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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서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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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835회 작성일 08-02-26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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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


이기호 「나쁜 소설」(≪실천문학≫ 2005, 봄)

소설의 현실성에 대한 재기발랄한 질문
서영인(문학평론가)


소설은 독자를 ‘당신’으로 호명하며 이 소설을 누군가에게 읽어주라고 권유한다. 소설을 읽어주기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고 그 장소의 조도를 맞추고, 소설을 들어줄 사람에게 편안한 자세를 알려주고, 그리고 이야기 속으로 진입한다. 이야기 속에서 만나는 주인공 그도 또한 ‘당신’이다. 독자는 소설을 따라 ‘나’의 이야기이기도 한 ‘당신’의 이야기를 읽게 되는 것이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소설 속의 ‘당신’에 자신을 겹쳐놓게 되는데, 그 ‘당신’의 행로는 이렇다. 도서관 정기간행물실에서 발견한 소설(바로 독자가 읽고 있는 그 소설이다) 때문에 시험이 임박한 상황을 밀쳐두고 소설을 들어줄 누군가를 찾아 헤매고, 결국 아무도 소설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 여관방에서 아가씨를 불러 소설을 읽어주는 것이다. 작가는 짐짓 독자를 ‘당신’이라 불러 작가와 독자와의 직접적인 소통의 상황을 설정하고, 그래서 그것이 마치 현실 속에서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대화인 것처럼 가장하지만 그러한 호명과 응답과 소통은 역시 가장된 허구일 뿐이다. 작가와 독자의 소통, 혹은 소설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기호의 「나쁜 소설」을 읽으면서 이인성의 「당신에 대해서」(이인성, 󰡔한없이 낮은 숨결󰡕, 문학과 지성사, 1989)를 떠올렸다. 물론 확인해 보지 않았으니 작가가 실제로 이 소설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인성의 「당신에 대해서」는 다짜고짜로 독자를 ‘당신’이라고 부르면서 소설을 시작한다. 작가가 가상의 독자인 ‘당신’에게 건네는 말들로 이루어진 「당신에 대해서」를 처음 읽었을 때, 허구인 줄 알면서도 작가의 부름말에 움찔하는 나를 보며 무척 흥미로워했던 기억이 새롭다. 「당신에 대해서」에서 작가는 작가와 독자의 소통에 대해서, 소설의 허구성과 현실성에 대해서, 지루하리만큼 장황한 고민을 쏟아낸다. 말하자면 「당신에 대해서」는 아주 고독한 관념소설이었던 것이다. 이기호의 「나쁜 소설」 역시 「당신에 대해서」와 유사한 고민을 안고 있는 소설이다. 그러나 그 말 건넴의 방식은 훨씬 유쾌하며 날렵하고, 그래서 독자를 덜 불편하게 한다. 어쩌면 이것이 1989년의 작가와 2005년의 작가가 지니는 차이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쁜 소설」에는 또 한명의 선배작가가 거론된다. 바로 윤대녕이다. 소설의 독자이기도 하고 또 소설의 등장인물이기도 한 ‘당신’이 소설에 깊이 빠져들었던 이유는 바로 윤대녕 때문이다. “소설 속 주인공이 느끼는 허무가, 하나도 남김없이 당신에게로 전이되는 막막함, 그래서 소설 속 주인공과 당신이 하나로 합치되는 듯한 감정의 출렁거림”(43쪽)은 ‘당신’으로 하여금 소설 속의 인물을 흉내 내고 그를 자신의 삶에 대입해 보게 했다. 물론 그 따라하기의 결과는 어처구니없이 참담했다. ‘블루 마운틴 원두커피와 여과지’나 ‘춘천행 기차’와 ‘청평사’는 소설 속에서만 그럴 듯하게 존재했을 뿐, 그것을 흉내 낼 수 있는 현실이 ‘당신’에게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홀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반지하 월세방에 원두커피나 여과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고, 춘천행 기차 안에서 앞자리에 앉은 여자에게 소설의 주인공처럼 말을 걸었다가는 치한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윤대녕의 소설을 흉내 내었지만 한번도 그 소설 속의 것과 같은 신비하고도 고독한 아우라를 만들어 보지 못했던 ‘당신’, 9급 공무원 시험, 그것도 연령 제한으로 단 한번의 기회만을 남겨 놓고 있는 시험을 준비 중인 ‘당신’은 다시 소설을 흉내 내 보기로 마음먹는다. 소설을 읽고 마음속으로 밀려들었던 그 감정적 동일시와 일체감을 다시 찾고 싶었기 때문일까. ‘당신’은 “누군가 누군가에게 직접 소리 내어 읽어주는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소설을 복사해 들고, 자신이 읽어주는 소설을 들어 줄 누군가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그 누군가는 없다. 우여곡절 끝에 소설을 들어줄 누군가로 선택된 사람은 여관에서 시간제로 불러주는 아가씨이다. 그러나 손님과 짧은 섹스를 거래하기 위해 찾아온 아가씨에게 소설을 읽어주다니. 도대체 성사될 리가 만무한 일이지 않는가. “몸엔 손 하나 까딱 않”을 테니 “편하게 누워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만”(52쪽) 하면 된다고 시작한 일이지만, 결론은 뻔하다. 소설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당신’은 팬티마저 벗어버리고 아가씨의 몸 위로 겹쳐 누워 있다. ‘당신’은 아가씨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소설을 읽는다. 읽어주는 누군가와 들어주는 누군가가 소설을 통해 소통하고 감정을 공유해야 마땅하겠지만, 결국 소통은 시간제 섹스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윤대녕에 대한 ‘당신’의 반응은 지극히 허구적인 소설이 가지는 현실성을 거꾸로 환기하게 한다. ‘당신’은 “당신이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이, ‘윤대녕’ 소설에서 그려지는 세계보다 더 소설 같고, 사막 같다는 생각”(49쪽) 때문에 윤대녕과 멀어졌다. ‘원두커피와 여과지’, ‘춘천행 기차’와 청평사’는 ‘당신’의 현실에 도저히 적용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9급 공무원 시험에 여덟 번이나 떨어진 당신”, “그런 당신이 언젠가는 꼭 9급 공무원이 될 것이라고 믿으며 해장국집 주방에서 하루 열두 시간씩 접시를 닦는 홀어머니”(47쪽)의 삶은 윤대녕 소설의 허무감과 막막함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러니 ‘원두커피와 여과지’나 ‘춘천과 청평사’는 이 사막 같은 삶에 던져진 하나의 신기루 같은 환상이고 위안이다. 환상과 위안은 없고 막막하고 허무한 고통만이 있는 삶이 소설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소설과 멀어졌지만, 그러나 그 위안이 내내 그리웠던 모양이다. ‘당신’은 연인이나 혹은 친구에게 낮은 목소리로 소설을 들려주는 장면에 그만 이끌리고 말았으니.
그러나 다시 한번, 소설과 같은 위안은 없다. ‘당신’은 여관방에서 시간제 콜걸과의 허무한 섹스로 소설읽기를 끝낼 모양이다. 「나쁜 소설」은 우리 시대의 소설에 대해서, 그것의 소통과 위안에 대해서, 또는 현실과 환상에 대해서 질문한다. 직설적 질문과 요구로 시작된 독자와의 대화, 그것은 결국 실패한다. 소설의 독자이기도 하고 주인공이기도 한 ‘당신’은 누군가에게 소설을 읽어주는 일을 완수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실패를 통해 소설은 다시 ‘독자’와 소통한다. 9급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기 위해 도서관을 오가며, 마땅히 불러낼 친구 하나 갖지 못한 ‘당신’, 소통이란 시간제 콜걸과의 섹스로나 가능할 뿐인 ‘당신’의 모습을 비추어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도란도란 소설을 읽어주고, 함께 그 소설을 이야기하는 정겨운 대화의 ‘환상’은 깨어졌지만, “불쌍한 사람, 내 한걸음에 달려가 소설을 읽어주고픈, 당신.”(57쪽)의 쓸쓸한 모습을 다시 발견한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그러나 그 허구로 인해 지독히 현실적이다. 이 허구 속에서 만난 현실은 한없이 쓸쓸하지만 또한 그 쓸쓸함의 발견이 연민과 공감의 바탕이 되고 있다.
다양한 방식의 소설적 발화를 실험하고 그 형식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작가의 재기발랄함은 소설의 본질이라 할 만한 허구성과 현실성의 문제를 결코 무겁지 않게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낯설고도 재기발랄한 실험보다 이 작가를 더욱 주목하게 되는 까닭은, 파격적이고 낯선 형식실험이 다시 현실성을 환기하는 곳으로 어느새 되돌아와 있는 장면 때문이다. 소설의 형식이야말로 내용과 결코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결국 소설에 대한 고민은 우리들 삶과 현실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는 말을 이렇게 참신하고도 새롭게 풀어내는 젊은 작가의 재능에 한동안 더 기대를 걸어도 좋을 듯하다.


서영인․
2000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평론 「쿨한 일상의 딜레마-김영하론」 등
․현재 경북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추천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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