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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문화산책/강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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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죽음의 두 방식, 멸(滅)과 사(死)
강유정(문학평론가)
1. 두 여인이 ‘구멍’ 속으로 사라지다.
2003년 가을 영화계에는 이채로운 사건이 있었다. 개봉의 시기가 약간 달랐더라면 서로 참조와 모방의 혐의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유사한 씬(scene)이 두 편의 영화에서 동시에 선보였기 때문이다.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 겨울, 그리고 봄>이 그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이다. 두 영화에는 모두 얼어붙은 저수지 위를 걸어가던 여자가 ‘구멍’에 빠져 죽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는 한 여자가 꽁꽁 얼어붙은 저수지 가운데의 사찰에 아이를 버리고 떠나다 호수 가운데의 구멍에 빠져죽고, <스캔들>의 여주인공은 사랑을 잃고 난 이후의 상실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살얼음이 낀 저수지 위를 걷는 방법을 택한다. 두 여인은 모두 얼어붙은 저수지 위를 걷다가 어느 순간 화면에서 사라진다. 구멍 속으로의 실종. 여자들은 갑자기 화면 위에서 사라짐으로써 내러티브와의 단절, 세계와의 결별을 고지한다. 비록 전자의 여인은 사고처럼 구멍에 빠지고 후자의 여인은 죽음을 각오하고 사라져갔다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두 감독의 카메라가 모두 부재의 흔적으로 남은 물건들을 응시할 때, 우연한 일치는 흥미로운 공통 감각으로 구체화될 수밖에 없다. 고무신과 목도리, 그들을 빨아들인 ‘구멍’ 위에 남겨진 물건들은 곧 그들의 리비도가 결집되어 있었던 욕망의 카텍시스(cathexis)라고 볼 수 있다. 구멍에 빠지기 직전까지 그녀들을 울고 웃게 했던 세사(世事)의 욕망, 이승의 인연은 한짝의 고무신, 붉은 목도리에 응집되어 떠오른다.
그런데 왜 하필 두 감독은 여자들의 죽음을 실종으로서의 사라짐, 실족으로서의 부재로 묘사한 것일까? 죽음에 고착되어 있는 사회적 관성(inertia)이나 장례의 절차가 아니라 그들이 선택하고 그들에게 허용된 죽음의 방식은 응시의 가시적 거리에서 삭제되는 것으로서의 소멸이다. 더 이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자의 부재를 인습의 틀로 받아들이는 생활세계의 죽음과 달리 여인들이 보여준 죽음의 방식은 철저히 습속의 맥락과 단절되어 있다. 염, 입관, 운구, 하관과도 같은 복잡한 사회 역사적 지평 안에서 죽음이란 실제적인 인륜으로 구체화된 삶의 일부이자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삶의 일부로 편입된 인륜의 구체적 실재인 죽음의 양상을 ‘사(死)’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녀들의 죽음은 체계를 초월한 ‘멸(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녀들의 죽음에는 중층 결정된 사회 역사적 의미와 인륜적 절차와 예법 그리고 이미지가 모두 생략되어 있다. 여자들은 구멍에 빠져 ‘멸(滅)’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갑작스럽게 증발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사라지는 것으로서의 죽음 즉 익사(溺死)로 수렴되는 ‘멸(滅)’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매우 여성적인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수지나 호수에 몸을 담가 목숨을 끊는 죽음의 형태는 전통적으로 언제나 여성의 몫이었다. 멀게는 햄릿의 ‘오필리어’부터 가깝게는 김동리의 「무녀도」에 이르기까지 익사는 여성적 죽음을 환기하는 고유한 방식으로 인증되어 왔음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여성적 죽음으로서의 멸(滅)은 무엇이고 이와 구분되는 사(死)로서의 죽음이란 무엇일까? 한편, 멸(滅)의 형식으로 드러난 여성의 죽음이란 어떤 문화사적 기의를 갖고 있으며 또한 동시대의 시공간적 좌표 위에 왜 멸(滅)은 새롭게 호출된 것일까? 이 글은 동시대의 영화를 이야기함에 있어 이미 빼놓을 수 없는 참조 사항이 되어버린 두 감독의 뜻하지 않은 공통 감각, 우연한 계기에 의해 조우한 두 장면이 던져준 질문, 죽음의 두 방식으로서의 멸(滅)과 사(死)의 의미를 추적하는 글이 될 것이다.
2. 사(死), 제도로서의 상징적 죽음
헤겔은 윤리의 체계를 가족의 법, 시민사회의 법 그리고 국가의 법으로 구분했다. 헤겔에게 있어 국가의 법은 객관적 기준이자 최고의 법으로서 가족과 시민사회의 법을 지양하고 부정한 결과물로서의 선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라깡은 헤겔이 말한 세 가지 차원의 윤리를 논함에 있어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의 행적을 윤리적 행위의 모델로 제시한다. 라깡이 주목한 것은 안티고네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국가의 법을 어겨 오빠를 위한 가족의 법을 관철했다는 사실이다. 소포클레스의 희곡 안티고네에서 갈등의 핵심은 바로 안티고네의 오빠인 폴리네이케스의 매장 절차에 관한 문제였다. 테베의 왕이 된 크레온이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들개와 새에게 쪼아 먹히도록 명령한 것이다. 시신의 방치란 실제의 물리적 생존과 하등 관계없는 상징적 절차와 예법의 문제이다. 그런데 안티고네는 이 상징성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버린다. 매장의 방식을 허용하지 않는 것, 그것은 폴리네이케스의 죽음이 갖는 사회적 아우라(aura)를 훼손하는 것이다.
안티고네가 오빠의 ‘매장’에 집착했던 것은 그것이 곧 사회적 맥락 안에 수용된 제도로서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맥락과 역사 안에서의 죽음, 누대에 걸친 습속과 관습으로 정해진 매장은 바로 상징계적 법의 용인 하에 거행되는 삶의 연장선상으로서의 ‘사(死)’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 매장을 통해서 죽은 자는 상징적 전통의 맥락 속에 기억되며, 부재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기억 속에 ‘계속 살아 있는 존재’로 편입된다. 즉 매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시신에 대한 모욕이며 공동체에서의 축출을 의미하는 가중 처벌된 상징적 죽음을 뜻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관습과 상징계적 법의 차원에서 용인된 ‘사(死)’는 철저히 ‘사각형’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얼어붙은 저수지 위에서 사라진 여인들의 죽음인 ‘멸(滅)’이 원형적 구멍으로의 실종이었다면 ‘사(死)’란 죽음을 ‘사각형’의 아날로지로 이미지화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송찬호의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무의식 가운데 축적된 ‘사(死)’의 이미지가 바로 ‘사각형’임을 잘 보여주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장지의 사람들이 땅을 열고 그를 봉해버린다 간단히
외과수술처럼 여기 그가 잠들다
가끔씩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그곳에 심겨진 비명을 읽고 간다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단단한 장미의 외곽을 두드려 깨는 은은한 포성의 향기와
냉장고 속 냉동된 각진 고깃덩어리의 식은 욕망과
망각을 빨아들이는 사각의 검은 잉크병과
책을 지우는 사각의 고무지우개들
오래 구르던 둥근 바퀴가 사각의 바퀴로 멈추어 서듯
죽음은 삶의 형식을 완성하는 것이다
미래를 예언하듯 그의 땅에 꽃을 던진다
미래는 죽었다 산 자들은 결코 미래에 도달할 수 없다.
―송찬호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일부
송찬호의 시는 우리가 죽음에 대해 갖고 있는 선험적 지식이 바로 사각의 도형에 지배받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데올로기적 관습 안에서 죽음이란 곧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구멍의 영구적 ‘봉’함이오 마모이다. 이에 사각형을 띤 모든 것은 죽음을 환기하는 용기로 제유된다. 사각형의 기억으로 떠오르는 죽음이란 매장의 방식으로 마감된 삶의 양식이다. 이는 곧 사회적인 지평 안에서 선험적으로 한편으로는 경험적으로 인정받는 죽음의 양식, 시스템 내부의 카테고리 속에서의 명실상부한 죽음이란 ‘사각형’의 안치임을 보여준다. 매장으로서의 죽음, 사각형의 사(死)는 사회적 제도로 인증된 양식으로서의 죽음인 셈이다.
‘사각형’의 매장, 죽음의 방식이 사회적 인준으로서의 죽음이라는 사실은 다시금 안티고네의 ‘목숨을 건 도약’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안티고네의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어머니와 동침을 하고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 오이디푸스의 딸인 안티고네에게는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라는 두 남자 형제가 있었다. 형제는 삼촌 크레온을 지지하는 에테오클레스와 크레온에 반대하는 폴리네이케스로 분열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겨눈 끝에 모두 죽고 만다. 문제는 숙부이자 새로운 왕인 크레온이 자신에게 동조했던 에테오클레스에게는 장례의 절차를 허락하고 자신을 거부했던 폴리네이케스에겐 매장을 금지하는 편파적인 명령을 내렸다는 점이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명령, 즉 국가의 법을 위반하면서까지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갖다 묻고 그녀는 이에 대한 형벌로써 동굴에 감금되고 만다. 이에 안티고네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린다. 라깡의 지적처럼 안티고네가 보여주는 죽음에 대한 태도는 명예와 연관된 상징적 죽음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수 있다. 안티고네가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에 집착했던 것은 바로 매장을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불명예스러운 죽음의 낙인이며 상징적 추방이기 때문이다. 안티고네에게 필요했던 것은 바로 죽음의 절차이며 형식이다. ‘사(死)’란 시민으로서 한 남성이 살아온 전 생애에 걸친 명예와 직결되는 것이다.
불명예에 대한 거부, 물리적 죽음을 넘어선 상징적 죽음에 대한 저항이란 점에서 ‘사(死)’는 역사적으로 남성적 죽음의 양식으로 받아들여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의 두 양식을 ‘상징적 죽음’과 ‘생물학적 죽음’으로 구분한 라깡을 생각해 볼 때, 사(死)로서의 죽음이란 ‘생물학적 죽음’보다 ‘상징적 죽음’에 더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사(死)’란 사회의 카테고리와 관습이 인정하는 제도권 내부에서의 명예로운 죽음이며 순환적 시간이 아닌 단선적이며 직선적인 세계관 내의 소실점으로서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 영화 <올드 보이>(박찬욱, 2003), <거미숲>(송일곤, 2004), <달콤한 인생>(김지운, 2005)은 자신의 죽음이 일종의 소실점으로서 구실하기를 바라는 직선적 세계관에서의 사(死), 상징적 차원에서 인증된 죽음에 집착하는 남성적 ‘사(死)’의 형편을 잘 보여주는 영화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올드보이>의 ‘이우진’은 ‘오대수’를 감금해 그에게 복수하기 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에게 삶이란 복수에 대한 감질나는 기다림과 다르지 않다. 매일 매일 불면증에 시달리며 사는 것 같지 않게 살고 있는 이우진에게 삶은 오히려 죽음의 상태에 더 가깝다. 이우진이 보여주는 삶의 방식은 마치 좀비나 유령처럼 이승과 저승 사이에 서스팬션(suspension)되어 있는 누락의 삶이다. 이우진이 삶도 죽음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 서스팬션되어 있는 것은 바로 누이의 죽음 때문이다. 그는 누이의 죽음에 덧씌워진 불명예와 오해를 벗기기 위해 살아갈 뿐이다. 따라서 불면증과 불치병에 시달리는 그에게 현재는 누이의 이원화된 죽음을 총체적인 것으로 재구하기 위해 연장된 삶과 다를 바 없다. ‘죽었지만 죽지 않은’ 유령과도 같은 존재,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파멸한 이후에도 살아남은 리비도로서의 정념. 이우진은 영혼이 떠난 채 육체만 남은 전도된 망령으로서, 자신의 삶을 배회한다. 심리적 죽음을 상징적 차원의 죽음, 사회적 맥락 안에서 공증된 사(死)로서 견인하고자 하는 그의 리비도는 오대수에 대한 복수에 고착되어 있다. 따라서 이우진이 오대수에게 다짐했던 복수를 하고 난 이후 자살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미 상징적 죽음에 처해 있던 그가 스스로 감아두었던 태엽이 다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이우진이 오대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징적 죽음을 실제적인 죽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복수에 집착했다는 역설을 가능케 한다. 즉, 이우진은 자신의 죽음을 완성하기 위해 오대수를 기다려온 셈이다. 자살, 그것은 이우진이 선택한 죽음의 방식이 바로 ‘사(死)’, 제도와 인과관계로 편입되지 않았던 사고로서의 죽음을 생의 소실점에 귀속시키는 자의적 선택이다. 이는 한편 공교롭게도 저수지에 빠져 죽은 누이의 죽음(滅)이 부재하는 현존으로서 이우진의 곁에 늘 머물렀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누이의 죽음에 대한 시나리오를 완성한 후에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우진, 그의 자살은 형제의 사회적 명예를 회복하고 자살한 안티고네가 보여주었던 가족 윤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사회적 인증을 통해서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 ‘사(死)’는 남성적 자살의 형태가 주로 자기 스스로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확보해 가는 과정과 겹친다는 점에서도 입증된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산다는 것은, 우리들처럼 숨쉰다는 것이 아니라 본다는 것이었고, 또 죽는다는 것은 시력을 잃는다는 것을 뜻했다. 레지스 드브레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력을 잃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스스로의 눈알을 뽑은 오이디푸스의 행위는 바로 상징적 차원에서의 자살,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외디푸스의 눈멂은 생물학적인 죽음을 앞선 상징적 추방이며 죽음이었던 셈이다. 죽은 자 취급을 받는 것은 사실상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지운 감독의 2005년도 작 <달콤한 인생>은 생물학적 죽음보다 먼저 상징적인 죽음을 맞게 된 인물이 그의 상징적 죽음을 사(死)의 차원으로 소실하고자 하는 욕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중간 보스 ‘선우’는 분명한 이유도 없이 불명예스러운 상징적 죽음에 처하는 한편 실제의 생물학적 안존까지 위협받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선우는 생물학적 죽음이 눈앞에서 실현되기 직전 가까스로 죽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어딘가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무릅쓰고 보스를 다시 찾아간다는 사실이다. 즉, 선우가 회복하고 되찾고 싶어 하는 것은 생물학적 생존이 아니라 상징적 죽음으로 더럽혀진 명예이다. 그는 상징적인 죽음을 감수한 생물학적 생존이 아니라 목숨을 담보로 한 상징적 명예의 복원을 선택한다. 그렇다면, 그에게 가해진 상징적 죽음이란 어떤 것이었던가? 공교롭게도 선우에게 내려진 형벌, 상징적 죽음의 제의는 바로 생매장이었다. 관도, 절차도, 사각형의 틀도 없이 그는 구멍에 암매장되는 모욕에 노출된다. 생매장은 선우의 불명예를 입증하고 상징적 죽음을 각인하기 위한 신랄한 조소로 활용된다. 매장이 생매장으로 전도될 때, 사각형의 무덤이 구멍으로 전복될 때, 죽음에 있어야 할 명예는 실종되고 그 죽음은 ‘사(死)’로서의 면모를 박탈당하게 된다. 따라서 자신의 물리적 신체를 담보로 투신하는 선우의 무모한 노력은 곧 자신의 소멸을 ‘사(死)’로 정립하기 위한 노력이다. 그가 추적했던 것은 생물학적 삶의 근거가 아니라 그의 ‘죽음’을 ‘죽음’으로 만들어 줄 그 원인, 물리적인 죽음을 앞질러 다가왔던 상징적 죽음의 회복을 통한 사회적 맥락 안에서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한편, 송일곤 감독의 <거미숲>은 <올드 보이>나 <달콤한 인생>이 보여주었던 것과 정반대의 궤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생물학적 죽음이 상징적 죽음을 동반하지 않았기에 이승과 저승 사이를 떠도는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강민’은 끔찍한 살해를 저지르고 터널 안에서 차에 치인다. 영화는 이 시점, 강민이 죽은 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문제는 강민이 죽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강민이 스스로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는 말이다. 생물학적 죽음의 사태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상징적 죽음의 의미에 매달리는 강민의 동선은 이우진이나 선우가 보여주었던 추적의 궤적과 정확히 대조되는 지점에서 겹쳐진다. 강민은 자신의 물리적 죽음, 생물학적 죽음의 상태를 알기 위해 온갖 무의식적 원체험과 기억을 더듬어간다. 유년기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첫사랑, 아내와의 사별, 마침내 끔찍한 살해 행위까지 환기하고 난 후 그는 드디어 물리적 죽음의 찰나에 놓여 있는 자가 바로 자신임을 발견한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죽음을 목도한 그 순간 강민은 생존의 세계로 되돌아오게 된다. <거미숲>이 보여주는 죽음의 방식은 스스로의 존재가 아닌 부재를 증명함으로써 오히려 존재의 자명함을 깨닫게 되는 아이러니와 맞닿아 있다. 마치 자신이 저지른 죄악과 악행의 근원을 찾아가는 오이디푸스처럼 그는 자신이 저질렀던 끔찍한 범행을 확인하기 위해 존재 부정의 알리바이를 찾아나간다.
<올드 보이>의 ‘이우진’, <달콤한 인생>의 ‘선우’, 그리고 <거미숲>의 ‘강민’이 보여주는 죽음에 대한 태도는 바로 자신의 죽음에 일종의 논리를 부여하려는 합리적 이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사회적 관습 안에서, 절차와 양식을 통해 구현되는 죽음으로서의 ‘사(死)’란 따라서 사회의 인증된 합의인 매장으로 귀결되는 선조적 세계관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생물학적 죽음보다 명예에 덧칠된 상징적 죽음에 집착하는 이들의 모습은 자신의 죽음을 질서정연한 인과관계로 규명하고자 하는 일종의 계몽적 논리와 밀접해 있다. ‘사(死)’란 철저한 이데올로기적인 사회적 맥락으로 조형된 죽음의 양식인 셈이다.
3. 멸(滅), 사라짐으로서의 죽음
‘멸(滅)’의 사전적 정의에는 불이 꺼지다, 다하다, 죽다, 빠지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삼수변’과 ‘음’으로 이루어진 ‘멸(滅)’은 축어의 과정에서 이미 물이 다하여 없어지다라는 고갈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사(死)의 형성이 영혼과 육체의 생명력이 흩어져 앙상한 뼈만 남은 상황에 대한 아날로지였음을 염두에 둔다면, 멸(滅)이 기능적 단위에 있어서의 파산을 지칭한다는 것은 쉽게 짐작될 수 있다. 김기덕 감독과 이재용 감독의 영화에서 재현되었던 여성적 죽음의 형태를 멸(滅)이라고 칭하는 이유도 이에서 비롯된다.
상징적 죽음과 구분되는 존재의 사라짐으로서의 ‘멸(滅)’의 양상은 <스캔들>에서 두 여자의 죽음의 방식을 통해 극명히 대조된다.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소설 위험한 관계를 각색한 <스캔들>에는 두 명의 대조적인 여인이 등장한다. 한 명이 관능적 욕망을 철저히 게임으로 남용하는 여인 ‘조씨 부인’이라면 다른 한 명은 방심했던 욕망과 결국 직면하고 마는 ‘숙부인 정씨’이다. 조원이라는 파락호를 중심에 두로 펼쳐지는 이 애정의 복잡다단한 관계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욕망의 경제학과 유비되는 죽음의 양식이다. 조씨 부인과 조원, 그리고 숙부인은 모두 자신의 욕망이 현실화되는 것을 중세의 보수주의적 윤리관에 빗대어 제어하는 능란한 욕망의 경제학을 보여준다. 주목해야 할 것은 숙부인과 조씨 부인이 맞는 두 가지 대조적인 죽음이다. 조씨 부인이 온갖 추문으로 인해 상징적인 죽음, 즉 사회적 맥락에서의 배제를 경험하는 것과 달리 숙부인 정씨는 꽁꽁 언 저수지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의 존재를 이승에서 즉 화면 위에서 지워버린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숙부인 정씨가 죽음을 각오하고 살얼음 위를 걸어가면서 “이승에서는 인연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읊조린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승에서는 인연이 없’지 않느냐면서 홍조 띤 얼굴로 죽음을 맞는 숙부인에게 ‘멸(滅)’이란 무엇인가? 이승에서의 인연이 없다는 것은 곧 숙부인이 이승이 아닌 저승의 인연을 염두에 두고 자살을 선택했음을 보여준다. 엄밀한 의미에서 숙부인의 ‘멸’은 종언이자 종결이 아니라 이승에서 맺지 못했던 인연의 완성을 위한 제의적 죽음인 셈이다. 이에 원의 형태로서의 사라짐, 멸(滅)은 사각형의 틀에 수렴된 선조적 시간의 종결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가시적 존재에서 벗어난 초월적 지평에서의 재탄생을 예비하는 가능성이자 단초로 전회한다. 원이라는 도형의 상상력으로 진폭하는 멸(滅)의 의미란 따라서 명예, 호명의 완성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불멸하는 순환적 생산력으로서의 사라짐을 보여준다. 멸(滅)로 형상화되는 여자는 단지 사라질 뿐 죽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기덕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얼음에 뚫린 동그란 구멍으로 사라지는 멸(滅)이 선조적 세계관에서의 종결이 아니라 탄생을 위한 전회임을 적실히 보여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도 역시 두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한 명은 욕망에 눈을 뜨고 그것의 기쁨을 알게 되는 ‘여름’에, 욕망의 대상으로서 등장하는 여인이며 다른 한 여인은 세속의 부침을 두루 겪고 ‘겨울’의 산사에 돌아온 그에게 새 ‘봄’을 안겨준 여인이다. 제목에서부터 이미 짐작되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사계의 흐름, 계절의 순환성에 의존해 업(業)과 인연의 끊임없는 순환을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불가의 향이 짙은 영화의 서사에는 내내 무거운 돌을 허리에 진 채 살아가야 하는 피조물들이 다양하게 비춰진다. 내러티브 속에서 사는 것이란 끊임없이 업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채색되고 이에 공평무사는 자신의 등에 업을 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고통의 일반화로 실현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후자의 여인, 겨울에 산사를 찾아온 여자에게 등에 맨 업(業), 돌덩이는 바로 아이라고 할 수 있다. ‘여름’에서 소년이 등에 짊어져야 할 업으로 등장했던 대상으로서의 여자는 ‘겨울’에 업을 매고 있는 주체로서 되돌아온다. 그런데 자신의 등에 업고 왔던 아이를 산사에 두고 돌아가던 그 여인이 얼음 위 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다음 날 아침 산사의 남자는 구멍에 떠 있는 여자의 신발을 발견하고 여자의 시신을 거둬 다시 물 속에 수장한다. 문제적 장면은 바로 다음에 이어진다. 구멍에 수장되었던 여자가 불상으로 뒤바뀐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영화적 전언이자 주제라고도 할 수 있을 이 장면은 여러 가지의 논쟁에 바쳐진 바 있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아이를 두고 나가다 물 속으로 사라지며 또 왜 시신은 불상으로 바뀌어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녀의 얼굴은 왜 그토록 철저하게 은폐되었으며 궁극적으로 이러한 사라짐이 왜 멸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일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이미 그녀가 얼굴을 온통 폐(閉)한 채 산사로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입적의 순간에 행해지는 눈, 코, 입, 귀의 ‘폐(閉)’는 바로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의 오감에서 비로소 자유로이 놓여나리라는 선언적 예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카프로 얼굴을 온통 가리고, 즉 자신의 오감을 폐한 채 오로지 업(業)인 아이를 업고 산사를 찾아온 그녀에게 죽음이란 예고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녀는 등에 매고 있는 것이 바로 사슬이며 업이라는 것을 깨달은 자였던 것이다. 한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아이를 두고 산사를 벗어나는 그녀는 바로 부처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싯다르타 역시 라훌라, 즉 사슬이자 족쇄였던 아들을 버림으로써 부처, 깨달은 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얼굴을 봉인한 채 물 속으로 ‘멸(滅)’한 여인은 이미 부처였다. 따라서 우리가 스크린 위에서 목도했던 여인의 멸(滅)은 그 어떤 윤회의 업으로도 다시 태어나지 않을 해탈을 위한 제의적 과정으로 읽어야 마땅하다. (불가에서 진정한 해탈과 열반은 윤회의 업을 끊는다는 것이다.) 이는 다비의 제식을 스스로 행함으로써 그 죽음을 ‘사(死)’의 형식으로 완수했던 노승이 뱀으로 윤회한 것과 정확히 대비된다. 그러므로 얼굴을 완전히 폐(閉)한 그녀가 ‘멸(滅)’한 자리에 어떤 생물도 아닌 불상이 놓여 있는 것은 결코 비약이 아닌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다.
김기덕 감독이 다비식의 ‘사(死)’로서 표현한 고승의 죽음과 달리 여자의 죽음을 ‘멸(滅)’로서 표현한 것은 바로 적멸로서의 여성적 죽음, 윤회의 업을 마친 소진이자 거룩한 고갈로서의 죽음의 상태를 보여주려 함에 분명하다. 따라서 멸(滅)이란 사회적 절차와 관습의 속박으로 규정할 수 없는 초월적 지평으로의 사라짐과 마주치게 된다. 즉, 봉인된 여성의 얼굴이란 여성 비하적 혹은 여성에 대한 가학적 비전의 반영이 아니라 윤회의 업을 스스로 절단할 수 있을 유일한 가능성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상찬에 가깝다. 멸(滅), 사회적 제도에 귀속되지 않는 죽음을 통해서, 사라짐으로서의 죽음은 완성된다. 물 속으로 사라져 죽어가는 여인, 멸(滅)의 방식으로서의 죽음은 선조적 질서와 소실점의 근대성에 소멸되지 않는 원환적 에너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자진으로서의 멸(滅), 세상과의 인연을 끊는 자살의 방식으로서 선택된 멸(滅)은 따라서 사회 역사적 시스템 안에서 거행되는 사(死)의 방식과 구분되는 원형적 형태의 죽음이다. 붉은 목도리, 신발에 고착된 카텍시스로 남겨진 생애는 따라서 여성적 욕망의 현존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응시의 대상으로서 여성은 정념의 흔적을 남기고 사회 역사적 맥락 너머의 초월적 지평에서 멸(滅)하고 사라진다.
4. 죽음, 환원으로서의 가능성
오정희의 소설 「옛 우물」에는 화자인 여성이 사우나에 앉아 있는 중년여성들을 보며 러시아 민속 인형 마뜨로쉬까(matrioshika)를 떠올리는 장면이 있다.
사무실에서 나와 미지근한 물로 땀을 닦아낸다. 동네 목욕탕치고는 시설이 좋고 물이 깨끗해서 사람이 항상 많았다. 젊은 처녀들로부터 둥글고 기름진 몸매의 중년 여자, 만삭의 임부, 다산의 주름이 겹겹이 늘어진 노파들이 열심히 때를 밀고 비누칠을 하고 마사지를 한다. 남편이 지난해 가을 러시아 여행에서 민속 인형을 사왔다. 얇은 나무로 만든 것으로 볼이 붉은 처녀의 얼굴이 그려지고 민속의상의 무늬와 채색을 입힌, 얼핏 오뚝이처럼 단순한 모양이었지만 그 안에는 똑같은 모양의 인형들이 크기의 차례대로 겹겹이 들어있었다. 그것은 내게 인생의 중첩된 이미지로 받아들여졌다. 앙상한 뼈 위로 남루하고 커다란 덧옷을 걸친 듯 살가죽이 늘어진 한 늙은 여자 속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들어 있는 것일까. 보다 덜 늙은 여자, 늙어가는 여자, 젊은 여자, 파과기의 소녀, 이윽고 누군가, 무엇인가가 눈 틔워주기를 기다리는 씨앗으로, 열매의 비밀로 조그맣게 존재하는 어린 여자아이.
오정희의 「옛 우물」은 마흔다섯 번째 생일을 맞게 된 한 여인이 자신의 욕망과 그 흔적으로 꾸려진 내면의 스펙트럼을 반추해 보는 소설이다. 곧 사라지게 될 관능과 위반을 향한 열망의 공간, ‘연당집’의 폐기를 스스로 생각해보게 되는 나이, 그 나이가 바로 오정희가 말하는 여자 나이 마흔다섯 살이다. 즉, 마흔다섯 살은 여자가 더 이상, 이성애적 관능의 대상인 남자에게 더 이상 타자인 여자로서 비춰지지 않을 마지노선이다. 마흔다섯 살이 넘게 될 이 여자는 이제는 여자가 아닌 어머니로 그리고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여자가 아닌 여성으로 살아가야 할 자신의 여생을 때론 아프게 그리고 때론 담담하게 추억한다. 여자에게 관능적 욕망의 시간은 부재해야 더 아름다울 향수의 시간으로 각인된다.
중요한 것은 관능적 이성애의 대상, 광기와 집착으로 요약될 욕망의 한 시기와 결별하는 여주인공, 화자에게 마침내 떠오르는 이야기가 바로 옛 우물 속에 살고 있다고 전해져 왔던 은빛 잉어에 대한 전설이라는 사실이다. 화자는 여자로서의 한 생애와 작별하며 영원히 우물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 있을 잉어를 생각해낸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우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원형의 죽음이다. 원형으로 이루어진 죽음의 공간. 김기덕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여자가 빠져죽었던 원형의 구멍, <스캔들>의 숙부인이 빠져죽었던 그 구멍처럼 옛 우물도 둥근 형태의 죽음을 보여준다. 이는 한편 「옛 우물」의 그녀가 자신의 멸(滅)에 임해 마뜨로쉬까(Matrioshka)를 떠올리는 까닭과도 상통한다. 러시아의 전통적 민속 인형 마뜨로쉬까의 어원은 어머니라는 뜻의 마뜨(Mat)이다. 끝없는 반복과 재생으로서의 시니피에, 그것이 바로 여성에게 기대되어 온 생산력이며 창조성이다. 자신의 생산성이 고갈되는 시점에서 또 다른 생의 에너지를 꿈꾸는 여성적 부재로서의 멸(滅). 멸(滅)이란 곧 원환적 도상으로 반복되는 모성으로서 여성, 죽음이 곧 끝없는 재생으로 이어지는 제의적 소멸로서의 죽음인 셈이다.
강유정
․2005년 <조선일보> <경향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동아일보> 영화평론 입선으로 등단
․한국예술종합학교, 극동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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