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18호 신작시/김미령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75회 작성일 08-02-26 22:30

본문

김미령


조율


찻잔을 감싼 손가락과 스푼이 구분되지 않는
어슴푸레한 박모의 시간
탁자며 시계초침이며 色을 가진 것들이 검게 입을 다물고
제 속에서 천천히 푸르스름한 것을 밀어내는데
카페주인이 스위치를 탁, 올린다 갑자기
어웅해진 색깔들이 벗었던 옷을 주섬주섬 입는다
내통하지 못한 아쉬움 속에 할로겐 불빛을 따라
부스러진 눈빛들이 커피잔 속으로 곤두박질친다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인광으로만 보이던 그 순간 동안
온몸이 스스로 빛을 발하던 그늘
그 낯설음에 대해 누구도 아는 채 하지 않는다 다만
윤곽을 더듬듯 서로가 아직 눈앞에 있음을 확인하고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듯 멎었던 이야기를 다시
그날의 찬란으로 돌려야 하는 것을 그들은 안다

창밖이 어두워질수록 더욱 또렷해지는 ‘할 말 없음’ 속에
실내가 사위의 빛을 빨아당겨 숨찬 식빵처럼 부풀어 오르고
나는 타지 않은 설탕 두 알 같은 말을 망설이고 있다,
언제나 저만치 뒤쳐지는 내 걸음으로 아직도
저 어둔 바깥에서 천천히 들어오고 있는 중이다,

두런두런 낮은 말소리들이 실내의 밝음 속으로 갇히고 있다



가방의 안쪽


무당벌레가 손바닥에 주홍색 물찌똥을 싸고
포르르 속 날개를 펼치며 날아간다
이팝나무 수천 개의 눈 끝이 수상하게도 간지런 봄날
노란 잠바 아이가 커다란 가방을 메고
아슬아슬 초록신호등을 엄마 품처럼 뛰어가고
택배차가 좁은 상자 속에 웅크리고 있는 물건들을 가득 싣고
어둔 손가락으로 장부를 더듬듯 지나간다 아무 일 없이,

늘 일정한 시각 그곳을 지나는 아이의 발뒤꿈치를
바람처럼 스쳐간 택배기사의 조바심이
아이의 등에 짊어진 잡다한 혐의들이
네모난 가방 속에서 덜컹거리며 눈감고 있는
뭉툭한 연필심 혹은
저마다 한줄씩의 번지를 가진 텅 빈 아파트로 가는
포장지 속 누군가의 자줏빛 브래지어, 그 이상은 아닐는지

저들의 명랑한 뒤꼭지로 한번 뒤돌아보지도 않고
봄빛을 줄지어 찰랑거리며 지나간 길이
저마다 들어간 컴컴한 입구까지 길게 이어지고
동행한 가방들이 잠시 입을 열었다 닫은 후
한쪽에 찌그러져 어둑한 뱃속에 또 무언가를 품는다





커다란 가방을 메고도 갈 곳 없는 사람처럼 나는
길 위에 새로운 길이 자꾸 겹쳐지는 걸 바라보고 있다


김미령․
1975년 부산 출생
․200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추천2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