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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2005년 여름호) 서평/김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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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지우 소설집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
김지우
마이노리티에 대한 한 읽기
김미정|문학평론가
1. 주변인에서 소수자로
김지우의 소설에는 노숙자․노래방도우미․자해공갈단․전직 소매치기․전과자․정리해고자․면도사 등, 2000년대 판 ‘주변인’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너무도 지금-여기의 일상과 밀착되어 있고, 또 그것을 그려내는 작가의 시선 역시 정공법적이기에 독자는 여러 모로 불안하다. 치부가 폭로되는 과정은 언제나 불안하다. 사실 이런 식의 주변인들에 대해서라면 동시대 소설에만 한정해 본다 해도 그리 낯설지 않다. 자해공갈단(이기호, 「당신이 잠든 후에」, ≪세계의 문학≫ 2004년 겨울), 매춘하는 주부(백가흠, 「구두」, ≪문학동네≫ 2005년 봄), 실직․정리해고자(김윤영, 「얼굴없는 사나이」, ≪작가세계≫ 2004 겨울) 등의 인물군은, 소설이 동시대 삶의 현장과 어떻게 긴밀한 관계를 맺는지 잘 보여준다. 나열한 인물군만을 놓고 볼 때 우리는 소재주의의 혐의를 떠올릴 수도 있다. 이는 달리 말해 세태나 풍속 소설의 차원을 넘어설 수 있는 어떤 심급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정황에서 김지우의 소설이 보여주는 미덕은, 소외된 이들을 등장시키되 그것이 단순한 소재와 모티프의 수준 이상임을 보여주는 작가의 시선 혹은 작가의 강직한 현실인식에 있다. 우선 작가의 시선은 근래 동시대 소설의 주류적인 흐름과는 거리가 있다. 대상과의 거리두기 혹은 냉소가 이 시대의 ‘불가피한’ 권장사항이라면, 김지우의 소설에는 항상 파토스를 가진 발화자가 있다. 그의 소설에서 ‘내면’의 직접적인 표출은 거의 없지만, 화자의 정서는 항상 대상과 밀착되어 있다. 소설 속 주변인은 관조와 묘사의 대상이 아니라, ‘-되기’(being)의 대상이다. 냉소가 자아를 상처로부터 거리 둘 수 있게 해주고 자기보존에 효과적인 전략을 제공하는 반면, 김지우의 이런 시선은 “내가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 한 그들은 나의 여전한, 가슴 아린 사랑이다.”(작가의 말)라는 식으로 대상과의 거리를 지운다. 즉, 작가는 단순히 소외된 이들을 포착하고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정서를 ‘사랑’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나’와 ‘그들’은 섞여 있다. 이 섞임은 단순한 인칭의 섞임이 아니라 동일자와 타자의 구분을 없애는 섞임이다. 비로소 조심스럽게 ‘소수자(minority)’에 관해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소설 속 주변인으로부터 소수자를 읽어내는 과정에는 작가의 현실인식을 읽는 것이 포함된다. 소설 속 주변인들, 소외된 이들에 대한 시선은 연민과 감싸안음의 시선일 뿐 아니라, 당연하겠지만 이들을 내몬 현실의 균열들을 예리하게 주시하는 시선이기도 하다. 즉, 소설의 인물들이 제재 수준을 넘어 그 자체로 사회적 함의를 지니며 구조적 모순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해피버스데이 투유」에는, 사회지도층의 원정 출산이나 2002년 붉은 악마의 함성을 제재로 취해 애국․민족주의의 양면성을 비판하거나 반미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등, 현실의 여러 층위 제모순에 대한 강한 일갈이 있다. 군부독재시절과 화해할 수 없음을 강인하게 보여주거나(「나는 달개를 달아줄 수 없다」), 생명과 미에 대한 과시적 허위의식을 조롱(「댄싱 퀸」)하는 등, 작가의 현실인식은 직접적으로 현실의 구체성과 현장성에 근거한다. 이것은 격동의 역사와 청춘이 종언한 후, 그저 공전(空轉)하는 내면의 고투에 만족할 뿐인 무수한 ‘아름다운 영혼(schöne Seele)’(by 헤겔)들과는 정반대에 놓인다. 후일담류의 파토스로는 확보하지 못하는 시야와 깊이일 뿐 아니라, 전혀 다른 현재형의 생명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소수자의 원칙, 소수자의 윤리
이 생명력은 현실의 구체적 균열과 틈새를 응시하는 것에서 비롯될 뿐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환대(hospitality)하는 사람들의 만남에서도 비롯된다. 「그 사흘의 남자」에는 이혼한 남편의 빚을 노래방 도우미 일을 하며 대신 갚아가는 여자와, 가족 없이 떠돌며 살아온 소매치기 8범 출신의 남자가 등장한다. 노래방 도우미로 전락한 여자는 정리해고, 가정경제 파탄, 이혼, 여성노동 시장의 구조적 모순, 사채시장의 불법성 등 자본주의의 현대적 풍속도를 한꺼번에 함축하고 있다. 또한 고아 출신 전직 소매치기 남자는 혈연 중심적 가족주의의 희생양이자, 불가피하게 생계형 범죄자로 내몰리는 과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연민하는 중에 사흘 동안 부부, 가족의 형태로 살기로 합의한다. 그런데 이들을 매개하는 것은 돈 삼백만 원이다. 화폐라는 교환 가치에 의탁할 방도밖에 없는 삶. 즉, 무소불위인 자본의 원리에 삶과 존재를 의탁하는 이 장면은 우리에게 분노와 절망을 동시에 전이시킨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자본의 외부는 없지만, 잉여는 있다. 삼백만 원어치가 효용을 다해도 빈틈은 생긴다. 이들의 관계는 단순히 삼백만 원의 계약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환대와 연대의 가능성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영역. 즉, 생명력은 틈새에서 솟고 인간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다. 남자는 비로소 가족을 누릴 수 있게 되어 행복하고, 여자는 "남자의 오롯한 순진성이 애잔"(101)하다고 여긴다.
이같이 약자들, 주변인들의 연대 가능성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작가의 신뢰와 관련된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이 신뢰감은 항상 양심, 죄책감을 호출한다. 「그 사흘의 남자」에서 남자가 소매치기를 그만두는 이유는 자신으로 인해 타인이 고통 받는다는 인과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장기를 팔아 어머니의 수술비를 마련하지만 이를 소매치기 당한 청년. 그는 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하고, 이 사건은 소매치기 남자에게 불현듯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남자는 열차에 뛰어들어 죄를 씻으려 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작위성을 논할 법도 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종의 ‘도약’을 개입시키는 시선이 있다. ‘도약’이라는 특이점, 우발적인 필연이 개입하는 순간, 이 소설은 단순히 밑바닥 인생의 참회록이 아니라, 소수자의 윤리를 논할 수 있는 소설로 전환한다. 이런 점은 「디데이 전날」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난다.
파란만장한 사연 끝에 의기투합한 4명의 자해공갈단이 보여주는 것은, 비단 이들을 전락시킨 근대화 및 IMF 이후의 자본주의 시스템만이 아니다. 법망의 교묘한 틈새 및 체제의 사각지대를 이용해서 체제의 누수를 역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 것이 바로 자해공갈단이라는 소재이며, 그런 점에서 「디데이 전날」 역시 너무도 현대의 일상과 밀착해 있는 소설인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정공법적 비판보다 더 소중한 것은, 소수자의 윤리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자해공갈을 위해 사고를 위장한 황 영감은 표적이었던 고급 대형차의 운전자가 실은 카센터 직원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공갈을 멈춘다. 자신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의 정서는 개인의 이익마저 포기하게끔 한다. 그것은, 단순히 밑바닥 인생들에 대한 연민과 훈훈한 정서를 넘어서는 것이다. 소수자 되기의 원칙과 윤리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김지우의 소설이 단순히 주변인, 약자에 대한 소설이 아니라 소수자 되기,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것은 이런 대목들 때문이다.
「물고기들의 집」은 이런 가능성을 가장 집약해서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혈연에 기초하지 않은 가족은 어떤 불행의 원천이라기보다 전적으로 서로를 환대해야 할 대체가족으로 그려진다. 이 화해와 환대는 같은 약자에 대해서라면 제약이 없다. 목돈을 들고 가출했다가 돌아온 아들과 그의 동거녀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노파. 노파의 용서는 아들 동거녀의 불행했던 과거를 듣고 이해하고 연민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타인의 불행에 공감하고 동참하는 윤리는, 도약과 마주침 없이는 불가능하다. 도약함으로써 나와 너는 비로소 이해관계의 맥락을 벗어난다. 그리하여 동거녀의 생리통을 위해 노파가 손수 약백숙을 끓이는 마지막 장면은 개인간의 화해인 동시에 연대의 가능성, 그 원칙과 윤리를 다시 한번 확인케 하는 것이다.
3. 딜레마 그러나 희망에 관하여
‘주변인’으로부터 ‘소수자’를 읽어내는 과정은 결국 정치적이자 윤리적인 문제였다. 단순히 현실에 대한 비판적 입각점뿐 아니라, 도약으로서의 마주침과 환대의 윤리를 보여주는 인물들. 김지우 소설이 보여주는 덕목의 하나는, 이처럼 구체적인 지점에서 출발하되 그것을 거침없이 도약하며 나아가는 생명력이다. 그런데 이것이 혈연중심의 가족서사에 대해서마저 과감하게 뛰어넘은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에서처럼, 김지우 소설이 겪는 미세한 딜레마는 실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겪는 딜레마의 일종일는지도 모른다. 소설에는 두 개의 갈등을 겪는 ‘나’가 있다. 수술 받는 아버지의 촌지를 마련하고 의사에게 건네기를 재촉 받는 나, 그리고 군부독재 시절 억압자들과의 타협을 종용 받는 나. 이것은 각각 가족과 부정한 돈의 문제, 그리고 폭압적 사회와 양심의 문제에 대응한다. 문제는 이 소설이 내내 불합리한 사회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면서, 동시에 가족의 부당한 요구에는 마지못해 순응한다는 데 있다. 즉, 표면적 갈등은 두 개이지만 실제로 행위자와 윤리를 언급하며 말할 수 있는 대목은 한 개인 셈이다. 오적을 읽고 대통령에게 감사의 편지를 쓰지 않겠다며 항변하던 소녀는, 세월이 흘러 가족이라는 자본주의의 축소된 시스템의 부당한 요구에 대해서는 고민을 외화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소수자들의 윤리, 그리고 가족 재구성의 의도에는 어떤 딜레마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가족을 그저 고향․집에 대한 그리움에 일대일로 등치시키는 대목과 관련되지는 않을까. 유년의 상실에 대한 아쉬움(「눈길」)은 개발과 문명에 대한 적대감을 강조할 뿐이므로 소박한 편이다. 즉, 가족과 근대의 문제에 개입된 중층적 심급들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편이다. 물론 이것은 이 시대 ‘가족’이라는 표상 자체의 딜레마인지도 모른다. 급변하는 현실의 요구로 인해 해체될 수밖에 없는 정상 가족의 범주는 김지우 소설 속에서 소수자의 연대 혹은 대체 공동체를 향한 가능성을 보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혈연 중심의 가족에 비하면 여전히 차선책인 듯 보이는 것이다.
혈연․혈통 중심의 가족 삼각형까지도 극복하고자 하는 시선은 불가능한가. 가족에 대한 사유가, 자본주의와 근대에 대한 비판적 사유와 나란히 가기란 힘든 것일까. 보다 래디컬한, 즉 근본적인 사유에 대해 발설하기란 어려운 일일까. 들뢰즈와 가타리가 카프카에게서 읽어낸 ‘소수집단의 문학’ 역시 결국에는 글쓰기가 미시정치학의 일종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질문들의 비약을 인정하면 이 같은 회의(懷疑)는 유보되거나 부당해질 터. 그러므로 또 다른 아둔한 질문이 허용된다면, 이 시대에 소설은 무엇인가에 대해 김지우의 소설은 희망에 관한 근본적(radical)이고 불온한 상상력이라고 답할 여지가 충분해 보인다. 이 점만으로도 그의 딜레마는 그리 염려스럽지는 않다. 희망에 관해 이미 충분히 말했고, 말할 것은 더 많이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미정․
1975년생
․2004년 ≪문학동네≫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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