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18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고인환
페이지 정보

본문
■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
심윤경 「토토로의 집」 (≪문학동네≫ 2005, 봄)
‘발가벗은’ 가족의 자화상
고인환(문학평론가)
심윤경의 「토토로의 집」은 우리 시대 흔들리는 가족의 정체성을 적나라하게 응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낭만적 사랑의 신화를 확대․재생산하는 화려한 자본의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계․생존의 문제는 ‘지금, 여기’의 가족을 짓누르고 있다. 네 식구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몸부림치며 “통증과 신음을 혀 밑에 가두는” 엄마의 숨막히는 절규(絶叫)는, 윤리․도덕으로 포장된 자본의 논리를 천리 밖으로 밀어내기에 충분하다.
작품의 줄거리를 따라가 보자. 화자는 조실부모하고 외삼촌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안간힘을 쓰고 기어 올라간 인생의 최고 정점인 군대(군무원으로 근무)에서, 일시적인 인생의 최저 하락점을 묵묵히 감내하며 장교로 근무하고 있던 남편을 만난다. 서울에 살던 부유한 남편과 지방에 살던 가난한 화자는 열정적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이들이 결혼한 이듬해 사업을 정리하고 통장을 챙겨서 은퇴한 시아버지는 주식 투자에 손을 대 “한평생 땀과 노동으로 빚어낸 알토란” 같은 ‘재산’을 신기루처럼 날려버린다. 이후 화자는 남편이 학업을 마치고 취업할 때까지만 한정적으로 생계를 책임지기로 합의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든다. 네 식구의, 아니 시아버지의 병원비까지 책임져야 하는 실질적인 가장이 된 것이다. 월급을 고스란히 보내도 아이들 학비와 시아버지 병 수발하기도 빠듯했다. 남편은 가까스로 박사학위를 받지만 교수 자리를 약속했던 대학에서는 연락이 없다. 남편은 서울에 있던 집을 팔고 수도권 인근 Y읍으로 이사 오면서 그 차액을 모두 모교의 어떤 통장으로 입금했다. 천하에 둘도 없는 샌님이었던 남편이 그런 방법을 모색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 애틋한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먼 하늘의 유성꼬리처럼 순간적이고 희미한 감상에 불과했다.
「토토로의 집」은 주말마다 시간 외 근무를 해야 했으므로 휴일조차 없었던 화자가 “아프고 지친 몸”을 이끌고 새로 이사한 집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육체적 피로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교차되는, 이 화자의 내면을 치밀하게 주조(鑄造)하고 있는 작가의 시선은 우리 사회의 정체성을 정면에서 문제삼고 있다. 가족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정체성을 심문하는 바로미터라는 사실을 피해 가지 않는 시선이 올곧다.
먼저, 현실적 고통(육체적 피로감, 불행/불운)과 덧없는 희망 사이에서 길항(拮抗)하는 화자의 양가적인 내면 풍경을 엿보기로 하자.
머리가 아파서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다말다 했지만 아이들의 즐거운 음향만 들어도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물론 이 안도감은 최면 같은 것이다. 어쩌면 독한 약과 진한 커피와 기름진 고기가 뱃속에서 만나 빚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토토로의 집」, p.136)
화자에게 가족과 함께 있다는 안도감은 ‘최면’이나 ‘환상’으로 여겨진다. 이 최면과 환상은 숲의 요정 토토로의 이미지와 절묘하게 교차된다.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반영하는 동화와 엄마의 피곤하고 지친 몸이 표상하는 현실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深淵). 우리 시대 가족을 지키려는 안간힘은 이 동화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봉합하려는 의도만큼이나 무모한 일인지 모른다. 피로와 노동에 찌든 몸을 이끌고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돌아온 화자가 아이들과 남편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 눈물겨운 것도 이 때문이다. “엄마가 찾아온 행복한 저녁의 기억을 아이들이 온전히 꿈에 담고 잠들 때까지만이라도” “통증과 신음을 혀 밑에 가두려 애”쓰는 엄마. 그렇다면 오랫동안 헤어져 지낸 젊은 남편의 욕망은 또 어떻게 잠재울 것인가?
내 옷자락을 풀고 가슴을 헤치는 그는 십대 소년처럼 다급하고 초조했다. 남편의 몸은 달군 쇳덩이처럼 단단하고 뜨거웠다. 아이들을 재우는 내내 불덩이처럼 열이 오르고 그렇게 많은 진땀을 흘렸는데, 오로지 질구만은 내 몸이 아닌 듯 건조하고 차가운 것이 미안했다. 남편의 체중이 실리고 그의 성기가 밀려들어오자 엉덩이가 쪼개지는 듯 날카로운 아픔에 허리께를 휘저었다. 아랫도리에 압력이 가해질 때마다 구역질이 나고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나는 입술을 앙다물고 어금니를 깨물며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제발 빨리 끝나주기를. 그러나 오랫동안 헤어져 지낸 젊은 남편의 욕망은 쉽게 충족되지 않았다. 이제 끝나는가 싶었으나 그는 황급히 자세를 바꾸어 다시 뒤쪽에서 밀려들어왔다. 그가 힘을 줄 때마다 등골 마디마디가 자근자근 부서져나가는 듯하고 숨이 턱턱 막혔다. 그가 귀를 핥으며 속삭이는 사랑의 말들도 알아듣지 못하겠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가라앉히기도 급급했다.(pp.143-144)
화자는 “도토리를 선물로 주는 숲의 요정에게 소원을 빌”어 본다. 남편이 교수가 될 수 있기를, 임용 결정을 알리는 기쁜 전화가 올 수 있게 되기를. 하지만 신령한 숲의 요정에게 이렇게 속물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소원을 빌어서는 안 될 일. 화자는 고개를 저으며 얼른 소원을 바꾼다.
아이들에게 손수 만든 간식을 챙겨주고, 저녁이면 곁에서 숙제를 도와주는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 사랑할 땐 날치같이 싱싱하게 허리를 내두르고, 절정에 오르면 비단천을 찢는 듯이 아리따운 교성을 내지르는 정열적인 아내가 되고 싶다. 그러나 그러려면 결국 남편이 교수가 되어야 한다는 똑같은 결론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착한 요정과 천진한 아이들이 나무 위에서 나를 내려보는 듯하여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치밀어 오르는 눈물만은 참으려고 이를 악물어보는데, 발가벗고 돌아누워 부끄러움을 삼키는 이 밤은 언제 끝날까? 토토로라면 혹시 알까?(p.145)
결국, 아내의 두 가지 소원은 야누스의 표정처럼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절망적 현실 앞에서 “치밀어 오르는 눈물만은 참으려고 이를 악물”고 “발가벗고 돌아누워 부끄러움을 삼키”는 화자의 모습이야말로, 우리 시대 ‘발가벗은 가족’의 자화상이 아닐까. 심윤경의 「토토로의 집」은 이 가족의 자화상을 외면하지 않고 정직하게 응시하고 있는 수작(秀作)이다.
고인환․
2001년 <중앙일보> 평론 등단
․저서 결핍, 글쓰기의 기원 등 ․≪문학과 경계≫』편집위원
- 이전글18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이정석 08.02.26
- 다음글18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서영인 08.02.2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