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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연재|속담으로 읽는 문화사④/고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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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50회 작성일 08-02-26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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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담에 나타난 제주인의 생활상

고재환





4. 주생활(住生活)
■놈이 집광 관장살인 궤던 밥도 두엉 간다.
  (남의 집과 벼슬살이는 끓던 밥도 두고 간다.)
제 집이 없어서 남의 집을 빌려서 생활한다는 것은 결코 편한 일이 아니다. 그것도 홀몸이거나 부부간 단둘이면 몰라도 어르신과 어린애들을 여럿 거느리고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남의 집에 산다는 것도 그렇지만, 집 주인과의 틈이 생기는 날이면 난처한 일이 어디 한두 가지겠는가. 당장 딴 데로 옮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정해진 기간을 참고 견디며 그냥 눌러앉아 살아야 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하기야 옮기자면 못할 것이 없지만, 한번 이삿짐을 꾸린다는 것이 그렇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
옛날은 남의 집을 빌어서 살 때, 지금처럼 기간을 정하기도 하지만, 그 집에 부득이한 사정이 없는 한은 빌어서 사는 사람이 마음대로 여러 해 살 수가 있다. 지금처럼 문서로 계약을 해서 비싼 대금을 치르는 경우는 없다. 있다면 농촌에서는 밭일을 거들어주거나 곡식으로 형편에 따라 서너 말 성의를 표시하면 된다. 빈집은 좀처럼 그냥 두는 일이 없다. 남에게 빌리면 집이 상하지 않아 좋을 것 같지만 그와 정반대이다. 사람이 살아야 윤기가 돌고 집의 골격이 잘 유지된다. 그보다 더한 것은 사람을 귀히 여기고 그리워할 줄 알았던 데 있다. 서로 의지하여 삶의 훈훈한 온기를 느끼며 살고 싶어서다. 그렇다고 마냥 머물러 살 수만은 없다. 언제나 변수는 있기 마련인데, 갑자기 집을 비워 달라는 통지를 받는 날이면 떠날 수밖에 없다. 결국 남의집살이는 솥에서 막 끓고 있는 밥도 그만 두고 떠나야 할 만큼 안정성이 없는 것이다.
마치 그것은 언제 그만둬야 할지 모르는 벼슬살이와 같다. 상전의 말 한마디에 밥줄이 오가고 마는 절대권력 앞에는 정해진 관직의 기한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임용교지를 받고 의기양양 임지에 도착해서 여장을 풀기가 바쁘게 해임장을 받는 황당한 일도 벌어진다. 이런 사례는 요즘도 마찬가지다. 고위직에 임용된 지 며칠이 안 돼 물러나야 하는 딱한 신세가 그것이다. 물러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간에 감춰졌던 치부까지 드러남으로써 망신만 당하는 꼴불견이 되고 만다. 아무튼 한평생 살 수 있는 주택을 장만하지 못한 셋방살이 신세는 나가라면 언제나 미련 없이 떠나야 하는 가련한 존재이다.

․깅이광 보말도 집은 싯나.
  (게와 고둥도 집은 있다.)
․집치레 말앙 밧치레라.
  (집치레 말고 밭치레하라.)
․집은 우잣 봥 사라.
  (집은 텃밭을 보고 사라)
․물린집 지방 우이서 칵 깬다.
  (물려받은 집 문지방 위에서 관솔 쪼갠다.)

자립생활의 기본은 자기의 집을 장만하고 사는 일이다. 집 없이 떠도는 사람을 “집 엇인 벵이(집 없는 달팽이)”라고 빗대어 나무라기 일쑤여서 단칸방에 거적문을 달고 사는 한이 있더라도 제 집을 갖기 바란다. 보잘것없는 바다생물인 게와 고둥도 다 그들 나름의 몸을 담고 사는 집이 있는데, 만물의 영장이라고 우쭐대는 사람이 어찌 집 한채 장만하지 못하고 사느냐고 나무람 받을 수밖에. 그렇다고 고대광실 으리으리한 집은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좋은 집이 싫어서가 아니라, 생활수준에 맞지 않아서다. 입에 풀칠할 생계가 아득바득 어려운 판국에 집치레는 마치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를 거는 것과 같이, 푼수에 어긋난 것으로 안다. 오직 실속 있는 삶을 위해서는 좋은 집보다 생산성이 보장된 밭을 확보하고 잘 가꿔서 농사를 짓는 것이 잘사는 비결임을 체득한 것이다. 그래서 집을 살 때도 그 집에 달린 텃밭을 중히 여긴다. 텃밭이 있어야 주위에 과실나무를 심을 수 있고 대숲을 만들 수 있으니, 수익도 올리고 울타리에 담장을 높게 쌓지 않아도 겨울철 하늬바람을 막을 수 있다. 더 활용가치가 큰 것은 사시사철 채소를 갈아 솥에 불을 지펴둔 채 나물을 뜯어다가 즉석에서 다듬고 국을 끓여 먹을 수 있으니 편리하다. 그러니 텃밭이 있는 집과 없는 집의 가치는 비교가 안 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다. 물려받은 집이라고 해서 문지방 위에 관솔토막을 올려놓고 자귀로 쪼개는 일이다. 그 문지방이 온전해질 리가 없다. 실제로야 그렇게까지는 않았겠지만, 자기의 손으로 어렵게 지은 집이 아니라고 해서 귀하게 여기지 않음을 경계하고자 꾸며낸 말이다. 꼭 집만이 아니다. 물려받은 재산은 공짜로 얻은 불로소득이다. 그러니 재산 귀한 줄을 모르고 흥청망청 마구 쓰고도 추호의 죄책감이 없다. 내 것 내가 쓰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느냐 막무가내이다. 요마적은 되레 관솔토막 정도가 아닌, 쇠뭉치를 올려놓고 해머로 내리치는 것 이상의 파산을 자초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내 것이지만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일말의 양심은 정말 구제불능의 수렁으로 추락하고 만 것은 아닌지…….
옛것을 통해서 새로운 것을 깨닫고 안다는 온고지신을 곱씹으면서도 아직도 빈익빈 부익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야단이다. 서울의 어느 곳은 30여 평 아파트의 값이 한때 10억 원을 호가했으니, 주눅이 들어 웬만한 집을 가지고서야 산다는 축에 낄 수 가 없다. 그러니 대박을 노린 복권에 운명을 거는 한탕주의 사행심이 어찌 누그러들 리가 있겠는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한 달에 100만 원씩 저축을 해서 30년을 모아야 3억 남짓이니, 봉급생활자에게는 그저 꿈같은 얘기다. 말이 30년이지 요즘 정년보장이 허물어지고 있는 이마적은 치열한 경쟁의 좁은 문을 뚫고 어렵사리 입사해서 10년이 되면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도 농어촌의 후예들은 시세에 뒤지고 초라해진다고 고향을 등지고 도심으로만 쏠린다.
활동반경이 한 시간대에 불과한 제주도만 하더라도 2005년 4월 현재 50만 중 30만이 제주시에 몰리고 있다. 하물며 수도권이야 사람으로 북새통을 이룰 수밖에 없으니 주거공간이 비좁을 수밖에. 이와 같은 도농간(都農間) 불균형의 한계를 걱정하면서도 웬걸 그 해결책 앞에는 기득권의 손익을 저울질하기에 급급하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했던가. 제 기반이 흔들린다고 온 나라가 뒤숭숭한 기세싸움만 벌리고 보니, 민초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빈정거림과 불신의 골만 깊게 파고 만 것이 우리의 현주소다.

■집줄 르게/르게 놓는 놈광 사돈 말라.
  (집줄 짧게 놓는 사람과 사돈하지 마라.)
제주도의 초가집은 그 생김새부터가 유별나다. 우선 겉모습을 보면 벽채가 돌로 둘러져 있고 지붕도 볏짚이 아닌 띠로 덮는다. 이 띠는 제주어로 ‘새’라고 해서 일부러 들에서 가꾸는데, 그런 밭을 ‘새왓’이라 한다. 개인이 아닌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관리할 경우는 ‘케왓’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베어 들여 쓰는 띠는 세 가지로 분류된다. 그 길이가 1m 정도의 것은 지붕을 덮는데 쓰이고 그 이상 긴 것은 거추장스러워 불편하므로 별도로 추려서 묶어두었다가 노적가리를 덮는 이엉인 ‘람지’를 엮는다. 또 50㎝ 내외의 짧은 것은 ‘각단’이라고 해서 지붕을 동여맬 줄을 놓을 때 쓰인다.
왜 이처럼 제주도의 초가집은 육지부처럼 볏짚으로 지붕을 덮고 새끼줄로 동여매면 편할 텐데, 굳이 ‘새’로 덮고 ‘각단’으로 동여맬 집줄을 놓아야만 했을까? 그럴 이유가 있다. 제주도의 기후는 온대성이지만 남태평양에서 발생한 태풍이 통로여서 일년 중 그 영향을 두세 번 받는 것은 예사로 돼 있다. 그래서 제주도의 재래식 가옥은 비바람에 강한 띠를 두툼하게 덮어서 굵은 줄로 동여매야 한다. 그 동여매는 것도 가로세로 25~30㎝ 간격으로 바둑판처럼 촘촘하다. 그렇지 않으면 거센 비바람을 이겨낼 수가 없다. 육지부 농촌의 초가집처럼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두르고 가느다란 새끼줄로 듬성듬성 동여맸다가는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그래서 가을걷이가 끝나는 대로 ‘새’를 베어들이고 ‘각단’으로 줄을 놓는 일은 농촌에서 일년을 마감하는 기획행사로 꼽힌다. 집을 덮는 일도 아무나 못하지만, 줄을 놓는 것 역시 아무나 못한다. 방안에 앉아서도 꼴 수 있는 새끼줄과는 사뭇 다르다. 그 놓는 과정부터 온종일 널따란 마당이나 곧게 뻗은 골목길 언저리에 주저앉아 거친 ‘각단’을 손아귀에 감아쥐고 메기는 고충은 해본 사람이 아니면 모른다. 숙련된 솜씨가 없이는 안 되는 기술이다. 그 인력도 집줄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네 사람이 필요하다. 표현력이 딸려 그 장면을 글로 묘사하기가 어렵지만 대충 이렇다. 제일차로 지붕의 규격에 맞게 한 가닥씩 놓게 되는데, 두 가닥이 한 쌍을 이뤄 집줄 하나가 되게끔 연결시킨다. 필요한 수량만큼 놓고 나면 최종적으로 집줄을 완성시키는 제이차 단계로 접어든다. 이때 두 사람은 한 쌍씩 연결된 줄을 ‘호롱(렝)이’1)에 한 가닥씩 나눠 꿰고 나란히 서서 일정한 속도로 돌린다. 나머지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두 가닥 줄이 서로 잘 어울려 밧줄처럼 꼬일 수 있도록 땅에 박은 버팀목 구멍에 꿰고 ‘뒤치기’2)로 돌린다. 나머지 한 사람은 그 돌아가는 줄을 한 가닥씩 양손으로 움켜잡고 고르게 감겨서 꼬이도록 조정하는 일을 맡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집줄은 그저 띠로 꼰 밧줄이 아니다. 척박한 땅을 일구고 악천후를 이겨내는 제주인의 심줄 바로 그것이다.
그것도 부지런해야 하루에 삼간집 한 채용을 마련하게 되는데, 길이를 짧게 놓았다가는 나중에 애먹는다. 새끼줄은 상황에 따라 길고 짧게 즉석에서 끊어 쓸 수도 있지만 ‘각단’으로 만든 집줄은 그럴 수가 없다. 집의 길이와 폭을 제대로 알고 긴 것과 짧은 것 별로 규격에 맞게 정확히 구분해서 좀 여유 있게 놓아야 한다. 어긋났다가는 나중에 지붕을 덮고 줄을 동여맬 때 여간 심기가 불편하고 고생스러운 것이 아니다. 두고두고 인색하고 융통성 없는 옹졸한 사람으로 찍혀 버린다. 지붕을 덮고 줄을 맬 때는 두 사람이 처마 양쪽 밑에 발판을 밟고 서로 맞서서 ‘거왕’3)에 붙들어 매야 한다. 이때 지붕 위에서 줄을 던져주는 사람이 지시에 따라 양쪽에서 줄 끝을 잡았는지 확인을 한 뒤 목청을 높여 당기라는 신호를 보낸다. ‘기여!’ 고함소리와 함께 동작을 맞춰 붙들어 매야 지붕에 덮인 띠가 어느 한쪽으로 밀리지 않는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느 한쪽의 줄이 짧으면 다른 한쪽 사람은 늦춰줘야 하는데, 줄을 짧게 놓았으니 잇지 않고는 붙들어 맬 수가 없으니 바동거릴 수밖에. 그것도 한두 개이지 집 한채를 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이만저만 짜증나고 귀찮은 일이 아니다.
매 해는 아니지만, 해 걸러 2년에 한번씩은 늘 해오는 일인데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남에게 고생을 시켜 핀잔을 받는 것은 사리를 헤아리는 도량이 모자람이다. 용의주도치 못한 마음가짐도 그렇지만, 물자를 아끼는 것만 능사로 알고 삶의 여유와 유통성이 모자란 처신은 우롱을 당할 수밖에 없다. 아껴야 할 때 아낄 줄 모른 것도 허물이 되지만, 아껴서는 안 될 때 나타나는 인색함은 그 사람됨의 바닥을 드러내는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옛 분들은 그런 사람과는 아예 사돈의 인연을 맺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부러움을 못 받을망정 남의 빈축을 사는 아무개의 사돈이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서다. 요즘 눈감으면 코를 베어 가는 사기행각이나 엄청난 비리와 폭력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처럼 따돌림의 빌미가 될 수 없는 가소로운 일이다. 하지만 옛 분들의 보편적인 정서가 그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 잘못이 크고 작고를 떠나서 시의 적절치 못한 일을 저지르는 그 자체로써 사람됨의 본바탕과 맞닿아 있다고 본 것이다.
옛날의 가옥들은 돌과 나무, 흙이 주된 재료이다. 벽채는 돌 사이에 다진 흙을 놓아가며 쌓았는데도 안쪽은 다시 흙으로 발라서 바람이 스며들지 못 하도록 한다. 가옥의 구조는 ‘오간․사간집’이면 큰 것에 해당하고 보통은 ‘삼간집’이고 ‘이간집’ 이하는 살림이 펴지지 못한 사람이 산다. 낫게 사는 가문은 한울타리 안에 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인 ‘안꺼리’와 바깥채인 ‘바꺼리’가 마주보게 돼 있고, 외양간인 ‘쉐막’이 있어 우마를 매고 농구들을 보관한다. 집안의 구조도 큰방인 ‘큰구들’과 작은방인 ‘족은구들’ 사이에 마루인 ‘상방’이 있고, 곡식을 보관하는 광인 ‘고팡’과 부엌인 ‘정지’, 찬방인 ‘쳇방’이 있다. 또 마당 쪽으로 향한 정면에는 툇마루인 ‘낭간’이 만들어져 있고, 그 위쪽 처마 밑으로 비바람이 들이치는 것을 막아주는 ‘풍체’를 길게 매달아서 작대기로 받치는 것은 필수적이다. 집 바깥 부엌문 옆에는 ‘물허벅’4)을 부려놓도록 양옆에 돌을 세워 그 위에 두툼 넓적한 돌을 덮어 만든 ‘물팡’과 겨울철 방에 불을 때는 아궁이에 해당하는 ‘굴묵’이 있는데, 그 방고래 속에 보리까끄라기를 가득 밀어 넣고 불을 지핀다. 그것도 방이 여러 개면 땔감이 모자라게 되므로 우마의 배설물을 주워 모아서 말렸다가 사용하면 열이 세고 마뎌서 좋다.
그것도 옛말―, 5․16 이후 새마을운동의 급물살을 타고 슬레이트 덮어씌우기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철근을 박은 콘크리트가 숲을 이룬 고층 아파트의 그늘들이 날로 늘고 있다. 그들 그늘에 가려 기가 죽은 민초들의 노여움은 어쩌다 매스컴을 타고 브라운관과 일간지 한 귀퉁이에 기삿거리가 되거나, 어느 시인의 펜 끝에서 앙칼진 열기를 토할 뿐이다. 왜! 왜! 햇볕마저 빼앗겨야 하느냐고 분통이 터져 일조권 소송에서 손을 들어줘야 겨우 종이돈 몇 푼의 배상금으로 울분을 삭이는 것이 고작이다. 초가집이 그리워 안달이 나서가 아니다. 못 가진 가난이 남의 탓처럼 서러워서다. 거기에다가 과시성 문명의 위세에 눌려 허리가 휘어지고 등골에 진땀이 나서다.

■신구간엔 날 안 봥 이(서)다.
  (신구간에는 날짜 안 보고 이사한다.)
제주도의 풍습 가운데 다른 지방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있다. 아무 때나 이사를 하지 않고 이사철이 따로 정해서 있다는 사실이다. 그 정해져 있는 기간은 7일 내외인데, 대한 후 5일째부터 입춘 전 3일까지이다. 이때는 지상을 관장하는 18,000이나 되는 무속신이 옥황상제께 일년간의 현황과 결과를 보고하고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 버리는 시기로 돼 있다. 즉 신관(新官)과 구관(舊官)이 교체되는 시기로써 신들의 지상에 머물러 있지 않는 신구간(新舊間)에 해당한다. 그러니 이 기간에는 아무 날이나 마음대로 흙을 파서 집을 고치는 형질 변경을 하더라도 지신의 노여움을 사는 동티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무렵에는 이사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집안 곳곳 헤어진 데를 손본다.
어찌 보면 이 신구간 풍습은 비과학적인 미신으로 웃어넘기기 쉽다. 하기야 현대적 시각에서 볼 때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니까. 하지만 옛 분들은 빗나가기 쉬운 방만하고 무절제한 삶에 제동을 거는 초인적 현상에 대한 경외감을 의식하지 않으면 무사안녕을 누릴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부정적인 면 못지않게 긍정적인 면도 무시할 수가 없다. 요즘 유동인구가 많아지는 산업사회에서는 적절치 못한 주거문화일 수 있지만, 농경생활에서는 한곳에 정착해서 살아야 하므로 아무 때나 막 터놓고 집을 옮겨 다니는 것이 더 비능률적이다. 일년 단위로 연말 농한기에 기한을 설정함으로써 한해를 정리하고 다음 해를 기약하는 시점으로 삼을 수 있다는 데서 이점이 더 많았던 것이다.
다음의 제시한 것들은 제주인의 특이한 주거문화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금기담이면서 속담으로 전용되는 것들이다.
․연삼살방광 밍삼살방엔 이(서) 안 간다.
  (연삼살방과 명삼살방에는 이사 안 간다.)
․새 집 짓엉 성주 안 리우민 본향당이 못 간다.
  (새 집 지어서 성주굿 안 하면 신당에도 못 간다.)
․집은 산 써난 듼 안 짓나.
  (집은 묘 썼던 데는 안 짓는다.)
․조왕광 칙간은 부튼 듸 안 다.
  (부엌과 뒷간은 붙은 데 안 한다.)

신구간이라고 해서 무작정 아무데나 이사를 가지 않는다. 그 이사하는 사람한테 맞지 않는 막힌 방위가 있는데, 그 방위를 삼살방(三煞方)이라 한다. 이 삼살방은 자손과 가축이 손해를 입는 ‘세살방(歲煞方)’, 생명의 해를 입는 ‘겁살방(劫煞方)’, 질병과 재난을 입는 ‘재살방(災煞方)’ 등의 방위를 일컫는데, 그것도 일년간 이사를 못 가는 ‘연삼살방’이 있고 생전 못 가는 ‘명삼살방’이 있다. 특히 명삼살방으로 이사를 했다가는 나중에 큰 화를 당한다고 해서 역술가의 자문을 받는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지키지 않았다가 당하는 사례를 옛 분들은 지금도 되새긴다. 그런 말을 안 들으면 모르되 일단 듣고 나면 찜찜한 생각이 들어 굳이 그런 방위를 범하고 싶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새 집을 지었을 때도 무당을 데려다가 성주풀이를 한다. 그래야 집안에 탈이 나지 않고 신당에도 갈 수가 있는 것으로 돼 있다. 무속신앙에서 성황당인 신당은 제주에서 ‘당’이라 부른다. 그 수효도 “절 오백, 당 오백.”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많았는데, 1960년대 ‘새마을운동’의 철퇴를 맞고 헐렸다가 일부 복원돼서 다섯 곳이 제주도문화재로 지정된 바 있다. 현대 종교계에서는 미신이라고 해서 배척하고 있으나 민간신앙의 메카로써 제주인의 정신적 지주의 구실을 감당해온 것이다. 그것은 상고시대 삼한의 성지인 ‘소도’를 중심으로 치러졌던 제천의식인 ‘무천’과 부여의 ‘영고’에 맞닿는 것으로서 민간에 깊숙이 자리잡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초에는 그 해의 안녕을 위해서, 가을철 추수가 끝나면 햇곡식으로 제물을 마련하여 일년에 두 번은 ‘당’을 찾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 그래야 마음이 놓인다. 이런 풍습은 온 마을 주민이 참여하는 마을제인 ‘포제’와 함께 ‘당굿’이 성황을 이뤘던 것이다.
또 새 집을 짓는 것 이상으로 그 터를 더 중히 여긴다. 풍수설은 그만 두고라도 정결한 곳이라야 한다. 삶의 보금자리인 집은 정결한 곳이 아니면 짓지 않는다. 특히 무덤이 있던 곳을 금기시해서 피하는 것이 관행이다. 한 세상 운이 다한 송장이 묻혀 있던 자리에 집터를 잡았을 때 우선 그 느낌부터 찜찜하다. 그보다도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겨 가운이 기울고 만다는 속설을 굳이 부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은 공동묘지를 밀어내고 아파트와 공공시설물이 들어서고 있지만, 옛날 같으면 택지로 제일 꺼리는 곳이다.
이렇듯 주택에 관한 선인들의 마음가짐은 예사롭지 않아서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흥미를 끄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제주도 무속신화인 ‘문전본풀이’다. 바로 그 내용과 직결된 것 중에 하나가 부엌과 뒷간을 같은 곳에 인접시키지 않고 반대쪽이거나 동떨어진 곳에 두는 일이다. 그 내력은 다음의 제시한 본풀이의 골격에 잘 드러나 있다.

아들 일곱 형제를 둔 남 선비가 그 아내인 여산 부인의 권유로 장사 차 곡식을 배에 싣고 오동고을에 가게 되는데, 그 곳에서 만난 귀일의 딸에게 속아 빠져 가진 것을 다 잃고 눈마저 어두워 곤경에 처하게 된다. 연 삼 년을 기다리다 지친 여산 부인은 남편인 남 선비를 찾아 오동고을에 도착한다. 그때 첩인 귀일의 딸은 불만을 품고 목욕을 핑계삼아 주천강 연못으로 유인하여 빠뜨려 죽이고 만다. 그러고 난 뒤 본부인으로 가장하여 남 선비와 같이 귀향한다. 그 사실을 눈치 챈 일곱 명의 의붓자식을 없애기 위해 계모인 귀일의 딸은 꾀병인 복통을 일으켜 남 선비에게 칠형제의 간을 내어 먹어야 낫는다는 간악한 음모까지 꾸민다. (중략)
칠 형제 중 영특한 막내인 녹디생인의 지혜와 재치로 생모인 여산 부인을 살해하고 자기 칠 형제까지 죽이려던 음모가 들통이 난다. 이에 가책을 받은 아버지인 남 선비는 집 밖으로 내닫다가 정주목에 목이 결려 죽으니 ‘정낭신/정살신’이 되고, 계모(귀일의 딸)는 뒤간에 목을 매달아 죽으니 측도부인 ‘측간신’이 된다. 어머니인 여산 부인은 환생시켜 부엌을 맡는 ‘조왕신’으로, 막내인 녹디생인은 ‘일(앞)문전신’으로, 첫째 형은 사방을 관장하는 지신 중 ‘동방 신’으로, 둘째 형은 ‘서방신’으로, 셋째 형은 ‘남방신’으로, 넷째 형은 ‘북방신’으로, 다섯째 형은 ‘중앙신’으로, 여섯째 형은 ‘뒷문전신’으로 자리를 잡음으로써 가신의 위상이 정립된다.

여기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문전본풀이’에 따른 가신(家神)의 서열을 보면, ‘일문전신/문전신’과 ‘조왕신’이 상위이고, ‘측간신’은 인과응보에 의한 최하위에 해당한다. 일상생활에서 처첩 간 갈등과 계모와 의붓자식 간에 벌어지는 비정한 삶의 실상을 서사화시킨 것이다. 그래서 옛 분들은 집을 지을 때 부엌과 뒷간은 옆에 붙어 있거나 마주 보이는 가까운 거리에 두지 않는 것이 불문율로 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뒷간인 ‘통시’에 쓰던 물건을 부엌에는 물론이고 집안에 가져들지 않는다. 다른데서 나는 동티도 꺼리지만 ‘통시’에서 난 동티는 더 고약하다고 해서 좀처럼 범하지 않으려고 명심한다. 그 ‘통시’는 구조도 독특해서 뒷간과 돼지우리를 겸하고 있다. ‘디딜팡’5)이란 곳에 발을 디디고 걸터앉아 용변을 보면 돼지가 와서 받아먹는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무턱대고 볼일을 보러갔다가는 기겁을 하고 뛰쳐나와야 한다. 6․25 때 피난민들이 겪었던 일들이다. 그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해를 하게 됐지만, 뒷간 이야기가 나오면 낯이 뜨거워진다. 지금은 없어져서 민속촌에서 관광객을 위한 구경거리로 돼지 한두 마리를 가둬서 당시 모습을 되살리고 있을 뿐, 인분을 먹이고 있는 곳은 없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통시’의 양면성이다. 부정적인 면은 인분을 먹인 돼지고기를 다시 사람이 먹는다는 위생관념상의 혐오감이다. 그것만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긍정적인 면은 청정자연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인분 처리에 고심하지 않아도 되고 채소밭에 거름으로 뿌리는 일이 없으니, 언제나 깨끗하고 신선한 채소를 맘놓고 뜯어서 씻지 않고 즉석에서 먹을 수 있다. 더 좋은 것은 얼굴을 찡그리는 역한 냄새 대신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오존(ozone)을 만끽할 수 있었음이다. 이제는 오수처리장이 들어선다고 머리에 붉은 띠를 동여매고 덤벼들어야 하는 싸움꾼 세상이 돼 버렸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생각수록 희한한 세상이다. 자기가 먹고 살아가야 할 주거환경을 죽여가면서 살려야 한다고 아우성들이다. 좋다는 곳은 다 골라서 행락을 자극하는 낚싯밥을 꿰고 호주머니를 노린 요상한 이름의 호텔과 팬션, 먹을거리집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서서 살인 찌꺼기들을 쏟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어떤 곳에 터를 잡아야 할지 방향감각을 망각해 버린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명삼살방’은 왜 없는 것일까. 산수의 풍광을 즐기면서도 결코 훼손하거나 더럽히지 않고 물아일체의 경지에 몰입해서 호연지기를 키우는 도량으로 삼았던 선인들의 기품이 새삼 우러러 보인다.


고재환․
1937년 제주 출생
․저서 󰡔제주속담총론󰡕 󰡔제주도속담사전󰡕 외
․제주교육대 명예교수 ․제주도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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