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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시)/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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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계절 작품읽기【시】
박해람 「릴레이」(≪현대시학≫ 2005, 3월)
보이지 않는, 막혀 있는, 사라지는, 어디에도 없는, 삶, 그리고 죽음
강경희(문학평론가)
머리가 짤린 닭은 더 이상 길이 없다.
순환에서 탈선으로 바뀐 피가 솟구치고
오래 전 날개가 잃어버린 허공에 길도
잠시 이러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 눈과 몸으로
풀섶이며 담장 아래를 한바탕 쓸고 숨을 곳을 찾는다
무언가 막혔다는 것, 그 안에서는
소란스럽다는 것이겠지
풀 섶이 자꾸 퍼덕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몸으로
푸득푸득 가끔 날개를 퍼득인다
캄캄한 궁금증 하나가 사라지고 있는 중이고,
사방의 길이 사라지고
이제 제 길을 찾은 듯 퍼덕이던 날개가 조용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영원히 숨고 있는 것들이
밥상이 둘러앉아
다 숨고 남은 빈 몸의 날갯죽지며 다리를 뜯고 있다
그 중 몇은
지금 어디에도 없다
아무 곳에서도 찾지 못할
달그락, 후르륵거리는 소리들이 달라붙은 그릇에
죽음의 냄새가 구수하다
구수함이 식어 다시 비린내가 되듯이
모든 릴레이에는
구수함과 비린내가 동시에 난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은 끊임없이
삶에 협조하는 것들이다
―박해람 「릴레이」
“머리가 짤린 닭”의 운명은? 아마도 시장 가판 위에서 머리가 잘린 또 다른 닭들과 함께 가지런히 누워있겠지. 그리고 누군가에게 팔려 펄펄 끓는 솥으로 들어가겠지, 아니면 이리저리 토막이나 뜨거운 기름에 튀겨지거나, 잘게 으깨어져 볶아지겠지. 그리하여 누군가의 입으로 위장으로 창자로 서서히 녹아들겠지. 어쨌거나 “머리가 짤린 닭”의 운명은 산 자의 제단에 바쳐진 재물로써 한 생애를 마감하겠지.
박해람의 「릴레이」의 기저에는 잔혹한 육식성의 세계가 드리워져 있다. 폭력, 살의, 살육에 이르는 육식성의 세계는 철저히 힘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는 잔인한 세계다. 철저히 타자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있는 나약한 생명은 오직 죽음으로써만 자신의 존재를 입증할 뿐이다. 육식성의 세계에 있어 존재의 죽음은 그 세계가 지니고 있는 잔혹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징표라 할 수 있다.
이 시의 첫 구절인 “머리가 짤린 닭”이 암시하듯이 시인은 생명성이 제거된 끔찍한 ‘몸’의 형상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육체의 절단은 육체를 물질화하고 개별화함으로써 더 이상 온전한 유기체로써 대상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효과를 지닌다. 몸과 머리가 분리되어버린 닭은 결국 하나의 물질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그런데 시인은 이 물질화되어 버린 죽은 닭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과한다. 그것은 머리가 잘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닭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촉발된 상상력이다. 즉 머리가 없는 닭은 “피가 솟구치고” “오래 전 날개”를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 눈과 몸으로” “풀섶이며 담장 아래를 한바탕 쓸고 숨을 곳을 찾는다”. 몸통만으로 이리 저리 숨을 곳을 찾는 닭의 모습은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하다. 이 그로테스크한 닭의 형상은 결국 온전한 존재로 살아가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오늘의 인간 세상을 비유하는 것이다.
죽고 죽이는 폭력만이 난무하는 세계, 들끓는 욕망의 아비규환 속에서 강요된 삶만이 존재하는 세계, 그 속에서 거세된 육체와 정신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비정상의 세계야말로 박해람이 말하고자 하는 오늘의 참담한 현실이다.
세계에 대한 사유와 판단을 할 수 없는 불구화된 존재에게 “더 이상 길”이 있을 수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은 “무언가 막”혀 있는 것이며, 막혀있다는 것은 나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암흑은 단절을, 단절은 정지를, 정지는 감금을 의미한다. 그러나 감금은 역설적이게도 나아가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무언가 막혔다는 것, 그 안에서는/소란스럽다는 것이겠지”라는 말은 곧 구속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강렬한 주체의 의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캄캄한 현실을 넘어서고자 하는 주체의 의지가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존재의 길 찾기는 더욱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결국 보이지 않는 것은 올바로 나갈 수 없는 것이며, 제대로 나갈 수 없기에 나가고자 하는 열망은 끝내 “캄캄한 궁금증 하나가 사라지”게 되고 마는 헛된 꿈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는 부정의 어법, 가령 “없다” “탈선” “보이지 않는” “막혔다는 것” “캄캄한” “사라지고” “찾지 못할” “죽어가는”과 같은 표현들은 이 세계를 인식하는 시인의 비관적인 삶의 태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 주는 말들이라 할 수 있다. 즉 박해람에게 있어 오늘의 현실은 ‘보이지 않고, 막혀 있고, 사라지고, 어디에도 없는’ 캄캄한 어둠의 세계이며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불가항력의 세계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자신의 삶의 길을 찾을 수 있는 눈과 몸이 망가져 버린 절망적 현실에 대해 그가 증오와 연민의 감정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즉 누군가의 밥상에 올라 “달그락, 후르륵거리는 소리들이 달라붙은” 요란하고 살벌한 생의 현장 속에서 그는 폭력적인 생의 한 단면을 응시하는 동시에, 이 처절한 삶의 굉음 속에서도 생의 “구수”함을 맛보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구수함이 식어 다시 비린내가 되듯이” 끊임없이 순환되는 ‘릴레이’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이 지독한 순환의 궤도 밖으로 일탈하고자 하는 것은 곧 “머리가 짤린” 채 살아가는 ‘닭’의 운명처럼 캄캄한 어둠 속에서 죽음에 이르는 길로 돌진해 가는 길인 것이다.
박해람의 「릴레이」는 허공의 길에 “보이지 않는” “찾지 못할” 허무한 생의 쳇바퀴를 끊임없이 돌려야만 하는 존재의 고통스런 숙명을 보여준다. 오늘의 현실은 꿈과 희망을 모두 저당 잡힌 채 보이지 않는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나가야하는 절망의 릴레이일지도 모른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은 끊임없이/삶에 협조하는 것들이다”라고. 삶이 죽음을 위한 공모라면 죽음을 향해 돌진해 가는 삶이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절망의 릴레이를 머리 잘린 몸으로만 계속해야만 하는 것인가. 이러한 물음은 과연 이 지독한 현실로부터 탈주할 수 있는 길인가.
강경희․
1967년 서울 출생
․200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숭실대, 호서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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