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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박해람 작품론/배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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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853회 작성일 08-02-26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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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람 작품론|


신 걸리버 여행기, 몸의 깊숙한 외부에서
환한 중심으로 가는 길

―박해람의 시세계―

배용제(시인)


라퓨타
현실에 안착하지 못하는 걸리버, 그는 여전히 아득한 여행 중이다. 쉴 새 없이 낯선 풍경 속으로 떠나는 그의 여행은, 그러나 막막하고 어쩌면 단 한 번도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까마득한 여정이다. 이상하게 그는 모든 실재하는 풍경으로부터 멀어지는 중이다, 몸 밖으로 끊임없이 달아나기도 하고, 몸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침투하기도 한다. 결국은 모두 꿈에 이르는 여정이다. 그 꿈은, 현실 속에 갇혀 순간의 형태로 단순화된 모든 존재를 다양한 형태로 재구축한다. 삶의 단면적인 현상 속에 묻혀 드러나지 않던 또 다른 영속성(永續性)과 공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걸리버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바라볼 뿐이다. 바라보며 자신만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언제나 실재하는 세계와 그 속에 얼룩처럼 묻어있는 삶과, 흑은 시간이라는 모든 것에 대해 고개를 저어본다. 떠나온 거리만큼 풍경 밖의 풍경들이 선명해진다. 마치 하나의 환영처럼 “랴퓨타, 가끔 구름 속을 나와 유영하는 城”을 발견한다. 아니 모든 존재의 일생은 하나의 화면에서 잠시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랴퓨타>인 것을 알아차린다.
랴퓨타, 삶의 감각들은 다 헛된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감각하고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가 믿는 현실이라는 것조차 하나의 화면 속에서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앞도 뒤도 없이 그저 흘러갈 뿐인 풍경’이어서,

지상에서 망가진 것들의 구름 같은 오후를
가는 일도 없고 되돌아오는 일도 없는
그저 유영하는 저 악착같은 걸음들,
둥둥 떠가는 동사무소 이층 천공의 성
타이머에 맞추어진 길의 시간을 걷고 또 걷는
단 한 번도 지상에는 내려서지 않겠다는 듯
런닝벨트 위를 규격품처럼 걷고 또 걷는,
불쌍한 승객들.
―「천공의 城 랴퓨타」 부분

삶의 원형적인 모습은 이미 규격화되어 있고 각각의 타이머에 맞춰진 한정된 순간을 걷고 또 걸어보지만, “가는 일도 되돌아오는 일도 없”이 몸이라는 城에 갇혀 제자리를 맴돌 뿐이다. 그러므로 랴퓨타; 삶의 모든 이미지는 부재이며 쓸쓸한 영속성의 화면에 잠깐 유영하는 순간이 삶이라는 것의 운명이다. 지상에 안착할 어떤 삶도 없다. 뜬구름 같은, 또는 천공의 성 같은 흔적들은 “어디에도 없는 내 몸에 꼭 맞는/내 몸을 찾”아 헤매는 환영들일 뿐, 실존은 어디에도 없다. 남편이 귀가하는 순간이나 끼니때라는 순간에 실존이라 인식하지만 그것은 정말 순간이다.
불쌍한 걸리버. 보이는 건 모두 허무의 풍경들이다. 아니 여태껏 믿어왔던 가치들이 지워진다. 어떤 것을 규정하고 믿는다는 일이 얼마나 헛된 일이었는지. 그렇다면 그 걸음을 벗어나는 길을 없단 말인가. 아니다. 단 하나 몸을 찾아내는 것이다. 몸만이 절대적 시간을 찾아내는 유일함이다.
그렇다면 애타게 찾는 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목숨이라는 것을 지니고 호흡하거나 자라나는 것이 아니다. 가장 확실한 근원에 다다르도록 연결된 단 하나의 고리이다. 몸은 모든 물질들의 충실하고도 완전한 시간을 기억해내며 원초의 신성한 꿈을 꾸기 때문이다.

몸이라는 이름의 이미지
아이러니하게도 몸은 형태나 물질이 아니다. 몸 안에도 있고 몸 밖에도 있다. 전부일 수도 있고 가장 변두리일 수도 있다. 악취가 나는 화장실이기도 하고 꽃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어떤 통합의 의미이거나 반대로 이분법적인 요소를 지니지 않는다. 그러한 해석은 이미 물질적이거나 행위적인 규칙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몸은 너무도 불규칙한 섬광처럼 극한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몸을 떠도는 여정이 얼마나 아득한 일인지 알 수 있다. 몸에 있어서의 삶과 목숨이라는 것은 그저 “화장실 배관 파이프/그 중간쯤에 물이 새고 있”는 시간의 틈새에서 빠져나온 “한참 되었는지 벽에 꽃 모양의 얼룩”이다. 언젠가 “내가 흘린 흔적일지 모”를 것들이 “흘러넘치거나 아니면 틈으로 새”어나온 풍경들.

내 속에서 흘러나온 것들 아니,
몸 가장 깊숙한 외부를 돌아 다시
외부로 나오는 것들
모든 맛을 빼앗긴 것들

내 속의 얼룩은 나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 만큼 제 영역을 넓히고 있는지 언제쯤 흘러넘칠지
한생을 썩어서야 모양이 되는
질질질 흘려지는 것들
―「꽃 피는 얼룩」 부분

하지만 내 것이면서도 여전히 몸을 찾지 못한 채 외부에서 외부로 흘러 다니는 삶은 “모든 맛을 빼앗”기면서 그저 “질질질 흘려지는”것이다. 이상하게도 생은 제 몫의 시간을 버려야 비로소 썩어서야 모양이 되어 몸의 한쪽에 제 흔적을 남긴다. 그 선명한 치장을 위해 몸은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생을 누수시킨다. 누수시킬수록 한없이 영역이 넓어져가는 몸은 물질에서 무한대의 이미지로 완전한 상징성을 띤다. 삶이라는 것도 비로소 몸에 흡수된다.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한 생은 수많은 고지서를 챙겨야 한다. “속도, 신호위반, 부음장 등등”의 고지서는 때로는 “이미 전생이나 후생으로 돌아간 이의 앞으로도” 날아온다. 그렇게 생의 시간은 거미줄처럼 끈끈하게 연결되어 끊임없이 대가를 지불하고 소통함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비유가 되고 상징이 된다. 그리고 생멸의 순간을 교환하며 순환된다.
그러므로 아무리 삶이라는 시간으로 걷고 발광을 해도 자기만의 순수한 인식, 순수한 행위를 만들어낼 수가 없다. 그렇게 수많은 종류의 인과성과 길에 매달려 있는 전부를 몸이라 명명해 본다. 그 객관적인 시간들이 극한의 이미지인 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줄
우리는 어쩌면 어느 먼 생과 연결된 면직류일지도 모른다
잠시 신호대기 중이거나
과속의 찰나 그 너머의 아찔한(다만 아찔할 뿐인) 생으로
길게 흔적들을 뽑으며 지나다니는
실이라는, 그러다 아내의 잔소리 몇 마디에
아차하고 깨어나는 이 끈끈한 느낌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는 딸이라는, 아내라는, 가족이라는 껍질들.
― 「거미들」 부분

이제 몸의 상징성은 여럿의 형태적 증명들과 그리고 수평적 대상들과도 결합한다. 딸이라는, 아내라는, 가족이라는, 그리고 수많은 이들의 기쁨과 질서 속에서 삶의 풍경을 나열할 때 나라는 하나의 존재, 혹은 얼룩으로 꽃필 수 있어 한때의 시간으로부터 이 세계의 몸에 스며드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해줄 유일한 증명서는 죽음이다. 죽음은 시간이라는 바람의 통로에서 펄럭이는 존재의 잎이다. 죽음의 이파리를 요란하게 흔들어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몸에게 수신호를 보낸다.

죽음의 상상력, 혹은 기묘한 추억
죽음의 상상력은 강력하다. 그리고 고요한 몽상을 전해준다. 그것은 다시 물질의 실체 속에 되살아나고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한다. 어떠한 꿈이나 몽상이 하나의 실체 속에 흡수되었을 때 생멸과 그 순환의 몸은 신비로운 영속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 진지한 미학성에 대해, 에드가 포우가 일찍이 <죽은 자들은 모두 잠들어 있다-모든 아름다움은 잠잔다.>라고 노래했듯이, 삶이 규정해 놓은 어떤 미학보다 무의식 속에서 피어나는 미학이 황홀하게 빛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수천 년 전에 죽은 어떤 죽음도 우리의 꿈속에서 다시 부재의 사실을 털고 나란히 산책할 수 있는 것이다. “오래 전 죽은 나무 위에/아침부터 새들이 날아와” 놀자 “소란스러운 죽음”이 되어버린다. “땅에서 일생을 마친 저 나무”가 새롭게 “뿌리내린 곳은 하늘”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전생의 기억을 땅 속으로부터 불러”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 새로운 풍경, 새로운 해석의 방식 안에서는 죽음과 삶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다만 형태의 전이를 이루거나 생멸의 시간을 반복할 때 “가끔 흰 구름의 잎”이 돋아날 뿐이다.

땅 속이나 저 위나
다 같은 하늘이라고
한 번쯤 누워본 이들은 다 안다고
울창한 하늘의 숲이 스스스 흔들리고 있다.
―「구름나무」 부분

이 세계의 모든 존재들은 언제든 “심심하지 않게 색깔과 잎 모양을 달리하며 놀”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쓸쓸한 삶의 밑바닥에 누워서 허공을 응시할 때 깊은 꿈을 통하여 아주 오래된 기묘한 추억과 맞닥뜨리는 것이다.
그 추억의 힘으로 다른 존재들과의 소통도 간혹 가능해진다.

바람과 가장 절친한 말이 있다면 그것은 잎이라는 말일 것이다.
이 葉綠의 프로펠러들이 없었다면 바람은
날아오르는 종족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가려운 등을 긁어주듯, 서로가 서로를 닮아가듯, 서로의 무거운 그늘과 햇빛을 털어주는,
아니, 서로가 할퀴는
절친한 것들의 흔들림
―「잎이라는 말」 부분

펄럭이는 수많은 이름의 죽음들, “바람의 가장 절친한 말이 있다면 그것은 잎이라는 말”이듯이 죽음과 삶의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길이 없었다면 어떤 세계와의 소통도 불가능하다. 하나의 화면 속에 고정되어 영원히 고립된 몸으로 굳어갔을 존재들. “이 葉綠의 프로펠러가 없었다면 바람”의 상징은 “날아오르는 종족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그 순간 상실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 영원히 살아 펄럭이는 죽음들, 그 싱싱한 잎새들.

一生의 父女가 돌아간 뒤 나도 내 손을 들고 팔랑거려 보다. 잘 가라고 나도 주먹 쥔 손으로 부녀의 등에다 흔든다. 한 잎으로는 아이의 손을 잡고 뭉툭한 잎이 주머니에서 나와 힘차게 흔들어 보이는 뭉툭한 인사.
푸른 새싹이라도 피어나려는지 주먹 쥔 손안에
따뜻한 땀이 배어 나와 있다
달랑 이 두 잎의 팔랑거림으로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인사의 뭉툭할 뿐인 이 저녁 말고는 말이다.
―「뭉툭한 인사」 부분

이런 형태적 관계, 그리고 물리적 행위의 자연스런 습관에 순응하는 모든 꿈의 여정은 점점 더 깊게 생의 중심을 파고들게 된다. 그러한 꿈속으로 다시 새롭고 기이한 꿈들이 찾아와 놀라운 풍경 속의 여행지를 안내할 것이다. 그 무한한 것들의 매력에 취하여 황홀한 눈물을 선물할 것이다. 갇힌 화면에서 벗어나 근원적 세계의 넓은 공간을 유영한다. “푸른 새싹이라도 피어나려는지 주먹 쥔 손”에 가득 고이는 수많은 몸들의 전언. “이 두 잎의 팔랑거림으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여정이 이르는 세계는 너무도 많고, 몸은 또 얼마나 광활한가.
수없이 많은 죽음과 끝없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전생과 후생의 은밀한 소통을 통해 얼만큼 영역을 넓힌 얼룩의 꽃을 피울 것인가.

몸의 내부를 향하여
결국 걸리버의 끝나지 않는 여행은 절대적 시간과 완전한 몸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그곳에는 磁力이 있어” 끝없이 이끌려가는 중이다. 그러나 “흩어지지 않으면 붙을 수 없󰡓듯이, “썩어서야 모양이 되”듯이 삶의 시간들이 온전히 망가지지 않으면 당도할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쉴 새 없이 삶의 시간들을 사용한다. 근원에, 혹은 몸의 중심에 이르기 위해 몸의 외부를 부지런히 떠도는 것이다.
이 세계의 존재란, 자신의 감정과 이성으로 우주에 대응하고 이해하고 있고, 영원으로 향하려 한다. 그것은 자신이 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와 순간의 수많은 리듬으로 영속성을 획득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정신은 미래를 향해 진보하는 것이 아니다. 근원의 뿌리를 향해 퇴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후의 종착점은 가장 단순해지거나 자신의 형태를 지우는 일이다. 그것이 가장 순수한 여정이다. 그렇기에 현생을 최선을 다해 소비하려 한다. “블랙박스처럼 잘고 다니는 골은 기억들로 무거울 때”까지 자신의 현생을 끌고 다닌다. “새의 무게가 새를 날게 하는 것과 같이” 무수한 풍경을 탐닉하는 것이다.

새의 무게가 새를 날게 하는 것과 같이. 그 무게가 온전히 바람을 넘겨 천천히 읽는 것과 같이. 조용히 책장을 덮는 것과 같이. 그 책 속의 한 문장이 되는 것과 같이.
―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부분

그가 지닌 풍경의 힘으로 삶의 무수한 기억으로, 다른 근원의 추억을 길어 올리는 일. 그래서 절대적이고 완전한 시공의 어떤 목적지에 안착하려 한다. 몸의 가장 중심으로 향하는, 그래서 그 몸의 흔적이 되고 일부가 되고자 하는 그 머나먼 여정.
고독한 걸리버. 그러나 그가 어서 빨리 풍경의 바깥에서 떠돌며 단순한 움직임만을 바라보고 자신의 한계에 대해 절망하는 것보다 그 풍경의 내부로 들어가 맛보고, 분노하고, 유희하고 눈물을 흘리길 바란다. 어떤 세계에 이르는 것보다 그 여정에 대해 조금 더 깊은 매력에 중독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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