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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신작단편/김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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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918회 작성일 08-02-26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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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단편|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김서령







정희 언니는 고속버스 터미널에 나와 있었다. 이월 마지막 날에 내린 눈 때문에, 다섯 시간이면 도착할 거라던 버스 기사의 말은 보기 좋게 틀렸다. 일곱 시간 만에 땅을 밟고 서서 나는 마른 구역질을 몇 번 했다. 내가 지나온 어느 도시쯤이 눈과 비의 경계선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도시에는 거짓말처럼 눈의 흔적이 없다. 오래 비를 맞고 기다린 사람처럼 정희 언니의 검고 긴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나보다 키가 한 뼘은 작고 몸무게가 십오 킬로그램은 적게 나가는 언니가 냉큼 무거운 가방을 받아 들었다. 바퀴도 안 달린 커다란 가방을 빗물에 젖지 않게 하려고 낑낑거리며 들고 가는 모습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나는 멀미 기운이 사그라지지 않은 속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언니를 따라 걸었다. 언니는 일 년 전보다 더 야위어 보였다. 키 크는 것은 잊어도 머리카락 자라는 것은 안 잊는다고 엄마가 언니에게 노상 그러더니 정말 그새 언니의 머리카락은 허리께까지 치렁하게 늘어져 있다. 서너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염색을 한 탓에 내 머리카락은 빗자루 같다. 친구들은 내가 회색 머리를 하건 초록색 머리를 하건 이제 더 이상은 신기해하지 않았다. 아무튼 길고 검은 머리카락의 키 작은 여자와 노랗고 짧은 머리카락의 키다리 여자애가 자매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좀 떨어져서 언니가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라고 했다. 내가 살던 곳은 강원도에서 제일 큰 도시였다. 시내에는 극장이 네 개 있었고 석 달 전 문을 연 백화점도 하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의 밤은 적막했다. 택시는 어두운 주택가 골목을 몇 번 도는가 싶더니 줄창 검은 강변을 따라 내달렸다. 언니의 집으로 가는 길에는 사람도 없고 차도 없었다. 백화점도 보이지 않았고 극장도 보이지 않았다. 그럴 리 없겠지만, 언니와 가끔 생맥주 한잔을 마실 <멍청한 외계인>이라던가 <시간을 잃어버린 바다마을> 같은, 우습고 감상적인 이름을 가진 맥주집이 한 군데도 없을 것 같아 불안해졌다. 아버지에게 매달 육십만 원을 보내주던 언니가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의 빈민가에 던져져 있었던 건 아닐까. 차갑게 언 달이 택시의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쳐 갔다.
“도배도 깨끗이 해놨어. 좁긴 해도 맘에 들 거야. 내가 너 오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지?”
언니는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환하게 말했다. 나는 이 인적 없고 어두운 도시의 어느 곳엔가 산뜻한 벽지를 바른 방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처음 와 보는 도시였다. 열아홉 살의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언니에게 오는 길이었다.

밤이라서 언니가 나를 데려간 곳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는 알지 못했다. 택시에서 내려 골목으로 들어서자 길쯤하게 생긴 건물이 검은 강물을 따라 흐르듯 서 있었다. 울퉁불퉁한 바닥이 빗물 때문에 질벅했다. 운동화 뒤축은 물론이고 바짓단까지 젖어왔다. 건물 안쪽으로 난 좁고 가파른 계단을 삼층까지 올라가니 처음보다 더 좁은 계단이 나타났고 그 계단 끝에 잠기지 않은 철문이 있었다. 끼이잉, 철문 열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 소리에 조용한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아 나는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멀미 기운이 여태 가라앉지 않았나 보았다.
가장 첫 번째 문을 언니가 여는 동안 나는 차츰 어둠에 눈이 익고 있었다. 열쇠는 진작 돌아갔지만 뻑뻑한 미닫이문은 잘 열리지 않았고 나는 슬레이트를 친 뒤란에 널린 빨래들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좁은 골마루를 따라 방문이 나 있었다. 짙은 갈색 장롱이 들어찬 방 하나는 컸다. 그 방을 지나쳐야 내가 쓸 작은 골방이 나왔다. 언니의 말대로 아이보리색 바탕에 파란색 꽃무늬가 그려진 벽지가 발린 방, 처음으로 갖는 내 방이었다.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원목 옷걸이가 벽에 붙어 있었다. 아직 한 번도 덮은 적이 없는 빳빳하고 깨끗한 이불 한 채까지, 나의 것들이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열아홉 살까지의 살림살이는 두 개의 가방 안에 모두 쟁여져 있었고, 나는 이제 여기서 다시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아무래도 나는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학교에 다시 나가기로 한 것이 잘한 일인지 판단이 되지도 않았고 좁고 긴 방이 어색하기도 했다. 골방에는 창이 하나 작게 나 있었는데 키가 큰 내 얼굴 높이와 딱 맞았다. 아마도 언니는 까치발을 해서야 밖을 내다볼 수 있었을 테다. 파란 방충망이 헐겁게 쳐진, 창틀에 보얗게 더께 진 먼지 속에 아마도 지난여름 죽었을 모기까지 섞여 있는 걸로 보아서 언니는 이 창을 내다보려고 한 적도 없는 듯했다. 창밖으로 검은 강물이 여전히 흘러갔다.
잠이 오지 않아. 잠이 안 와. 투덜거리던 나는 눕자마자 긴 잠에 빠져들었다. 긴 여행으로 지쳐서 그랬을 거다.
날이 밝은 후에 제대로 바라본 집의 생김새는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강변을 따라 긴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그 건물들마다 모두 똑같은 옥탑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원래 벽의 빛깔이 무엇이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짙고 어두운 회색의 건물들마다 슬레이트로 지붕을 이은 집들이 수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방 두 개, 부엌, 다락 월 삼십. 방 세 개 (한 개 골방), 부엌 보증금 백, 월 이십.
그러한 벽보들이 계단들을 꽉 채우고 있었다. 각 가구들마다의 생김생김은 다르다 해도 긴 옥탑집을 밖에서 보아하니 조그만 나무창들이 빼꼼빼꼼, 너절한 빨래들만 내보이는 풍경이란 빼다 박은 듯 닮아 있었다. 나는 언니가 출근한 뒤 꼬깃꼬깃한 약도를 주머니에 넣고 교복을 맞추러 갔다.
교복집으로 가는 길은 내내 시장이었다. 생선가게를 지나치는데 자반고등어 하나 없고, 갈치 한마리 보이지 않는다. 작은 책상이 놓인 곳을 빼고는 온통 대형 냉장고가 벽을 채웠다. 입구에는 큰 글씨로 쭈꾸미, 오도리, 알, 곤, 아나고, 곰치, 오징어, 홍새우, 열합, 마구로 라고 쓰여 있다. 오징어나 홍새우는 알겠지만 다른 것들은 처음 듣는 말들이다. 한식, 일식, 중식재료 일절이라는 글씨도 붙어 있다. 열여섯 살 겨울에 치렀던 고등학교 입시 국어 시험에 나왔던 문제이기도 하다. 다른 보기들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답은 ‘안주일절’ 이 틀렸다는 것이었다. ‘안주일체’가 맞는 것이라고 시험 전부터 외웠다. 그 문제는 틀리지 않았지만 나는 강원도에서 제일 큰 도시의, 가장 좋은 여고 입시에서 낙방했다.
나는 후기 고등학교 시험을 치르지 않았고 입시학원에 등록했다. 학원의 수업을 오래 듣지는 않았다. 나는 독서실에다 간단한 짐을 부려놓고 피자집이며 민속주점, 돼지갈비집, 혹은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월급을 받으면 학원을 같이 그만 둔 친구들과 청평이나 강촌 등지로 여행을 가고 클럽엘 갔다. 이틀 걸러 한 번씩은 영화를 보았다. 도시에는 극장이 네 개라서 이틀 걸러 한 번씩 영화를 보려면 같은 영화를 여섯 번 내지 일곱 번은 보아야 했지만 나에게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 일부러 영화가 시작된 지 이십 분 정도가 지났을 때 들어갔다. 어리둥절해 하면서 끝까지 보고, 다시 시작하면 아 이랬구나, 하면서 끝까지 다시 보고. 그러면 세 시간은 족히 때울 수 있었다.
버스 정류장 앞에 쪼그리고 앉은 한 여자는 아까부터 열무 한 단 천 원이구메에라는 소리를 쉴 새 없이 반복하고 있다. 아마도 좌판을 벌인 그 직후부터 저렇게 같은 소리를 반복하고 있었을 테다. 열무 한 단 천 원이구메에, 열무 한 단 천 원이구메에. 억양의 변화 없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어느 곳 사투리인지 알 수 없는 그 말이 교복을 맞추고 노트 몇 권과 볼펜 서너 자루를 사서 돌아오는 동안에도 귓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열무 한 단 천 원이구메에.
시장은 굉장히 컸다. 아주 높은 언덕에라도 올라서지 않으면 시장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듯했다.

노란 머리로는 입학식에 갈 수가 없어 검은 물을 들였다. 귀 뒤에는 아직 검은 염색약이 튀어 있었다. 나는 머리에서 나는 쿰쿰한 냄새를 맡으며 학교를 둘러보았다. 남녀공학인 이 학교는 시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빼기에 있었다. 내가 살던 도시처럼 경쟁 입시제도가 아니니 이 학교의 학생들은 이 동네에 사는 아이들일 터였다. 한 학년 당 여학생 일곱 반, 남학생 일곱 반이었다. 담임은 나와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아 보이는 앳된 여자였다. 담임은 아이들보다 더 쑥스러워하며 인사를 했다. 그녀가 잘게 자른 종이에는 번호가 적혀 있었다. 아이들은 종이를 하나씩 집고 거기에 적힌 번호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물론 눈이 나쁘다는 둥, 앉은키가 보기보다 작다는 둥 하며 자리를 바꿔달라고 요구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일부러 뒷자리에 앉기 위해 그런 아이들에게 선심을 쓰는 축도 있었다. 나는 운 좋게도 창가 쪽, 앞에서 네 번째 줄에 앉았다.
짝 아이는 재킷 속 허리가 꽤 뚱뚱해 보이는 아이였다. 수더분하고 붙임성이 좋아 마음에 들었다. 나로서는 처음 입어보는 교복이었다. 내가 살던 도시에서는 교복을 입는 중학교가 두 군데밖에 없었다. 초록색과 감색이 섞인 체크무늬 에이라인 스커트와 감색의 모직 재킷이었다. 뻣뻣한 게 촌티가 났다. 짝 아이는 내 공책에다 노란 곰 모양의 스티커를 줄지어 붙여 주었다. 스티커 한 장 당 오백 원이라고 선심 쓰는 양을 했지만 스티커 한 장에는 곰 모양의 스티커가 이백 개는 더되게 붙어 있었다. 결국 내게 준 선물은 이십 원도 안 되는 거였다.
“진짜로 나이가 많아? 두 번이나 떨어진 거야? 그럼 실업계라도 가지 뭐 하러 그렇게 꼴고 있었어? 거기도 다 떨어졌어?”
나는 조금 기분이 상했다. 떨어진 건 한 번이고 게다가 내가 떨어진 학교는 그 도시에서 제일 좋은 학교였다고 설명을 하긴 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안 하느니만 못했다. 짝 아이는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씩 웃으며 내 어깨를 밀쳤다.
정희 언니가 입학선물로 준 반지는 앙증맞은 디자인이었다. 리본과 방울 모양으로 세공을 해서 링에 붙인 거였다. 한 돈짜리이다 보니 작아서 튀지는 않았지만 반 친구들은 볼 때마다 혀를 내두르며 귀엽다고들 했다. 키도 크고 손도 크고 발도 큰 나였지만 생각보다 손가락은 가늘었는데 언니는 그것을 몰랐던 모양이었다. 식지에 끼었지만 비눗물을 묻힐 때는 조심해야 했다. 미끌미끌, 몇 번이나 빠질 뻔했다.
미용사였던 엄마는 집을 떠날 때 알반지를 두고 갔다. 아버지는 언니더러 그걸 팔아오라고 했다. 언니와 나는 커다란 루비가 박힌 반지를 소중하게 품고 금방에 갔다. 금방 주인 남자는 겨우 만오천 원을 쥐어 주었다. 고등학교 일학년이던 언니는 아버지에게 차마 만오천 원을 갖다 줄 수가 없어서 훌쩍였다. 나는 언니에게서 그 돈을 받아들고 아버지에게 가서 대신 내밀었다. 만오천 원을 주던데요, 많이 쳐준 거래요. 아버지는 끄응, 소리를 내며 돌아누웠다.
사람들은 엄마를 야매라고 불렀다. 어렸을 적 나는 그 말이 미용사를 뜻하는 것인 줄 알았다. 엄마는 동네 여자들이 부를 때마다 초록색 얇은 헝겊 가방에 파마약과 고데기 등을 챙겨서 나갔다. 머리를 깎을 조무래기들은 집으로 직접 찾아왔다. 엄마가 마당에서 동네 아이들의 머리를 깎고 나면 언니와 나는 빗자루를 들고 잘디잔 머리카락들을 쓸어냈다. 솜씨가 소문난 엄마였지만 가게를 두고 하는 장사가 아니라 늘 반값이었다.
엄마는 결국 욕심을 내어 미용실을 차렸다. 권리금 없이 싸게 난 가게를 얻고 거울과 의자를 두 개씩 들여놓았다. 드라이어도 두 개를 샀고 진열장을 짜 와 파마약과 염색약을 진열했다. 샴푸도 팔고 외국 여자들의 금발머리 사진도 커다랗게 붙였다.
엄마는 두 달이 다 지난 다음에야 <꽃너울 머리방>이 망했다는 것을, 왜 망하게 되었는지를 깨달았다. 사람들이 좋아했던 것은 야매로서의 엄마이지 미용실 사장으로서의 엄마는 아니었던 것이다. 강원도에서 제일 큰 도시에는 미용실이 많았다. 극장이 네 개 있었던 것처럼 한 동네에 네 개 정도의 미용실은 있었다. 남자 미용사도 있었고 머리 감겨주는 일만 하는 보조 미용사도 따로 있었다. 꽃너울 머리방 한켠에서 대야에 머리를 넣고 스스로 감아야 하는 미용실에 오지 않고도 그들은 파마를 할 수 있었고 커트를 할 수 있었다.
엄마는 권리금 없이 꽃너울 머리방을 넘겼고 거울과 의자에 들인 돈 외에는 그다지 큰 손해를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더 이상 야매 일을 하지 않았다. 재미가 없다고 했다. 언니나 내가 머리를 깎아야 할 때도 엄마는 사천 원씩을 쥐어주며 미용실에 가라고 했다. 언니와 나는 미용실에 돈을 주어본 적이 없어서 그 돈이 아까웠다. 너무 자란 머리카락이 눈을 찌르고 귀를 덥수룩하게 덮을 때까지 버티고 있으면 엄마는 그것이 답답해서 또 스스로 가위를 찾아 머리를 깎아주었다.
드르르륵, 바리깡이 뒷목을 지나가는 느낌은 희한하다. 그렇게 부드럽던 머리카락들이 단번에 발딱 서서 다르륵, 나무줄기 같은 소리를 낸다. 나는 고개를 양껏 숙이고 바리깡이 뒷목을 지나가는 순간을 즐겼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수두룩한 이물질이 다 베어지는 느낌이었다.
사실 엄마는 지겨웠을 게다.
정희 엄마, 나 새벽에 서울 가잖우. 일찍 와줘. 그런 소리가 있을 때면 엄마는 새벽 세 시면 일어나 그 집을 찾아갔다. 드라이를 해주고 엄마가 받는 돈은 이천 원이었다. 아이들 머리를 깎아줘도 이천 원, 파마는 만 원, 단골은 칠천 원.
엄마는 감상적인 사람도 아니었고 결이 거친 사람도 아니었다. 엄마는 늘 평범한 선택을 했다. 알반지가 이십만 원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해서 놔두고 간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다.

정희 언니가 일하는 곳은 16번 상회였다.
식초도 말통, 콩기름도 말통으로 놓고 파는, 음식점 재료상인 태양상회 같은 곳일 거라고 막연히 예상을 했는데 가보니 영 규모가 다르다. 긴 건물의 1층인 16번 상회는 낡고 지저분했다. 조그만 가게라는 처음의 생각은 오해였다. 따로따로인 줄 알았던 칸칸의 가게들이 사실은 뒤편의 트인 창고를 두고서 다 붙은 하나의 가게였다. 건물을 뒤쪽까지 둘러보고 나니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어마어마한 창고가 있는 큰 가게였던 것이다.
언니는 거기서 주문을 받는 일을 했다. 아침 일곱 시에 출근을 하면 자동 응답기에 각 업소에서 녹음해 둔 주문을 정리해 컴퓨터로 전표를 뽑고, 아주머니들에게 주문 내역을 알려주면 그녀들이 커다란 바구니에 업소 별로 물건을 담는다고 했다. 배달 직원들이 그것을 가져가고 수금을 해오면 언니는 장부를 정리하고. 그것이 언니의 일이었다.
16번 상회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파리가 끓는 자반고등어부터 색이 누렇게 뜬 갈치, 수입 과자들, 땅콩과 배추, 냉동 오징어, 주방세제, 그릇 등등 내가 아는 물건은 거기 다 있다고 해도 거짓말이 아닐 지경이었다.
늙은 주인 여자는 새벽 경매에 참여해 물건을 떼어오는 일을 한다고 했다. 내가 갔을 때 늙은 주인 여자는 주판알을 굴리며 장부를 한장 한장 따져보고 있었다. 긴장된 얼굴의 언니가 나를 보며 살짝 웃었다. 각종 냄새가 뒤섞인 가게 앞에 서서 나는 언니의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배달 직원 한 사람이 슬며시 다가오더니 잽싸게 내 가방 속에다 미국산 감자칩 한 통을 넣어주었다.
“요즘도 주판을 쓰는 사람이 있네. 계산기 안 쓰고 왜 그러는 거야?”
근처의 중국집에서 언니는 자꾸 물만두 접시를 내 앞으로 밀었다. 묽은 초간장을 흠뻑 찍어 입에 넣으며 내가 물었다.
“사십 년 동안 주판알을 굴린 사람이잖아. 컴퓨터도 안 믿어. 자기가 아는 것만 믿거든.”
“우리 언니 시집살이 고되겠다.”
언니는 내 말에 웃었다.
아직 얼굴을 보지 못한 언니의 애인은 16번 상회의 둘째 아들이라고 했다. 언니와 사귄 지는 사 년이 꽉 찼단다. 물만두를 두 접시나 비운 후에야 언니의 애인 영채 오빠가 허겁지겁 중국집의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잘생기거나 키가 훤칠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팔을 뒤로 뻗어 언니의 허리를 살짝 감싸안는 것이,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언니랑 많이 다르네. 키도 크고.”
얼굴이 닮았다손 치더라도 언니의 키는 백오십오 센티였다. 백칠십 센티의 나와는 닮아 보일 수가 없는 조건이었다.
“잘 지내보자. 언니랑도 오래 떨어져 있었다 하던데, 인제 밥도 자주 먹고 그러자. 언니 바쁘면 병원에도 놀러오고.”
나는 영채 오빠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언니가 처음 영채 오빠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나는 어찌 불안한 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의대생이라는 점이 그랬다. 누구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영화를 보아도 텔레비전을 보아도 잘될 구석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영채 오빠와 언니는 오래 사귀어서 서로에게 무척 익숙해 보였다. 나는 그 점에 마음을 놓았다.
팔보채와 간자장을 하나씩 시켰지만 기다리는 동안 물만두를 그만큼 먹은 터라 다 먹을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에는 다행히도 시장 외의 세상이 있었다. 영채 오빠는 우리를 데리고 대학병원이 있는 동네의 맥주집으로 갔다.
나는 안주로 나온 대구포를 찢어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달짝지근한 비린내가 입 안을 돌았다. 영채 오빠는 인턴이라고 했다. 산부인과를 전공할 거라는 말도 했다. 나는 열아홉 살에, 지금의 내 나이에 생떼를 써 학교에 취업증명서를 내고 그 해 봄부터 이 도시에 내려와 일을 했던 정희 언니의 미래가 배꽃처럼 환할 것에 안도했다. 하얀 이가 간잔지런해서 더 예쁜 우리 언니는 배꽃처럼 곱디곱게 늙어갈 것이었다.
짝 아이는 수선스러웠다. 내가 열아홉 살이라는 것을 혼자만 알고 있으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는데도 우리 반 아이들 중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게 되었다. 몇몇은 늙수그레라고 나를 불렀다. 점심시간에 마른오징어 조림을 반찬으로 먹었더니 바로 다음 시간인 수학 시간을 견딜 수가 없었다. 봄 햇살은 내 등만 쪼이는 것 같았고 선하품이 났다. 결국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허락을 얻고 교실을 나왔다. 주머니에는 담배 한 개비와 라이터가 들어있었다.
나는 처음에 화장실에 가서 피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파랗게 빛이 나는 학교 뒤 언덕의 나무들이나 복도 구석구석을 쓸어담듯 비추는 햇살 때문에 도저히 냄새나는 화장실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는 학교 뒤 언덕으로 올라갔다. 나무들이 무성해서 약간 경사진 곳에 등을 대고 앉으면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덩치 큰 나무 뒤에 숨어 앉아 있자니 내 옆을 지나가는 개미들까지 등이 반짝거렸다. 체육복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든 나는 불을 붙이고 천천히 빨았다. 아아, 하늘이 빙글 도는 기분 좋은 어지러움.
옥탑집은 스무 가구가 넘는 듯했다. 화장실은 다섯 칸이었다. 늘 사람이 들어가 있거나 냄새가 나거나 물이 내려가지 않거나 했다. 그곳에서 피우는 담배와는 맛이 달랐다. 딱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나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에 등을 깊이 기대는데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내가 낸 소리인가 싶기도 하고 누가 있구나 싶기도 해서 담배를 급하게 바닥에 비볐다. 꺼지지 않아 다급하게 발로 밟아 문지르는데 누군가의 발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의 구두. 아찔했다. 입학한 지 한 달도 못 되어 정학이나 그런 비슷한 징계를 받는다면 그건 끔찍한 일이었다. 더구나 나는 열아홉 살이 아닌가. 눈을 감다시피 하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보니, 교복이다. 화가 났다. 학생이라면, 저나 나나 비슷한 용무라면 애초부터 인기척을 제대로 내고 올 일이지 이게 뭔가. 두어 모금밖에 빨지 못하고 비벼 끈 담배가 아까웠다.
“뭐야?”
남자애의 가슴에 달린 명찰은 노란 색, 그러니까 삼학년이지만 나는 상관 않고 성질을 부린다. 벙벙하게 서 있던 남자애가 그제야 사태 파악을 한 모양인지 씩 웃고는 내 옆에 앉았다.
남자애는 미남형의 얼굴이다. 쌍꺼풀이 가늘게 진 눈이 모양있게 길다. 앉은 품새를 보니 다리가 긴 것이 나보다 키가 십 센티는 족히 클 것 같다. 남자애는 내가 비벼 끈 담배를 내려다보더니 교복 안주머니에서 반쯤 남은 담뱃갑을 꺼냈다. 한 개비에 불을 붙여 나에게 내민다.
“나 때문에 놀라서 껐으니 물어줘야지.”
나는 담배를 건네받았다. 두 사람이 같이 내뱉는 연기가 나무 사이로 훌훌 퍼져 나간다. 가슴팍의 명찰을 보니 이름이 박태원이다. 피부가 희지 않고 점이 많다. 주근깨는 아닌 것 같다. 담배를 오래 다 피운 내가 일어서자 남자애도 일어선다. 역시 키가 크다. 그러고 보니 나는 파란 색에 흰 줄이 그어진 체육복 바지 차림이다. 게다가 구두를 신었고 교복 재킷도 걸쳤다. 엉덩이에 붙은 풀들을 툭툭 털자니 남자애가 손을 내민다.
“박태원이다. 담에는 여기 말고 좀 멋진 데서 보자.”
나는 픽 웃으며 손을 잡는다. 무엇보다 이 남자애는 지나치게 잘 생겼다.

나는 가끔 옥탑집 아래의 분식집에서 부추전을 먹었다. 분식집 아줌마는 부추전 위에다 떡볶이를 덤으로 얹어 주었다. 나는 발개진 부추전을 먹기 좋은 크기로 뜯은 후 젓가락으로 돌돌 말아 먹었다.
“느이 언니는 영채랑 연애 잘 하지?”
“어? 아줌마가 어떻게 아세요?”
“왜 몰라? 영채야 이 시장에서 젤 잘난 총각이고 정희는야 젤 이쁘고 착한 아가씬데.”
그러고 보니 정희 언니가 이곳에 산지도 육 년째다. 나는 풋고추 튀김도 두 개 집어 와서 먹는다.
“영채 오빠네 식구들도 잘 아세요?”
“그럼. 그 집은 여기서도 젤 오래된 집 중의 하나지. 젤 부자고 젤 점잖고."
“점잖아요?”
제일 부자라는 말이 걸리기도 하고 제일 점잖다는 말이 반갑기도 하다. 점잖은 집이라면 정희 언니를 이뻐할 것도 같다.
“정희는 시집 잘 가는 거야.”
나는 잠깐 한숨이 난다. 잘 되겠지. 우리 언니는 착하고 예쁘니까. 의뭉스러운 내 속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숨이 난다.
태원이는 괜찮은 아이였다. 열아홉 살 동갑내기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토요일 저녁, 태원이는 제 엄마가 일하는 소주방으로 나를 데려갔다. 주방에서 창문을 열어놓고 담배를 길게 빨던 태원이 엄마는 마디 굵은 손가락으로 내 푸석한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으며 아주 선머슴애구만, 했다. 태원이가 낄낄거렸다.
소주방의 젊은 사장님은 우리가 태원이 엄마의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맥주를 계속 내주었다. 태원이 엄마가 직접 볶은 번데기를 안주로 천칠백오십 씨씨 맥주통을 네 개나 비웠다. 사장님은 훈제치킨도 한 마리 공짜로 주었고, 태원이 엄마는, 손님들이 손도 대지 않은 거라면서 껍질을 까다 만 귤 반 개와 한 입 깨문 사과 한 조각만 드러낸 과일 접시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태원이 엄마는 소주를 잘 마셨다.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단숨에 홀랑 잔을 비웠다. 대학가 주점이라 주말에는 손님이 거의 없다며 밤 열시가 넘어가자 소주병과 알탕 하나를 끓여가지고 우리 테이블에 앉았던 것이다. 사장님은 졸린 눈으로 생활정보지를 들추고 있었고, 아르바이트생은 카운터 아래에 만화책을 숨겨두고 고개를 폭 숙인 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큰 고생은 안 했지. 태원이 할머니가 집도 사주고 쌀도 사주고 했으니까. 태원이 삼촌이 하나 있는데,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 때마다 태원이 옷 한 벌씩 꼬박꼬박 사보내고.”
태원이 엄마의 손톱에는 오래된 상처처럼 고춧가루가 깊게 끼어 있었다. 술이 들어갈수록 태원이 엄마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안 그래도 태원이가 가끔 제 할머니와 삼촌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태원이가 두 살 때 오토바이 사고로 뇌를 다친 아버지는 지능이 세 살 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다 했다. 태원이는 할머니와 삼촌의 후한 인심을, 병신 아들을 내팽개치고 며느리가 도망이라도 가버릴까 겁나서 그런 것이라고 오히려 못마땅해 했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닐 테다. 태원이 엄마가 어느 날 문득 사라져버린다면 태원이 아버지는 꼼짝없이 늙은 할머니 혹은 돼지를 키운다는 삼촌네 부부에게 떠맡겨질 것이 분명했으니까. 해서 태원이 엄마는 할머니 앞에서 담배를 빼물어도, 카바레에서 밤새 누군가와 노닥거리고 온 것이 분명함에도, 그 누구의 잔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다 했다.
태원이 엄마는 가끔씩 태원이의 머리통을 잡아끌어 목덜미에다 비볐다. 그럴 때마다 태원이는 바둥거리면서 제 엄마의 굵은 팔뚝에서 벗어났다. 자리를 옮겨 근처의 막창구이 집에서 노곤하게 퍼드러진 채 우리는 밤새 술을 마셨다. 노래방에서 노래도 불렀다. 태원이 엄마는 똑같은 노래를 계속 불렀다. 너를 보내는 들판에, 마른 바람이 슬프고, 내가 돌아선 하늘엔, 살빛 낮달이 슬퍼라.
도도록한 볼살 때문에 눈매가 이지러진 태원이 엄마는 젖무덤도 크고 허리도 굵었다. 까실한 촉감의 바지통이 터지도록 탱탱한 허벅지는 못해도 정희 언니의 허리만큼은 될 듯싶었다. 그에 비한다면 우리 엄마는 어땠던가. 정희 언니는 엄마를 닮아 체구가 작았다. 나잇살 때문에 아랫배가 늘어지긴 했지만 워낙 작은 몸매라 채 오십 킬로그램이 나가지 않았던 엄마였다. 꽉 닫아둔 설탕병 뚜껑을 열지 못해 정민아, 나를 부르고 염색을 하고난 동네 아줌마의 머리를 감겨주고 난 후 대야를 들어 마당 수돗가에 내다버릴 때는 늘 휘청거렸다. 마룻바닥에 물이 질질 흘러 걸핏하면 미끄러져 나자빠지곤 했던 것이다. 오래도록 잊었던 눈물이 솟고,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 태원이 엄마가 자꾸만 똑같은 노래를 불러대는 통에 태원이와 나는 노래방을 잠시 빠져나와 노래방 뒷담에 몸을 기대고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우리는 처음으로 입을 맞추었다.
태원이가 살짝 내민 혀에서 번데기 냄새가 났다. 노래방 안에서 주워먹은 땅콩 부스러기도 느껴졌다. 긴 입맞춤을 끝낸 뒤 나는 땅콩 부스러기 씹는 척을 했고 태원이는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부끄러워서인지 술기운 때문인지 태원이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날이 다 밝아 콩나물해장국까지 한 그릇씩 비우고서야 우리는 태원이 엄마의 팔을 하나씩 양쪽에서 부여잡고 집으로 갔다. 가거라. 사람아. 세월을 따라. 모두가 걸어가는 쓸쓸한 그 길로. 태원이 엄마는 계속 노래를 불러댔다. 이른 출근을 하는 남자들과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킥킥거리며, 혹은 쯧쯧 혀를 차며 우리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겨워 죽겠어, 태원이는 중얼거렸지만 정작 표정은 하나도 지겹지 않아 보였다. 우리 엄마는 술에 취하면 누구의 팔을 잡고 집으로 돌아갈까. 아니, 엄마는 술을 마시지 않으니 그럴 일은 없겠다. 그리고 어쩌면 정희 언니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낯선 어느 도시에선가 죽었을는지도 모르니까.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간혹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안 좋은 날들이 있었다. 그 나이의 여자가 돈도 없이 나가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젊지도 않고 곱지도 않은 중년의 혼자 사는 여자라고 아무나 막 대하지는 않을까, 그런 걱정들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엄마의 부음을 기다린 적이 있었다.
오래 앓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짐을 정리하고 방을 뺀 후 독서실로 옮기면서 나는 마음이 후련했다. 이제 나만 잘 살면 되는구나. 다른 걱정 없이, 먹여 살릴 식구 없이 내 몸 하나만 건사하면 되는구나 싶었다.
정희 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굳이 이 도시에 오지도 않았겠지. 딱히 고등학교 졸업장이 필요했던 것도 아니고 대학에 가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었던 내가 열아홉 살에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은, 나 때문에 가슴을 졸이는 가여운 언니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세상에 너랑 나랑 둘이야. 정민아, 나 네가 떠돌아다니는 거 마음 아파서 못 보겠어. 한 번만 내가 하자는 대로 하자, 응?”
독서실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로, 하루에도 수차례씩 전화를 걸어와 언니는 애원조로 말했다. 고향이라면 몰라도 낯선 도시까지 가서 학교를 다니고 싶지는 않았지만 별수 없었다. 태원이 엄마는 대문 앞에서 자고 가라며 나를 계속 잡아끌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태원이네 집 이층에 세 들어 산다는 할머니가 씩씩거리며 우리 앞에 딱 버티고 섰기 때문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말이야, 우리도 좀 살자.”
태원이의 얼굴이 빠르게 굳고 있었다.
“애 아버지 말이야. 언제 올라왔는지 우리 집 부엌을 다 뒤지고 있잖어. 뭐 부수거나 한 건 없지만서도 이럴 때마다 내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데, 참말로, 나도 못살겠다.”
대문을 밀고 올라가려는 태원이의 팔을 제 엄마가 잡았다.
“정민이나 데려다줘라.”
태원이 엄마는 우리 둘을 남겨둔 채 대문 안으로 들어가 철컹, 소리 나게 문을 닫았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철퍼덕, 대문에 바짝 붙어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을 뿐이었다. 어헝 엉, 낮은 울음소리가 대문 틈으로 비어져 나왔다. 태원이는 아무 말 못하고 서 있기만 하는 내 손을 덥석 잡고 걷기 시작했다. 무어라 해줄 말이 없어 나는 빠르게 걷기만 했다.

정희 언니의 다리는 통통하게 부어 있었다. 양말 밴드가 닿는 발목에는 피딱지가 앉았다. 언니는 수건을 뜨겁게 적셔 찜질을 했지만 부기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텔레비전을 켜놓은 채로 잠든 언니의 얼굴이 가칫했다. 설거지를 하다 말고 오래 주저앉았고, 퀭한 눈을 하고서 빨래를 개켰다. 나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방 아래로 자꾸 무거운 먼지가 쌓여가는 것 같았다.
영채 오빠는 자주 늦은 밤에 들러 언니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니는 종종 훌쩍거렸고 나는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혹은 궁금하지 않아서 닫힌 문을 다시 한 번 단단히 밀었다. 내 작은 골방으로 불안한 수런거림이 새어들어 올까봐 나는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때로는 모자를 눌러쓰고 태원이에게 가기도 했다. 골방 문을 열고 나오면 정희 언니는 모아 앉은 무릎 위로 더 깊이 고개를 파묻었고, 영채 오빠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다가 아주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올 때 떡볶이 사다줄까?”
영채 오빠는 대답 없이 다시 웃는다. 나는 현관문을 조용히 밀어 닫았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끼이잉, 둔탁한 소리라도 난다면 길쯤한 옥탑집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이었다. 동전을 넣으면 공이 튀어나오는 야구장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태원이와 조잘대다보면 다리에 땀이 배었다. 우리는 담배를 나눠 피우기도 했고 입을 맞추기도 했다. 태원이 엄마는 새벽 두시가 넘어서야 허정허정 걸어 골목으로 들어섰다. 가끔은 셋이서 콩나물해장국을 먹기도 했다.
그때쯤 태원이와 나는 처음으로 함께 잤다. 전문대학 근처의 좁은 여관방이었다. 텔레비전도 꺼진 동굴 같은 방에서, 나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낮은 음악소리 때문에 자꾸만 태원이의 가슴팍에 귀를 묻었다.
“귀가 간지러워.”
내 말에 태원이는 내 귀를 들여다보았다. 불을 껐지만 창을 다 가리지 못한 커튼 사이로 거리의 빛들이 스며들어 태원이의 수줍은 어깨선을 붉게 그어놓았다.
“귀가 길어졌나봐. 토끼가 된 건가.”
나는 귀를 들어 퉁퉁 털어보았다. 태원이가 긴 손가락으로 내 머리통을 긁어주며 웃었다. 나는 다리 사이의 낯선 통증을 참느라, 귀를 간질이는, 나에게만 들려오는 낮고 음산한 음악소리를 지우느라 밤새 부산했다. 지극히 사사로운 시간이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는데 나는 정희 언니와 영채 오빠 사이의 일들을 알고 있었다. 라디오 볼륨을 높여도, 문을 아무리 꽁꽁 밀어 닫아도 차갑고 습한 사실들은 내 귀로 밀려들었다. 순서도 결과도 알 리 없는 매캐한 연기 같은 소식들.
되짚어보면 다 그랬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엄마가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양말을 꺼내려고 했었는지 새 속옷을 꺼내려고 했었는지 나는 장롱의 가장 아래쪽 서랍을 열어보았고 늘 그 안에 있던 엄마의 갈색 장지갑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가만히 서랍을 움켜쥐고 앉아있었다. 고작 갈색 장지갑이라니. 엄마는 은행에 갔을 수도 있고 시장에 다니러 간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귀가 긴 토끼가 되어 엄마가 사라지는 소리를 이미 다 들은 것처럼 그렇게 엄마의 부재를 깨달았다. 아버지의 부음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늘 하던 대로 동네 슈퍼마켓에 들렀다. 두부 한 모와 양파 따위를 살 생각이었다. 가게의 문을 밀고 들어서자 가겟방에 앉아있던 주인 여자가 놀란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내 양손을 바락 움켜쥐었다. 그녀는 울지도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끄응, 아버지의 힘겨운 마지막 숨소리가 내 귀를 뱅글 돌았다.
그래서 나는, 열무 한 단에 천 원이구메에를 외치는 좌판 바로 곁에서 나를 말끄러미 바라보고 선 태원이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정민아.”
태원이는 그렇게 여섯 번쯤 나를 불렀다. 여섯 발자국쯤만 걸으면 태원이의 곁이겠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급기야 태원이가 나에게 다가왔고 나는 나를 잡아끄는 태원이에게서 빠져나가려고 한사코 악을 썼다. 왜 잡아끄는지 왜 버티는지 아무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우리는 시장 한복판에서 한참동안 실랑이질을 했다. 태양상회 주인아저씨도, 걸핏하면 물러터진 포도나 복숭아를 파는 바람에 싸움판이 벌어지게 하는 과일집 할머니도, 꽃게 칼국수를 파는 초원식당 언니도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들 입에서, 불쌍한 정희……라는 말이 새어나오는 것만 같아서 귀를 막았다. 그렇게 주춤하는 바람에 태원이에게 허리를 잡혔다.
영채 오빠는 나빴다. 적어도 내가 오기 전에 정희 언니를 깨끗한 침대로 옮겨 누이고 땀과 눈물에 젖은 얼굴을 닦아주고 고통스럽게 벌어진 입을 다물게 해주었어야 했다. 그런데 언니를 수술대에 버들쩍 매달아놓은 채로, 자신은 핏자박이 된 수술복 그대로 넋 나간 얼굴을 하고 섰다니. 나는 헝클어진 언니의 머리칼을 만져주다가 주저앉았다. 어질증이 일었다. 영채 오빠도 기다렸다는 듯이 철퍽 주저앉았다. 태원이는 내 손가락 사이에 낀 언니의 땀 젖은 머리칼을 빼 주느라 진땀을 뺐다. 차디찬 빙하기가 온 것 같았다. 추웠다. 태원이가 내 등을 빠르게 빠르게 쓸어내려 주었지만 나는 여전히 몸을 떨었다.
정희 언니의 배가 차츰 불러가는 동안에도 갈팡질팡 집에 이야기할 짬을 잡지 못한 영채 오빠는 결국 선배의 병원으로 언니를 데려갔고, 이미 6개월이 넘어선 소파수술에 대해 정색하는 선배를 구슬려 직접 수술복을 입었다고 했다. 뒤늦게 달려온 병원 원장은 엉망진창인 수술실의 풍경에 질겁을 했다. 그는 악을 쓰면서 수술실을 뛰어다녔다. 수련의였던 애인의 칼에 자궁이 찢긴 채 죽은 정희 언니의 마지막은 교통사고로 마무리되었다. 녹신해진 영채 오빠와 나를 대신해 16번 상회의 늙은 주인 여자와 병원 원장, 그리고 태원이 엄마가 서푼서푼 움직였다. 정희 언니가 입학 선물로 주었던 반지가 어디선가 빠져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건 한참 후였다.

이래저래 언니의 장례가 끝난 뒤 태원이 엄마는 보자기 두 장을 들고 옥탑집엘 찾아왔다. 내가 고개를 저었지만 태원이 엄마는 장롱을 뒤적여 내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챙겨 보자기에 싸고는 내 손목을 와락 그러쥐었다.
“가서 밥이나 먹자.”
“밥 먹으러 가는데 옷은 왜 챙겨요?”
태원이 엄마는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의, 가장 큰 시장 골목에다 언니를 내려두고 나 혼자 밥을 먹으러 가는 것 같아서 속이 깔깔해졌다. 내가 얌전히 따라가는 양을 보이자 태원이 엄마가 손목에 힘을 풀었지만 이번에는 내가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태원이 엄마가 잠시 나를 바라보고는 짧고 얕은 숨을 한 번 내뱉었다.
그날 밤 태원이 엄마는 국물이 진한 시래기국을 끓여준 뒤 마루에 이불을 깔았다. 태원이 아버지는 안방에서 잠들고 태원이는 공연히 마루를 뱅뱅 돌다가 결국 제 방으로 들어갔다. 반들반들한 마룻바닥에 얇은 이불을 깔고 눕자니 등이 선득해 왔다. 나는 몸을 돌려 모로 누웠다. 태원이 엄마의 흐벅진 젖가슴이 코앞에 놓였다. 부서진 조각들은 너무 멀리 날아가고 흩어졌다. 그것들이 남기는 인사들만 귀엣말처럼 나를 여전히 간질이고 있었다. 나는 태원이 엄마의 젖가슴에 얼굴을 댔다. 다보록한 가슴에 코를 묻자 뺨을 묻고 싶어졌고 또 귀를 묻고 싶었다. 나는 자꾸만 파고들었다.
“아이고, 불쌍한 토끼 같으니. 살아봐라, 세상이 다 그렇게 아린 게니라.”
토닥토닥. 태원이 엄마가 내 엉덩이를 두들겼다. 나는 더 깊이 태원이 엄마의 가슴에 머리통을 들이밀었다. 어느샌가 태원이 아버지가 아기처럼 기어나와 이불 발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돌아보니 태원이도 방문을 열어놓고 있다. 작은 토끼야, 잘 자. 어두운 방안에서 태원이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 긴 귀에, 분명 그렇게 들렸다.



김서령․
1974년 포항 출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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