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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외국문화 순례-에머슨의 문학 에세이 「시인(The Po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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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머슨의 문학 에세이 「시인(The Poet)」
번역:김성균
변덕스런 아이와 격정에 빠진 현자가
희열에 들뜬 눈으로 경주를 벌이네
유성처럼 각자의 길을 골라
밤하늘을 찢어발기고
지평선마저 뛰어넘어 치달리던 두 줄기 빛살은
아폴론만 달릴 수 있는 천로(天路)까지 엿보더니
남자와 여자와 바다와 별을 넘어
우주 끝까지 춤사위를 날리는 자연의 춤을 보았다네
세계들과 민족들과 단체들과 시대들을 넘어
음악처럼 조화로운 질서도 보고, 짝지어 어울리는 운율들도 보았다네
올림피아의 방랑시인들은 노래하네
지상까지 드리우는 신의 꿈들을
언제나 우리의 청춘을 깨닫게 하고
언제나 우리의 청춘을 지켜주는 꿈들을.
취미의 심판관으로 존경받는 사람들은 흔히 뛰어난 그림이나 조각품에 관한 일정한 지식을 습득했기 때문에 세련되거나 우아한 것이라면 무엇에나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이 정말 아름다운지, 그리고 그들이 정말 그림 같은 행동을 하는지 눈여겨 살펴보면 사실 그들도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자들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의 교양이란 것도 기실 장작은커녕 불쏘시개로나 겨우 사용함직한 나무막대처럼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다. 미술에 관한 그들의 지식이란 것도 사실 피상적인 한담(閑談)이나 눈요기에나 필요한 사소한 규칙들과 특징들에 관한 약간의 공부 혹은 색깔이나 형태에만 국한된 약간의 풍월로 습득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사실은 우리와 같은 아마추어들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아름다움의 공식 역시 얼마나 피상적인 것인지를 방증(傍證)한다. 형상이란 영혼이 잠시 깃드는 대상에 불과함을 우리의 지각은 흔히 망각하는 듯이 보인다. 차라리 우리의 철학에는 형상에 관한 학설이 전무하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불이 데우는 냄비에 불이 깃들듯이 우리는 우리의 몸에 깃들인다. 그러나 영혼과 신체기관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하물며 신체기관이 영혼의 싹일 리도 없다. 영혼 이외에 또 다른 형상들과 관련해서도 지성인들은 본질적으로 물질세계에 사유와 의지가 깃들어 있음을 결코 믿지 않는다. 신학자들은 그런 믿음을 배(船)나 구름, 도시나 계약서에도 영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여기는 턱없는 백일몽과 진배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의견을 뒷받침하는 확고한 역사적인 근거가 있다고 거듭 주장한다. 그리고 심지어 시인들조차 일개 시민으로 만족하고 시민적인 생활방식을 편하게 느끼면서도 유독 시를 쓸 때만큼은 그들의 체험과는 동떨어진 환상만 가지고 시를 쓰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최고의 세계정신은 삶의 이중적인 의미에 대한 탐구를 결코 중단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삶을 구성하는 모든 감각적인 사실은 네 겹 혹은 백 겹, 심지어 수천수만 겹의 의미를 내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르페우스(Orpheus),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서기전 490~430),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 서기전 540경~480경: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 서기전 428~348), 플루타르크(Plutarch, 46경~120경), 단테(Dante, 1265~1321),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 스웨덴의 과학자․철학자․신학자)를 비롯한 조각, 회화, 시의 거장들도 바로 그런 중첩적인 의미를 탐구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우리는 냄비나 손수레도 아니요 횃불을 든 사환이나 계몽가도 아니다. 우리는 불의 아이들이요 불로 만들어진 아이들이다. 설령 우리가 불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 불이 약간 변질되었다 했어도, 우리는 신성한 불에서 고작 두세 발짝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불일 따름이다. 그래서 모든 시간의 강물과 그 지류의 발원지는 본질적으로 이상적이고 아름답다. 이러한 숨겨진 진실은 우리로 하여금 ‘시인’ 즉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표현코자 하는 예술가’의 본성과 기능에 관해서, 그가 사용하는 수단들과 소재들에 관해서, 그리고 오늘날 예술의 일반적인 위상에 관해서 숙고하게 만든다.
문제의 외연이 이처럼 광대한 만큼 시인은 인간의 대표자이다. 그는 불완전한 인간들 사이에 머물며 완전한 인간을 지향하고, 우리에게는 그 자신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부유함을 알린다. 청년과 같은 이 시인은 천재적인 인간들을 숭배한다. 왜냐하면 천재들은 시인보다도 훨씬 청년답기 때문이다. 천재들은 시인과 다름없이 영혼을 받아들이지만 훨씬 더 잘 받아들인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눈에 자연은 스스로 아름다움을 더하는 듯이 보인다. 그들은 시인도 그런 자연의 장관을 함께 본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신이 추구하는 진실과 예술 때문에 동시대인들 사이에서 고립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진실과 예술이 조만간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위안을 삼는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진실에 편승하여 살아가면서 진실을 표현하려는 욕구를 품고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연애, 예술, 탐욕, 정치, 노동, 놀이 등을 통해서 각자의 괴로운 비밀을 표현하는 법을 배운다. 인간은 오직 절반만 자기 자신일 뿐 나머지 반은 자기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표현의 필연성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사람은 드물기 그지없다. 나는 우리가 왜 해석자를 필요로 하는지 아직도 그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왜 그렇듯 소심하게 보이는지, 다시 말해서 그들은 왜 자신만의 언어나 침묵을 소유하지 못하는지, 그리고 평소 지기들과 자연스럽게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을 왜 낯선 제3자에게는 잘 전달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만은 알고 있다. 태양과 별, 대지와 바다의 초감각적인 효용을 예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자연물들은 인간에게 특별한 유용성을 제공할 수 있고 또 제공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신체는 담즙이 모자라거나 과잉 분비되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그에 비해 자연은 우리에게 극히 미미한 인상이나 감동만 주고도 우리를 예술가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감각에 전율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지기와 나눈 대화의 내용을 제3자에 차분히 전달할 수 있는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물론 광선들이나 사물의 접촉점들은 우리의 오감에 도달할 만한 힘은 있지만 좀더 깊은 속살이나 골수에까지 침투하여 그것들 자체를 언어로 재생시킬 만한 위력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힘을 균형 있게 지닌 인간이고, 남들이 겪기를 꿈꾸는 경험과 그러한 경험의 과정 전반에 가로놓인 장애물들을 목도하고 조종하는 데 아무런 애로를 느끼지 않는 인간이며, 최대의 힘을 수용하고 분배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인간의 대표자이다.
우주는 동시에 세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들은 모든 사유체계 속에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 아이들을 각자 원인, 작용, 결과로 불러도, 좀더 시적으로는 주피터(제우스), 플루토(하데스), 넵튠(포세이돈)으로 불러도, 아니면 신학적으로 성부, 성령, 성자로 불러도 상관없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이 아이들을 각자 식자(識者), 행위자, 화자(話者)라고 부를 것이다. 이 아이들은 각기 진리를 사랑하는 자, 선을 사랑하는 자,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자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이 세 아이는 서로 동일하고 동등하다. 이 아이들은 각자 더 이상 분해되거나 분석될 수 없는 본질과 같아서, 각자 나머지 둘의 힘을 자신 안에 품고 있음과 동시에 각자의 고유하고 특권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시인은 화자요 작명가인 동시에 아름다움의 연출자이다. 그는 한 명의 주권자로서 세계의 중심에 서있다. 세계는 아름답게 그려지거나 꾸며진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리고 신이 아름다운 것들을 만든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이 우주를 창조했기 때문에, 시인은 관대한 권력자라기보다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황제라고 할 수 있다. 작금의 비평계에서는 유물론자들이 사용하는 위선적이고 가련한 유행어가 창궐하고 있다. 그들은 손재주나 신체 활동만이 인간의 으뜸가는 활동인 양 상찬하고, 타고난 화자들인 이른바 시인으로 불리는 일부 인간들은 표현을 목적으로 삼는 세계로 추방된 자들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채 행동 없이 말만 하는 자들이라고 비방을 해대면서, 이 화자들의 흉내밖에 낼 줄 모르는 자들과 화자들을 혼동하고 있다. 그러나 아가멤논(Agamemnon)의 승리가 아가멤논을 귀하고 존경스럽게 만들었듯이 호메로스(Homeros/Homer)의 시어들도 호메로스를 귀하고 존경스럽게 만든다. 시인은 영웅이나 현자를 기다리지 않는다. 시인은 앞으로 말해지고 또 말해져야 할 것들을 처음 시로 쓰느니만큼 최초로 행동하고 최초로 사유하는 인간이다. 설사 그가 다른 화제들을 먼저 머리에 떠올렸다 하더라도 그 화제들은 결국 그에게는 마치 화가의 작업실에 놓인 정물이나 모델 아니면 건축가가 사용할 건축 자재나 도구를 가져다주는 조수처럼 부수적이고 노예적인 것들에 불과하다.
그래서 모든 시는 시대를 앞서 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음악처럼 율동하는 대기와 어우러져 춤출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고 정교한 유기체로 조직되었다면, 우리는 대기가 부르는 원초적인 노래를 듣고 그 노래를 시로 옮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기의 노래를 표현할 미묘한 시어나 동사를 잃어버린 지 오래여서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시가 잘못 쓰이는 것은 당연한 소치이다. 좀더 예민한 귀를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대기의 음률을 훨씬 더 충실히 받아쓸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받아쓴 노래야말로 비록 불완전할지언정 인류의 노래가 될 수 있다. 자연은 선한 만큼 혹은 이치에 맞는 만큼 진실로 아름답기 때문이고, 드러나야 하는 만큼 혹은 알려져야 하는 만큼 많은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언어와 행동은 신의 에너지가 발휘되는 거의 동일한 방식이다. 언어도 행동이요 행동도 언어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시인으로 불리거나 인정받는다는 것은 누구도 예언하지 못한 것을 그가 고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진실이요 유일한 의사이다. 그는 진단하고 처방한다. 그는 현상을 묘사하고 소개하는 내밀한 관지자(關知者)이기 때문에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유일한 전령사가 될 수 있다. 그는 이상(理想)들을 관조하고 필연성과 인과관계를 선언하는 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시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나 산업기술과 계산기술을 가진 사람이 아닌 진정한 시인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나는 최근 들어 유명세를 타고 있는 영리한 작사가를 화제로 삼는 대화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그는 정교한 가락과 리듬을 자아내는 전축(電蓄) 같은 머리 그리고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라는 언어기교 및 언어구사력을 지닌 듯이 보였다. 그러나 ‘과연 그를 고대의 음유시인들과 같은 시인으로 간주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 제기되자, 우리는 ‘그는 분명히 우리시대 사람이지 영원한 인간은 아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를테면 저 열대의 하늘로 치솟은 침보라소(Chimborazo) 산이 거느린 고산초원지대의 수목 한계선에도 못 미칠 정도로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천재(그)는 상류층 신사숙녀들이 산책을 하거나 한담을 나누기도 하는 산책로와 테라스를 갖추고 화려한 분수대와 조각상으로 꾸며진 현대식 저택의 정원쯤은 된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우리는 그가 연주하는 모든 변주곡의 저변에 흐르는 전통적인 음조를 들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시인들은 노래하는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긴 하지만 음악의 아들들은 아니다. 시에서 논리적인 줄거리는 부수적인 것이다. 시에서 최우선적인 것인 바로 맨 마지막 구절이다.
왜냐하면 한 편의 시를 구성하는 것은 여러 운율들이 아니라 시의 줄거리를 형성하는 하나의 운율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는 고유의 건축학적 구조를 구비함과 동시에 늘 새롭게 자연을 장식하는 식물이나 동물의 영혼처럼 열정적이고 생생한 사유(思惟) 같은 시여야 한다. 사유와 형식은, 사유가 형식을 앞선다고 간주하는 발생학적 차원에서만 서로 동등하지 않을 뿐, 시간의 차원에서는 서로 동등하다. 따라서 시인은 늘 새롭게 사유하는 사람이다. 그가 전개하는 모든 사유는 전적으로 새로운 경험이 된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사유할 수밖에 없는 그의 운명을 우리에게 말해줄 것이고, 이러한 그의 운명 덕분에 모든 사람들이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새로운 세대가 겪은 체험은 새로운 고백을 필요로 하며, 세계는 언제나 그런 고백을 할 시인을 기다리는 듯이 보인다. 나는 젊은 시절 어느 날 아침 어떤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내 곁에 앉아있던 한 젊은이에게 밀물처럼 밀어닥치던 천재성을 목격하고 감동에 들떴었다. 그는 내가 잊지 못한 한마디를 남겨놓고 정처 없는 방황의 길로 나아갔다. 그는 수백 줄의 글을 썼지만 글로 표현된 자신의 생각이 정확히 무엇인지 말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말은 단지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인간도, 짐승도, 하늘도, 땅도, 바다도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말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우리는 얼마나 기뻐했던가! 또한 우리는 얼마나 경솔했던가! 그 모임의 회원들은 그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듯이 보였다. 우리는 모든 별빛을 삼키며 밝아오는 여명의 오로라 속에 앉아있었다. 아직 어둠에 잠겨 있던 보스턴의 시가는 평소보다 두 배 혹은 그 몇 배나 멀리 떨어져 있는 듯이 보였다. 로마! 그렇다. 로마는 과연 어떠했던가? 로마에서는 플루타르크와 섹스피어는 떨어지는 낙엽이었고 호메로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바로 이날, 바로 이 지붕 밑에서, 바로 우리 곁에서 시가 쓰였던 것이 자명했다. 그렇다! 그 찬란한 영혼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돌처럼 꿋꿋한 이 순간들은 지금도 불꽃을 튀기며 활활 타오르고 있다! 나는 그 신탁이 완전한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고 자연은 스스로 불타고 있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사위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도 빛나는 오로라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시인의 출현에 얼마간의 흥미를 갖기 마련이다. 하지만 누구도 한 시인의 출현이 자신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우리는 세계의 비밀이 심오하다는 것은 알지만 누가 혹은 무엇이 그 비밀을 우리에게 해명해줄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거대한 방랑자, 새로운 유형의 얼굴, 새로운 개인은 우리의 손에 비밀의 열쇠를 쥐어줄 수 있다. 우리에게 천재가 가치 있는 이유는 그가 기록한 것의 진실성에 있음은 당연하다. 재능이 있는 사람은 그 재능만큼 장난을 치고 곡예를 부릴 수 있다. 천재는 실현하고 보태는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장 정직한 인간은 자기 자신과 자기의 작품을 가장 높은 곳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제일 먼저 새로운 소식을 전할 수 있다. 그 소식은 가장 진실한 말이기 때문에, 그런 말로 된 문장은 그 시점의 세계에 가장 적합하고 그 시점의 세계에서 가장 음악적이고 적확한 목소리가 될 것이다.
우리가 신성한 역사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한 시인의 탄생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연대기적 사건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거짓과 허위에 쉽사리 현혹되지 않는 인간은 그가 하나의 진리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 때까지 그로 하여금 그 진리를 붙들고 있게 만들 수 있는 형제가 도착하기를 묵묵히 기다린다. 내가 한 편의 시를 읽으며 받은 감명을 고백하는 순간은 얼마나 기쁘던가! 그 순간 나를 묶고 있던 쇠사슬은 부서지고 만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이 지상에 드리운 이 흐린 구름들을 뚫고, 이 칙칙한-비록 투명해 보일지라도 실질적으로는 불투명한-공기를 뚫고, 저 진실의 하늘로 날아올라 나와 진리의 관계를 발견하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비약은 나와 인생을 화해시키고 자연을 회복시킬 것이며, 나로 하여금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미물들을 이해하게 만들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진실로 무엇인지를 알게 만들 것이다. 인생은 더 이상 한낱 잡음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바야흐로 세상의 남자들과 여자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어리석음과 미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징표를 발견할 것이다. 그런 이해와 발견의 날은 나의 생일보다도 기쁜 날이 될 것이다. 나는 태어날 때는 한 마리 동물과 같았지만 지금의 나는 현실을 궁구하는 학문의 세계에 초대받은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예감은 아직 열매를 거두지 못한 희망일 뿐이다. 나를 진리의 하늘로 데려갈 그 날개 달린 인간은 나를 데리고 안개 속을 선회하면서 진리가 빛나는 하늘의 경계를 확인시켜주려는 듯이 이 구름에서 저 구름으로 뛰어다니면서 장난을 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지상의 희망은 그를 추락시키려고 든다. 진리를 향한 상승에 이제 갓 입문한 나는 어느새 그도 진리의 하늘로 들어가는 방법을 모른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고작해야 땅에서 폴짝거리는 닭이나 바다에서 자맥질이나 하는 날치와 같은 그의 기술에 내가 그저 분별없이 현혹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모든 것을 훤히 들여다보는 눈(目)과 같은 천상의 공기 속에서는 누구도 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곧장 낡고 누추한 지상의 한 구석으로 추락하여 과대 포장된 이전의 생활에 사로잡혀서는 내가 도달할 수도 있었을 저 천상의 세계로 나를 인도할 수 있는 안내자가 존재하리라는 나의 믿음마저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헛된 허영심은 버리고 새로운 희망을 품고 좀더 가치 있는 충동에 편승하여 자연을 관찰해 보자. 자연은 임무에 충실하려는 시인의 성실성을 보장해 왔다. 시인의 임무란 이른바 사물의 아름다움은 표현할수록 더욱 새롭고 고차원적인 아름다움을 띤다는 사실을 고지하고 긍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을 그림문자 같은 형태로 그에게 제공한다. 하나의 대상은 모범 또는 전형으로 이용될 때 이전에 지니고 있던 낡은 가치보다도 월등히 우수하고 탁월한 새로운 가치를 드러내는데, 그것은 목수가 팽팽히 잡아당긴 먹줄이 스쳐지나가는 산들바람에도 떨리며 음악을 탄주하는 현으로 바뀌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이암블리쿠스(Iamblichus, 245~325경: 시리아 출신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는 “모든 이미지보다 우월한 사물도 표현은 이미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 맥락에서 사물은 상징으로 이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도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상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백사장에 그릴 수 있는 모든 선(線)은 표현될 수 있는 사물이다. 그래서 정신이나 천재성을 지니지 않은 신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형태는 성격의 효과이고, 모든 건강 상태는 생명이 지닌 성질의 효과이며, 모든 조화는 건강의 효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름다움에 대한 지각도 교감(交感)이어야하거나 선(善)에만 오로지 부응해야 한다. 아름다운 것은 필연성이라는 토대에 입각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영혼이 신체를 만든다. 영국의 현명한 시인 스펜서(Ebmund Spenser, 1553~1599)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가르쳤다.
모든 영혼은 순수할수록
천상의 빛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아름다운 신체일수록
신체를 단정히 하는 습관을 들인다면
밝고 우아한 아름다움과 친절한 외모를 가질 수 있으리.
신체의 형태는 영혼을 본받고
영혼의 형태는 신체를 본받기 때문이다.
이 시편을 읽으며 우리는 불현듯 비판적인 토론장이 아닌 성스러운 장소에 와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바로 이 순간부터 우리는 지극히 신중하고 경건한 태도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순간 우리는 세계의 비밀 앞에 서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비밀 앞에서 존재는 현상으로 출현하여 단일화되었다가 종래에는 다양화되기 시작한다.
우주는 영혼의 외적인 표현이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은 어디서나 생명력을 외부로 폭발시킴으로써 스스로를 표현한다. 우리의 과학은 감각적이어서 피상적이다. 물체와 천체, 물리현상과 화학물질 같은 것을 우리는, 마치 그것들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들이라는 듯이, 감각적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가 앞서 깨달은 존재의 수행원들에 불과하다. 프로클루스(Proclus, 411~485: 콘스탄티노플 출신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전능한 하느님은 성스러운 변신을 통해서 지적인 능력을 지닌 선명한 빛의 이미지로 우리 앞에서 나타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도 모르게 지적인 자연물들과 함께 은밀히 움직이고 있다.” 그래서 과학의 수준은 언제나 종교와 형이상학에 보조를 맞추는 데 급급한 인간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거나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의 지표에 머물고 만다. 자연적인 모든 것은 도덕적 능력에 부응한다. 따라서 만일 어떤 현상이 그저 야만적이고 미개한 현상으로만 취급되고 있다면 그 까닭은 그런 현상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학자의 도덕적 능력이 아직 활성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연의 바다가 그토록 심오하다면 우리가 종교적 관심에 이끌려 그 바다 위에서 끊임없이 맴돌기만 하고 있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무릇 우화의 아름다움은 시인에게 그리고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감각의 중요성을 증명해준다. 그런 반면에 모든 인간이 시인이라면 이러한 자연의 마력은 의심의 대상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시인을 제외한 모든 인간은 자신이 속한 우주를 축복받은 우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환상이 상징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과연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누구일까?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은 오직 시인들 즉 여유 있고 교양 있는 사람들밖에 없을까? 그렇지 않다. 사냥꾼, 농부, 동물 조련사, 푸줏간 주인이나 도살업자 등도 비록 언어가 아닌 생명을 좌우하는 일을 선호한다는 사실만 빼놓고 본다면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있는 셈이다. 작가(시인)는 마부나 사냥꾼이 말이나 당나귀나 사냥개 같은 짐승을 무엇 때문에 귀하게 여기는지 궁금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은 피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교감할 수 있는 것을 중시한다. 따라서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이 짐승들에 대해서 항상 어느 정도의 관심은 가지고 있다. 그는 이 짐승들이 발산하는 생명력을 느낀다. 그는 물론 그 생명력을 뭐라고 딱히 정의하지는 못하지만 자연스럽게 그 생명력에 이끌린다. 그는 이 짐승들 흉내를 내거나 짐승들을 부리거나 짐승들과 어울려 노는 일에도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는 북풍한설에도, 비바람에도, 돌과 나무와 쇠붙이에도 가장 정직하게 반응하는 존재를 사랑한다.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은 우리가 전모를 확인할 수 있는 아름다움보다도 귀중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진지하고 의례적인 것들보다도 조야한 것들에 대해서 존경심을 품는다. 왜냐하면 자연은 상징이어서 초자연적인 존재를 증명하기 때문이며, 육체는 생명으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이런 애착의 내면성과 수수께끼는 모든 계급의 인간으로 하여금 상징이나 문장(紋章)을 사용하도록 부추긴다. 그런데 시인들과 철학자들은 대중들만큼 그런 상징들에 도취되지 않는다. 정치인들은 배지나 표장을 보면서 상대의 권력을 가늠한다. 거대한 나무공에 열광한 군중들이 계주하듯이 그 공을 볼티모어에서 벙커힐까지 굴려가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정치란 누구는 옷을 누구는 신발을 누구는 배(船)를 만들고 하는 과정과 다름없다. 사과술통, 통나무집, 히코리나무막대, 야자수 등 기장(記章)이나 상징을 내걸지 않는 정당은 없다. 국기는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가! 신의 은총을 상징하는 별, 백합, 표범, 초승달, 사자, 독수리, 기타 갖은 문양이나 형상을 그려 넣은 낡은 깃발들이 오래 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이 깃발들은 가장 거칠거나 아니면 가장 인습적인 외부세계를 피로 물들일 창칼로 바뀌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시인들을 미워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모두 시인이요 성자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징 언어의 보편성을 넘어서 자연의 사물을 초월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신성한 일임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세계는 신의 상징들, 그림들, 명령들이 빼곡히 기록된 담장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사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원 안에는 자연에 대한 온전한 감각을 전달하지 않는 자연적 사실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흔히 사건이나 사태를 접하면 저급한 것과 고급한 것으로, 우수한 것과 열등한 것으로 구분하곤 한다. 하지만 자연이 상징으로 이용될 때 이러한 구분은 사라지고 만다. 사유는 모든 것을 용도에 부합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모든 것을 아는 인간이 사용하는 어휘는 고상한 척하는 자들이 대화에서 배척하는 단어와 이미지들까지도 아우를 것이다. 저속하고 음탕하며 외설적인 표현조차 새로운 사유와 결부된다면 빛나는 표현이 될 것이다. 히브리 예언자들의 신앙심은 그들의 악취미와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주었다. 또한 할례의식은 저열한 것을 고양하고 불쾌한 것을 정화하는 시의 위력을 입증하는 사례로 간주할 수 있다. 작고 하찮은 것들이 위대한 상징으로서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다. 법칙은 저열하고 하찮은 형태로 표현될수록 더욱 신랄한 의미를 띨 수 있고 인간의 기억에 오래 남을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휴대할 수 있는 도구들 가운데 필수적이고 귀한 것일수록 가장 작은 상자나 케이스에 담아서 휴대하는 이치와 같다. 게다가 풍부한 어휘는 상상력 넘치는 활달한 정신을 시사한다. 예를 들면, 의회연설을 준비할 때면 항상 베일리의 사전을 들고 다녔다는 채텀 경(Lord Chatham)은 바로 이런 정신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표현의 의지를 가진 정신이라면 가장 빈약한 경험이라도 충분히 표현의 소재로 이용할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그토록 새로운 사실들에 대한 지식과 정보만 탐하는 것일까? 낮과 밤, 집과 뜰, 몇 권의 책, 몇 가지의 행동만으로도 세상 모든 직업과 모든 경험으로 얻을 수 있는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조그만 상징들의 풍부한 의미를 대부분 사장시켜 왔다. 더구나 우리는 그런 상징들을 무자비하게 단순화시켜서 사용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런 시류에 반발하여 시를 길게 써야 한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실제로 모든 단어는 한때 시어로 사용된 적이 있다. 그래서 모든 새로운 진술은 새로운 단어가 될 수 있다. 더구나 우리는 신성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결함과 기형적인 것들도 이용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세계의 악이 오로지 악마의 눈에만 보이도록 우리의 감각을 표현할 수 있다. 신화학자들은 과거의 신화들 속에서 발견되는 불카누스(Vulcan)의 절룩대는 다리나 큐피드(Cupid)의 맹목적인 눈(目)과 같은 신의 결함이 오히려 신의 본성을 표현할 뿐 아니라 그 의미를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처럼 신의 삶에서 탈구되고 탈락된 것들은 사물을 추하게 만들지만, 그렇게 탈락된 것들을 자연과 완전한 존재에 재결합시키는-심지어 인공물이나 자연에 어긋나는 것들마저 자연에 재결합시키는 더욱 깊은 통찰력을 지닌-시인은 가장 용납하기 어려운 사실들조차도 매우 손쉽게 다루고 이용할 수 있다. 공장이 있고 철도가 지나가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자연의 풍경을 노래한 시를 읽는다면 그 사람들은 그 시가 공장이나 철도 앞에서는 전혀 맥을 못 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연시들은 아직 현대인들의 독시(讀詩)를 신성한 행위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의 시들이 벌집이나 거미집처럼 복잡하고 강력한 현대 산업체계에 빨려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 한편에서 자연은 그 시들을 생명의 주기 속으로 매우 신속히 나포해 들인다. 그리고는 철로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기차가 본래 자연적인 것이었다는 듯이 철로와 기차마저 사랑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정신을 집중하여 생각하면 무수한 기계적인 발명품들은 인간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기계적인 사실들은 비록 우리에게 수백만 달러를 벌어줄는지 몰라도 결코 우리의 정신을 놀라게 하지는 못하는 까닭에 곡식의 씨앗 한 알만큼의 중요성도 획득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에 비해서 정신적인 사실은 많든 적든 그 사실에 속하는 특수한 사실들까지도 변함없이 그대로 존속한다. 산은 아무리 높아도 하늘을 뚫지는 못한다. 도시 구경을 처음 나온 거칠고 호기심 많은 시골소년과 마주친 소심한 도시민은 그 거칠고 자그마한 이방인을 보고 불쾌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 소년은 자기가 도시의 세련된 집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조차 모름에도 마치 처음 기차를 탄 시인이 자기 좌석을 정확히 찾아서 앉듯이 찾아가야 할 집을 쉽사리 찾아갈 것이다. 새로운 사실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삶이라는 중요하고 영속적인 사실을 고양시키는 반면에, 돈벌이나 미국의 상업처럼 삶을 구성하는 기존의 어떤/모든 부차적인 환경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세계는 정신의 저변에서 동사와 명사로 제시된다. 시인이란 이러한 세계를 시어로 조직할 수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삶이 그렇게 대단하고 매혹적이며 흡인력이 강함에도, 그리고 그렇게 칭해지는 상징들을 모든 인간이 이해할 수 있음에도, 시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그 상징들을 독창적으로 이용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상징들인 동시에 상징들 속에서 살고 있다. 노동자, 노동, 도구, 언어와 사물, 탄생과 죽음, 이 모든 것이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상징들과 교감하고 상징들에 공감하면서도 사물들을 경제적으로 사용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상징들이 사유의 산물들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시인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지성의 인식력을 발휘하여 상징들에게 활력을 부여한다. 즉 시인은 상징들이 지녔던 잊혀진 용도를 환기시키면서 말 못하는 무기력한 대상들에게 눈과 혀를 달아준다. 그는 상징에 깃들인 사유의 독자성과 안정성은 물론 상징의 우연성과 일회성도 지각한다. 땅속을 꿰뚫어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고 전해지는 린카에우스(Lyncaeus)처럼 시인도 세계를 속속들이 꿰뚫어보는 눈을 가지고 있어서 그가 보는 모든 것의 정확한 배열과 운동을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다. 그는 남보다 뛰어난 지각을 통해서 사물에 한발 더 다가가서 사물의 변질 과정을 파악할 수 있고 사유가 다양한 형태를 띤다는 사실도 지각할 수 있다. 그러한 변화와 다양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모든 생물의 형태가 형태 자체를 좀더 고차원적인 것으로 향상시키려는 강제력 곧 생명력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의 눈은 그러한 생명력을 표현하는 형태들을 이용하여 생물을 파악하고 그의 입은 넘쳐흐르는 자연과 더불어 언어로 넘쳐흐른다. 섹스, 영양, 임신, 탄생, 성장, 노화와 같은 동물 경제를 구성하는 모든 사실은 인간의 영혼으로 진화하는 세계의 상징들 즉 동물 경제를 통해 변화를 겪으면서 좀더 새롭고 고차원적인 사실들을 수확하는 세계의 상징들이다. 그는 형태 자체에 조응하기보다는 생명력에 조응하는 형태들을 이용한다. 바로 이러한 활용법이 진정한 과학이다. 그래서 시인만이 천체학, 화학, 식물학, 동물학에 두루 조예가 있다. 시인은 이런 사실들로부터 거침없이 기호(sign)들을 뽑아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 달, 별이라고 부르는 꽃들이 우주라는 들판이나 초원에 그렇듯 무수히 피어있는 까닭도, 동물들, 인간들, 신들이 우주라는 망망대해에서 그렇듯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는 까닭도 시인은 다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모든 말(言)은, 그가 쓰는 모든 시는, 그가 하는 사유의 말(馬)을 타고 달리며 그가 하는 말이요 그가 쓰는 시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러한 과학을 바탕으로 때로는 각 사물의 외관에 때로는 사물의 본질에 알맞은 이름을 붙이는 자, 즉 각 사물의 독립성 또는 경계를 분명히 밝혀 사물에 대한 앎의 축제를 벌이는 명명자(命名者) 혹은 언어제조자가 될 수 있다. 시인들은 모든 언어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는 역사의 문서고(文書庫)이자 어쩌면 뮤즈들의 무덤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그 대부분의 기원이 망각되었음에도, 각 단어들은 뮤즈들의 천재성이 최초로 드러난 언어적 충격파였기에, 그리고 그 단어들을 최초로 발설한 사람과 최초로 들은 사람 앞에서 세계를 상징으로 만들었기에, 지금까지 통용될 수 있었다. 어원학자는 세상에서 가장 무용한 단어가 처음 태어났을 당시에는 그렇듯 찬란하게 빛났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래서 언어는 시의 화석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바다 속에 살던 아주 미세한 생물들이 장구한 세월 동안 퇴적된 결과물이 바로 대륙의 석회암인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비록 부수적인 용법 때문에 우리가 오랫동안 그 시적인 기원을 떠올리지 않거나 못한 이미지들 또는 비유들의 퇴적물이 바로 언어라는 말이다. 그런데 시인은 사물을 보기 때문에, 혹은 다른 누구보다도 사물에 더 가까이 접근해서 보기 때문에, 사물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이러한 표현하기 또는 이름붙이기는 창조적인 예술은 아니지만 나무에서 잎이 자라나듯 최초의 자연에서 자라난 2차적인 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이란 자율적인 어떤 활동 내지 변화를 가리킨다. 자연은 스스로의 손으로 모든 일을 한다. 또한 다른 어떤 것이 이름 붙여주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자연 스스로 이름을 짓는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은 거듭 변모한다. 나는 어느 시인이 내게 해주었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기억한다.
“천재성은 전체든 부분이든 유한한 물리적인 사물의 부패를 막고 회복시키는 활력이다. 자연은 자연의 왕국 어디서나 스스로를 보증하고 책임진다. 따라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는 허약한 버섯이라도 주름 속에 무수한 포자를 품고 있다가 때가 되면 주름을 펴고 흔들어대며 수백만 개의 포자들을 내일 혹은 모레 거듭 태어날 수 있도록 사방에 퍼뜨린다. 이러한 뒤흔들림의 시간을 거쳐 세상에 뿌려진 포자는 이전의 늙은 버섯이 갖지 못했던 새로운 버섯이 될 기회를 획득한다. 새로운 장소로 날아간 이 포자들은 부모버섯을 파괴시킨 사건들과 동일한 사건을 겪지 않아도 된다. 자연은 인간도 만들었다. 그러면서 자연은 이 경이로운 존재인 인간도 다른 생물들처럼 성숙하고 번식하게 만듦으로써 일거에 인간을 상실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었다. 즉 자연은 기존의 인간으로부터 동일한 새로운 인간을 분리시킴으로써 그 새로운 인간은 기존의 인간이 겪었던 사건들을 개인적으로 겪지 않아도 된 것이다. 그래서 시인의 영혼이 성숙한 사유에 도달하면 자연은 시인의 영혼을 시인의 시들이나 노래들과 분리시켜 멀리 때어놓는 것이다. 바로 이 시들이나 노래들이 진절머리 나는 시간의 왕국에서 벌어지는 지겨운 사건들을 겪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대담무쌍하고 늘 깨어있어서 죽음을 모르는 자손들 즉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은 또한 더 빨리 더 멀리 날아가서 인간의 심경에 돌이킬 수 없이 깊이 스며들 수 있는 날개들을 단 겁 없고 쾌활하며 역동적인 후손들이다. 이 날개들이 바로 시인의 영혼이 지닌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죽어야할 운명의 부모들로부터 영원히 날아오르는 이 노래들은 부모들보다도 훨씬 더 수가 많은 아귀 떼처럼 탐욕스럽고 시끄럽게 불만을 표시하며 위협하고 덤벼드는 비난자들에게 설복당하여 끝내 날갯짓을 멈추고 만다. 그토록 짧은 비약의 순간이 지나면 그 노래들은 아귀들의 영혼으로부터 어떤 아름다운 날개도 발아시키지 못한 채 시들어 말라죽고 마는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이 일단 자아낸 선율들은 무한한 시간의 심연을 뚫고 상승하고 비약한다.”
그 방랑시인은 이렇듯 자유로운 언어를 사용하여 나를 가르쳤다. 그러나 새로운 개인을 낳는 자연의 천궁은 영혼이 안심하고 비상하거나 상승할 수 있는 고차원적인 형태들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존재하고 있다. 나는 젊은 시절 내가 살던 도시의 공원에 서있던 한 청년의 동상을 제작한 조각가와 친분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행복하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꼭 집어서 말하진 못했지만 간접적으로는 훌륭하게 표현했음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어느 날 그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새벽에 일어나 밝아오는 아침을 바라보았고 그 아침의 영원함만큼이나 숭고한 침묵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 후 오랫동안 그는 이 침묵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러던 어느 날 보라! 그의 조각칼은 대리석으로 아름다운 새벽의 신 루시퍼(Lucifer/Phorphorus)의 형상을 조각해냈던 것이다. 그 청년 조각상은 그것을 보는 모든 이들을 침묵에 빠뜨렸다고 전해진다. 시인은 자기의 기분에 스스로를 내맡긴다. 그러한 그를 뒤흔드는 사유는 포장만 바꾸는 방식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러한 표현법은 사물 자체가 자유롭게 표현될 때 획득하는 유기적인 모범 또는 새로운 전형으로 자리 잡는다. 전 우주의 욕망을 공유한 사물들은, 마치 햇살에 비친 사물이 자체의 이미지들을 보는 이의 눈의 망막에 그려 넣듯이, 자체의 본질을 다른 누구보다도 시인의 정신에 훨씬 더 정밀하게 모사해 넣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물들이 좀더 고차원적이고 유기적인 형태로 변모하는 과정은 사물들이 시인의 시를 통해서 선율로 변화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모든 사물은 각기 수호신(daemon) 내지 영혼을 두르고 있어서, 사물의 형태가 눈의 망막에 비치듯이, 사물의 영혼은 시의 선율에 반영된다. 바다나 산맥이나 나이아가라 폭포같이 출렁이며 흘러넘치는 모든 것은 공기 중에 떠다니는 냄새들처럼 다른 것과 어울리고 섞이기 전에 ‘이미 -존재’하거나 ‘초월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충분히 밝은 귀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 존재들이 출렁이고 넘치는 소리를 듣고 그 소리들을 희석시키거나 더럽히지 않으면서 고스란히 기록하기 위해 애를 쓸 것이다. 비평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철저하고 치열한 비평정신이야말로 자연을 기록하고 자연과 일치해야할 시편들 중에서 오염되고 부패한 시편이나 시구를 정확히 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네트 한편을 읊조리며 느끼는 기쁨은 조개들이 쉼 없이 껍질을 여닫는 소리를 듣거나 다양한 꽃들이 서로 닮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기쁨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새들이 짝짓기하며 우짖는 소리는 한편의 목가(牧歌)와 같아서 결코 싫증나지 않는다. 사나운 폭풍우도 위선이나 분별없는 폭언이 깃들 여지가 없는 한편의 솔직한 송시와 다름없다. 파종되고 수확되어 저장되는 곡식과 과일의 씨앗을 햇살과 열기와 폭풍우로 성장시키는 여름은 수많은 등장인물이 각자 맡은 배역을 훌륭히 수행하는 한편의 장대한 서사시를 써내려간다. 이 모든 음을 조율하고 변조시켜 우리의 영혼으로 스며들게 하는, 그리하여 우리를 자연의 발명 활동에 참여시키는 것이 과연 조화와 진리가 아니라면 그 무엇이겠는가?
이른바 상상력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통찰력은 아주 높은 시력을 요구한다. 이러한 시력은 학습을 통해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견자(見者) 자신이 어디를 바라보고 무엇을 바라보는지를 앎으로써, 사물의 형태를 통해서 사물의 길 내지 회로를 파악하고 공유함으로써, 그리고 그 형태를 타인들에게는 반쯤 투명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획득할 수 있다. 그러한 사물의 길은 침묵의 길이다. 그런데 그 말없는 사물은 자신과 동행하는 화자(話者)를 과연 그냥 내버려둘까? 그 화자가 스파이라면 사물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그 화자가 사물을 사랑하는 연인이거나 시인이라면 사물은 그와 동행할 것이다. 그 연인 또는 시인은 사물의 본성을 초월한 화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편에서 볼 때 올바른 이름을 붙이기 위한 조건은 형태를 통해서 사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신의 후광(aura)에 그 스스로를 맡기고 그 후광과 함께하는 것이다. 모든 지적인 인간의 비밀은 사물의 본성에 스스로 지성을 내맡김으로써 그들이 소유하고 의식하는 지성의 에너지를 초과하여 (지성 자체를 배가시키는) 새로운 에너지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학습의 속도가 빠르다는 데 있다. 그러한 개인은, 개인적인 지력에 대한 긍지와는 별도로,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 인간적인 문들을 열어젖힐 수 있는, 그리고 그렇게 열린 문들을 통해서 밀려드는 격류들이 그를 휩쓸고 지나가도록 내버려둘 수 있는 대범하고 공적(公的)인 지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게 우주의 생명력 속에 휩쓸린 그의 발언은 번개가 되고 그의 사유는 법칙이 되며 그가 사용하는 어휘들은 식물이나 동물처럼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어가 된다. 시인은 다소 거칠고 생생하게 혹은 말짱한 지성이 아닌 신의 술(nectar)에 취한 지성으로만 스스로를 표현하고자 했던 고대인들처럼 ‘정신의 꽃으로’ 말할 수 있을 때에만, 다시 말해서, 하나의 기관으로 이용되는 지성이 아닌 모든 노역에서 해방된 지성으로서 그리하여 천상의 삶이 이끄는 대로 스스로를 맡기는 지성으로서 말할 수 있을 때에만, 자기가 충분하고 적절하게 말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길을 잃은 여행자가 자신이 탄 말의 목에 채찍을 갈기며 길을 찾아내는 동물의 본능에 몸을 맡기듯이, 우리는 우리를 태우고 이 세계를 여행하는 신의 동물도 그렇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이 본능을 자극할 수 있다면, 우리 앞에는 자연으로 진입하는 새로운 여로들이 열리고, 정신은 넘쳐흘러 가장 단단하고 가장 높은 사물에까지 스며들어서 변모하거나 변성(變性)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들이 술, 마취제, 커피, 홍차, 아편, 백단향이나 담배를 비롯한 동물적 흥분을 촉발시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인간도 그들의 평범한 지력에 이처럼 경이로운 능력을 보태기 위해 그런 수단들을 사용할 수 있다. 그들은 또한 이러한 목적에 부응하는 대화, 음악, 그림, 조각, 춤, 연극, 여행, 전쟁이나 패싸움, 불놀이나 게임, 정치, 연애나 과학, 그리고 진정한 신의 술을 대신하여 동물적인 도취와 흥분을 유발하는 좀더 조악하거나 세련된 몇 가지 유사-기능성 대체약물들을 높이 평가한다. 특히 이런 것들은 지성으로 하여금 사실에 더욱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결국에는 일종의 지적인 황홀경이라고 할 만한 체험까지 가능하게 만든다. 또한 이것들은 인간의 원심화(遠心化) 경향과 자유로운 공간지향성을 보조할 뿐 아니라, 인간이 갇혀 있는 육체라는 혼곤한 감옥으로부터 그리고 그런 인간을 둘러싼 인간관계라는 안온한 교도소로부터 인간이 탈출하는 데도 도움을 제공한다. 그래서 화가, 시인, 음악가, 배우 같이 아름다움을 직업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쾌락과 도취의 삶을 더욱 쉽사리 부추기고 주도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양산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진정한 신의 술을 음복한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들의 대부분은 숭고한 차원의 자유가 아닌 저속한 차원의 자유 속으로 해방되어 마치 자유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듯 위조된 행동을 하게 되고, 종래에는 자기의 장기만 믿고 난봉과 패악을 저지르다가 대가를 치르는 자들도 나타난다. 그러나 그 어떤 장기도 속임수로는 결코 자연의 성격을 획득할 수 없다. 아편이나 술이 부리는 요술만으로는 세계의 영혼 즉 위대하고 고요한 창조자를 불러내지 못한다. 웅대한 꿈은 정결한 신체에 깃들인 순수하고 담백한 영혼에게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아편이나 술과 같은 도취제를 통해서 얻었다고 믿는 영감은 사실 어느 정도 날조된 흥분이자 약간은 가장된 격정이라 할 수 있다. 영국의 시인 밀턴(John Milton, 1608~1674)은 “서정시인은 술도 마시며 대담하고 거침없이 살아갈 수 있지만 천상의 신들과 그 신들이 내려와 깃들인 인간들을 노래해야 할 서사시인은 나무잔으로 물만 마셔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시는 ‘악마의 술’이 아니라 ‘신의 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의 술은 한편으로 장난감과 같다. 우리는 흔히 아이들에게 갖가지 인형이나 북이나 목마 같은 장난감들을 잔뜩 사다준다. 그러나 아이들의 눈을 그런 무표정한 인형들 대신에 해와 달, 동물들, 강과 바다, 조약돌과 바위 같은 자연물로 채워준다면 아이들은 그 자연물들을 장난감으로 삼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시인의 생활습관도 시인 자신으로 하여금 일상적이고 자연적인 것들에 대해서 기쁨과 환희를 느끼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햇살은 그에게 명랑함을 선물할 것이고, 공기는 그의 영감을 자극할 것이며, 물은 그를 취하게 만들 것이다. 고요한 가슴들을 가득 채우는 영혼은, 잡초마저 말라버린 모든 불모의 야산 앞에서도 3월의 밋밋한 햇살에 반쯤 몸을 묻고 있는 모든 소나무 그루터기와 돌 앞에서도 그리고 가난과 굶주림 앞에서도 자신을 드러내는 영혼은, 그렇듯 소박한 취미를 가진 영혼이다. 그래서 와인과 프랑스 커피에 넌더리가 난 감각을 자극할 수 있는 보스턴과 뉴욕의 유행과 탐욕만 머릿속에 가득 찬 사람이라면 아무리 푸른 소나무들을 관찰해 보아도 어떤 지혜의 빛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시인을 도취시키는 상상력이라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무기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변모(혹은 변태)는 구경꾼이 지닌 기쁨의 감정을 자극한다. 상징들은 모든 인간을 해방감과 유쾌한 흥분감에 들뜨게 만드는 어떤 힘을 발휘한다. 상징과 마주친 우리는 마치 마술사의 지팡이에 닿은 듯이 보인다. 그 지팡이는 우리를 어린아이처럼 춤추게 만들고 기뻐 날뛰게 만든다. 우리는 답답한 동굴이나 지하실에 오랫동안 갇혀 있다가 금방 상쾌한 공기 속으로 나온 사람처럼 보인다. 이것이 비유, 전설, 신탁을 비롯한 모든 시적인 형상들 곧 상징들이 우리에게 미치는 효과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우리를 해방시키는 신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은 진실로 새로운 감각을 획득할 수 있고, 이 세계에서 또 다른 세계 또는 세계들의 둥지를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우리가 목격한 변화는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고 예견할 수 있다. 나는 물론 이러한 변화가 수학의 매력, 그 중에서도 특히 언제나 정의된 명제를 통해서 감지되지만 동시에 다양한 비유의 가능성도 지닌 대수학(代數學)의 매력을 얼마나 크게 만들지 지금 당장은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비유의 가능성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공간(space)을 만물이 담긴 부동의 배(船)나 그릇으로 정의했던 것이나, 플라톤이 선(線, line)을 연속적으로 흐르는 점(點)으로 정의하거나 형상을 고체의 경계선으로 정의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 속한다. 이와 매우 유사한 측면에서 우리는 우리가 환호하는 자유의 감각을 비트루비우스(Vitruvius)의 견해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예술가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면서 “해부학을 모르는 건축가는 결코 좋은 집을 지을 수 없다.”고 피력한 바 있다. 소크라테스(Socrates, 서기전 470~399)는 영혼의 질병을 치유하려면 어떤 주문들을 외우면 되는데, 그 이유는 그 주문들은 영혼의 절제력에서 비롯된 아름다운 이성의 산물이기 때문이라고 가르치기도 했다. 플라톤은 세계를 한 마리의 동물에 비유했고, 티마이오스(Timaeos, 서기전 356경~260경: 그리스의 역사가)는 “식물도 동물과 다름없다.”고 단언했을 뿐 아니라 “인간도 하늘을 향해 자라는 뿌리인 머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천상의 나무가 될 수 있다.”고까지 호언장담했다.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 채프먼(George Chapman, 1559~1634)도 티마이오스의 견해를 따라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 인간은 나무와 같아서
강인한 뿌리는
우리의 머리에서 솟아나리
오르페우스는 인간의 백발을 “세상에서 제일 오래 살았음을 표시하는 하얀 꽃.”이라고 비유했다. 그리스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프로클로스(Proclos, 410~485경)는 우주를 지성의 동상(銅像)이라고 불렀다. 영국의 시인 초서(Geoffrey Chaucer, 1342~1400)는 ‘기독교도들’을 찬양하는 글에서 기독교도들은 열악한 조건에서도 횃불처럼 꺼지지 않는 순수한 혈통이라고 비유하면서, 이러한 횃불은 아무리 어두운 암흑 속에서도 본연의 임무를 잊지 않고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의 앞길을 밝힐 정도로 밝게 타오를 것이라고 썼다. 기독교경전 중 신약성서를 구성하는 마지막 책으로서 요한(John)이 기록했다고 전해지는 이른바 「요한의 묵시록」에서 요한은 악이 휩쓸고 간 세상의 폐허와, 끝내 무화과나무에서 떨어지고 마는 열매처럼 하늘에서 추락한 별들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이솝(Aesop)은 인간사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새와 짐승들이 벌이는 우화의 형태로 기록했다. 이 모두가 우리 인간이 구사할 수 있는 비유의 실례들이다. 그리하여 “길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애써 갈 길을 찾느라 쓸데없이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집시들의 격언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본질과 그 본질의 변덕스러운 습관과 탈주로는 불멸한다’는 흐뭇하고 고무적인 암시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시인들은 신들마저 해방시킨다. 고대의 영국의 방랑시인들은 스스로를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자유로웠고 또 자유를 만들었다.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저저가 쓴 책은, 비록 우리가 저자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한 다음이라도, 풍부한 비유들을 통해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함으로써 시간이 갈수록 우리에게 훨씬 더 많은 것을 선사한다. 나는 초월적이고 경이로운 어떤 것을 담고 있지 않은 책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독자를 흥분시키고 그/그녀의 정신을 사로잡아 그/그녀로 하여금 저자도 대중도 망각한 채 마치 정신병자처럼 단 한 가지 꿈에만 미친 듯이 몰입하게 만들 수 있는 풍부한 사상이 담긴 책을 쓴 저자가 있다면, 누구라도 나에게 그 저자의 글이나 저서를 추천할 수 있을 것이고, 나는 그 저자의 글이나 저서에 대한 추천자의 논평이나 해설, 비평까지도 빠짐없이 경청할 것이다. 천사, 악마, 마법, 점성학, 수상학(手相學), 최면술 등 의문의 여지가 있는 사실들을 도입하여 저마다 우주발생론 내지 우주진화론을 수립하고자 했던 피타고라스(Pythagoras, 서기전 580~500), 파라켈수스(Paracelsus, 1493~1541: 독일 태생 스위스의 의사․연금술사), 아그리파 폰 네테스하임, 카르다노(Gerolamo Cardano, 1501~1576: 이탈리아의 생리학자․수학자․점성가),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 스베덴보리, 셸링(F.W.J. von Schelling, 1775~1854: 독일의 철학자), 오켄(R. Oken: 17세기경에 활동한 독일의 자연철학자)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모두 우리가 판에 박힌 일상을 벗어난 새로운 증인임을 명시하는 증명서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한 증명서는 또한 한 개의 공(毬)과 같은 세계를 우리의 손에 쥐어주는 대화에서 최고의 승리를 거두었다는 표시이자 자유의 마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하나의 감정이 자연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지성의 힘과 교감할 때면 그렇듯 마법적인 자유조차 얼마나 값싸게 보이고, 학습이란 것도 얼마나 하찮은 활동처럼 보이던가! 그러니 눈을 들어 저 멀리 바라보는 전망은 얼마나 광활할 것인가! 국가들, 시간들, 체제들은 거대한 문양들과 다채로운 색으로 장식된 태피스트리의 실처럼 짜이면서 생성소멸을 거듭한다. 이렇듯 흘러넘치는 자유의 부에 취한 우리는 꿈이 꿈을 낳는 꿈속만을 연신 헤매다가 우리의 침대와 화단과 철학과 종교마저 팔아먹고도 그 취기에서 헤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러한 자유를 높이 평가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눈보라 속에서 눈멀고 길을 잃어 자기의 집 몇 발짝 앞에서 쓰러져 죽어가는 가련한 목자의 운명은 인간이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우리는 삶과 진리의 바다를 바로 눈앞에 두고도 가련하게 죽어가고 있다.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지 않는 한 이해하기 어려운 모든 사상은 그래서 탁월한 사상이다. 설령 우리가 그런 사상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다고 자부하더라도 바로 그 순간 그 사상은 이미 우리로부터 가장 먼 곳에 떨어져 있다. 그래서 모든 사상은 일종의 독(毒)과 같다. 그러니 모든 천국도 독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시인을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인은 송시든 연극이든 관조든 행동이든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이러한 독과 같은 새로운 사상을 착안하여 우리에게 선사하는 사상의 발명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인은 우리를 묶고 있는 현실의 쇠사슬을 풀어주고 우리가 새로운 무대, 새로운 현실, 새로운 세계에 입장하는 것을 허락한다.
이러한 해방은 모든 인간에게 소중한 것이어서, 필경 훨씬 더 깊고 넓은 사유에서 비롯되었을 이 해방의 소식을 전파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지성의 척도가 될 것이다. 그래서 풍부한 상상력에 의해 쓰인 모든 책은 그러한 해방의 진리에 도달하려는 모든 것을 허용한다. 여기서 해방의 진리란 저자가 자기 내면의 근저에 존재하는 자연 속에서 발견하여 자기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활용하는 진리이다. 이러한 미덕을 지닌 모든 시편이나 시구는 고유의 불멸성을 간직하게 될 것이다. 세계의 종교들은 이처럼 상상력이 풍부한 소수의 인간들이 불현듯 내지르는 탄성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상상력의 속성은 흘러넘치는 것이지 얼어붙거나 경직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색이나 형태 앞에서 얼어붙기보다는 그것들의 의미를 읽는다. 그는 또한 이러한 의미에 안주하기보다는 동일한 대상을 그의 새로운 사상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가공한다. 바로 여기에 시인과 신비주의자의 차이가 있다. 신비주의자는 일순간 진실한 의미일 수 있지만 곧 낡고 부당한 것으로 전락하고 마는 하나의 의미에 상징의 못을 박아버린다. 하지만 모든 상징은 본시 부단히 흘러넘치고 변화하는 유동성을 가지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모든 언어는 마치 연락선이나 마차처럼 이동하고 전달하는 탁월한 운송수단이지 농장이나 주택처럼 머물기 위한 주거수단이 아니다. 신비주의는 우발적이고 개인적인 상징을 보편적인 상황과 존재에 적용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붉게 물든 아침하늘이 독일의 신비주의자 야콥 뵈메(Jacob Böhme, 1575~1624)의 눈에 맑은 날씨를 예고하는 징조로 보였던 것은 그가 지키고자 했던 진리와 신념의 발로였다. 그는 모든 독자에게 동일한 사실들을 제시함으로써 그의 진리와 신념을 확인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저서를 처음으로 읽는 독자는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아들 또는 원예가와 알뿌리 또는 보석세공사 같은 상징적인 인물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본시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닌 이들을 비롯한 훨씬 더 많은 인물들이 그의 저서에서는 동등한 하나의 인격체로 상징화되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다양성은 참으로 가볍게만 취급될 뿐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동등한 의미로 사용하는 용어를 통해서 너무도 쉽사리 일갈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신비주의자는 그런 지루한 상징을 동원하지 않아도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사람들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가 흔해 빠진 수사학 대신에 약간의 대수학을 사용한다면, 그리고 이처럼 소박하고 국지적인 상징들 대신에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기호들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양쪽 모두에 대해서 승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제도의 역사는 모든 종교적인 오류가 너무나 경직되고 단단한 상징을 만들려는 욕심에서 비롯되었고 결국에는 지나치게 비대한 언어기관들밖에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듯하다.
스베덴보리는 최근까지 자연을 사유와 사상으로 번역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걸출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역사적으로 그만큼 사물들을 독창적이면서도 일관된 언어로 표현했던 인물을 알지 못한다. 그 이전에는 끊임없는 변태의 과정만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모든 것은 도덕적 본성의 충동에 좌우되었다. 무화과도 그가 먹으면 포도로 변했다. 그를 수호하는 천사들 가운데 일부가 어떤 진리를 선포하자 그 천사들이 들고 있던 월계수 나뭇가지는 꽃을 피웠다. 멀리서는 이를 갈아붙이거나 탁자를 내려치는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던 소리가 결국은 사람들이 언쟁을 벌이는 소리였다는 것이 밝혀질 때가 있는 법이다. 그가 품었던 꿈들 가운데 하나인 천상의 빛에 비추어본 인간들은 마치 암흑 속에 갇힌 사나운 용들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들이 비록 각기 인간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이 머무는 오두막에 천상의 빛이 내리쪼였어도, 그들은 여전히 어둡다는 불평을 늘어놓으며 그들의 눈을 밝힐 창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스베덴보리의 이처럼 심오하고 광대한 투시력은 시인이나 예언자를 경외와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다. 왜냐하면 시인과 같은 개인이나 그런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한편으로는 자신과 동료들을 믿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인들보다 높은 지성을 믿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교파의 성직자들을 두고, 그들은 함께 모이면 매우 교양 있는 대화를 나누지만 서로 조금만 떨어져 있으면 어린아이처럼 권태와 불안에 휩싸이거나 죽은 말(馬)처럼 풀이 죽거나 아니면 대부분은 늘 그렇듯 불만스런 표정으로 돌아가고 말지만, 그들의 정신은 곧장 다리 밑 개울물 속에서 노니는 이 물고기들, 저기 목장에 풀을 뜯는 소들, 마당에서 뛰어노는 저 개들이 불변하는 존재인지 아니면 나에게만 그렇게 보이는지, 또는 불현듯 저 동물들도 직립 보행하는 인간처럼 보이는 듯하니 과연 나도 저 동물들의 눈에는 인간으로 보일 것인가 하는 문제에 골몰한다고 묘사한 적이 있다. 브라만들과 피타고라스는 이와 동일한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시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다각적인 체험을 조율함으로써 그러한 현상의 변형이나 변환이 가능함을 확실히 증언할 것이다. 우리는 밀이나 풀쐐기를 보아도 확연히 알 수 있듯이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가 만약 시인이라면, 다시 말해서 우리의 외관을 통해서 우리의 확실한 본성까지 꿰뚫어보고 그 존재를 선포할 수 있는 시인이라면, 사랑과 공포로 우리를 매료시킬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그리는 시인을 찾아 헤맸지만 거의 허사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충분히 솔직하게 혹은 충분히 심오하게 삶을 영위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시대와 사회적 환경을 찬양하는 노래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용감하고 자랑스럽게 오늘을 보내고 있다면 우리는 머뭇거림 없이 오늘을 축하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과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지만 세상 만물은 아직도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인간, 새로운 종교, 새로운 조정자를 기다리고 있다. 단테의 업적은 대담하게도 그의 자서전을 거대한 암호문처럼 혹은 우주론처럼 써내려갔다는 데 있다. 미국에는 아직도 우리가 보유한 엄청난 자원의 가치를 알고 있는 거대한 눈을 가진 천재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과거 호메로스의 시대에도 그리고 중세와 종교개혁의 시대에도 찬탄을 자아냈을 아름다운 그림들에 등장하는 신들과 똑같은 신들이 바야흐로 야만성과 물질만능주의가 창궐하는 이 시대에 벌이고 있는 또 다른 사육제를 간파할 수 있을 심안을 가진 단테 같은 천재를 우리는 아직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각종 은행이나 관세기관, 각종 신문사나 회합, 감리교파(Methodism)나 유니테리언교파(Unitarianism) 등을 이끄는 작자들은 지루함에 겨운 아둔한 민중들을 더욱 김빠지고 지루하게 만들면서도, 트로이 같은 도시나 델피의 신전에서 일어났던 기적처럼 눈 깜박 할 사이에 잊혀지고 마는 기적이나 행운만 기대하고 있다. 우리의 정치적 협력, 우리의 연설가들과 정치인들, 우리의 낚시꾼들, 우리의 흑인들과 인디언들, 우리의 자긍심과 독립심, 깡패 퇴치활동, 성실하고 정숙한 사람들의 소심함에 대한 질타, 북부의 무역과 남부의 농업, 서부의 오리건 주와 텍사스의 개척지를 노래하는 시인은 아직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아메리카는 지금도 우리의 눈에는 한편의 시로 보인다. 그러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 광대하고 풍요로운 지리적 조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계량화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토록 고대하던 시들을 내가 살던 시골마을 사람들의 시적인 재능이 탁월하게 발현된 작품들 사이에서 발견하지 못했다면, 지난 5세기 동안 활동한 영국 시인들의 작품을 집대성한 차머스(Alexander Chalmers, 1759~1834: 스코틀랜드의 편집인․전기 작가)의 초서에서 쿠퍼에 이르는 영국 시인들의 작품(The Works of the English Poets from Chaucer to Cowper)을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읽었다고 한들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시인상은 결코 확립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이 시골사람들은 시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기지 넘치는 재주꾼들에 가깝다. 물론 그들 중에는 시인도 존재한다. 그러나 굳이 가장 이상적인 시인을 정해야 할 경우에도 우리는 밀턴이나 호메로스조차 그러한 이상적인 시인의 반열에 선뜻 올려놓기를 주저할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나는 현재 비평계의 조류에 밝지 못하니만큼 뮤즈로부터 받은 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다소 오래된 과거의 위대한 시인들의 작품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예술은 예술가가 작품을 창조하는 길이다. 그러한 길들 또는 방법들은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더라도 이상적이고 영원한 길이다. 물론 예술가 스스로는 몇 년 혹은 일생동안 그러한 이상적이고 영원한 길을 찾지 못했다고 생각할지라도 그렇다는 말이다. 화가, 조각가, 작곡가, 서사시인, 웅변가를 비롯한 모든 예술가들은 하나의 욕망을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옹졸하고 파편적인 방식이 아니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풍요로운 방식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들은 화가나 조각가가 어떤 감동적인 인물상을 모델로 삼듯이 창작에 적합한 조건을 발견하거나 스스로를 그런 조건에 처하게 만든다. 웅변가는 청중을 모으거나 청중을 찾아 나선다. 다른 예술가들도 역시 각자 원하는 조건을 만나면 지적인 흥분을 느끼고 급기야는 새로운 욕망까지 품기에 이른다. 그는 어떤 목소리를 듣고 그를 부르는 유혹의 손짓을 목격한다. 그 순간 그의 수호신들이 그를 에워싸면 그는 경이로운 존재로 부각된다. 그는 더 이상 안주할 수 없다. 그는 늙은 화가처럼 “맹세컨대, 나는 내 안에 있는 것, 바로 그것을 표현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눈앞에서 반쯤 모습을 드러내고 날갯짓하는 아름다움을 뒤쫓는다. 시인이 절절한 외로움 속에서 시를 쏟아내듯이, 그가 하는 말의 대부분은 필시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말이지만, 때로는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표현이 튀어나오는 경우도 있다. 바로 그런 표현이 그를 매료시킨다. 이제 그는 그런 말 이외에는 일체 다른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상투적인 대화법에 따라 “그것은 네 것이고,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겠지만, 시인은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낯설고 아름다운 것은 시인에게도 낯설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마침내 웅변과 같은 말만 듣기를 바라마지 않게 될 것이다. 그의 몸속에는 한때 이렇듯 감미로운 신의 영액(靈液, Ichor)이 흘렀으나 그 양이 충분하지 못했다. 그의 찬탄할 만한 지적인 창조력을 촉진하는 이 영액은 이러한 웅변적인 말들을 발화시키는 데도 필수적인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것 중에서 말해지는 것은 얼마나 적은가! 우리가 학문의 바다에서 퍼 올리는 물은 또 얼마나 소량인가! 그리고 자연 속에는 무수한 비밀이 잠들어 있는데도 왜 그토록 드물고 우연하게만 밝혀지는 것인가! 그래서 말과 노래가 필요하다. 말과 노래는 청중을 앞에 둔 웅변가의 연설을 통해 떨리면서 청중을 공명시킨다. 궁극적으로 사유와 사상이 로고스(Logos) 혹은 말씀(Word)으로 발설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말과 노래의 진동과 율동이다.
그리하여 오, 말하고 노래하는 자는 분명 시인이었지 성직자는 아니었다! 시인은 말한다. “나는 내 안에 있는 것, 바로 그것을 말하리라.”고. 그리고 일어서라, 그대의 말문을 막고 그대를 벙어리로 만들려는 자들, 그대를 말더듬이로 만들려는 자들, 그대에게 야유를 퍼부으며 그대의 기를 죽이려는 자들, 그런 자들 앞에서도 굴하지 말고 당당히 일어서서 버텨라. 그대가 밤마다 꾸는 꿈의 힘을 그대의 창조력으로 전환하여 그대의 격정과 열정을 폭발시킬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꿋꿋이 버텨라.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한계와 아집을 초월하는 힘을 획득한 인간을 모든 격정과 열정을 빠짐없이 유도하고 전달할 수 있는 감정의 초전도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걷지도 기지도 자라지도 존재하지도 못하던 것들이 이젠 그가 앞에 나타나면 그의 의도를 지지하고 대표하기 위해 일어서서 걷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에게 다시금 새로운 세계를 제시하는 그의 정신은 마치 노아의 방주와 같아서 그 속으로 모든 종류의 생물의 암컷과 수컷이 짝을 지어 흘러 들어간다. 이러한 그의 정신은 우리가 호흡하거나 난로가 연소되는 데 필요한 공기통에 비유할 수도 있다. 이 공기통은 부피를 정확히 측정할 수는 없지만 누구나 원하는 대로 마음껏 호흡하고 난로를 연소시키는 데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호메로스, 초서, 섹스피어, 라파엘로(Sanzo Raffaello, 1483~1520) 같은 풍요로운 정신의 시인들은 수명(壽命)만 한계가 있었을 뿐 작품은 확실히 한계가 없었으니, 대로변의 모든 사람과 동물의 이미지를 가감 없이 비추며 운반되는 커다란 거울과 같은 존재들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오, 시인이여! 그대 새로운 귀족에게 부여되는 것은 이제 성(城)이나 검(劍)이 아닌 작은 숲과 목초지이다. 그대에게 주어진 이 조건이 열악하고 부담스럽게 느껴질지 모르나 이 조건은 다른 시인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진다. 그대는 이제 기존의 세계를 잊고 오직 뮤즈만을 알아야 한다. 시대의 유행이나 관습, 예의범절이나 정치, 여론 따위는 이제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다. 오로지 뮤즈가 선사하는 것만 알면 된다. 왜냐하면 도시와 시장의 시간은 죽은 세계가 울리는 조종(弔鐘) 소리로 측정되는 반면에, 자연과 우주의 시간은 대를 이어 번식하는 동물들과 식물들에 의해, 그리고 기쁨에서 자라나는 환희에 의해 측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뮤즈의 신은 또한 그대가 복잡다단하고 빡빡한 생활을 과감히 내던져버리기를 기대하면서도, 그대를 위해 남들이 해주는 충고도 그대가 기꺼이 감수하기를 원한다. 남들은 그대에게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기왕의 세계에서 생활하기를 친절하게 권장할 것이다. 또한 그들은 그대에게 관대하고 감동적인 행동을 해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자연 속에 깊숙이 은거하여 정치인들이나 상인들이 그대를 범할 여지를 주지 말아야 한다. 기존의 세계는 내버릴 것들과 수습해야 할 것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그대는 알아야 한다. 그런 세계에서라면 그대는 오랜 기간 멍청한 어릿광대나 야비한 구두쇠처럼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삶은 판(Pan)이 사랑하는 꽃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기만술이나 가면과 같아서,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만이 그대를 알 뿐이니,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상냥한 애정 공세로 그대를 안심시키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지난날 거룩하고 이상적인 시인 앞에서 느꼈던 부끄러움 때문에 그대의 시로는 그대의 친구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 부끄러움은 바로 그대에게 주어지는 보답이다. 꿈에 그리던 이상적인 시인이 그대 앞에 실제로 나타날 것이고, 그리되면 현실 세계는 그대의 불변하는 본질에 손상을 입히지 않으면서도 여름날 억수같이 쏟아지는 소나기 같은 감동의 빗줄기를 그대에게 뿌려줄 것이다. 그대는 세금 한푼 내지 않고 어떤 질시나 시샘을 받지 않고도 세상 모든 땅을 그대의 정원과 영지로 삼고 세상 모든 바다를 그대의 욕실과 선박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세상 모든 숲과 강도 그대의 소유가 될 것이니 그 숲과 강변에 사는 다른 사람들은 이제 그대의 소작인이나 식객에 불과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 진정한 땅의 주인이여! 바다의 주인이여! 대기의 주인이여! 그대는 이제 눈이 내리는 산야, 강물이 흐르고 넘치는 강변, 차올랐던 바닷물이 안타까이 쓸고 내리는 해변이나 개펄, 새가 날아오르는 창공이나 산정, 낮과 밤이 만나 불태우는 황혼이 잦아드는 들녘, 흰 구름이 매달려 대롱거리는 푸른 하늘, 별빛을 흩뿌리는 밤하늘, 투명한 형상들이 노니는 연못이나 호수, 천상의 공간으로 가는 출구가 나있는 숲 속, 위험한 늪지, 두렵고 아찔한 절벽, 사랑스러운 초원을 비롯한 이 세상 어디를 가든 그대를 폭우처럼 덮칠 아름다움을 발견하리라. 그럴진대 그대 온 세상을 다 뒤져본들 부적절하고 저열한 것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리니.
김성균․
숭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대학 및 대학원 졸업(석사)
․역서 명상의 기술 깡패국가 유한계급론 등
․논문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제3세계의 강박적 욕망」 등
․현재 번역가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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