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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시)/백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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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713회 작성일 08-02-26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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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계절 작품읽기【시】


박인숙 「미늘」(≪문학과경계≫ 2005, 여름)

‘감정’적으로 생각해 본시인의 의무

백인덕(시인)


당신의 명치끝에 방이 하나 있었습니다
정작 당신은 그 방을 모르고
슬픔을 세 놓으려고 한 적 없지만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 방에 들어가
평화롭게 저물곤 했습니다.
당신의 숨소리가 흰 그리움을 타고 내려와
벽을 더듬거릴 때면
행여 내가 당신 몸속에서
너무 오래 살고 있진 않나
와락 눈물이 날 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출구를 봉합한 내게
시련이 머무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이 영원히 찾아내지 못할 그 방에서
오늘 새벽 세찬 빗소리를 들었습니다
귀를 허물며 들려오는 빗소리
그것은 당신의 울음소리였습니다
그 소리가 너무도 길고 무거웠으므로
나는 가만히 일어나
온몸으로 번진 자줏빛 멍을 오래도록 핥았습니다
육체는 운명이 아니라지만
몰락이 이리도 깊으니
나는 죽은 칼을 들고 천천히 일어섭니다
기어이 당신의 명치끝을
도려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박인숙 「미늘」

이번에 선택한 시는 여러모로 내게 반성의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우선 창피한 일이지만, 시인이라는 작자가 국어사전 한 권이 없었다. 작년에 이사하면서 제대로 된 사전을 구입하려고 작고 낡은 것들을 과감하게 버려버렸는데, 뭘 하고 살았는지 아직까지도 구입하지 못했다. 제목이 ‘미늘’이다. 아무리 살펴봐도 ‘마늘’의 오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낚시 바늘의 튀어나온 고리’를 지칭한다.(어학박사 친구의 도움으로 겨우 해결했음.) 또 하나는 시에 대한, 아니 솔직하게 말해 시의 기능에 대한 오래된 생각 하나를 상기시켜 주었다. 한 뭉치의 복사물 중에서 아침에 깨니 바로 이번 작품에 붉게 표시되어 있었는데, 모니터에 올려놓고 보니 내 자신의 선택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읽었던 것이 분명하다.
김준오는 ‘서정’의 문제를 논하는 한 지면에서 ‘감정의 기능은(그래서 감정의 의의는) 여러 가지다. 정서는 의식의 구성요소다. 시인의 의식은 근본적으로 정서의식이다. 감정을 이성으로부터 해방시켜 극대화시킨 낭만주의는 그러나 대상에 대한 감정의 투사가 그 인식방법이다. 다시 말하면 감정은 세계 파악의 색인이다. 감정은 이성과 함께 사물은 어떻게 지각하는가 하는 인식론과 연결되는 것이다. 감정은 이성과 함께 이해에 참여하며 그 자체 인식의 한 과정이다. 낭만주의에서 대상에 대한 투사는 세계인식의 방법이자 자아발견의 방법이다. 감정은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탐구하거나 발견하는 수단이다. 이런 점에서 서정시란, 그리고 다양한 형식의 서정시는 자아탐구의 다양한 형식이다.’고 밝힌 바 있다.
박인숙의 이번 작품은 단순한 감정의 토로나 생경한 감정의 모자이크가 아니라는 점에서 우선 주목된다. 그것은 비록 길지 않은 시행이지만 나름대로 ‘이야기(서사)’가 들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시적 화자는 적당한 거리와 나름의 어조를 확보하고 있다. 결국 시에 드러나게 되는 시인의 면모는 서정적 자아일 수밖에 없고, 의심할 여지없이 이 자아는 거리와 어조, 보태자면 태도 등을 통해서 자신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아쉬웠던 점은, ‘평화롭게 저물곤’ 했던 시의 전반부가, 중반으로 이어지면서 ‘흰 그리움’, ‘와락 눈물이 날 때’, ‘새벽 세찬 빗소리’, ‘자줏빛 멍’, ‘죽은 칼’ 등 근사한(?) 표현들에 의해 오히려 조금씩 진부해졌다는 점이다. 게다가 ‘육체는 운명이 아니라지만’ 같은 명제도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아마도 필자가 과문한 탓이리라.
“서정적 자아의 통제와 간섭은 지성의 몫이다.”라고 같은 지면에서 김준오는 강조하고 있다. 풀어서 말하자면 서정적 자아는 지성의 통제와 간섭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일까? 시란 결국 감정의 폭로가 아니라 환기이기 때문이다. 고통스럽지만 시인의 의무는 쓰는 매 순간에도 자신이 시 속에 액화되어 틈입하는 것을 경계해야만 한다. 무릇 시란 자연인, 또 잠재적 시인이 쓰는 것이 아니라 읽는 이들에 의해 끊임없이 다시 쓰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백인덕․
1964년 서울 출생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한밤의 못질󰡕 󰡔오래된 藥󰡕
․한양대, 한양여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추천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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