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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문화산책/이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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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병집의 오래된 넋두리 혹은 1970년대의 사실적 ‘음악 벽화(壁畵)’
―양병집의 1집 ≪넋두리≫―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복고와 재활용의 시대에, 어느 잊혀진 통기타 이야기꾼을 회상하다
최근 한국 대중음악계의 주요 ‘코드’로 복고와 재활용을 꼽을 수 있다. 지난 2004년 상업적으로 각광받으면서 주요 이슈로 부상한 리메이크(음반) 붐은 대표적이다. 리메이크라는 아이템이 이전 시기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과 같이 메인스트림에서 전략적 음반으로 ‘기획’된 것은 2000년에 대박을 터뜨린 조성모의 리메이크 음반 ≪Classic≫이 시발점이다.(<가시나무>를 기억하시나요.) 물론 단발적인 움직임에서 지금의 집단적인 경향(‘붐’)으로 자리매김한 신호탄은 2004년 1월에 나온 이수영의 5.5집 ≪Classi≫이라는 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광화문 연가>를 기억하시나요.) 이수영의 음반을 필두로 성시경(<제주도의 푸른 밤>), 서영은(<가을이 오면>), 리즈(<난 아직 모르잖아요>), 그리고 해를 넘겨 김범수(), 나얼(<귀로>)에 이르기까지 지금 한국 대중음악계는 가히 리메이크 열풍이라 할 만하다.
<이미연의 연가>(2001)로 촉발된 컴필레이션 열풍 때처럼, 최근의 리메이크 붐도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보다는 ‘손 안 대고 코풀기’ 격에 ‘제 살 깎아먹기’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지만, 상업성이 검증되었고 그 ‘약발’ 또한 아직 유효하다고 판단해서인지 인기가수와 신인가수를 막론하고 리메이크 음반의 인기는 여전히 식지 않고 있다. 이승철과 박효신, 그리고 소방차(!)도 각각 리메이크 음반(이나 그에 준하는 음반)을 발매할 예정이라니 ‘잔치’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타박네> 자필 악보복고와 재활용 코드의 다른 대표적인 사례로 옛 가요음반 재발매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시장에 있어서 이 재발매 음반들은 대세에 영향 없는 ‘틈새시장’에 해당하지만, ‘마이너한 붐’으로 치부하면 그만인 것은 아니다. ‘한류 열풍’이란 헛된 폭죽에 들떠 있는 지금도 ‘변함없이’ 망각과 무관심 속에 유실되고 있는 한국 대중음악의 지난 유산을 한 땀씩 기워나가는 중요한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1960~70년대 키 보이스, 신중현(덩키스, 퀘션스, 더 멘), 김추자, 히 식스, 데블스, 김민기, 서유석, 한대수, 이연실, 오세은, 김정미, 현경과 영애 등의 음반부터 1980년대 마그마, 로커스트, 따로 또 같이, 무당, 다섯 손가락, 부활, 작은 하늘 등에 이르기까지 주옥같은 음반들이 재발매되었다. 최근에는 예전 LP 재킷을 축소한 듯한 케이스를 채용한 이른바 ‘LP 미니어처’ 형태로 음반(CD)이 재발매되고 있다. 여기에 이른바 ‘70/80 붐’으로 잔가지를 치면, 얘기가 끝이 없으니 이쯤 해두자.
이런 따분한 얘기를 길게 한 이유는 간단하다. 포크 가수 겸 제작자인 양병집의 음반 두 종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이의 과반수는 ‘양병집이 누구?’냐고 물어볼 것 같다. 가장 손쉬운 답변은 ‘김광석이 다시 부른 바 있는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의 원곡인 <역(逆)>을 부른 가수’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구전가요 <타박네>를 채보하여 대중가요로서 처음 알린 인물’이란 얘기나, ‘김민기, 한대수와 함께 한국의 3대 포크 저항가수’ 혹은 ‘한국의 밥 딜런’이란 평가가 있다는 점을 부연해 주면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포크 가수’로서의 면모 외에 ‘제작자’로서의 면모도 소개할 필요가 있다. 사실 양병집은 음반 제작자라기보다는 재능 있는 음악인을 ‘발굴’하고 그 ‘터전’을 마련해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태춘, 들국화, 해바라기, 동서남북, 16년 차이, 김하용덕, 손지연 등이 양병집이 운영했던 음악 카페들을 터전으로 활동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하거나 그에 의해 발견되었다.(더 자세한 이야기는 웹진 ‘weiv’에 실려 있는 양병집 인터뷰를 참고하길 바란다. http://www.weiv.co.kr/view_detail.asp?code=interview&num=2286)
정리하면 양병집은 1970년대 대표적인 한국 포크 가수였으며, ‘될 성부른 떡잎’을 알아보는 감식안과, 그 떡잎이 성장할 토양을 마련해주고 때론 열매까지 정성으로 보살펴준 인물이었다. 하지만 김민기, 한대수와 달리 양병집이란 이름은 이제 많이 잊혀졌거나 여전히 낯선 편에 속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일 텐데, 하나는 ‘포크 가수’로서 뛰어난 작사와 보컬 능력은 인정하지만 작곡 능력이 그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대표곡이 번안곡’이란 사실로 요약된다). 다른 하나는 ‘음반 제작자’로서 다른 사람이 열매를 (가로채서) 챙기거나 애써 수확한 열매가 시장에서 잘 팔리지 않는 일이 반복되었고, 그 결과 자신 있게 내세울 만한 성과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전자의 측면이 양병집을 과소평가하게 했다면, 후자의 측면은 그에게 경제적 어려움을 안겼다. ‘포크 가수 겸 음반 제작자 양병집’이란 설명 앞에 흔히 ‘불운한’이란 수식어가 붙는 이유는 그런 맥락에서다.
양병집 ≪넋두리≫ 재발매반재킷만↑ 띠지 포함→
세월의 더께를 털고 다시 공개된 양병집의 저주받은 걸작
서론이 길었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번에 나온 ‘양병집 음반 2종 세트’ 중 하나는 데뷔작 ≪넋두리≫(성음, 1974)의 재발매반(비행선, 2005)이고, 다른 하나는 통산 7집에 해당하는 신보 (BJE/서울음반, 2005)이다. 이 중에서 LP 미니어처 모양의 ≪넋두리≫ 재발매 CD를 보자. 이 음반은 김민기, 한대수의 역사적인 데뷔 음반과 함께 한국 모던 포크의 정수를 이루는 작품으로, 김민기, 한대수의 음반과 마찬가지로 1970년대 중반 판매 금지되어 졸지에 희귀 음반이 된 비운의 음반이다. 오리지널 LP가 고가에 거래되었음은 사족이다.
≪넋두리≫는 시쳇말로 저주받은 걸작이다. ‘저주받은’ 이유 중 하나는 발매된 지 1년만인 1975년 공연윤리위원회와 방송윤리위원회로부터 ‘가사와 창법’의 부적격 판정을 받아 음반이 판매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은 ‘가사와 창법의 부적격’뿐 아니라 갖가지 어처구니없는 명목으로 음반을 판매 금지시키기 일쑤였으니 이런 저주가 이 음반만의 불행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양병집의 기억에 의하면, 음반 제작자인 ‘당대 음반업계의 미다스의 손’ 나현구 사장이 2,400장 찍어서 800장 팔리고 나머지는 반품되어 폐기되었다고 말했다 한다.(물론 수치는 사실과 다를 수 있다.)
‘저주받은’ 다른 하나의 이유는 앞서 운을 뗀 송라이팅과 관련이 있다. 이 음반에 수록된 10곡 중에서 양병집이 작사와 작곡을 모두 한 건 <아가에게>가 유일하다. 나머지는 번안곡(8곡)과 구전가요(<타복네>)이다. 양병집 스스로 수록곡을 선곡하고 모든 곡의 가사를 붙였으며, 노래의 편곡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음반은 단지 작곡의 문제 때문에, 달리 말해 ‘싱어송라이터(singer-songwriter)’를 최상위의 위계로 한 포크/록의 이데올로기와 낭만주의적 작가주의 때문에 평가 절하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사, 작곡, 연주(노래)’의 삼위일체 중에서 작곡력의 결여는 그대로 이 음반, 그리고 양병집이란 음악인을 최고의 반열에 올려놓지 못한 요인이 되어온 게 사실이다. 이것은 과연 합당한 일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현재 양병집에 대한 그리고 이 음반에 대한 평단과 세간의 평가는 다소 부당하거나 인색하다는 생각이다. 사실 대중음악사에서 하나의 가수 혹은 밴드가 작사, 작곡, 노래, 연주의 역할을 모두 해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며 ‘전통’이라고 당연시할 양상도 아니다. 물론 한 음악인이 송라이팅부터 노래와 연주와 편곡까지 훌륭히 해내는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각각 작사가, 작곡가, 연주자, 가수로서 프로페셔널하게 활동하는 이들을 얕잡아볼 이유는 없으며 심지어 열등하게 볼 이유도 없다. 지금도 대중음악계의 주류는 작사가, 작곡가, 연주자, 가수의 프로페셔널리스트로 형성되어 있으며 그들의 역할 분담 하에 작동하고 있다. 또한 ‘오리지널’과 ‘싱어송라이터’를 결정적인 잣대로 보는 시각으로는 필연적으로 현재 각광받는 힙합이나 일렉트로니카를 ‘음악도 아닌’ 것으로 평가하기 쉽다. 수만 장의 LP에서 추출한 샘플과 수많은 음악 샘플에서 간취한 음원을 변용하여 하나의 새로운 작품으로 빚어낸 DJ나 턴테이블리스트들의 음악을 폄하하는 것은 미술로 치면 콜라주(collage)를 폄하하는 것처럼 ‘편견’에 불과하다.
그래도 포크/싱어송라이터 음악의 경우는 예외가 아니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밥 딜런 같이 뛰어난 싱어송라이터의 존재 때문에 포크 가수는 당연히 싱어송라이터여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지만, ‘모던 포크의 아버지’ 우디 거스리도, ‘포크의 여왕’ 존 바에즈도 수많은 구전가요와 다른 작곡가의 노래들을 레퍼토리로 삼았다. 즉 작사, 작곡 능력이 (포크)가수를 평가할 때 ‘플러스 옵션’이 될 순 있어도 ‘마이너스 옵션’이 될 수는 없다는 얘기다. 고(故) 김광석을 두고 작곡력을 문제삼아 폄하는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양병집의 자작곡이 아닌 번안곡을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음반 ≪넋두리≫를 지레 (또는 최종적으로) 한 수 접어두고 볼 이유는 없다.
음반 ≪넋두리≫에 담긴 번안곡을 살펴보아도 기준으로 삼은 원곡들의 절반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가수의 자작곡이 아니다. 물론 <너와 나의 땅>은 우디 거스리의 , <나는 보았지요>는 피트 시거의 , <소낙비>와 <역>은 각각 밥 딜런의 과 에 한국어 가사를 붙인 곡인데, 이 곡들은 각각 우디 거스리, 피트 시거, 밥 딜런의 자작곡들이 맞다. 하지만 나머지 번안곡들은 그렇지 않은데 <서울하늘(1)>의 원곡인 우디 거스리의 은 구전음악이고, <잃어버린 전설>의 원곡인 피터, 폴 앤 메리의 는 아일랜드 전통음악이며(때문에 재니스 이언의 를 비롯해 여러 이본(異本)이 있다), <서울하늘(2)>와 <그녀>는 피트 시거의 와 를 각각 원본으로 한 것이지만 필 오크스와 카디시가 원작자이다. 전설적인 미국 포크 가수들의 사정도 그러하니, 이 음반에 담긴 곡들이 번안곡이라고 시비 걸지는 말자.
풍자와 해학의 음률로 빚은 1970년대 보고서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했을 때, ‘저주받은’ 측면에 대해서는 지루하게 설명했으니 이제 ‘걸작’인 측면에 대해 살펴보자. 양병집이 선택한 곡들은 모두 1950~60년대 미국 모던 포크의 주옥같은 곡들이다. 그런데 여기 담긴 곡들은 단순히 번안곡에 머무르지 않는다. 대부분의 곡들은 원곡의 가사를 번역하는데 그치지 않고 말 그대로 ‘번안’했고 새롭게 가사를 붙인 것에 가깝다. 요즘도 번안곡을 만들 때 원곡과 무관한 사랑 타령의 가사를 붙이는 게 관행이란 점을 감안했을 때, 또 당시만 해도 전문 작사가가 (물론 원곡과 별로 관계없는) 가사를 붙이는 경우가 태반이었던 걸 감안했을 때, 양병집이 ≪넋두리≫에서 보여준 번안 가사는 탁월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양병집 청평페스티벌(1973년)예컨대 음반을 시작하는 <서울하늘(1)>은 무작정 상경한 시골 청년의 시각으로 도시와 자본주의 사회의 비정함을 그린 역작이다. “서울하늘 보구 싶어서 무조건 올라왔소.” 하는 1절에 이어 “무슨 사람 그리 많은지 무슨 차가 그리 많은지/무슨 집이 그리 많은지 내 안경이 기절했다오.” 하는 2절까지만 해도 그저 시골 청년의 재미있는 상경기 같지만, “나도 돈 좀 벌고 싶어서 나도 출세를 하구 싶어서/일자리를 찾아봤으나 내 맘대로 되지 않습디다.” 하는 3절에 이어 “나는 내일 떠날랍니다. (중략) 내가 살던 고향으로/두 번 다시 안 올랍니다. (중략)/화려하고 머리 복잡한 서울하늘 밑으로.” 하는 4절에 이르면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 각 절마다 나오는 “헤이 헤이 헤이 헤이 오~/노래나 불러보자.”는 마무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미학, 긍정의 자세를 읽을 수 있다. 이 노래를 듣고 ‘구전가요’ 같다고 느꼈다면 그 때문이다. 당대의 이농(離農)현상, 비정한 도시의 풍경, 무산자(無産者)들의 좌절을 그려낸 수작이다. 시각을 바꿔 ‘시골 청년’을 현재의 ‘아시아계 노동자’로 바꿔서 불러보아도 흥미로울 곡이다.
이어지는 <잃어버린 전설>은 1980~90년대 민중가요를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민중가요 중에서 이른바 ‘서정가요’ 계열의 노랫말이다.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 연약한 몸을 가누면서/참다 참다 쓰러져간 아름다웠던 꽃송이야/(중략)/검은 하늘 바라보며 스러져가는 향기 안고/웃다 웃다 지쳐버린 아름다웠던 꽃송이야/(중략)/잃어버린 전설 속에 사라져간 꿈을 찾아 그늘에서 피다 지친 아름다웠던 꽃송이야.”로 전개되는, ‘해석의 여지’가 많은 가사를 읽다 보면, 1980~90년대 유행한 민중가요 가사의 전형성마저 선구적으로 예증한 것 같은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 곡은 실제로 노래운동 초기 여러 악보집에 실리며 ‘민중가요’로 불렸다.
다음으로는 양병집이 발굴한 구전가요 <타복네>가 나온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즐겨 불러주던 노래를 채보해서 레코딩한 이 곡은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는 곡이다. 서유석이 먼저 레코딩해 유명해진 곡이기도 한데, 양병집은 과도한 감정 투여 없이 저음의 담담한 가창으로 노래함으로써 자칫 신파에 빠질 수 있는 함정을 피한다. 음반의 후반부에 나오는 <서울하늘(2)>와 <역>도 <서울하늘(1)>와 함께 탁월한 양병집의 가사를 느낄 수 있는 곡들이다. 처음 듣는 사람은 “정태춘 아냐?” 할 정도로 ‘정태춘 노래 같은’ <서울하늘(2)>는 무교동과 명동의 풍경을 그리며 ‘다정한 젊은이들’과 ‘신문 파는 아이들의 외치는 소리’, ‘백화점 진열장의 오색등’과 ‘과일장수 아줌마의 돈 세는 소리’를 날카롭게 대비한 곡이다. 무정한 도시의 상반된 풍경이 너무도 담담하게 읊조리는 양병집의 노래에 실려 무심하게, 그러나 그만큼 가슴에 깊은 울림을 남긴다. 정태춘의 음악에 양병집이 남긴 영향을 엿볼 수 있는 노래이다.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로 잘 알려진 <역>은 ‘재밌지만 반어적인’ 가사로 장단을 맞추면서 깨닫는 곡이다. 이제는 누구나 아는 가사이지만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 들어도 ‘신선하고 탁월한’ 가사이다.
‘넋두리’의 유산(流産)과 유산(遺産), 그리고……
비록 판매 금지와 망각과 ‘상대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대접으로 이어지는 불행한 운명의 길을 걸었지만 양병집의 ≪넋두리≫는 모던 포크라는 미국의 음악 스타일을 훌륭하게 소화한 음반이다. 물론 작곡의 측면에서 양병집의 목소리는 아쉬움이 있지만(엄밀히 말해 그의 자작곡인 <아가에게>는 음반에서 가장 쳐지는 노래이다), 그것이 흠이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가사와 편곡을 통해 자기 식으로 소화했다. 그래서 여기 실린 번안곡들의 법적인 주인은 미국의 원저작자들이지만, 이 곡들은 이미 ‘양병집의 곡’이다. 그만큼 그의 번안은 새로운 창작에 가까운 것이다. 리메이크를 ‘제2의 창작’이라고 한다면, 양병집의 번안을 창작으로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실제로 이후, 원곡들에 대해 몰라도 양병집의 이 번안곡 버전은 널리 알려졌으며, 지금까지도 불리는 긴 생명력을 얻었다.
양병집의 최근 모습양병집이 이 음반에서 선보인 프로테스트 송(protest song) 성향은 김민기의 곡들과 함께 1970년대 후반부터 태동된 노래운동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1970년대의 어두운 시대상을 이 음반만큼 지독하게 드러내는 작품은 드물다. 또 ‘엘리트의 시선’이 아닌 ‘낮은 시각’의 묘사, 풍자와 해학을 녹여낸 탁월한 작품이란 점에서 이 음반은 걸작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 물론 이 음반의 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 최고의 스튜디오 세션을 펼치던 동방의 빛의 반주는 종종 양병집의 노래와 부조화를 일으키고, 그래서 ‘차라리 어쿠스틱 악기만으로 녹음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러나 이 정도의 단점은 한국 대중음악의 걸작이라 불리는 음반들에 없지 않은 것이다. 한마디로 ≪넋두리≫는 포크 음악이나 프로테스트 음악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구입해야 할 음반이다.
≪넋두리≫의 31년만의 재발매와 함께 신보 ≪Debut & Fade Away≫도 발매되었다. 이번 신보도 그의 창작곡보다는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이 중심이다. 근래에 그가 발굴한 싱어송라이터 손지연의 곡들(<춤추는 달>, <김밥>, <호떡>)을 비롯해, 장인호의 <이대 앞길>, 박동률의 <그 사람> 등이 실려 있다. 그의 대표곡들인 <서울하늘> 연작과 <타박네>도 새롭게 녹음되어 실렸다. ≪Debut & Fade Away≫는 앞서의 ≪넋두리≫와 비교하면 여러모로 ‘날이 많이 무딘’ 작품인 게 사실이다. 한창 때의 날카로운 풍자를 기대하는 대신, 이제 황혼기에 접어든 나이에 내놓은 작품임을 감안하고 여유를 가지고 들어보는 게 좋을 듯하다. 다음에는 후배들이 작곡한 곡에 양병집 자신이 가사를 붙여서 만든 신곡들로 구성된 음반을 기대한다. 그래서 ‘시대’와 ‘시장’ 때문에 안타깝게 계속된 불운의 길에 행운의 햇살이 비추길 진심으로 바란다. 양병집에게 그럴 자격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용우․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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