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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문화산책/강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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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767회 작성일 08-02-26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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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산․책

감각의 전이, 상징의 이동
―2005년도 상반기 한국 영화의 상징 이동―

강유정(문학평론가)


1. 시각에서 청각으로
포르노그래피에서 소리가 빠지면 어떨까? 신음 소리도, 몸의 마찰이 발생시키는 효과음도 없이 남녀가 서로를 탐하고 뒹구는 장면을 본다면 말이다. 그럼, 거꾸로 한 번 생각해보자. 포르노그래피를 소리로만 듣는 것은 어떨까? 일찍이 깨달은 자, 부처는 색성향미촉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감각적 세계를 경계한바 있다. 색성향미촉이란, 보고 듣고 맛보고 감촉하는 오감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색성향미촉 중 어떤 것이 가장 말초적인 자극일까?
최근의 영화에서 눈에 띄는 특이한 사항 중 하나는 바로 감각의 전이이다. 애초부터 영화는 시각에 의존한 영상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시네마 스코프(cinema-scope)라는 말이 암시하듯 혹은 뛰어난 영상미라는 클리쉐가 증명하듯 분명 영화적 쾌감은 시각에서 시작해 절정을 맞음에 분명하다. 시각은 오감 중 이성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영어에서 “I see”가 “나는 본다.”라기보다 “나는 안다”로 통용되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반면 청각은 시각과 달리 이성적 인지에 기억되지 않고 이성 너머 어딘가 무의식의 공간에 기록된다. 시각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면 청각은 무의식에 저장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각의 전이는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변화는 공포 영화와 미스터리 영화에 가장 극명히 반영되어 있다.
이채롭게도 2005년도 상반기 한국 영화계는 유례없는 장르 영화의 다양성을 경험했다. <혈의 누>로 시작된 미스터리 영화는 <남극일기>를 거쳐 <박수칠 때 떠나라>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한편 <분홍신>에서 시작된 호러 장르는 <여고괴담>을 거쳐 <가발>, <첼로>로 계속될 전망이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미스터리 영화는 우리나라 영화에서 매우 취약한 장르라는 암묵적 동의 하에 놓인 장르라는 점이며 또 하나 이들 영화들이 공교롭게도 몇 가지 공통점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남극일기>, <혈의 누> 등은 <올드 보이> 이후 미스터리 영화의 공식 문법처럼 되어버린 외디푸스적 궤적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이 두 영화는 공포의 근간이 바로 내면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또한 조우한다. 한편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분홍신>, <가발>, <첼로>, <목소리(여고괴담 4의 제목)> 등은 신체의 일부를 환유하는 혹은 신체의 일부 이미지를 전유하는 패티시즘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이는 한편 매우 여성적인 욕망을 환기한다. 하루 종일 춤을 추게 만들어 발목을 잘라낼 수밖에 없었던 분홍신의 이야기, 여성의 변신을 가능케 하는 소도구인 가발 등의 소재는 그 제목부터 이미 여성적 욕망의 고착임을 확신케 해준다. 그렇다면 올해 영화계에서 두드러진 이러한 경향들은 단순한 우연인가? 아니면 동시대적 문화계의 흐름인가? 그것도 아니면 상업적 계산이 빚어낸 유행인가? 아마도 이 글은 어쩌면 사소한 우연일 수 있을 이 경향에서 동시대 문화의 도상을 읽어내고자 하는 시도일 것이다.


2. 여성적 욕망에 대한 지독한 오해, 패티시즘과 호러
2005년도 여름 한국 호러 영화는 <분홍신>과 함께 시작되었다. <분홍신>은 “잔혹동화”라는 광고문구와 함께 신발이라는 욕망에 곧잘 은유되던 페티시즘에 대한 조명이 되리라 주목받았다. 게다가 <분홍신>은 <와니와 준하>라는 색다른 멜로 영화로 데뷔한 감독의 두 번째 선택이라는 점에서 이채롭기까지 했다.
제목에서 드러나다시피 <분홍신>은 안데르센의 동화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원래 「빨간 구두(Red shoes)」였던 제목이 「분홍신」으로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됨으로써 신랄한 욕망을 환유하던 “붉은 색”은 보편적 여성성에 깊이 각인된 욕망의 단죄로 함께 오역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날 우연히 얻게 된 “분홍신” 때문에 끊임없이 춤을 추게 된 소녀, 결국 발목을 스스로 잘라낼 수밖에 없었던 잔혹함을 통한 허영에 대한 경고가 동화 「분홍신」이 행간에 숨겨 놓은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김용균 감독의 <분홍신>이 제유하는 것은 무엇일까?
신발 특히 하이힐은 여성의 성적 욕망을 은유하고 그것을 제유하는 오래된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분홍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선재(김혜수)”는 남편이 외도를 한 것을 발견하고 난 후 딸과 함께 집을 나온다. 남편과 이혼한 후 새로운 살림집을 찾아 나선 선재의 모습은 나카다 히데오 감독의 <검은 물 밑에서>가 보여주었던 인물 구성과 유사해 보인다. <검은 물 밑에서>는 이혼한 지적인 엄마가 딸아이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귀기와 맞서는, 즉 엄마의 모성애에 주목한 영화였다. 그런데 소재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분홍신>의 모녀관계라는 설정의 목표는 정반대의 극점에 놓여 있는 듯싶다. <분홍신>에서 엄마와 딸은 ‘분홍신’을 두고 서로 대결하고 길항하며 파괴한다. 즉 영화 속에서 “분홍신”은 모성애라는 여성으로서의 마지노선에 가까운 이타적 감정이자 본능마저 침범하는 여성의 욕망을 제유한다. 엄마도 딸도 중요하지 않은 욕망에서, 친구나 동료와 같은 유대는 쉽사리 거부된다. 그렇다면 과연 친구와 엄마와 딸마저도 버리게 하는 여성의 욕망이란 과연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영화 속에서 “분홍신”이 제유하는 욕망이란 소유라는 구조로 상징계적 현실에서 질서가 되어버린 일부일처제에 대한 욕망으로 구체화된다. 자신의 발에 맞지 않자 발뒤꿈치까지 잘라내야 했던 원 텍스트의 잔혹함이 암시하듯 이 부분은 발에 맞는 단 하나의 신발이 환기하는 「신데렐라」의 비전과 닮아 있다. 선재는 매우 현대적이며 지적인 여자로 그려져 있지만 남편의 외도, 그러니까 자신의 발에만 맞으리라고 기대했던 신발이 다른 누군가의 발에 신겨져 있음을 발견하고, 내면으로부터 철저히 파괴되는 여성으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점은 “분홍신”을 최초 발견하고 주운 자가 아니라 그것을 빼앗은 여자가 단죄 받는 영화적 설정을 설명해준다. 즉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것, 남의 남편을 탐한 여자는 목숨을 빼앗기는 것이다.
여성적 욕망에 대한 환유라는 영화의 표면적 전언과 달리 일부일처제를 수호하고자 하는 분홍신의 메타포는 오히려 여성의 욕망을 상징계적 질서와 가부장적 체제에 묶어두고자 하는 음모에 가까워 보인다. 혐의는 하필 남의 것을 탐하는 자가 모두 여성이며, 그것 자체가 여성적 욕망으로 호명되고 있다는 데서 좀더 불쾌한 것으로 확대된다. 이러한 행간은 가부장적 질서의 안온함을 공포스러운 파멸로 이끌어가는 것이 바로 ‘남의 것을 탐하고자 하는 여성적 욕망’에서 기원한다는 위험한 정치적 편견을 내재하고 있다.
여성의 욕망을 여성적 연대에 대한 회의의 시선으로 구체화한 편견은 <여고괴담>에서도 드러난다. <여고괴담>은 한국 영화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참조 사항이자 브랜드임이 자명하다. <여고괴담>이 기존에 거둔 성과는 관객의 중인환시리에 여고라는 구조의 잔혹함을 노출했다는 데서 기인한다. 방점을 찍어야 할 부분은 “여고”이지 “괴담”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고괴담>을 통해 그토록 순정한 발음인 “여고”는 파렴치한 성추행, 잔인한 따돌림의 장으로 전도되었고 얼룩진 폭력의 무대로 각성되었다. 언어적 현실, 상징계적 질서의 은닉과 억압을 노출하는 여고. 이에 입시생․여자․미성년의 중첩으로서 여고생은 피억압자의 중핵이자 사회적 소수자의 대명사로 호명되기에 이른다. 은폐된 폭력에 의해 지탱되는 파과기, 이 절묘한 모순 형용 속에서 <여고괴담>은 한 시대를 종횡하는 코드로 부각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고괴담 4>에서 ‘여고괴담’이라는 브랜드가 상징했던 전복의 지점을 거절하고 있는 듯 보인다. 엄밀히 말하자면, 변화의 기미는 이미 3편 <여우계단>에서부터 발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고생의 잔인한 욕망을 성취시켜 준다는 ‘여우계단’은 실상 주술과 비방으로 점철되어 있던 궁중비화의 세계와 다를 바 없다. 이에 여학교는 실재계적 구멍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그들끼리의 욕망”에 아전 투구하는 접전지로 교체되고 만다. 이를 증명하듯 <여고괴담 4>는 여선생님, 여고생, 엄마라는 삼각구도를 통해 진행된다. 그곳에는 아버지도, 남자 선생님도, 남자 친구들도 부재한다. 레스보스와 같은 여학교에서 그녀들은 오로지 또 다른 그녀들의 시선과 청각을 독점하고자 전전긍긍한다. 이제 여학교라는 공간은 자신에게 부재하고 있는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포화된 용광로가 된다. 남성적 질서가 결락된 불완전하고 불온한 욕망의 공간으로 말이다.
십대 소녀의 정체성의 혼란을 담고 싶었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감독이 그려낸 소녀의 자기 대면은 가혹하기 그지없다. 안타깝게도 여고생이라는 아이콘은 엠피3 플레이어와 같은 소도구로 규명되지 않는다. 전작의 성과를 부채로 떠안은 클리쉐나 지리멸렬한 템포 역시 안타깝다.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죽음, 유사 어머니인 선생에 대한 애착으로 구체화되듯 소녀들의 고민은 정체성의 혼란이라기보다 분리장애에 가깝다. ‘초아’는 말한다. “개와 늑대의 시간, 석양을 등지고 내게 다가오는 것이 개인지 늑대인지 알 수 있는, 따라서 진실과 거짓이 구분되는 시간”이라고. 하지만 과연 진실 여부와 진정성으로 검증받아야 할 것은 여성이라는 주제를 소재로 차용한 감독의 의도가 아닐까?
<가발>은 그 출발이 좋은 영화였다. 원신연이라는 감독은 이미 단편 영화 몇 편으로 귀재라는 소리를 들었고, 티저 포스터는 소재를 통한 공포의 창출이라는 목표를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깡마른 등뼈 옆에 놓인 탐스럽게 윤기 나는 가발의 불협화음이란! 원신연 감독은 영화 크랭크 인 시점부터 “새로운 스타일”의 공포 영화를 만들겠노라 선언했고 평단과 언론은 그 선언에 대해 기대감 부푼 신뢰의 시선을 보냈다. “공포 영화의 관습을 따르지는 않지만 어느 공포 영화보다 무서울 자신 있다”, “이제까지는 만나보지 못한 섬뜩한 공포 영화를 만들겠다.”라는 감독의 말은 기대를 예언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감독의 선포이자 의욕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가발>은 ‘장르의 관습’을 위배하며 새로운 장르의 규칙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일까?
고백하자면, <가발>은 기대한 만큼의 만족이 아니라 오히려 기대에 비례하는 달콤 쌉싸름한 배신감을 줄 영화이다. 어떤 점에서 장르적 관습을 거절하리라는 감독의 약속은 지켜진 셈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관습은 좀더 첨예한 방식으로 행간에 은닉되어 있는 듯싶다. 물론 영화는 장르적 관습을 벗어나고 전복하고자 하는 의욕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이를테면, 영화의 초반 수현(채민서)은 큼직한 플로럴 사방 무늬 패턴의 벽지와 앤틱풍 가구로 장식되어 있던 방 벽지를 모두 떼내 흰색의 모노톤으로 교체해버린다. 눈치 챘다시피 프로럴 패턴과 앤틱풍 가구는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에서 살아 있는 인물 못지않은 연기를 펼쳐 보인 소도구들이다. 이 장면은 집안과 자매라는 유사한 소재를 이용하지만 이전의 영화에서 보여졌던 것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무엇을 보여주겠다는 감독의 선고로 받아들여진다. 유리 공예, 사진, 다락방, 간유리와 같은 숨 막힐 듯 포화되어 있는 영화적 미장센들 역시 차별화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신연의 “새로운” 영화적 어법과 문법은 어딘가 너무나 낯익다. 가령, 청회색 톤의 전체 분위기라든가 어딘가 아파 보이는 여동생, 침울하고 그로테스크한 식탁 분위기 등은 그가 거부하고자 했던 관습과 그다지 멀어 보이지 않다. 이는 영화가 공들여 세밀히 숨겨둔 영화적 메타포들에서도 드러난다. 차갑고 서늘하고 위험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이라는 ‘유리’의 이미지, 올올이 셀 수 있는 가닥에 대한 공포, 예컨대 철근 같은, 그리고 사방으로 반복되는 무늬에 대한 공포 등 <가발>에는 공포를 은유하는 수많은 미장센들이 숨어 있다. 공들여 배치하고 숨겨 놓았을 이러한 소도구는 안타깝게도 어디선가 본 듯한 식상함과 연관된다. 이 낯익음은 일상 속 어딘가에 은폐된 공포를 노출시키겠다는 감독의 의지에 부합하기도 하지만 낯익음을 통한 낯선 충격의 유발에는 실패한 듯 보인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가발>이 실패한 영화라기보다 위험한 영화라는 사실에 있다. 영화는 <분홍신>, <여고괴담>이 보여주었던 궤적과 동일하게 친밀한 여성적 유대에 대한 가혹한 의구심에 헌정되고 있다. 얼핏 보기에 <장화, 홍련>과 비슷해 보이는 <가발>이지만 그것의 전언은 완전히 정반대의 척점에 놓여 있다.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이 끝내 죄책감을 벗지 못해 그것을 내면적 자기 심문과 자기 분열로 받아들인 “언니”의 이야기였다면, <분홍신>, <여고괴담>, <가발>은 “딸”을 질투하고, “동생”을 죽이고 싶어하며, “친구”를 버리고자 하는 여자들의 이야기이다. 즉 이들 영화에서 여성적 욕망이라는 말은 최소단위의 유대마저도 실현할 수 없는 여자들의 “질투”라는 말과 동일하게 사용된다. <분홍신>에서 엄마 선재(김혜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딸”과 “분홍신”을 차지하기 위해 악다구니를 하면서 싸우고 심지어는 딸의 목숨까지 위협한다. <여고괴담>에서 소녀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을 독차지하기 위해 잔인한 음해와 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급기야 <가발>에서 언니 지현은 공포를 핑계로 동생 수현을 죽이기에 이른다.
어떤 점에서 <가발>은 언니 지현이 동생을 죽일 수 있는 심리적 알리바이를 만드는 데 영화의 서사가 할애되고 있다 말할 수 있다. 동생 수현은 뇌종양 말기의 환자이며, 언니 “지현”은 그녀가 곧 죽게 될까봐 공포스러워하면서 동생을 지극히 아낀다. 표면적으로 지현은 동생의 죽음을 지연하고 그것을 안타까워하는 듯하지만 실상 동생에 대한 애착은 이기적 이용에 가깝다. 영화의 서사 가운데서 지현은 헤어진 애인을 붙잡는 핑계로서 아픈 동생을 이용하는 장면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지현은 슬픔과 두려움에 가득찬 눈으로 헤어진 애인에게 호소하고, 애인은 수현이 죽을 때까지만 네 곁에 있겠노라 공공연히 선언한다. 즉 지현의 애정은 애인의 관심을 묶어두기 위한 핑계이자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이 추측은 영화의 마지막 결국 애인이 자신의 품게 안기자 동생의 말을 믿지 못하고 카메라로 내려치는 장면에서 확신으로 굳어진다. 지현은 동생의 두 가지 말, “나 머리카락이 자라.”라는 말과 “언니 우리 어린 시절에 말이야.”라는 말 가운데서 전자만을 취사선택해 듣는다. “나 머리카락이 자라.”라는 말은 아픈 수현에게 목숨에 대한 열망보다 더한 여성으로서의 성적 욕망이 남아 있다는 말로 번역되며, 표면상 이는 여전히 수현의 몸속에 다른 죽은 자의 영혼이 남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지현은 수현의 머리를 내려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지현이 의도적으로 곡해한 것에 가깝다. 결국 애인과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키워왔던 동생에 대한 애정은 애인을 유혹하려 했던 빙의 상태의 동생에 대한 증오를 이기지 못한다. 귀신이 들려서였건 말건 간에, 머리를 내려치는 순간 동생 수현은 지현의 애인을 유혹하려했던 것에 대한 처벌을 받아 마땅한 요부에 불과한 것이다.
일별만으로도 알 수 있다시피 <분홍신>, <여고괴담>, <가발>에서 드러나는 여성적 욕망에 대한 시선은 불쾌하다 못해 위험하다. 그것은 여성의 몸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닌 장식물로서의 패티시를 통해 여성적 욕망을 허영으로 강등시키고자 하는 남성적 시선의 전횡이며, 한편 여성적 유대에 대한 불신과 가격을 목표로 삼고 있는 보수적 오해의 구체적 산물이다. 이러한 여화 속에서 여성의 욕망은 기펜제 효과처럼 타자의 시선에 매개된 것은 최소단위의 애정마저도 불식하고 독차지하고자 하는 위험한 폭력으로 그려진다. 결국 이 영화들은 동화 「분홍신」보다 더한 가학적 교훈이며 남성 위주의 재단으로 귀결되고 만다.
슬래셔 무비에서 난도질당하는 여성 인물은 성적 문란을 단죄 받는 마녀재판의 영화적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한국 영화에서 드러나는 패티시즘에 고착된 여성의 욕망이라는 비전은, 여성의 욕망을 하나의 고착으로 축소하고 패티시즘의 의미를 불필요하고 소루한 것에 목숨을 걸고 집착하는 여성에 대한 오해로 드러난다. 영화의 표면적 문맥상 여자들은 주인공으로 활보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녀들은 영화적 문맥의 바깥에서 남성적 시선의 횡포 아래 난도질당하는 여성 희생자들과 다르지 않은 셈이다.

3. 끊임없는 외디푸스적 좌절과 내러티브의 부재.
결국 찾아 헤매던 과오의 주체가 자신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점에서 <여고괴담 4, 목소리>나 <분홍신>, <가발>의 비전은 최근의 한국 영화의 주도적 흐름이라고 할 수 있을 외디푸스적 자기 심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흥미로운 것은 <남극일기>, <혈의 누>, 그리고 <올드 보이>와 같은 남성적 오이디푸스 서사에서와 달리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영화에서 그들은 누추하고 편협한 욕망과 조우한다는 사실이다. 즉 남성적 외디푸스의 자기 심문이 상징계적 모순과 그것의 불완전함을 고발하는 하나의 단초로서 기능한다면, 여성적 외디푸스의 서사는 결국 단죄 받아야 할 자는 스스로임을 발견하는 데에 지나치게 할애되어 있다. 요컨대, 남성의 자기 발견이 운명적 결함과 비극을 환기했다면 여성의 거울은 고작 자멸을 초래할 뿐이다. 그렇다면 남성적 자기 발견이 환유하는 상징계적 모순, 그 구멍은 무엇인가? <남극일기>, <혈의 누>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되어줄 듯하다.
남극은 체감이나 경험에 의해 추적되는 공간이 아니다. 손에 꼽을 수 있는 몇 사람을 제외한다면 대개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남극이란 꿈의 세계나 달나라처럼 결코 감각될 수 없는 지평 너머의 공간이다. 이는 곧 우리가 <남극일기>에서 바라보고 믿게 될 “남극”의 비쥬얼 이펙트들이 엄밀한 의미에서 남극의 실제가 아니라 이미지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광활한 남극을 훑다가 그 위를 걸어가는 여섯 명의 대원을 헬기에서 포착한 <남극일기>의 오프닝 신은 따라서 영화가 보여줄 것이 이미지로서의 “남극”임을 선언하는 일종의 날인이자 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시원한 헬기 숏을 통해 제공되는 남극대륙은 정복하고 극복해야 할 자연이라기보다 위험한 분열을 은닉한 실재(the real)로서 다가온다. 이미지로서의 “남극”이라는 설정은 제목이 비록 남극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이 굳이 “남극”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역설을 허용한다. 이를 증명하듯 실상, 영화의 주요 장면은 남극이 아닌 뉴질랜드에서 촬영되었다. 즉 관객에게 필요한 것은 극지라는 남극의 이미지이지 반드시 남극은 아닌 셈이다. 이는 한편 우리가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바가 내셔널 지오그래픽류의 사실성이 아니라 그것이 제유하고 상징하는 의미라는 것을 분명히 해준다. 그렇다면 임필성 감독이 ‘남극의 이미지’를 통해 구체화하고 싶었던 내면의 드라마란 과연 무엇일까? 단서는 검은 스크린 위에 한 글자씩 떠올랐던 “도달 불능점(POI: Pole of Inaccessibility)”이라는 말 속에 숨어 있다.
탐험대원 김민재(유지태)에 의해 최초로 설명되는 “남극”의 면모는 밤과 낮이 구분되지 않고 6개월씩 지속된다는 점이다. 남극의 시간은 6개월간 해가 지지 않는 낮과 6개월간 해가 떠오르지 않는 밤으로 구분된다. 밤과 낮의 분리가 사라진 남극의 상태는 구분이 사라진 상태야 말로 카오스라는 레비나스의 언급을 상기할 때 지옥도로 다가온다. <남극일기>에서 제시되는 남극이란 밤의 자리를 낮이 차지하고 낮의 영역을 밤이 침범한 무질서와 혼돈의 공간인 셈이다. 일년 열두 달, 하루 이십사 시간의 제도적 규율에 맞추어 살던 대원들에게 구분이 설정될 수 없는 남극의 카오스는 극심한 공포로 내면화된다. 그들은 점점 자신이 서있는 좌표를 잊고 대원들 간의 유대를 의심한다. <남극일기>에서 사람과 사람을 망치고 위협하는 것은 자연의 횡포가 아니라 내면에 똬리 틀고 있는 의심과 공포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2.35:1의 시네마스코프 위에 실현된 과장된 아웃 포커싱과 인물에 대한 익스트림 클로즈업 숏은 인물들 간의 괴리감과 괴리에서 비롯된 고독한 공포라는 상태를 표현해내기에 충분한 장치로 기능한다. 6명의 대원들이 각각 은닉하고 있는 내면적 공포와 거리감은 익스트림 클로즈업과 익스트림 롱 숏이라는 과감한 대조를 통해 가시적 격렬함으로 제시된다.
중요한 것은 <남극일기>의 숏들이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익스트림 클로즈업이라는 사실이다. 관객에게 육박해 오는 것은, 과도하게 바짝 들이밀어진 데다가 신경 쇠약 직전의 표정을 호소하는 인물의 불안한 눈빛들이다. 이는 영화가 던지고 있는 질문이 “남극”이라는 공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남극”으로 상징되는 극지에 놓인 한 인간의 내면에 대한 것임을 알게 해준다. 그들의 탐험이 진행될수록 전경화되는 것은 남극의 면모도 극한을 정복하는 인간의 의지도 아닌 각각의 내면에 은폐해 왔던 소루하고 비참한 욕망과 공포일 따름이다. 결국 그들의 노정은 자신이 은닉했던 것들과 불편한 조우로 귀결되고 만다. “남극이 그들을 미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미치기 위해 그들은 남극으로 간” 셈이다.
남극은 반드시 남극일 필요가 없는 극지, 대낮의 서울 한복판이라 할지라도 극한의 상황에서라면 언제든지 출몰하고야 말았을 광기의 공간이다. 원근법적 감각의 상실로 이해할 수 있는 화이트 아웃 현상에 직면한 이들에게 내려진 저주는 밀봉된 욕망에 대한 자기 검열이자 확인으로 요약된다. 도달 불능점에 가는 도정에 발견하게 된 광기는 즉 필연적으로 한번쯤은 대면하게 되어 있는 근원적 공포인 셈이다. 광기와 귀기가 대원들의 영혼을 잠식한 이후의 영화적 내러티브는 대장 최도형(송강호)의 광기와 각각의 대원들이 경험하게 되는 공포로 진행된다. 감독 임필성이 얼핏 이야기하듯 최도형의 캐릭터는 <모비딕>에 등장하는 에이하브 선장과 닮아 있다. 그와 대립하는 이성적 스타벅 부선장의 면모는 이영민 부대장으로 구체화되며 또 한편 팀의 막내인 김민재와 최도형의 대립은 동시대 영화의 맥락에서 이미 진부해진 부자간의 갈등 양상을 고스란히 재현해준다.
문제는 <남극일기>가 일종의 미스터리물로 관객에게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분명 80년 전에 남겨진 일기라는 오브제는 이 영화를 미스터리적 어법으로 오해하기에 충분한 실마리가 된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남극일기>에 주제적 코드가 너무나 많이 산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광기와 이성의 대결, 내면적 욕망 및 공포와의 직면으로 요약될 수 있을 <남극일기>에는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로 제유되는 현실적 상황에 대한 언급, 인간의 이기심, 절대적 극지를 탈환하고자 하는 욕망의 무모함, 죄의식과 같은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오지’라는 매력적인 영화적 설정을 <남극일기>의 서사는 혼종모방된 나약한 서사로 인해 놓치고 만다. 결국, 영화는 미스터리물이라는 표방이 무색할 정도로 지루하고 예측이 뻔한 서사로 인해 도달 불능점을 놓치고 만다.
미스터리를 표방했으나 결국 긴장과 서스펜스를 발생시키고 유지하는 내러티브 창출에 실패함으로써 영화적 비쥬얼의 효과를 반감시킨 경우는 김대승 감독의 <혈의 누> 역시 마찬가지이다. <혈의 누>(김대승, 2005)는 복잡한 영화이다. 얼핏 보아 잔혹한 신체 훼손 비쥬얼로 호소하는 스릴러물인 듯 보이는 <혈의 누>는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한 영화인 셈이다. 이를테면, <혈의 누>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살인을 통해 조명한다는 점에서 데이빗 핀처의 <세븐>과 닮아있지만, 그것을 내면적 무의식의 차원으로 심화시키고 있기에 좀더 심각하고 한편으론 장애를 넘어선 사랑이란 점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고전적이지만 살기로 전복된 사랑이라는 점에서 당혹스럽다. 어쨌거나 <혈의 누>는 그 잔혹한 하드 고어 장면의 충격만큼이나 복잡한 질문들을 관객에게 던져주는 영화이다. 7년 전에 몰살당한 가족들이 귀기로 되돌아온 고립된 섬의 세계, 부정되어야할 아버지, 금지된 사랑, 신분과 인권, 욕망과 죄의식까지. 따라서 스릴러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범인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밝혀진 이후에도 관객은 좀처럼 개운치 못하다. 아니 오히려 해답은 관객의 내부에 질문으로 변질돼 깊숙이 파고드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과연 <혈의 누>란 어떤 영화인가? 이야기는 조공으로 바쳐질 제지가 실린 수송선이 불에 타는 사건에서부터 비롯된다. 자,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단지 “시작”이자 “실마리”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화재는 바로 훨씬 더 끔직한 비밀을 간직한 몇몇 사람들을 섬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위장된 초대였기 때문이다.
화재 사건을 조사․취재하기 위해 섬에 들어온 자는 세 사람, 군관 이원규(차승원), 최차사(최종원), 그리고 호방이다. 이원규는 섬에 들어오자마자 죽창에 찔려 죽은 남자의 사인이 독살임을 밝혀내고 이처럼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원인수사를 통해 화재를 유발한 진범을 금세 찾아낼 수 있으리라 자신한다. 영화 속에서 이원규는 자신이 갖추고 있는 지식에 대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당당하다. 그는 섬 안 주민들을 종용하고 결계하는 미신적 상상력과, 맹목을 비웃으며 사건을 “과학적”으로 밝혀내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영화 내내 등장하는 “도르래”라는 미장센은 바로 이원규가 의존하고 있는 과학적 지식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철저한 계산을 통해서 성립되고 조율되는 세계관에 대한 아날로지인 셈이다. 자,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이원규가 섬의 제지소에 도착하자마자 고장난 도르래로 인해 부상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도르래”로 상징되는 자가 “도르래”로 인해 훼손당하고 마는 아이러니, 여기에 우선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첫 번째 퍼즐 조각이 숨어 있다.
자, 그렇다면 이쯤에서 이원규가 밝혀내게 될 섬의 비밀, 7년 전의 사건을 복기해 보자. 7년 전 강승률 일가는 천주교도라는 오명을 쓰고 몰살당한다. 오명이라는 말이 암시하듯 강승률 일가의 처참한 죽음은 각자가 진 빚이나 탕감해 보고자 했던 자들의 암묵적 동의 하에서 저질러진 일종의 살해였다고 할 수 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일가가 참혹하게 죽어갔지만 누구도 나서서 진실을 밝혀내지 않는다. 결국 섬 주민이 모두 범인이며 발고자였으며 형 집행자였던 셈이다. 이에 그들의 섬 “동화도”는 우리의 내면 한 구석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는 파렴치의 공간과 마주치게 된다. 따라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 피눈물이 비가 되어 내리는 날에 서로가 서로를 찌르고 자신이 자신의 배를 가르는 광란의 장면은 공모자들의 내면에 숨어 있던 죄의식의 발로로 보는 편이 옳다.
문제는 강승률 일가의 처참한 죽음과 현재 재현되고 있는 살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에 있다. 영화의 서사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면서 현재의 사태를 “설명”해주고자 한다. 후반 약 10분 안에 7년 전의 역사 전부와 그 사이에 은폐되어 있던 음모와 공모까지 모두 스크린 위에 부상한다. <남극일기>가 보여준 한계와 마찬가지로 <혈의 누>가 미스터리 장르로서 보여주고 있는 치명적 약점은 서스펜스를 유지하는 서사, 내러티브의 부재를 들 수 있다. 광활한 남극이라는 대지 잔인한 살해방식이라는 비쥬얼로 관객의 주목을 끌고 난 후, 이 작품들은 관심을 증폭된 긴장으로 확장시키지 못한다.

4. 또 다른 지형의 변화를 예감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내 안에 잠재해 있는 “나”의 욕망과의 조우라는 두 영화의 메시지는, 남성적 자아의 내면을 반성적이며 자기 검열적인 초자아로 전경화하는 데에는 성공하고 있다. 이 성공은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단죄 받아야만 하는 여성적 외디푸스들의 입장과 비교했을 때 더욱 돋보인다. 욕망을 가지고 그것을 관철하고자 했던 이유만으로 여성은 범죄자로, 질서를 깨는 지독한 혼란의 유인자로 지탄받는다. 이러한 지탄의 맥락 가운데, 목소리의 상실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여고괴담 4: 목소리>에는 ‘목소리’를 잃은 “영은”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가발>에도 역시 사고로 목소리를 잃은 언니, 지현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목소리를 잃은 여자들은 이미 결핍된 자들로서 스크린 위를 배회한다.
여성적 욕망에 대한 박해에 가까운 영화의 여성 인물들의 특징이 하필이면 목소리를 잃는다는 사실은, 최근의 한국 영화계에서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감각적 지형도의 변화를 다시 연상케 한다. 공포 영화에서 소리, 특히 여성의 비명은 여성이 피해자임을 각성케 하는 일종의 사이렌이었다. 목소리를 잃은 여성이라는 비전은, 유독 시각보다 청각을 통해 공포를 유발하고자 하는 최근 공포 영화의 특성을 생각할 때 좀더 흥미로운 공통점으로 받아들여진다. 메타포로서의 ‘청각’이라는 새로운 비전은 동시대 문화의 감각적 지향이 이제 시각이 아니라 청각으로 선회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를테면, <주온>의 헐리웃 리메이크 버전인 <그루지>는 청각을 통한 충격과 경이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영화이다. 청각공포라는 말을 탄생시킨 <주온>의 영향 그대로 <그루지>는 관절이 꺾이는 듯한 소름끼치는 소리, 벽을 긁는 괴이한 소음, 빈 집에 홀로 있을 때면 들려올 법한 일상적 환청으로 포화되어 있다.
2005년도의 공포 영화에서 소리는 분위기를 미리 조성하는 조연이 아니라 공포의 심급을 좌지우지하는 주인공에 가깝다. <텍사스 전기톱 살인 사건>은 공포의 주체가 “전기톱”이고 <여고괴담 4, 목소리> 역시 소리가 쟁점이다. 어린 시절 공포 영화를 볼 때 눈을 가리고 그 장면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던 식의 외면은 여기서 통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관객을 괴롭히는 것은 잔혹하게 살해된 시체의 풍경이라기보다 어디선가 들려올 법한 괴기스러운 “환청”들이다. 익스트림 클로즈업된 인물의 표정을 통해 공포를 근접 제시했던 <블레어 위치>, “나는 죽은 사람이 보여요(I see the dead people).”라는 시각적 고백이 이제 “이상한 소리가 들려요.”라는 청각 이상으로 전복될 판인 셈이다.
아마도 곧 감각적이라는 수식어는 시각적 현란함이 아닌 청각적 동요로 교체될 것이다. 끊임없는 음악, 비트의 강렬함이 고막의 진동, 피부의 촉감으로 먼저 다가올 때 우리가 보는 것은 듣는 것만 못하다. 이는 비단, 공포 영화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점에서 공포 영화에서 소리의 영향은 교과서적인 지침에 가깝다. 변화의 양상이 흥미로운 단초로 작용하는 영화로는 정재은 감독의 <태풍태양>을 들 수 있다. 한마디로 <태풍태양>은 눈으로 보는 영화가 아니라 고막의 진동으로 느끼고 피부에 떨려오는 음향으로 감촉하는 영화이다. 시각에서 청각으로의 전이는 그만큼 감각이 말초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각을 잃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상징했다고 한다. <여고괴담 4: 목소리>는 이제 목소리의 상실이야말로 상징적 죽음이 된 동시대의 문화를 체감케 한다. 이미지와 현란한 카메라 웍을 넘어서 그렇다면 영화는 또 어떻게 감각을 감각화해 나갈까? 영화적 표현의 마지노선에 대한 실험으로서 감각의 전이는 진행될 것이다.


강유정․
2005년 <조선일보> <경향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동아일보> 영화평론 입선으로 등단
․한국예술종합학교, 극동대 강사

추천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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