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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신작시/이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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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04회 작성일 08-02-26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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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아


고라니 똥


간밤, 법면 작업 중인 골프장 절벽에서
새끼 고라니 한 마리가 추락했어요
필생의 질주, 홀로 다다른 절정의 속도를
어린 고라니는 어떻게 견뎠을까, 녀석은
손으로 눌러보니 아직, 가슴 근육이 물렁했지만
홍가시나무 스친 입술에 핏물이 번지고
왼쪽 송곳니 하나는 그만 부러지고 없었는데요

그때부터, 골프장 잔디밭 한가운데로 내려와
오래도록 서성이는 어미 고라니를 보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점점 잦아지는 거였지요
이 길로 올까, 저 길로 오려나 기웃거려보다
어미는 꿈쩍도 않고 헨리코스 잔디밭에 서서
그믐달 보며, 꼭 그 자리에만 와서
소문처럼 불쑥 피어난 꽃잔디 무덤 곁으로
총총, 차마 목이 메는 한 무더기 똥을 누어요

이번에는 퍽도 오랜 가출이라고, 절벽 향해 목을 빼며
눈물 한 번, 똥 한 번, 눈물 한 번, 똥 한 번,
밤새 맴돌아 제 몸을 가둔 어미의 발자국 무늬가
한 목숨이 보태놓은 등고선으로 남을 무렵





어린놈의 부러진 희디흰 송곳니 하나는
새벽하늘 고라니 일가(一家)의 야윈 문패가 되어서
빼뚜름히 박힌 채 좀처럼 뽑힐 줄 몰랐지요

바람에 밀려나 도처에 분분한 고라니 똥 보고 있으면
저기 저 숱한 말없음표 엿듣는 것 같다가도
문득, 오래 전 우리가 속했던 면면(綿綿)한 서성임,
다시는 마주치지 못할 우리들 먼 먼 눈동자 같아서
고라니 똥 술렁이는 잔디밭 함부로 쓸어내지 못하는데요
말없는 것들이 모여 한밤 내 바람의 질주를 견뎠다는
방금 출간된 푸른 잔디의 점자 보고서를, 오늘도 나는
가만히 손끝으로만 읽다 돌아오고야 말았지요



잃어버린 부분을 내포한 낭만적 풍경을 위한 연구*


점박이 장수하늘소, 녀석을 본 건 굉장한 사건이었다 몸체보다 긴 더듬이는 금방이라도 나를 찌를 듯했다 적어도 방충망을 뚫고 들어오지만 않았어도 녀석은 십분 자유로웠다 컴퓨터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어 목덜미가 뻣뻣해질 때쯤 별안간 낮은 헬기 소리같이 벵, 하는 게 아닌가 녀석이 방충망을 뚫고 들어온 것이다, 놀랐다, 어떻게…… 몇 번이고 부딪힐 때 멀리 쫓았어야 하는데, 후회는 늦은 것이었다

왜 창 밖으로 날려 보낸 녀석이 방에 있었던 걸까, 방안 네 모서리 구석쯤 어디선가 사사삭, 하는 소리에서 본능적으로 바퀴벌레일 것이라 생각했다 냉큼 살충제를 뿌려댄다 그 정도 줄기차게 약을 뿜어대면 으레 초죽음이 되어 기어 나오곤 했기에, 나는 휴지를 가지러 간다 두어 바퀴 손에 휴지를 감아 온 나는, 아뿔싸

녀석은 점박이였다 비틀거리며 어두운 책장 구석에서 나온 점박이는 예의 더듬이가 축 쳐져 있었다 슬리퍼로 탕, 탕, 탕, 쳤던 건 왜일까 이왕 약까지 중독되었으니 고통 없이 죽어버려! 휴지에 말아서, 뭉클, 꿈틀대는 느낌이 전해오는 점박이를 변기에 던졌다 그런데 점박이는, 변기 물이 블랙홀로 빠져나가는 소용돌이 속에서 설산(雪山) 같은 휴지를 헤치고 여섯 개의 건각(健脚)을 내미는 게 아닌가 그 생명력에 놀란 나는 황급히 손을 뻗었지만 너무 늦었다, 다시 솟구쳐 오르는 점박이에게서 우주를 느끼는 그 순간, 점박이 장수하늘소는 변기 속으로 쓸려 내려갔다 나를 원망하면서, 금방이라도 내게 날아들어 살점을 물어 뗄 기세였는데!

크고 견고한 등껍질에 조약돌 반짝이던 점박이를 보내고, 나는 오늘 나를 살충(殺蟲)했다

*2000년 PICAF 출품작 제목 인용.


이민아
․2005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추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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