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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이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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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계절작품읽기【소설】
구효서 「소금가마니」(≪창작과 비평≫ 2005, 봄)
모성의 신앙화, 모성의 재신화화
이정석(문학평론가)
흔히 보편 타당한 체계라고 믿어지는 상징의 그물망도 조금만 비켜나 바라보면 의외로 자명한 체계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게 인지된다. 하지만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를 지배하는 상징체계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가져 보지 못한 자들에게 그 인위성의 자각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래서 비평의 소임 중 하나가 삐딱한 응시로 절대적 것인 체, 초역사적인 것인 체, 공명정대한 것인 체하며, 우리 행동과 사고의 지반 역할을 하는 상징의 그물망이 실은 상대적이고 인위적인 역사적 구성물에 불과함을 밝혀내는 일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동안 상징체계의 자의성과 모순을 파헤치는 데 집중한 점에 비추어 본다면, 페미니즘 비평이 적어도 그 같은 임무만큼은 충실히 수행해 왔다고 말해도 좋을 성싶다. 모성의 신화가 사회ㆍ문화ㆍ역사적 관계망 속에서 생산되는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이라는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이 널리 확산된 것도 페미니즘 비평의 활약 덕분이다. 그러나 가부장제를 합리화하는 기제라 해서 모성을 배제의 대상으로만 보던 종전의 페미니즘은 한편으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문열의 선택이 그 반발의 한 예인바, 그가 보여준 시대착오적 모성담론은 결과적으로 페미니즘의 정당성만 확인시켜 준 꼴이 되고 말았다. 이제, 한층 유연해진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모성 체험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며 이를 새로운 상징체계를 구축하는 긍정적 기제로 활용한다. 그런 상황에 즈음해서, 남성작가 구효서가 다시 모성을 신화화하는 작품을 들고 우리 앞에 다가왔다.
자식을 위해 한평생을 헌신하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있다. 가난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 가난한 남편과 혼인하여 갖은 성적 학대와 비겁한 폭력을 감내하며 6남매를 낳은 후, “평생, 자기를 증오하듯 어둠과 습기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식을 사랑으로 지켜온 어머니”. 그 어머니는 소금가마니가 어둠과 습기를 한껏 빨아들인 연후에야 떨어뜨리는 간수로 두부를 만들어 가족을 먹여 살렸다. 어디 가족뿐이던가. 인민의 군대가 내려왔을 때 그들을 먹여 살린 것도 어머니의 두부였고, 청년단과 부상당한 정규군 역시도 어머니의 두부로 연명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역경의 세월과 인고의 삶을 내내 체념어린 표정과 평온한 얼굴로 감내하다 숨을 거둔 ‘나’의 어머니. 그런 어머니가 “집어삼킬 듯한 광기와 무모한 기대”로 입에 허연 거품을 물던 적이 있었다. 조상 제사에 필요한 대추를 얻는다며 아버지가 한사코 베기를 마다하던 대추나무에 기어 올라가 새알을 꺼내려다 둘째 누이가 대추나무에서 떨어져 죽어갈 때였다. 읍내에 있는 병원까지는 삼십 리 길, 멀기도 멀지만 장마 끝에 물이 불어난 용내천의 사나운 물길은 사람들을 수수방관하게 만든다. 하지만 “미친 어머니”는 낡은 톱 한 자루만 가지로 홀로 커다란 용수버드나무의 밑동을 베고 넘어가 끝내 누이를 살려낸다. 고난의 삶을 묵묵히 인내하다가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야차(夜叉)가 되는 것조차 서슴지 않는 어머니.
간추린 내용을 보면, 「소금가마니」가 그다지 참신하지 못한 소설이라고 단정해도 무방하다. 이제 다소 진부해 보이기조차 한 모성예찬. 게다가 모성의 부각을 위해 격동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설정하는 방식도 그다지 새로운 것이 없다. 특히 어머니의 목소리가 거세되어 있는 점은 페미니즘 비평의 심기를 거스르기 십상인 데다가, 소설 미학적 견지에서 보아도 ‘나’를 서술자로 내세운 점은 미학적 실패라 판정받을 소지가 크다.(경험적 자아가 한없이 퇴각한 대신 서술적 자아가 전면에 부상한 ‘나’는, 말이 1인칭 서술자지 전지적 서술의 권한을 맘껏 휘두르고 있다.) 그러나 「소금가마니」가 기존의 모성상을 재진술하는 데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은 어머니가 모성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사랑의 주체이자 지식 추구의 주체이기도 함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어머니는 일본유학까지 한 면내 최고 부농의 자제 박성현이 연모하는 여인이다. 이때 그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에 대한 서사적 정보가 직접적으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풍문의 아버지 박성현이 실제 ‘나’의 아버지일 수도 있음을 은근히 암시함으로써, 희생적 모성의 주체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정념의 주체성을 자연스럽게 긍정한다. 게다가 헌신적 주체로만 여겨지던 무학(無學)의 어머니가, 실은 지식에의 열망을 지닌 개인적 주체이기도 함을 내비쳐 예기치 않은 놀라움까지 자아낸다.
고인이 된 외종형이 어머니가 읽던 책이라며 남겨둔 키에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 일어판을 ‘나’가 전해 받는 것으로 소설이 시작되고 있음에 주목해 보자. “다닐 학교도 없었고, 그래서 글을 배운 적도 없지만”, 어머니는 “한글을 읽고 쓰며 일본어까지 잘 익”혀 놓고 있었다. 물론 그 배후에서 정념이 지식에의 열망을 촉발한 매개 역할을 했을 터이지만 말이다.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도 그는 그다지 놀라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한동안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런 뒤 나에게 물었다. 어머니의 소망이 무엇이었는지 아느냐고. 어머니에게도 소망이 있었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아버지와 혼인하던 순간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얼른 대답하지 못하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나의 소망이며, 너의 소망이 그것이라고. 형님의 소망이 무엇이냐고 내가 물었다. 외종형은 멋쩍게 웃은 뒤 말했다. 나나 너나 원 없이 읽고 썼으니 다 이룬 셈이다.(225쪽)
아버지에게 끌려 나가 한해를 논과 밭에서 빌려온 소처럼 일해야 했던 외종형이 열네 살 되던 해. 어머니는 “무엇이든 읽고 써야 한다”는 다짐과 함께 자신이 읽던 책이 담긴 보따리를 안겨, 외종형을 외지로 떠나보낸다. 그리고 후에 외종형은, 서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고 지방대학 교수가 되어 어머니의 소망에 화답을 하게 된다. 이 줄거리에다가 위의 인용문을 겹쳐 읽으면, 어머니의 헌신은 단순히 대리만족을 구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포기해야 했지만 내면적으로는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앎에의 열망을 숨기면서 드러내는 역설적 행위가 되어버린다. 이는 외종형과 관련된 이야기가 서술되기 전에 인용된 공포와 전율의 경구를 통해서 재삼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자기의 소원을 포기한다는 것은 위대한 행위이다. 그러나 자기의 소원을 버린 다음에도 그 소원을 간직한다는 것은 더 위대한 일이다. 한시적인 것을 버리고 영원한 것을 포착한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그러나 한시적인 것을 버리고 난 후에도 계속 이것을 간직한다는 것은 더 위대한 일이다.”(223쪽) 이처럼, 「소금가마니」는 하나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전에 먼저 그와 부합할 만한 공포와 전율 속 한 구절을 빌려오곤 한다. 둘째 누이의 사고 때,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포기한 목숨을 살려낸 어머니의 ‘미친 행위’를 이야기하기 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먼저 들어앉는다. “어떤 사람은 가능한 것을 기대함으로써 위대했다. 또 다른 사람은 영원한 것을 기대함으로써 위대했다. 그러나 가장 위대했던 사람은 불가능한 것을 기대했던 사람이다.”(217쪽)
공포와 전율은 자식을 죽이는 행위까지도 신을 위한 신성한 번제(燔祭)의 행위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아브라함의 불안과 고뇌를 통해 신앙의 역설과 부조리를 말한다. 이 역설과 부조리는 이성적으로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차원에 속한 것이지만, 신앙이란 바로 인간적 사고가 끝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지 않은가.(공포와 전율, 삼성출판사, 1982, 90쪽) 그렇다면 “무력(無力)이라고 하는 힘에 의해”, “미친 희망과, 자기를 증오하는 방식의 사랑을 통해 더욱 위대했”(211쪽)던 헌신적 모성도 인간적 사고를 넘어선 곳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신앙에 비견되는 경지가 아닐는지. 「소금가마니」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모성을 신앙의 단계로까지 격상시킨다는 것이다. 모성은 현세의 논리를 뛰어넘는 전적인 희생, 전적인 맹목성을 통해 숭고한 신앙의 경지로 도약한다. 이때, 아브라함의 번제행위가 현실의 도덕률로 재단될 수 없듯, 종교적으로 재신화화된 모성은 어떤 현실적 논리로도 반박할 수 없는 절대적 역설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종교적 아우라를 덧씌워 균열된 모성의 상징체계를 재봉합하려는 시도가 그다지 참신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금가마니」가 모성을 신앙에 비견되는 숭고한 행위로 재신화화하더라도, 그것이 기존의 관습적 통념을 재생산하는데 그칠 뿐, 새로운 모성의 가치체계를 생성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비평이 구효서의 모성의 재신화화전략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이정석․
2004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 등단
․숭실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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