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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서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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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
최인석 「내 님의 당나귀」
(문학수첩 2005년 여름)
하수구에서 건져낸 시든 꽃
한 송이, 혹은 당나귀 한 마리
서영인(문학평론가)
꽤 오랫동안 최인석이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환상을 말해 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무허가 판자촌에서, 창녀촌에서, 또는 삼청교육대에서, 인물들은 때로 털북숭이 괴물이 되고 천년 묵은 지네가 되고 구렁이가 되어 지옥보다 비참하고 잔인한 세상을 견뎠다. 그들이 그 세상을 견디다 못해 집채만 한 파도를 넘어, 외계의 아득한 혹성으로 날아가기도 하고 천년을 살고 만년을 사는 존재로 세상을 허공 끝을 밟듯 살았지만, 그것이 피안을 향하고 있다는 징후를 보이기도 했지만, 우리는 역시 알고 있다. 그것은 그럴수록 더 잔인하고 비참한 세상을 되비추고 있다는 것을.
환상의 영역이 이전 소설만큼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내 님의 당나귀」 역시 이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나’와 순이의 삶이란 결국 지옥을 향해 걸어가는 고달픈 행로의 한자락일 뿐이다. 처음부터, ‘내’가 하수구 위에 판자를 겹쳐놓고 튀김집을 열겠다고 마음먹을 때부터 그 길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렇게 살아가다가는 언제 이 삶을 벗어날지 알 수 없어서 공장을 그만두고 하수구 위에 천막을 치고 튀김집을 열었다. 튀김을 파는 일이 공장에서 밤일을 하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내 집이고 내 일이라는 생각에 “순이의 얼굴에서는 반짝반짝 윤이 났”지만, 그러나 그 일 역시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사는 고달픈 삶을 벗어나게 해주지는 못했다. 상하기 직전의 값싼 재료로 튀김을 만들고, 두드러기가 난 얼굴로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협해야만 그들은 돈을 벌고 예금을 하고 집을 살 수 있었다. 만약 그들이 그때 조금이라도 행복했다면, 그 행복은 냄새나는 하수구 위에 가까스로 발을 걸친 위태로운 행복이었다. 돈 냄새가 하수구 냄새보다 더 강한 듯 보였지만 문제는 하수구에서 퍼 올린 그 돈이 그들을 더 큰 하수구 속에 처박아 넣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그들이 어떻게 행복해질 것인가. 하수구 위에 집을 짓지 않고는 지독한 가난 때문에 도저히 행복해질 수 없고, 하수구 아니고는 집을 지을 데도 없는데, 하수구는 더 지독한 악취로 그들의 삶을 삼켜버린다. 처음에는 돈이 사라졌지만 그 다음에는 마음이 사라진다. 조금이라도 돈을 모아 남들처럼 살아보겠다는 욕망이 조금씩 결실을 맺어 마침내 꿈을 이루었다는 미덕은 결코 이 세상에서는 완성되지 않는다. 상한 음식을 먹고 배탈이 나고, 얼굴이 짓물러 찾아오는 손님들을 외면하고, 심지어 위협하기까지 해야만 비로소 돈은 조금씩 모이기 시작하고, 그러므로 그들의 욕망은 이미 상하기 시작했다. 배달을 가다 다쳐 식물인간으로 누운 순이 앞에서 함께 꿈을 일구려던 소박한 서민의 행복은 갈 길을 잃는다.
살 수 있다는 것인지 없다는 것인지 알아듣기도 어려운 말들을 전하던 병원은 급기야 장기 기증 서약서를 내민다. 더 기막힌 일은 병원과 시장과 세상 앞에서 ‘나’와 ‘순이’가 더 이상 순결한 피해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이미 상한 음식으로 내 욕망을 채웠고, 장기 기증 서약서를 보면서 마음이 흔들렸으니, 부끄럽고 무서운 것은 세상이 아니라 이미 나 자신이다.
어째설까.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 꼴이, 그리고 순이의 꼴이, 우리 부부가 이놈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며 살아온 세월들이 너무나 참혹했다. 지금 저기 의식도 없이 나무토막처럼 누워 있는 순이와 밥을 먹자마자 담배 한 개비 피울 생각도 못하고 허겁지겁 그녀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두르는 내 꼴이 슬프고 안타까웠다. (……) 나는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살아내기 위해 내가 짊어진 이놈의 세상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아무리 안간힘을 다 써도 내가 이놈의 세상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도저히 거역하거나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155쪽)
거듭 강조하건대, ‘내’가 세상을 감당할 수 없는 까닭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가난 때문이거나 갑자기 아내를 덮친 교통사고 때문이 아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상한 음식을 팔아야 하고, 갑자기 죽은 듯 누운 아내를 앞에 두고 장기 매매를 생각하는, 상실해 가는 마음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참혹한 질서는 어디 먼 곳에 따로 구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욕망을 낳고 키우는 사람들에 의해 점점 더 거대한 괴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돈을 벌기 위해 허덕거려서는 그들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돈도 잃고 아내도 잃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은 후에 ‘내’가 얻은 것은 바로 이 깨달음이며 이것이 하수구에서 겨우 건져낸 희망이 될 터이다. 그러니 “갈 곳은 여전히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가지 말아야 하는 곳이 어디인지는 알 것 같았다.”라는 나의 목소리는 하수구를 겅중겅중 뛰어 달아나는 당나귀 한 마리처럼 이 참혹한 세상을 오래도록 떠돌 것이다.
떠나지 않고는 희망을 얻을 수 없다는, 이 집요한 비관주의가 부담스러운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타락과 비정에 분노하고 그곳을 이탈하고자 하는 자들의 마음마저도 어느새 그 질서 속으로 통합해 버리는 세계를 좀더 오래 바라볼 필요는 분명 있다. 때론 노동조합에 무관심한 채로 죽도록 일을 했던, 87년의 민주화보다 하수구 위의 튀김집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던 순이 부부의 냉소가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노동자의 권익이 신장되고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삶의 밑바닥을 전전할 수밖에 없는, 오래 지속되는 빈곤과 처참을 잊지 않기 위한 대가인지도 모른다.
더 큰 문제는 오히려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소설을 통해 드러나는 작가의 세계인식이 너무 패턴화되어서 이전의 소설들이 전하는 울림을 지속시키지 못한다는 점. 세계는 너무 오래도록 잔혹했고, 인물들은 언제나 이곳에서 허우적대다 저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생겨나고 살아오지 않은, 다른 세상에서 온 구원자들이 그들을 이끈다. 고아인 줄 알았던 순이가 남편인 ‘나’도 모르게 오래도록 아비를 감추어두고 있었고, 그 아비는 돌연 나타나 세상에다 행패를 부리면서 ‘나’에게 당나귀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리고 사라졌다. 알고 보니 그 당나귀는 오래 전부터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그것 말고는 희망이 없다고 작가가 말한다면 우리는 또한 이 작가의 집요한 비관을 더 지켜볼 수밖에 없겠지만, 희망이든 절망이든 그것이 어떤 관습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도저히 변할 것 같지 않은 이 세상의 구조가 소설의 익숙한 패턴을 만드는 것은 분명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착된 구조 속에서 삶을 읽는 다른 시선을 발견하는 일은 여전히 작가의 몫이다.
서영인․
2000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평론 「쿨한 일상의 딜레마-김영하론」 등
․현재 경북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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