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19호 특집/최강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27회 작성일 08-02-26 22:55

본문

|특집|왜 문학판은 싸늘한가?


비평 논쟁의 침체와 문학의 죽음

최강민(문학평론가)


1. 침묵의 카르텔과 비평 논쟁의 소멸
요새 비평계는 조용하다 못해 음산한 기운마저 풍긴다. 한때 비평 마을이 정신없이 분주하던 80년대라는 호시절도 있었다. 이때 평론가는 소설가와 시인을 진두지휘하며 반독재, 민주, 민중, 자유, 평등, 통일을 주장하면서 시대의 모순과 첨예하게 맞서 싸웠다. 민족문학론, 노동문학론, 민중문학론, 리얼리즘론 등은 그 당시의 민족민중문학 진영의 비평가들이 애용하던 리볼버 매그넘44라는 강력한 권총 무기였다. 그러나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며 당대의 구조적 모순과 싸우던 평론가 총잡이들은 90년대에 탱크를 앞세운 후기 자본주의의 총공세 속에 주변으로 내몰렸다. 이 과정에서 문학주의를 내세운 일부의 평론가는 출판자본이라는 두목에게 충성적으로 봉사하는 대가로 소설가와 시인 위에 군림할 수 있는 한시적 권력을 양도받는다. 문학주의는 출판자본의 입맛에 맞는 주례사비평의 양산을 지원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작용했던 것이다.
90년대는 텍스트 중심주의라는 기치를 내건 문학주의의 득세 속에 표면적으로 보면 80년대에 이어 비평의 전성시대였다. 그러나 그것은 가치의 준별이라는 비평 본래의 기능을 출판자본 등에 팔아버린 정조 부재의 시대였을 따름이다. 비평은 본래 문학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문학을 사수하는 전위대 역할을 담당한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비평은 본래의 사명을 망각한 채 스타작가를 키우는 기획사의 매니저 역할에 좀더 골몰해 왔다. 매니저의 권력은 스타작가를 얼마만큼 거느리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래서 평론가는 앞 다투어 입에 발린 교언영색의 주례사비평을 양산하며 스타 작가 양산에 열을 올렸던 것이다. 이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만을 토로하는 저항세력들은 중요 문예지의 지면 배제라는 왕따 작전을 통해 고립시켜 버렸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가하는 돈키호테들이 하나 둘씩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문학주의를 앞세워 문단을 전횡했던 세력들은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비판적 글쓰기로 통칭되는 이들 소장 평론가들은 주례사비평 논쟁, 문학권력 논쟁 등을 촉발시키며 문단의 자성을 촉구한다. 문학주의를 내세운 주류들은 비판적 글쓰기에 발끈하여 비평 논쟁에 뛰어든다. 그것은 잊혀졌던 정겨운 풍경의 복원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 비평 논쟁의 과정에서 깊은 내상을 경험한 문학주의 세력들은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입을 봉하는 전술을 채택한다. 자신의 기득권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철밥통의 수비 전략은 침묵의 카르텔로 나타난다. 이것은 ‘아무리 떠들어봐라, 나는 결코 상대하지 않겠다.’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의 자세이다.
비평 논쟁은 기본적으로 대화이다. 대화라는 것은 상대방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요즘의 평론계는 대화의 장 자체가 거의 형성되지 않는다. 정당한 문제제기성의 글이 등장하더라도 자신이 조금이라도 손해 볼 것 같다는 손익계산이 나오면 결코 나서지 않는 영리한 처세술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영상매체와 인터넷 문화의 확산에 따른 문자매체인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모든 문학인의 결집된 전열이 형성되지 못한다. 그럴수록 더더욱 기세를 부리는 상업주의라는 망령들!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 비평 논쟁의 불꽃을 점화하고, 제기되었던 논쟁점들을 성찰하여 문단을 혁신해야 한다. 이 글에서 나는 비평 논쟁이 부재한 이유를 비판적 내시경으로 꼼꼼히 진단하고, 비평 논쟁의 재출발을 위한 몇 가지 처방을 내릴 것이다.

2. 찍히면 죽는다!
과거에 비평 논쟁이 벌어지면 다수가 참가하여 열띤 공방을 펼쳤다. 따라서 그것은 비판하는 자나 비판당하는 자만이 참여하는 축제가 아니라 다수의 문인이 동참하는 논쟁의 축제였다. 논쟁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지닌 견해의 타당성을 주장하면서 상대방이 지닌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는 형태를 취한다. 특히 평론가에게 있어 비평 논쟁은 평소 자신이 갈고 닦아온 총체적 역량을 동원해 다른 존재와 팽팽하게 맞서 대화하는 행위이다. 이런 까닭에 논쟁 당사자들은 논쟁의 심화 과정에서 좀더 높은 경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새 논쟁은 원맨쇼이거나 기껏해야 양자간의 입씨름으로 축소된다. 구경꾼도 많지 않다. 그래서 논쟁은 계속 이어지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나는 경우가 많다. 비평 논쟁의 침체는 평론가가 자신의 전 역량을 겨룰 기회를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기에 기량도 감퇴된다. 나는 비평 논쟁이 침체될 수밖에 없는 원인을 크게 아홉 가지로 분류한다.
첫째, 서열적 권위주의의 작동이다.
비평 논쟁은 반드시 비슷한 연배나 문단 경력을 지닌 사람에게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평 논쟁은 문단의 후배가 선배를 비판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많다. 이때에 소위 선배 평론가들이 후배 평론가와 논쟁하는 것을 일종의 수치로 아는 기이한 문단 풍토가 만연되어 있다. 이것은 평론가 개인에게만 해당하지 않고 문예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문학동네≫는 ‘문학권력 논쟁’ 이후, ≪창작과비평(약칭 창비)≫ 등 동급의 주류 문예지가 비판할 때만 대응하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격이 맞지 않는 문예지와 맞상대하는 것은 본전치기 아니면 손해일 뿐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비≫는 어떨까? ≪창비≫는 비평 논쟁에 참여하지 않고 저 멀리 높은 곳에서 아랫것들을 주시하는 오만함을 종종 보여준다. 비평 논쟁이 소강상태에 빠지거나 자신이 개입해도 별 손해 볼 것이 없다는 판단이 서면 ≪창비≫는 뒤늦게 논쟁에 개입해 우열을 심판한다. 여기에서 ≪창비≫는 여타의 문예지보다 우위에 서 있는 최종 심급체계임을 은연중에 과시한다. 이러한 것들은 비평계에 만연한 서열적 권위주의를 말해준다. 진정한 비평 논쟁을 하려면 계급장을 떼고 동등한 자격에서 논쟁이 이루어져야 한다. 서열적 권위주의가 작동하는 곳에서 학식, 지위, 나이 따위가 자기보다 아래인 사람에게 묻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는 불치하문(不恥下問)의 정신은 당연히 실종된다.
서열적 권위주의는 필연적으로 성역을 구축한다. 성역이 존재하면 금기가 발생한다. 그 금기는 성역에 대한 신비화를 촉진시킨다. 그러면서 비평 논쟁의 무풍지대를 형성한다. ≪문학과사회(약칭 문사)≫에서 대표적인 성역은 1990년에 작고한 김현에 대한 것이다. ≪문사≫는 2000년에 ‘김현 10주기 기념 문학 심포지움’을 개최하고 이 내용을 여름호에 싣는다. 이 심포지움에서 권성우는 「4·19 세대 비평의 성과와 한계」라는 글을 통해 김현을 비판적으로 조명했다. 이에 대해 ≪문사≫ 동인들은 신경질적인 반응 속에 집단적인 공격을 가했다. ≪문사≫ 동인들의 비판에 대해 권성우는 반론권을 요청하였으나 이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문사≫ 동인에게 김현이라는 정신적 우상을 비판한 권성우는 대역죄인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원로 문학평론가인 백낙청은 본받을 만한 사례이다. 백낙청은 ≪창비≫ 2004년 여름호에서 「소설가의 책상, 에쎄이스트의 책상-배수아 장편 󰡔에세이스트의 책상󰡕 읽기」라는 평론을 발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다음호에서 중견 문학평론가 김명인과 소장 평론가 김영찬이 백낙청의 평론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겨울호에서 백낙청은 「‘창비적 독법’과 나의 소설읽기」라는 평론을 통해 김명인과 김영찬의 평론에 성실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창비≫가 적지 않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아직 ≪창비≫에서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이벤트가 간혹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나는 평소 존경하는 문학평론가 김윤식의 현장비평이 지닌 공과에 대해 짧은 평론을 <교수신문>에 쓴 바 있다. 그 글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서열적 권위주의와 그것에서 파생된 성역을 인정하지 않는 평소 소신 때문이다. 김윤식도 카프 연구가 금기시되던 1970년대에 선도적으로 카프 문학을 연구하여 국문학 연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바 있다. 내가 비평에 있어 성역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도 바로 김윤식에게서 소중하게 배운 것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내가 스승인 김윤식을 감히 비판했다고 하여 직계 제자인 김승환이 나서서 내 논지를 왜곡되게 공박한 바 있다. 여기에서 왜 김윤식은 백낙청과 같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지 안타깝다. 이런 점이 바로 현장 비평가로서 김윤식이 지닌 한계가 아닐까 한다.
둘째, 문단 주류의 기득권 사수를 위한 협박 및 왕따 작전이라는 봉쇄정책이다.
비평적 논쟁이 확산되지 못하는 것은 무엇보다 기득권을 사수하려는 기존 주류 세력의 방해 공작 때문이다. 서열적 권위주의로 무장한 주류 세력은 무엇보다 자신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견디지 못한다. 그들은 비판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하극상의 범죄로 규정해 신속하게 대응한다. 그것은 발언권 자체를 주지 않거나 자사의 문예지면을 활용해 공격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문학평론가 권성우, 이명원, 고 이성욱은 비판적인 글을 썼다고 하여 주류 문예지의 살생부에 올라 배척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지면 제공 박탈만이 아니라 ≪문학사상≫은 ‘이상문학상’ 운영을 비판했던 사람들을 법적으로 고소하겠다는 위협을 통해 비판적 평자들의 목소리를 봉쇄해 버린다. ‘찍히면 죽는다.’라는 살벌한 언어가 문단에서 현실적 구속력을 갖고 유통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합리적 현실을 목격하면서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쉽게 비판적 문제제기를 할 수 없게 된다.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눈뜬장님 3년과 같은 굴욕적 순응 기간을 지내다보면 이런 체제에 익숙해져 치열한 비평 논쟁은 참으로 낯선 이야기가 된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은 이와 같은 현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정당한 문학적 비판을 많은 수의 편집자나 비평가들은 그들 자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비평을 통해 합리성을 강조하지만, 막상 합리적인 비판이 제시되면 비판을 제기한 해당 비평가를 소외시킨다. 비평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발언의 장인데, 이들은 문예지로 상징되는 발언으로 장으로부터 문제의 비평가를 완전히 소외시킨다.
더 큰 문제는 대개의 유력한 매체들이 암묵적인 ‘카르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략) 그러니 이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는 것은, 비판자가 문단의 기득권을 스스로 포기할 때에나 가능하다.(이명원, 「문학제도와 문학비평가」, 󰡔파문󰡕, 새움, 2003, 118-119쪽)

셋째, 문단과 학계의 검은 유착이다.
신춘문예나 문예지를 통해 등단하는 대부분의 소장 평론가는 대학원생이거나 강사들이다. 이들은 강단비평인 연구와 현장비평인 평론을 동시에 수행하는 이중적 존재이다. 이런 상황에서 선배 평론가들의 잘못된 행태를 비판하는 소장 평론가의 글은 현장비평의 문제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문단의 중견이나 원로 평론가들 대부분이 학계의 교수로 군림하고 있기에, 소장 평론가의 신랄한 비판은 교수 임용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소장 평론가들은 박사논문 통과, 학회지 논문 게재, 더 나아가 신임교수의 선정에 있어서도 선배 평론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에 짓눌리고 있는 것이다. 소장 평론가들은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자기합리화 속에 비평 논쟁을 삼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구조적 모순은 소장 평론가들을 텍스트 비평에 집착하게 만들거나 순한 양으로 길들여버린다. 그러면서 문학평론가라는 직함은 교수가 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일종의 자격증으로 전락한다.
넷째, 비합리적인 패거리주의의 작동이다.
신춘문예나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문인들이 제일 먼저 경험하는 것은 바로 패거리주의이다. 이 패거리주의를 낳게 한 근원에 에콜과 학풍이 자리한다. 에콜이 유사한 문학적 세계관을 지닌 문학공동체라면, 학풍은 그 학교 출신만이 지니는 차별적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에콜과 학풍이 잘만 결합한다면 문학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정실주의와 권력 욕망이 개입하면서 에콜은 배타적 사단으로, 학풍은 학연이라는 비합리적 인간관계로 변질된다. 신춘문예나 문예지를 통해 등단하더라도 주류의 패거리에 끼지 못하면 지면을 얻지 못해 주변을 맴돌다가 사장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등단한 문인들은 기를 쓰고 이 패거리에 동참하려고 피똥을 싼다. 이 패거리주의를 내심 지배하는 것은 상명하복의 서열적 권위주의이다. ≪문학동네≫ ≪문학과사회≫ ≪문예중앙≫ 등의 문예지는 에콜을 내세우고 있지만 ‘패거리주의’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 보이지 않는다.
또한 비평계에서 단연 독보적인 학맥은 서울대이다. ≪창작과비평≫ ≪문학과사회≫ ≪문학동네≫ 등 유력 문예지들의 편집위원은 과반수나 그 이상이 서울대 출신 평론가로 이루어져 있다.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명문 사립대들이 결합한 학벌주의는 패거리주의를 지탱하는 유력한 동력원이 된다. 중요 문예지 편집위원들이 대개 서울대로 구성되기에 이들은 고급 정보를 사적 네트워크를 통해 상호 교환함으로써 문학담론의 헤게모니를 선취하거나 유지하는데 활용한다. 결국 학연(또는 학벌)과 사단이 결합한 패거리주의는 자신의 이익을 침해하는 비판적 논쟁이 발생하더라도 이것을 문단 전체로 확산시키지 않고 봉쇄하는 침묵의 카르텔 구조를 암묵적으로 형성한다. 이것은 기득권을 계속 향유하려는 전형적인 수구반동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3. 비평적 자의식의 실종과 보신주의
다섯째, 출판자본의 공룡화와 상업주의의 범람이다.
90년대 이후 출판자본은 문학의 진정성을 일종의 장식품으로 활용하면서 문학의 상품화에 앞장서왔다. 질(best quality)보다 판매량인 베스트셀러(bestseller)가 무엇보다 중요시 된 것이 90년대 문학이 남긴 부정적 유산이다. 문예지의 편집위원이나 편집동인에게 자본을 공급해 지속적인 문예지를 발간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출판자본의 힘이다. 문예지 편집위원도 출판자본의 뜻을 거스른다면 자신이 확보한 문학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출판자본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예민하게 포착해 알아서 봉사하는 것이 문예지 편집위원의 중요 업무가 된다. 이 과정에서 문예지를 발간한 출판사에서 나온 단행본들에 대해 편집위원과 청탁한 필자들이 합심해서 주례사비평을 함께 생산한다. 이것은 편집위원이 출판자본이라는 VIP 물주를 위해 봉사하는 대표적인 서비스의 하나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비판적 글쓰기는 출판자본과 편집위원이 러브호텔에 함께 투숙한 야합의 애정 관계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문학평론가 김명인은 출판자본과 문학권력의 공생 관계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출판자본은 자연스럽게 문학권력의 자리에 등극하게 된다. 투자와 기획과 홍보 전략을 통해 히트작을 많이 산출한 출판사에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자 하는 기성작가와 작가 지망생들이 줄을 잇고, 그 생사여탈권을 쥔 출판사의 사주, 기획책임자, 편집위원 등에게는 문학적 권위와는 성격이 다른 힘, 즉 문학권력이 형성된다. 이 문학권력은 출판자본의 등을 업고, 문학작품에 문학성 대신 상품성의 서열을 부여하며, 언론과의 유착을 통해 그 상품성의 서열을 문학성의 서열로 치환하고 고착시킨다.(김명인, 「단자, 상품, 그리고 권력」, 󰡔자명한 것들과의 결별󰡕, 창작과비평,2004, 242쪽)

여섯째, 비평가 본인의 자의식 부족과 보신주의 때문이다.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을 통해 등단한 소장 평론가들은 대개 현장비평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문학적 명성을 쌓는 일에 헌신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문학사에 등재될 만큼 위대한 평론가가 될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똘마니 의식은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내면화한 왜소증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적당히 현장비평을 하면서 이름을 조금 얻고, 궁극에는 그것을 활용해 대학교수라는 봉건군주가 되고자 한다. 이것은 현장비평가로서 지녀야 할 비평적 자의식의 미흡에서 기인한다. 누구나 처음부터 김현, 백낙청, 김윤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꾸준히 자기 분야에서 노력하는 자에게 대가라는 명칭은 부여된다. 이런 점에서 소장 평론가들은 문학적 야망을 크게 품고 똘마니 의식을 과감하게 청산해야 한다. 문학사에 남는 위대한 평론가가 되겠다는 꿈이 없는 평론가들에게 문단 주류들이 제공하는 달콤한 당의정은 어느새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족쇄가 된다. 기존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비평 논쟁에 잘못 가담해 선배 평론가에게 찍히면 교수 되기 힘들거나 강의 자리도 얻을 수 없다는 현실인식은 평론가들을 보신주의에 쉽게 빠져들게 한다. 희생 없는 곳에 새로운 세계의 창조와 대가로의 성장은 기대하기 힘들다. 일상의 안락함을 포기하고 사즉생(死卽生)의 자세로 투쟁하는 게릴라 정신이 무엇보다 소장 평론가에게 요구된다고 하겠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난관을 극복하고 비평의 진정성을 향해 나아가는 도정이 값진 의미를 지닌다. 참다운 비평 논쟁은 자신의 정체된 틀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향해 떠나는 오디세우스(Odysseus)의 모험인 것이다.
일곱째, 이념성의 약화와 문학주의의 확산에 따른 협소한 텍스트에 대한 집착이다.
요새 나온 평론집을 보면 작가론이나 작품론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과거의 평론집이 총론이나 주제론이 1부를 구성하고, 2・3부에서 작가론이나 작품론을 배치했던 것과 비교한다면 그 변화의 정도를 감지할 수 있다. 90년대 거대담론이 축소되면서 시대를 이끌어갈 거대담론은 찾기 힘들었다. 이념적 방향 상실 속에 주체의 부재는 기정사실화되고, 불확정성・비종결성 등의 논리가 유행처럼 퍼져나간다. 이런 상황에서 평론가들은 문학판 전체를 읽으려는 노력보다 바로 앞에 주어진 텍스트에 집착하면서 미로에 빠져버린다. 숲은 보지 않고 나무만 보고 이야기하려는 평론가들의 행태는 문학주의로 칭송되거나 부작용이 은폐된다. 다윈이 진화론에서 밝힌 것처럼 미시적 텍스트 비평에 길들여지면 거시적 판세를 읽으며 비평적 논쟁을 감행할 시선마저 퇴행되거나 상실된다. 평론가들은 논쟁을 하고 싶어도 논쟁할 언어가 빈곤한 것이다. 비평 논쟁이 불임인 시대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유토피아에 대한 강렬한 욕망과 디스토피아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다.
여덟째, 대화성의 상실과 승자와 패자의 이분법적 도식의 작동이다.
비평 논쟁은 기본적으로 치열한 대화의 과정이다. 대화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문단 주류들은 문학권력 논쟁에서 소장 평론가들의 정당한 문제제기를 또 다른 권력 욕망으로 논점 흐리기를 시도하며 타자화시킨다. 그러면서 양자간에 대화할 가능성을 원천 봉쇄한다. 문단 주류에 의한 왕따 작전과 협박에 의해 비판적 글쓰기 진영은 고립무원의 섬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비판적 글쓰기 진영은 상대방에 대해 문학의 진정성을 위해 함께 노력할 동지라기보다 하루속히 퇴치해야 할 바이러스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문단 주류의 야비한 공세는 적과 아군이라는, 승자와 패자라는 이항대립체계를 양산했던 것이다. 문단 주류가 틈만 나면 말하는 열린 다원주의는 소장 평론가의 비판적 글쓰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비평은 대화라기보다 적으로 규정된 상대방을 무찌르는 KO싸움으로 변질된다. 비판적 글쓰기 진영에서 이러한 이항 대립적 구도를 타파하려고 하지만 문단 주류의 호응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비평 논쟁은 열린 대화를 통해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평 논쟁은 승자독식주의를 배격한다. 이것을 위해 무엇보다 솔직하게 자신의 취약점 내지 한계를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1964년에 순수문학론자인 시인 이형기는 문학평론가 김우종의 참여문학론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그는 비평 논쟁의 과정에서 순수문학론이 지닌 취약성을 자각하면서, 1965년에 참여문학론을 긍정하는 쪽으로 선회한다. 여기에서 보듯 비평 논쟁에 있어 자신이 주장한 논리의 취약성을 패배로 받아들이기보다 좀더 나은 세계로 나아갈 계기로 인식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참다운 비평 논쟁은 상대방을 죽이기보다 문학의 진정성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상생의 길이다. 물론 때로 부패한 환부는 도려낼 필요도 있다. 이러한 비평 논쟁의 법칙을 깨닫지 못한 평론가들이 문단을 장악하면서, 비평 논쟁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싸움으로 전락한다. 이것은 비평 논쟁의 활성화를 가로막는 부정적 이미지를 생산한다.
아홉째, 전망 부재의 현실 인식 속에 무기력한 패배주의와 냉소주의의 확산이다.
진보적 소장 평론가들이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문단 주류들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비평의 논쟁을 회피해 왔다. 그러면서 진보적 소장 평론가들을 죽이는 작업에 동참해 왔다. 문학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들이 현실에서 좌절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반 독자나 일부 평론가들은 문학판 자체에 대한 환멸을 경험한다. 이것은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패배주의적 태도를 낳는다. 아무리 비판해도 현실은 변할 것이 없기에 기를 쓰고 비판하는 투쟁 행위는 무의미한 몸짓으로 인식된다. 그러면서 그 더러운 문학판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지독한 냉소주의를 양산한다. 냉소가 현실비판의 동력으로 작동하지 못할 때, 냉소주의는 수동적 허무주의로 귀결될 가능성이 많다. 소장 평론가들이 이러한 냉소주의의 늪에 깊이 빠져들었다면 새로운 문학 패러다임의 창출은 기대하기 힘들다.

4. 비평을 다시 생각한다
200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김정란 논쟁, 서정주 논쟁, 이문열 논쟁, 주례사비평 논쟁, 문학권력 논쟁, 리얼리즘 대 모더니즘 논쟁, 문학상 논쟁, 고은 논쟁, 김윤식 논쟁 등이 계속되어 왔다. 이것은 기존 문단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대안을 생각하려는 차원에서 제기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단 주류의 반응은 전반적으로 싸늘했다. 특히 문학권력 논쟁 이후 비평 논쟁 자체를 기피하는 현상이 대규모로 발생한다. 그러면서 문학계가 지닌 구조적 모순은 감춰진다. 그러나 그것은 위기의 일시적 봉합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동업자적 의리만을 강조하며 서로의 잘못을 은폐하려는 순간 새로운 희망의 가능성은 부재하다. 이것을 위해 무엇보다 비평 논쟁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비평 논쟁은 일종의 구더기 치료법이다. 의학계에서 ‘구더기 치료법’은 항생제로도 치료불가능한 상태의 환자에게 구더기들을 상처 부위에 투입해 감염된 조직을 먹어치우게 하고 건강한 조직은 남겨두게 하는 신종 치료법이다. M. 홀랜드 의학박사는 “대부분의 구더기들은 생존 가능한 세포조직과 죽은 조직을 구별하는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비평 논쟁을 통해 건강한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을 확연히 구분할 수 있다. 비평은 문학계의 다양한 사태에 대해 개입할 수 있는 검찰권과 감사권을 지닌 막강한 존재이다. 따라서 그에 걸맞은 투명성, 정당성, 도덕성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할 때 비평 무용론은 확산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비평의 죽음으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학판 전체의 괴사로 이어질 것임에 틀림없다.
소설가 고종석은 「평론 문학상을 넘어서」(2005)라는 글에서 평론상이 실제 문학적 현실이 아닌 평론가들이 누리는 문학권력을 반영한 것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문학평론은 평론 문학상이라는 인공호흡기를 통해 생명 연장을 하고 있을 뿐 현실에서는 이미 죽은 존재라는 것이다. 고씨는 문학평론의 특권을 폐기하는 방안으로 평론문학상 대신 논픽션문학상을 제안한다. 그의 비판 논리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지만, 적어도 현재의 문학평론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은 나도 공감하고 있는 부분이다.
비평 논쟁은 진검 승부다. 함부로 잘못 사용하면 자신이나 타인을 해칠 수 있는 것이 바로 비평이다. 나는 오늘도 숫돌에 내 비평 언어를 뜨겁게 갈아 비평의 날을 세운다. 평론가는 자신의 비평적 자의식을 문학의 진정성이라는 거울에 수시로 비추어봐야 한다. 그렇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평의 고백성사이다. 냉소주의, 패배주의, 허무주의, 보신주의를 넘어 우리는 비평 논쟁의 불꽃을 피워야 한다. 비평은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언제 어디서나 달려 나가야 하는 119이기 때문이다. 나는 비평 논쟁을 소환한다.


최강민․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공저 󰡔한국 문학권력의 계보󰡕 등

추천1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