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18호 서평/권경아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68회 작성일 08-02-26 22:45

본문

|서평|

:윤석산(尹錫山) 시집 󰡔견딤에 대하여󰡕
윤석산



어둠 속 푸른 인광(燐光)의 빛


권경아|문학평론가



1.
윤석산(尹錫山)의 󰡔견딤에 대하여󰡕(시선사, 2004)는 시선집으로 여기에는 동학의 교조 수운 최제우 선생의 일생을 노래한 네 번째 시집 󰡔용담 가는 길󰡕(1997)을 제외한 첫 시집 󰡔바다 속의 램프󰡕(1980)에서부터 󰡔온달의 꿈󰡕(1986), 󰡔처용의 노래󰡕(1992), 󰡔적(寂)󰡕(2000) 등 네 권의 시집에서 발췌된 그의 대표시가 실려 있다. 이 시집은 윤석산(尹錫山)의 시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그의 시세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윤석산(尹錫山)은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천착해 가고 있다. 우리에게 펼쳐진 현실은 “안개의 무리”에 의해 푸름을 점령당한 형국과 같이 앞이 보이지 않는 암담함에 휩싸여 있으며 인간은 이러한 세계를 “묵시의 나라 백성”(「黙示의 나라 백성이 되어」)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윤석산(尹錫山)이 노래하는 현실 속의 인간은 어두운 현실에 함몰되어 가는 존재가 아니라 고통과 좌절을 수반하는 현실을 살아가며, 이러한 고난의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존재이다. 결국 시인이 인식하는 삶이란 “세상의 얽히고 설킴”을 외면하지 않고 “눈 다만 똑바로 뜨고”(「趙光祖를 생각함」)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진정한 삶의 의미는 현실 속에서 겪게 되는 얽히고 설킴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윤석산(尹錫山)의 이러한 시작업이 서정시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시에 드러나는 서정적 경향은 첫 시집에서부터 일관되게 나타난 장르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첫 시집에서부터 서정적 경향이 나타난다는 것이 첫 시집 전체가 서정시로 묶인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다 속의 램프󰡕는 서정적 경향의 시와 함께 모더니즘의 경향을 띤 시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복합적인 의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후 두 번째 시집 󰡔온달의 꿈󰡕에서부터는 모더니즘의 경향은 사라지고 전형적인 서정시의 모습이 특징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시인이 다양한 모색과 갈등 끝에 서정의 장르를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상호의 지적처럼 자기 시의식이 깊어짐에 따라 시작 초기에 갖고 있던 모더니즘의 경향을 일탈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기 시작한 결과라 할 수 있다(「비극적 존재 인식과 적멸에의 꿈」 ≪문학과창작≫ 2001년 12월호).
19세기까지의 서정시 이론은 서정시란 시인 자신의 체험과 감정을 표현하는 문학이라는 주관성 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서정시는 ‘자기 발언’, 즉 시인 개인의 발화이며 주관적 발화라는 관념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서정시가 체험 내지는 정조(情調)에 기반한다는 소위 ‘체험 서정시 및 정조 서정시’ 이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소위 전통적, 고전적 서정 시론인 서정시의 주관성 이론을 거부하며 발화의 모든 제약들로부터, 즉 체험이나 감정과 같은 특별한 발화의 대상과 발화의 상황으로부터의 자유를 서정시의 특징으로 규정함으로써 주관성 이론까지 포괄하는 넒은 의미의 개념 규정을 하고 있는 사람이 디이터 람핑이다. 람핑은 이러한 의미에서 서정시를 ‘개별의 발화’로 규정하고 있는데 윤석산(尹錫山)이 보여주고 있는 서정시가 바로 람핑이 의미하는 개별의 발화로서의 서정시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람핑은 개별 발화로서의 서정시 개념을 ‘발화 상황’과 ‘발화 기능’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함으로써 서정시 개념 규정에 고착되어 있는 주관성을 지닌 문학, 비(非)미메시스적인 문학이라는 정의를 거부하며 서정시는 주관적 문학이 아닌 미메시스적인 문학일 수 있다는 견해를 주장하고 있다. 람핑은 이 논의에서 서정적 텍스도 허구적이거나 허구를 기반으로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즉 시인이 ‘가면을 쓰고’ 혹은 ‘어떤 역할을 지닌 채’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시인의 자리에 타자(他者)를 등장시킬 경우 그것은 허구적 발화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람핑은 서정적 시는 고안된 인물이거나 역사적 인물이거나 불문하고 작자와 동일하지 않는 등장인물이 발화할 때 허구적인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윤석산(尹錫山)이 현대적 삶을 노래하는 과정에서 설화상의 전승적 인물들의 목소리를 내는 이유가 밝혀진다. 시인의 자리에 타자를 등장시키는 경우 그것은 허구적 발화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허구적 발화는 체험 내지 정조의 서정시, 주관적인 문학이라는 좁은 개념 규정을 벗어날 근거가 되는 것이다. 윤석산(尹錫山)의 시들 중에서 온달, 서동, 처용과 같은 설화상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시들이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개인적인 체험을 기반으로 하는 시인의 주관적인 정조를 노래하기 위한 방법으로 설화상의 인물을 등장시키는 것은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없다. 이는 그의 시형식이 주관적 정조만을 노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외의 시편들이 현실과 삶에 대한 주관적 정조가 두드러진다면 설화상의 인물들을 등장시킨 시편들은 주관적인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세계적 차원에서 이상적인 삶은 무엇인가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시인은 설화 인물들이 과거뿐 아니라 현재의 시․공간 속에서도 목소리를 내고 있는 ‘허구적 발화 상황’을 통해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도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진정한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탐색함으로써, 시인 자신의 체험과 감정을 표현하는 문학이라는 서정시의 주관성 이론을 넘어 체험이나 감정과 같은 발화의 대상과 발화의 상황으로부터의 자유를 특징으로 하는 ‘개별의 발화’로서의 서정시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시인이 인식하는 현실은 “안개의 무리”에 의해 강물의 푸름을 점령당한 암담함과 “뜻은 버리고 그래서 音만 남은 막막함”(「音借」)이 가득한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은 ‘소외’라는 구체적으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차단된 시간 잠시 고인다.//(그는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의 어깨가 나와 나란하다. 어깨가 나란한 사람. 이내 신호가 바뀌면 나란히 걸어야 할 사람. 그는 담배연기를 자꾸만 날려 보낸다. 푸-푸-푸-.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그 ‘기다림’. 공유될 수 없는 시간 속, 잠시 그렇게 있을 뿐이다.)
―「횡단보도 앞에서」 부분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한 사람과 한 사람이 있다. 이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서있지만 그들은 결코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공유될 수 없는 시간 속”에 잠시 그렇게 서있는 것에 불과하다. 잠시의 기다림도 각자의 시간 속에 서있는 것일 뿐, 공유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를 소외하고 또 소외당하는 인간의 상황은 담배연기를 “푸-푸-푸-” 뱉어내는 행위에 의해서도 드러난다. 끊임없이 담배연기를 뿜어내는 행위는 상대는 밀어내는 행위, 버리는 행위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드디어 신호가 바뀌면 그가 나를 버리고 내가 그를 버리는 상황이 이어진다. 그리고 서로에게 “버려진 한 사람”은 군중 속으로 묻혀버림으로써 단절과 소외는 깊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소외의 양상은 「늑대」에서 더욱 처절하게 드러난다. 장안에 나타난 늑대는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또 다른 이름이다. 술에 취해 “가슴팍을 쥐어뜯으며 울부짖”는 늑대가 나타났지만 “놀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라는 것은 한 사람의 울부짖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의미도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울부짖는 한 사람이 나타난다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의 일상은 계속된다는 소외의 현실, 소통불능의 현실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피폐하고 어두운 현실은 비단 외적 상황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 개인의 내적 욕망이 현실에서의 갈등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욕망」은 현실의 갈등 요인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를 시인의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접근해가고 있다. 밤새 자주 화장실을 찾아야 하는 자신의 병을 “늘 균형을 깨뜨리고 체내를 벗어나려는 조급한 욕망” 때문이라고 표현하는 시적 인식은 현실을 지배하는 원리가 인간의 외적 환경뿐 아니라 개인의 내적 요인에 의해서도 비롯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로 인해 인간들은 변해가고 있다. 시인은 현실 속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을 온달과 처용이라는 설화상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그려내고 있다.

박수소리, 나를 더없이 들뜨게 만드는 박수소리,
병졸도 장수도 임금도 대신도
모두가 손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고.
나는 그만 말머리에 우뚝 앉은 威武,
바로 그것이 된다.

요즈막 나의 모양은 바로 이렇게 됐다.
가장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지게 위에 지고 다니던 몇 다발의 나뭇짐,
이제는 더 이상 나의 진실이 되질 못한다.

아침이면 배달되는 신선한 우유와 함께
식탁 위에 오르는 신문,
그 안에서 득의만만히 웃고 있는 나의 사진이
진정한 나의 진실임을 나는 매일 아침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온달전 -또 하나의 변신」 부분

순수하게만 살아가던 온달은 현실 세계 속에서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용마로 평원을 달리며 온갖 짐승들을 사냥하는 그의 실력에 병졸과 장수뿐 아니라 임금과 대신까지도 박수를 치며 환호하고 있다. 온달은 “말머리에 우뚝 앉은 威武”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온달은 나무를 지던 예전의 시절로 돌아가지 못한다. 아침이면 배달되는 우유와 신문, 현대인의 생활 속에서 “득의만만히 웃고 있는” 모습이 이제 온달의 진실이 된 것이다. 이 시는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에 관계없이 현실적 삶은 인간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설화상의 온달이라는 인물이 현대인의 초상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바보 온달이 온달 장군으로 추앙받기 시작하면서 온달은 그 박수소리에 “더없이 들뜨게” 되고 이러한 온달의 모습은 출세를 지향하는 현대인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위의 시에서는 온달을 통해 현실 속에서 삶의 모습뿐 아니라 진실까지도 변화하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면, 「처용가 -낮달」은 처용을 통해 어두운 현실 속에서 변화된 자신의 모습에 괴로워하는 인간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눈부신 햇살 속
태연하고,
달 그늘에 숨어 몰래 웃고
사각의 보도 불럭, 당당히 옷깃 세워 걸어가고.
이것이 사는 것, 이것이 사는 길
스스로 자위하고.
보이잖는 손들과 힘주어 악수하고.

사실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부끄러움의 옷 겹겹이 껴입고
無邊天空의 하늘
오늘도 낮달 하나
속살 훤히 보이며 떠있다.
―「처용가 -낮달」 부분

이 시에서 처용은 “끊임없이 나를 배반하고, 시기하고, 게으름 피우”는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죄로 인식하며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이것이 사는 것, 이것이 사는 길”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보이지 않는 손들과 악수하며 현실에 대항하지 못하고 타협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현실과의 타협보다는 처용이 느끼는 부끄러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죄의 살”을 숨기고 “허울 좋은 꺼풀”로 겹겹이 껴입은 처용 위에는 “속살 훤히 보이며” 낮달이 떠있다. 부끄러워하며 땅위에 서있는 처용과 부끄러움 없이 하늘에 떠있는 낮달의 대조는 처용의 부끄러운 현재의 모습을 더욱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자신의 삶을 애써 정당화하고 있는 처용의 언술 또한 처용이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어두운 현실을 거부하고자 하지만 거부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속이고 위로하며 살아가는 처용의 모습은 곧 나의 모습이자 우리의 모습이다.
시인이 온달, 처용, 서동, 그리고 조광조와 같은 설화적, 역사적 인물들을 시적 화자로 등장시키고 있는 것은 진정한 삶의 의미는 한 개인인 시인이 추구하는 진실만이 아니라, 일정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인간이라는 존재 모두에게 보편타당한, 공동의 진실이어야 함을 지적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라 할 수 있다. 또한 역사의 기록에 근거한 설화상, 역사상 인물들의 삶이 현대인의 삶과 겹쳐지는 상황에 대한 묘사를 통해 이들의 삶은 과거와 현재의 구분을 넘어 어느 시대에서도 발견되는 보편적 인간의 삶이 될 수 있음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온달과 처용은 지난 과거 속의 현실을 살아가던 인물이며 동시에 현재의 현실을 살아가는 인물로 그려짐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넘어 현실을 살아가는 보편적인 인간상으로 부각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윤석산(尹錫山)이 인식한 현실 세계는 암담함과 막막함이 가득하다. 이 세계는 소외와 단절로 인한 외로움과 슬픔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휩싸여 있으며 들끓는 욕망으로 오염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또 살아가야 할 우리의 삶이다. 시인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이 삶의 무엇이 우리를 살게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우리를 “아프고 슬퍼하고 또 기쁘게 하는 이 힘”, “두 다리로 이 지상을 버팅이게 하는”, “스스로 불뚝이는 존재이게 하는”(「너에게」) 그 무엇에 대한 탐색은 곧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음습의 경지는 얼마나 황홀한 것인가.
음습의 황홀함, 딱딱한 각질이라도
살아남으려는 의지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삶, 그 깊은 음각」 부분

주위의 불빛이 하나 둘 꺼지고 어둠이 더욱 짙어질 때,
아, 아 비로소 하늘의 별들이 빛나고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되었다.
―「한계령에서의 一泊」 부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언제나 “냉기 썰렁한 세상”(「아버지」)이지만 시인은 이 세상에서 또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다. “살아남으려는 의지”가 있는 것은 어떤 것이든 아름다운 것이다. 어둠의 그늘에 덮인 그 어떤 음습한 곳일지라도 그 곳에는 삶의 의지가 있기에 황홀하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어둠이 더욱 짙어질 때”에야 비로소 “하늘의 별들이 빛나고 있음을” 깨닫게 되듯이, 삶에 어둠이 짙을수록 삶의 의지는 더욱 강하게 불타오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삶의 의미는 이러한 어둠의 현실, 현실 속의 얽히고 설킴에 있는 것이다.

떠나는 자여, 떠나는 자여
바라보는가,
온 바다로 우리의 피가 번져올 때
달려가는 파도의 시린 등허리를,
바다에 머리를 부딪고 죽어가는 파도를,
이윽고 깨어진 채
바다는 더 깊은 바다로 침몰하고,
밤내 우리의 두개골은 물살에 씻긴다.
그러나 바라보라
우리가 헤매는 곳마다 열리는
진정한 바다를,
진정한 바다를 딛고 살아나는
파도의 푸른 발굽을.
―「바다 속의 램프」 부분

윤석산(尹錫山)은 삶에 대한 인식을 어둠과 빛의 대비를 통해 탐색해 가고 있다. 이것은 초기작인 「바다 속의 램프」에서 드러나듯이 초기부터 일관되게 나타나는 그의 시세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어둠과 빛은 대립적 관계 속에 놓여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위의 시에서 시인이 삶의 진정성을 발견하고 있는 것은 어둠, 빛을 존재하게 하는 어둠, 곧 빛으로서의 어둠이다. 그가 삶의 의미를 어둠 속에서 찾는다는 것은 현실 세계의 얽히고 설킴, 즉 어두운 현실 속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파도는 바다에 머리를 부딪고 죽어가며 “바다는 더 깊은 바다로 침몰”하듯 삶은 절망의 심연으로 우리를 떨어뜨리지만 시인은 그 어둠 속에서 빛나는 그 무엇을 찾아내고 있다. 더 깊은 바다로 침몰하는 바다가 “진정한 바다”임을, 그리고 그 “진정한 바다를 딛고 살아나는 파도의 푸른 발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어두운 현실이야말로 진정한 현실이며 이 현실을 딛고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삶이 된다는 인식은 이 시의 제목인 “바다 속의 램프”에도 함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램프는 어두운 바다 속에서 빛나고 있고, 바다는 램프를 담고 있다는 것은 어두운 현실 속에 삶의 의미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윤석산(尹錫山)은 어두운 현실의 얽히고 설킴 그 자체에 진정한 삶의 의미가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어두운 현실 세계를 외면하거나 어둠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그 어둠 속에서 진정성을 발견한다는 시적 인식은 어둠이 짙을수록 “푸른 燐光의 눈”(「온달전 -온달의 투혼」)을 부릅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시인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어둠을 밝히는 빛과 동시에 그 빛이 빛으로서 발할 수 있게 하는 어둠이다. 그는 현실의 얽히고 설킴 자체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함으로써 어둠 그 자체가 곧 빛이 될 수 있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윤석산(尹錫山)은 짙은 어둠이 쌓일수록 “푸른 燐光의 눈”을 부릅뜨며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연탄불 위에서 “지글거리는 살점”과 “연탄불의 지글거리는 발화”(「지글거리고 싶은 중년의」)를 목격하며 자신도 지글거리고 싶어하는 것은 현실의 얽히고 설킴 자체에 삶의 진정성이 담겨 있듯 자신과 투쟁하는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칠흑 같은 바다 속에서도 “내 안의 빛나던 램프 아직도 당당히 빛나고 있”(「미안하구나 내 추억아」)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어둠을 끌어안고 그 어둠 속에서 빛나고자 하는 의지, 이것이 시인 윤석산(尹錫山)의 힘이라 할 수 있다.


권경아․2003년 ≪시와세계≫로 등단

추천1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