들을 괴롭히면서 비참하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자, 그런데 그대로 죽을 수는 없고 한번이라도 고고한 부르주아들의 위선이라도 까발려 보자.” 하는 심정으로 그는 범행을 계획한 것이다.
만약 이것을 알레고리로 보자면, 부르주아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비판으로 읽을 수 있다. 대중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메워주는 ‘백마 탄 왕자’들은 대개 잘 생겼고, 예의 바르며 학벌 좋고, 부유하며 세련된 사람들이다. 여기서 핵심은 부유한 자들이 다른 조건까지 갖추었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도저히 가지지 못한 조건을 두루 갖춘 것이다. 대중들은 이런 조건을 갖춘 이들을 한편으로는 욕망하지만 한편으로는 비판한다. 그런 자리에 대한 ‘욕망’과 현실에 대한 ‘절망’이 교차하는 것이다. 박찬욱은 프롤레타리아의 이런 절망에 대해 논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박찬욱이 추구하는 것은 극단적 대립일 뿐이다. 단지 그것이 계급의 형식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박찬욱은 계급 문제를 극단적으로 표현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극단적 이야기를 계급의 틀로 엮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에 나타난 계급의식은, 자신이 해왔던 말처럼 그리 체계적이지 않다. 더구나 영화는 계급의 틀로 인간의 선악 문제를 그린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컷>은 프롤레타리아가 듣고 싶은 부르주아의 위선이 아니라 착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위선을 그리고 있다. 착한 사람이 어떻게 악인이 되는지, 또는 될 수 있는지 그 과정을 보여준다. 엑스트라는 어떻게 가족을 죽이고 감독에게 복수를 하게 되는지, 감독은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면서 마침내 부인까지 죽이게 되는지, 인간에 대해 탐구한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면 계급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의 선과 악에 대한 문제로 귀결되고 만다.
그러나 정말로 이 영화의 문제점은 개인의 원한이 강조되면서 더 큰 방향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엑스트라의 개인적 사정이 부각되면서, 그가 저지른 범죄가 부각되면서, 결국 그가 응징 받기를 바라게 된다. 이것은 계급의 대립을 보여주지만 계급의 투쟁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든다. 게다가 이 영화는 극단적인 계급의 대립을 강조하기 위해 과도한 대사를 남발하는데, 그것이 영화를 오히려 죽이는 꼴이 되고 만다. 이 영화는 박찬욱의 그 어떤 영화보다도 대사가 직접적이다. 임원희가 분한 엑스트라가 내뱉는 구구절절한 대사는 관객들에게 상황에 동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이완시킨다.
여기서 다시 박찬욱의 영화에 나타난 폭력성에 대해 거론해야 할 것 같다. 박찬욱 영화의 마니아들은 그의 영화에 나타난 잔인한 폭력의 이미지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반면 박찬욱 영화 싫어하는 이들은 그런 폭력과 기괴한 이미지를 거부하는 이들이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박찬욱의 영화를 보면서 거부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계급 문제를 다룬 두 편 역시 과도하게 폭력의 이미지를 남용함으로써 대립의 이미지를 강조하기보다는 오히려 폭력의 이미지가 지나쳐 하고자 하는 의미의 전달이 약화되는 측면이 있다. 물론 폭력의 이미지를 선호하는 B무비 감독의 영화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이런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이다. 가끔 극단적인 폭력의 이미지를 통해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폭력 이미지의 과잉으로 메시지가 약화된다.

5. 개인적 관점의 계급 갈등만 존재한다
박찬욱의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은 그가 부르주아를 너무 선한 존재로 그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복수>의 동진은 숱한 고생을 겪은 후 자수성가한, 매우 착한 사람이다. <컷>의 감독 역시 능력과 자질을 겸비한 사람이다. 그가 생각하는 부르주아는 완벽한 조건을 겸비한 이들이기에 죄 지을 일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때문에 가난한 이들은 죄를 더욱 짓게 되고 부유한 이들은 죄를 짓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다.
그러나 정말 한국에서 부르주아들은 이런 사람들인가.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아주 궁핍한 상황에 처하지 않은 대다수의 부르주아들은 큰 죄 짓지 않고 살아간다. 오히려 부르주아들이 탈세를 비롯한 숱한 죄를 지으면 살아간다. 근대화 시기에 독재에 빌붙어서 이권을 따내 오늘의 부를 만든 사람들이다. 그들의 부를 유지하기 위해 지금도 편법을 일삼는 사람들이 바로 대한민국의 부르주아들이다. 그들에겐 정통성이 없다.
마지막으로 계급을 다룬 두 영화의 결말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복수>의 결말은 동진이 영미의 지하단원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문제적이다. 왜냐면, 수사관들도 영미의 지하단원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로 이 부분의 결말은 이해가 쉽지 않다. 그들 단체가 현실적으로 존재할 가능성도 없고, 경찰도 모를 정도의 지하결사 조직원이 동진에게 무참히 죽는 것은 느닷없고 어처구니없다. <컷>의 결말 역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괴한이 죽고 난 후 감독이 부인을 죽이는 것은 작위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혹자는 여기서 박찬욱의 진보성을 읽을 수도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반격에 부르주아 역시 어느 정도 굴복하거나 응징 당했다고 읽을 수도 있다. 부르주아도 변화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예상을 뒤집는 결말은 이런 영화읽기를 가능하게 만든다. 프롤레타리아의 노골적인 반격에 고고한 부르주아가 변화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짚을 것은 박찬욱의 영화에는 계급 대립은 있지만 계급투쟁은 없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원한의 이야기만 길게 나열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의 이야기는 재현되지 않는다. 계급 관점에서 박찬욱의 영화를 볼 때 가장 큰 한계는 바로 이것이다. 박찬욱 영화에 나타난 계급의식은 깊은 성찰을 담거나 한국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무척이나 아쉽지만 박찬욱은 이런 것을 그리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는 B무비의 영향을 받은 감독이므로.


강성률․
1970년 경북 안동 출생
․2000년 ≪민족예술≫}에 영화평을 쓰면서 평론 활동 시작
․호서대, 한국기술교대 강사․본지 편집위원

추천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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