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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정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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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82회 작성일 08-02-26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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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


박민규 「코리언 스텐더즈」 (≪문학수첩≫ 2005, 봄)
KS 세계로의 귀환 명령


정재림(문학평론가)


1.
박민규의 「코리언 스텐더즈」은 일종의 후일담 소설이다. 서술자인 ‘나’와 ‘나’의 아내 ‘수희’, ‘기하 형’은 소위 80년대 운동권 출신이다. 그런데 후일담 소설이면 후일담 소설이지, ‘일종의’라는 수식언을 붙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 소설이 후일담 소설의 일정 패턴-가령, 순수한 과거와 혐오스런 현실의 대조,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반대급부로 발생하는 현실에 대한 염증,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의 복합적 감정-을 따르는 듯하면서도, 거기에서 일탈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2.
‘나’와 ‘수희’, 그리고 ‘기하 형’은 한때 애정의 삼각형의 각 꼭지점을 차지했던 적이 있었다. 86년 대학 2학년이던 ‘나’는 ‘운동권 그룹의 연합모임’에 갔다가 ‘수희’에게 반하게 된다. ‘수희’는 ‘기하 형’의 애인이었는데, ‘기하 형’은 수배자 명단에도 몇 번씩 이름이 오른 투사, 이른바 “스타 플레이어”였다. 그런데 그가 구속되고 오랜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수희’는 ‘나’의 애인이 된다. ‘나’와 ‘수희’의 관계만 변한 것이 아니라, 그 사이 모든 것이 변했다. “세상은 문민으로 되었고, 또 민주란 이름으로 변해갔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레닌의 동상이 철거되고, 그 사이 깡말랐던 그 여학생은 나의 애인이 되”는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변화에 뒤처지지 않을 만큼, ‘나’도 부지런히 세상을 좇아왔다. 초등학교 2학년인 딸아이를 두었고, 7년간 맞벌이를 해서 신도시에 34평의 아파트를 마련했다. 표준형 식탁에 앉아 까르푸에서 사온 맥주를 마시고, 아이는 세 군데의 학원을 다니며, 여름휴가를 제주도의 콘도에서 보낼 예정인 ‘나’는 “한국의 표준”이라고 일컬을 만하다. ‘나’는 “세상이 변하기보다는 직급이 변하길 바라는 사람”이 되었으며, “이미 삶은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 마흔의 나이가 되었다. ‘나’만 변한 게 아니다. ‘기하 형’과 함께 복역했던 ‘鄭 선배’는 학원가의 스타강사, 룸사롱의 귀빈이 되어,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한때의 동지를 비판한다. ‘金’과 ‘郭’은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탁류에 휩쓸리지 않고 순수성을 지키는 인물이 ‘기하 형’이다. 그는 정치권의 권유를 뿌리치고 노동현장에, 다시 농촌운동에 투신한다. 그리고 사람을 모아서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 공동체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기하 형’은 언론에서도 지인들의 기억에서도 점점 잊혀져 간다. 그러던 어느 날 ‘기하 형’이 “도와달라”는 전화를 걸어오며 문제가 생긴다. 결국 ‘나’는 이런저런 죄책감과 부담감 때문에 공동체가 있는 “실상리”로 향하게 된다. ‘나’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공동체 운동은 완전 실패였다. “총무란 인간이 남은 후원금과 그간 공동체가 벌어들인 수익금 전액을 들고 튀”었고, 그래서 “빚을 얻어 농사를 지었는데 흉년”이었으며, 정부의 말을 믿고 특수작물을 재배했지만 실패하는 바람에 빚이 세 배가 되었다. 양계를 시작했지만 조류독감이 돌아 닭들이 집단 폐사했다. 청정미와 흑미로 간신히 버텨오는 형국인데, 얼마 전 쌀 개방 조약이 발표되자, 남아있던 연수생마저 공동체를 이탈한 실정이다.
그렇지만 ‘기하 형’이 ‘나’를 부른 이유는 정작 다른 데 있었다. “외계인의 습격”이 심각하다는 것! ‘기하 형’의 설명에 의하면, 비행물체가 날아와서 섬광을 발사하고 그 때문에 농작물이나 가축이 죽는다는 것이다. ‘기하 형’이 말을 마친 잠시 후, 정말 비행물체가 나타나고 ‘나’는 창공을 선회하는 물체를 목격하게 된다. 외계인이 마지막으로 습격한 곳은 축사와 옥수수밭이었는데, 외계인은 옥수수밭에 “크롭 서클”(도형이나 기호로 그려진 외계인의 메시지)을 남긴다. 옥수수밭에는 “놀랍도록 정확한 비례의, 거대한 KS”가 새겨져 있었다.

3.
‘나’를 “실상리”로 향하게 하여 “17년 전의 나”로 돌아가게 하는 것, 그래서 속물적인 현실의 삶을 반성케 하는 것, 여기까지만 보면 <코리언 스텐더즈>는 후일담의 수순을 밟는 것 같다. 그러나 현실/환상의 경계가 흐려지는 “외계인의 습격” 즈음에 오면 이 소설이 후일담 소설이 아니잖는가라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물론 17년 전의 과거와 지금 현재가 일차적 대조를 이루는 게 사실이다. 17년의 시간을 통과하며, 세상이 변하기를 바라던 사람들은 직급이 바라기를 소망하는 사람으로, 44kg의 여학생은 72kg의 살찐 주부로 변해버렸다. 문제적인 것은 변화의 흐름이 너무도 거대해서인지, 아무도 변화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오히려 자신의 현재적 삶을 “한국의 표준”으로 생각하는 듯하며, 고만고만한 서로의 모습에서 위로를 삼고 있는 듯하다. 과거/현재라는 시간의 대조에 주목해 보면, 이 소설은 80년대 운동권의 자기 반성문으로 읽힌다.
이번에는 농촌/도시라는 공간의 대조로 눈을 돌려보자. ‘나’는 ‘기하 형’의 부탁으로 실상리를 찾아가기 전까지는 한번도 농촌을 찾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6시 내 고향’에서 몇 번 농촌을 보았거나, 국도를 달리면서 그 풍경을 잠시 지나쳤”을 뿐이다. 소설의 서두에서, ‘나’는 “누구나 아는 단어이지만, 누구도 모르는 단어”가 있다며 운을 뗀다. “농촌”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6시 내 고향 같은 거”를 떠올리는 데 불과하고, “운동권”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PD수첩 같은 거”를 연상하는 데 불과하다. ‘기하 형’의 공동체가 있는 마을의 이름은 “실상리(失像里)”이다. 실체로서의 ‘實像’은 없고, ‘失像’뿐이라는 뜻일 것이다. 쭉정이로 변한 벼이삭이나 곡식 알갱이가 의미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농촌” “운동권”이란 개념이 “~같은 것”이라는 은유의 방식으로 설명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개념의 실제에 육박해 들어가는 데에 실패한다. “6시 내 고향”이란 아주 구체적인 보조관념에 기대어 원관념이 성공적으로 설명되는 듯 보이지만, TV 속의 “농촌”과 현실의 “농촌”의 격차를 떠올린다면, 이런 식의 비유란 애초부터 허구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현대 중산층의 삶이라고 하면, 자연스레 신도시의 아파트, 세 식구로 이뤄진 단출한 가정, 대형마트에서의 쇼핑, 콘도에서의 여름휴가를 떠올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식의 연상으로 조합된 생활이 “한국의 표준”처럼 제시되곤 하지만, 이미지의 합성으로 만들어진 개념과 실제의 생활 사이의 거리란 전혀 좁혀지지 않을 게 뻔하다.

4.
實像 없는 세계, 失像의 세계, 혹은 KS(한국의 표준)의 세계에서 자리를 부여받지 못한 인물이 있는데, 그가 ‘기하 형’이다. ‘기하 형’은 실상리를 혼돈의 상태로 몰아넣는 비행물체를 “외계인”이라고 말하지만, 진짜 “외계인”은 ‘기하 형’이다. 失像의 세계에 살며 자신의 세계가 實像이라 믿으며, 자신이 KS의 삶을 살아간다고 믿는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외계인! 때문에 옥수수밭에 새겨진 “놀랍도록 정확한 비례의, 거대한 KS”는 외계인을 향한 내국인의 마지막 경고로 해석된다. 즉, ‘기하 형’에게 實像을 찾는 헛된 노력을 버리고 失像의 세계로 귀환하라는, 현실세계의 명령인 것이다. 신도시/농촌(실상리)의 거리는 현실/이상, 현실/환상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는 피씨방이 구비되어 있는 ‘읍내’가 존재한다. 신도시/농촌의 갈등은 어떻게 종결될 것인가. ‘나’는 곧 신도시로 귀환할 예정이다. 외로이 지구를 지키고 있는 ‘기하 형’의 운명 역시 암울하다. 그가 이미 너무 많은 실패를 겪어 왔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싸움에서도 이길 확률이 지극히 적기 때문에. 게다가 “이놈들”은 “우리를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정재림․
1973년 출생
․200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극동대 강사

추천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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