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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젊은 시인 집중조명/박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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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35회 작성일 08-02-26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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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람



천공의 城 랴퓨타


동사무소 이층 복지회관 런닝머신 위를
몇 명의 여자들이 걷고 또 걷는다
넓은 통유리가 마치 일생의 한 화면 같다
아침까지 갔다가 다시
통유리의 넓은 저녁으로 돌아오는 유영
38, 29, 50, 17, 다양한 나이와 문수의 걸음들이 걷고 또 걷는다
아무 목적지도 없는 걸음
다만 몇 킬로의 또는 몇 그램의 일생을 줄이며.

랴퓨타. 가끔 구름 속을 나와 유영하는 成
어디에도 없는 내 몸에 꼭 맞는
내 몸을 찾는 사람들
둥둥 떠서 아니, 둥둥 걸어서
끊임없이 걷고 또 걷는
그러다 남편의 귀가시간이라는 역에, 끼니때라는 지상의 역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걷고 또 걷는.

앞도 뒤도 없이 그저 흘러갈 뿐인 풍경
지상에서 망가진 것들의 구름 같은 오후를
가는 일도 없고 되돌아오는 일도 없는
그저 유영하는 저 악착같은 걸음들,
둥둥 떠가는 동사무소 이층 천공의 성
타이머에 맞추어진 길의 시간을 걷고 또 걷는
단 한번도 지상에는 내려서지 않겠다는 듯
런닝벨트 위를 규격품처럼 걷고 또 걷는,
불쌍한 승객들.



꽃피는 얼룩


화장실 배관 파이프
그 중간쯤에 물이 새고 있다
한참 되었는지 벽에 꽃 모양의 얼룩이 져 있다
서둘러 지퍼를 내리다
저 얼룩도 내가 흘린 흔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떨어져 내린 그 순간에도 제 영역을 넓히려 퍼져 있는,
어느 쪽도 쉽게 받아주지 않아 생긴
얼룩이라는 모양
그러고 보면 세상이란
변변치 않아서 흘린 것들의 천지 아닌가
흘러넘치거나 아니면 틈으로 새거나

내 속에서 흘러나온 것들 아니,
몸 가장 깊숙한 外部를 돌아 다시
外部로 나오는 것들
모든 맛을 빼앗긴 것들

내 속의 얼룩은 나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만큼 제 영역을 넓히고 있는지 언제쯤 흘러넘칠지
한 생 썩어서야 모양이 되는
질질질 흘려지는 것들
오염시킬 줄만 아는 내 속의 美食家들
모든 맛을 빼앗기고 스스로 썩어가는 한 생이라니.

죽어 꽁꽁 싸맨 것들
脫棺을 하자
마지막 냄새의 꽃이 피어 있었다.
맛없이 꽃 피는 것들이라니.



거미들


몇 개의 고지서들이 날아온다
속도, 신호위반, 부음장 등등
때론, 이미 전생이나 후생으로 돌아간 이의 앞으로도
벌금이나 미수금들의 고지서가 날아온다
모양만 남겨놓는 거미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거미줄
우리는 어쩌면 어느 먼 생과 연결된 면직류일지도 모른다
잠시 신호대기 중이거나
과속의 찰나 그 너머의 아찔한(다만 아찔할 뿐인) 생으로
길게 흔적들을 뽑으며 지나다니는
실이라는, 그러다 아내의 잔소리 몇 마디에
아차 하고 깨어나는 이 끈끈한 느낌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는 딸이라는, 아내라는, 가족이라는 껍질들.

무엇인가를 쌓아 놓기에는 너무 헐거운 거미줄,
빈 껍질들 사이로 마른 관계들만 쌓여 있는 거미줄
다시 이사를 가기 위해 실을 뽑는 거미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길
지나간 흔적이 보이지 않는.



구름나무


오래 전 죽은 나무 위에
아침부터 새들이 날아와 논다
소란스러운 죽음
땅에서 한 일생을 마친 저 나무가
새로 뿌리를 내린 곳은 하늘이다
전생의 기억을 땅 속으로부터 불러올리는 乾木
그 위로 가끔 흰구름의 잎이 돋아난다
흔들이는 법이 없는 나뭇잎
바람이 불고
그동안 잎을 흔든 것이 바람이 아니라
스스로 한 생 흘러가는 마른 것들의 소란스러움인 것

잎이 있다는 것은
줄기가, 뿌리가, 몸통이 있다는 뜻이다
하늘의 그 흐린 지층에다 새로
뿌리를 내리고 잎을 피우는 구름나무
심심하지 않게 색깔과 잎 모양을 달리하며 놀고 있는 구름나무
오늘은 하늘의 숲이 온통
검은 잎으로 뒤덮인 것을 보니
비라도 내릴 모양이다
그 커다란 잎을 흔들어 물기를 뿌리는 잎

땅 속이나 저 위나
다 같은 하늘이라고
한번쯤 누워본 이들은 다 안다고
울창한 하늘의 숲이 스스스 흔들리고 있다.



잎이라는 말


바람과 가장 절친한 말이 있다면 그것은 잎이라는 말일 것이다.
이 葉綠의 프로펠러들이 없었다면 바람은
날아오르는 종족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가려운 등을 긁어주듯, 서로가 서로를 닮아가듯, 서로의 무거운 그늘과 햇빛을 털어주는,
아니, 서로가 할퀴는
절친한 것들의 흔들림

나라는 잎
바람에 속아서 너무 빨리 팔랑거렸다
그러고 보니
바람과 가장 불편한 말이 있다면 그것 또한 잎이라는 말이다.



뭉툭한 인사


사내의 손을 잡고 놀던 딸아이가 아빠 손은 나뭇잎 같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손등에 푸른 정맥이 줄기처럼 이어져 있는 사내의 손. 아이는 그의 손을 들어 신기하게도 바람을 만들어 제 얼굴 쪽에다 팔랑거리고 있다.
달랑 하나 남은 나뭇잎 손
방향을 가리킬 때나 무엇을 설명할 때도
사내는 온 가지를 흔들어 그 뭉툭한 말들을 쏟아낸다
뭉툭해서 잘 스며들지도 못하는

나는 사내나무의 한쪽 잎도 알고 있다
지금은 주머니 속에 그 뭉툭한 잎을 감추고 있지만
생각해 보면 나는 그 잎을 통해
둥글고 따뜻한 말을 참 많이도 배웠다

一生의 父女가 돌아간 뒤 나도 내 손을 들고 팔랑거려 보다. 잘 가라고 나도 주먹 쥔 손으로 부녀의 등에다 흔든다. 한 잎으로는 아이의 손을 잡고 뭉툭한 잎이 주머니에서 나와 힘차게 흔들어 보이는 뭉툭한 인사.
푸른 새싹이라도 피어나려는지 주먹 쥔 손안에
따뜻한 땀이 배어 나와 있다
달랑 이 두 잎의 팔랑거림으로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인사의 뭉툭할 뿐인 이 저녁 말고는 말이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그곳에는 磁力이 있어 쇳가루가 묻어있는 몸들이 쉽게 이끌려 간다
흩어지지 않으면 붙을 수 없는 곳

지구의 거대한 磁石
새들이 페루에 가서 붙는 일과 같이

더 이상 알을 슬 수 없는 새들과 같이. 블랙박스처럼 달고 다니는 골은 기억들로 무거울 때, 새들이 따뜻한 백사장에 몸을 던지는 것과 같이

새의 무게가 새를 날게 하는 것과 같이. 그 무게가 온전히 바람을 넘겨 천천히 읽는 것과 같이. 조용히 책장을 덮는 것과 같이. 내가 그 책 속의 한 문장이 되는 것과 같이.

……



시작노트


순간이나 그보다 더 짧지만 잊어버리는 기능이 없다면 인간은 혹은, 나는 아마도 살아가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가 지배당하는 것을 못 참는 인간이라는 종족들이 어쩌면 이 죽음이라는 지배는 거스르지 못하는지. 神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도 억울하지 않은가. 얼마를 더 기다려야 된단 말인지…….
그러나 그 무엇을 하든지 죽음이라는 것을 잠시 생각해보면 참 용서 못 할 일도, 그 무엇 하나도 물음표에 젖어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갈수록 무거워져 더 이상 걸어 다닐 수 없을 때, 혹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때 인간이 하는 최고의 비자주적 선택이 아닌가. 죽음이라는 것. 그것까지 신의 뜻으로 돌리기에는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박해람
․1968년 강원도 강릉 출생
․199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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