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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신작시/윤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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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709회 작성일 08-02-26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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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향기


눈 내리는 모스크바 강


붉은 광장이 숨 가쁜 자기 탐닉에 빠진 회색이라니…… 나보다 오래 된 눈이 눈을 감고 내린다 눈은 길을 따라 Secret garden을 크게 틀어놓고 책을 읽고 봄의 풋풋한 햇살이 부르면 집 뒤켠으로 가서 수은처럼 찰랑거리는 모스크바 강물에 두 발을 담가보다 손가락 끝으로 수은의 심장을 좍 갈라놓는 노동에 준하지도 않는 학습을 해본다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위대한 붉은 혁명 깃발은 머리가 잘려나간 사마귀 같은 마을 쓰레기통에 처박힌 지 오래다 욕망의 汚水에 몸을 던지고 만 절름발이 이데올로기는 붉은색을 어지럽힌 자주와 보라를 지나 이미 빨갛다에서 너무 멀어져버린 울음 뒤의 정적 같다 붉은 기억을 잃어버린 회색 거리의 레닌은 종일 밀랍 유리관에 누워 나직한 한숨으로 한끼의 끝을 걱정하는 것이다 모두가 떠나버린 옛 궁전 뜰 아래로 그러나 이론의 강물과 실천의 이념들이 모스크바 줄무늬를 해독하며 머뭇머뭇 흘러간다



푸른 나뭇가지의 비밀


1.
1833년 여름, 야스나냐 폴랴나의 깊은 산속에서 5살짜리 꼬마 소년이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큰형 니콜라이가 숲 속에 묻어놓은 ‘푸른 나뭇가지’를 찾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비밀’이 적혀 있다는 푸른 나뭇가지는 해질녘에만 보인다 하여 소년은 무서움에 떨면서도 숲 속을 헤매었다

2.
소년이 조금씩 아껴가며 내놓은 삶은 ‘유년시절’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 ‘부활’의 옷을 차례로 갈아입으며 인간과 자연을 구속하는 모든 제도를 과감히 버리고 광활한 영지 귀퉁이에 푸른 종소리를 매달아놓고 등 굽고 상처 난 이들이 푸른 종소리를 들고 찾아오면 건네주던 한 닢의 은화 사랑조차도 인간을 원초적 행복에서 멀어지게 한다 하여 열매 대신 씨앗을 나누어주기도 하던 손, 그 손으로 몸소 기운 장화를 신고 농노가 되어 그들과 더불어 씨앗을 뿌리고 가꾸듯 그는 최초의 인간을 심는 데 부유했다

3.
풀밭에서 노는 어린아이들이나 길가의 꽃에게 새들에게, 말 타고 눈 쌓인 영지를 달릴 때 만나는 숲 속의 작은 동물들이나 나무들이나 언덕에게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물었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간직한 사람의 눈을 갖게 되면서부터 그는 “나 자신을 위해 남을 부려선 안 돼, 일하지 않고는 먹지 말아야지”라는 철학에 깊이 도달하는 것도 그때의 일인 것이다

4.
누구도 들어본 적 없는, 미처 삶 속에 들어가지 못한 채 아직도 길거리를 서성대고 있는 벌판 한가운데를 빛 한줄기가 아프게 내리비쳤다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빛이 달려온 것이리라 그리하여 빛이 된 황량한 간이역 아스타포보는 한시도 사람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는 큰 빛이 멈추어 선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다만 노을을 듣던 귀로 신을 들으며……

5.
선인들이 가득하되 아이들이 없는 세상과 악인들이 가득하되 아이들이 있는 세상이 있다면 당연히 후자를 택하겠다고 말하는 소년, ‘푸른 나뭇가지’를 찾아 그토록 헤매던 소년이 숲 가운데 풀꽃으로 덮인 작은 언덕에 누워있다 누워서도 계속 집중하는 것은 무구한 사랑이다 문장도 비문도 이름도 없는 無爲自然 밖으로는 나가지 않기로 한다

6.
소년을 아는 것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던가?
(지난해 그의 생가에서 마주친 ‘푸른 나뭇가지’를 든 소년이 계속 마음속에서 기웃거린다 이때 우리들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린다)
∙∙∙
누구세요?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요!


윤향기․
1991년 ≪문학예술≫로 등단
․시집 󰡔엄나무 명상법󰡕 등, 수필집 󰡔로시란테의 오막살이󰡕

추천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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