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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신작시/조성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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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심
묵은 시계
오래된 시계는 태엽이 풀릴 때마다 묵은 시간을 풀어낸다
정확한 거리만 반복하던 시계추
단칼에 초를 자르며 남은 59초를 계산해낸다
벽면을 기어 내려오던 무거운 숨소리 구석으로 떨어진다
모서리마다 후끈하게 풀어놓는 시간의 묻은 때
스르르 방문을 열고 현관문의 손잡이를 돌린다
손목 없는 화가가 그린 밑그림 위로 강바람 세차게 불고
이름을 달지 못한 나뭇가지마다 휘어진 만큼 무게를 얹고 있다
싸리비를 들고 눈을 쓸던 젊은 할아버지
스스로 끊어버린 길을 뒤돌아보며
만주벌판으로 떠난다
바람이 절컥 지붕 위를 때리자
아득하게 사라지는 여백의 목숨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바람이 현관문을 닫아버리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여울목에서
웅웅 강물소리를 내며 가속을 더해 달리던 물살 시계추를 때린다
큰바늘과 작은바늘이 하나로 만나자
흐르던 강물도 깊은 곳에 이르러 발을 멈춘다
눈동자만 굴리던 오래 묵은 시계
깊은 물결에 눌려 명징한 소리 한번 내 보지 못하고
시간을 넘기고야 꼭 종을 친다
새벽강이 걸음을 옮긴다.
마취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윤기 흐르는 빨간 사과
탱글탱글 잘 익은 배에 메스를 대자
밀가루 같은 살갗이 하얗게 질식한다
허공에 매달려 있을 때부터
몸의 가장 중심부위에서 익어가던 씨앗
완성되지 못한 몸이 물컹 소리를 내며 분쇄된다
한번도 마주치치 못한 검은 눈
엄마라고 불러보지 못한 작은 입술
붉은 피로 어긋난다
나긋나긋한 살 비명소리 한번 내보지 못하고 햇살에 콱 밟힌다
살이 되어 보지 못한 씨앗
사과와 자연스럽게 분리되고 마는 날이다
빈 몸으로 다시 허공에 매달려야 한다
바람 부는 날 더욱 견디기 힘들었고
밤이 오면 닫힌 몸에서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마취가 풀리면 어금니가 아파 왔던 날
안으면 거품처럼 사라지는 파란 사과
언제쯤 분내 나는 야릇한 살 냄새를 잊을 수 있을까.
조성심․
2004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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