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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특집/이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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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왜 문학판은 싸늘한가?
우리 시단의 한랭전선에 대한 우울한 보고서
―우리 시의 몇 가지 낯선 징후들―
이경수(문학평론가)
단절의 징후들
최근의 시단에 감도는 냉랭함의 의미를 짚어 달라는 기획은 생각할수록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난감함은 진단의 어려움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기획의 문제의식에는 공감하면서도 막상 징후로서 나타나는 것들을 분석하고 진단하는 일은 적지 않은 오류를 동반할 수 있는 것이어서, 진단하고 분석하는 나를 의심하는 나와 종종 대면해야 했다. 낯선 징후들의 정체가 좀더 선명해지면, 나의 발언을 부정하거나 철회해야 하는 날이 올 수도 있음을 인정하면서 다소 무모한 글쓰기를 시작하려 한다. 난감함을 안고 글을 쓰는 일은 곤혹스러운 것이었지만, 문제의 원인에 다가서면서 우리 시의 현재를 들여다보는 과정 자체는 비평가로서 내가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음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예정된 실패의 체험이 내 안에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이 우울한 보고서도 우울함을 넘어설 날이 있을 거라 위로해 본다.
분명 최근 몇 년 사이에 우리의 시단에는 몇 가지 의미 있는 변화의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을 냉랭함 또는 싸늘함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시단이라는 장에서 함께 시를 쓰고 읽는 사람들에게서조차도 서로에 대한 무관심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는 것만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 시단에 여느 때 못지않은 활기가 넘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 세계적으로 시라는 장르가 급속도로 위축되고 있는 현상과 비교할 때, 우리 안에 넘치는 시적 열기는 기현상처럼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 시가 유례없는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는 판단은 아마도 이러한 시적 열기와 성취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일 게다. 그러나 시적 열기의 안쪽을 골똘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 이상 징후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양적으로는 시인도 시 잡지도 넘쳐나지만, 시를 읽는 독자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겠다. 사실 미래에 시인이 될 예비 시인들과 전문 독자들을 제외하면 순수한 의미의 독자는 시로부터 점점 등을 돌리고 있거나, 특정한 시들만을 읽을 뿐이다. 스타 작가들에게는 고정 독자들이 있지만 이때의 독자들이 다른 시로 확장되고 있지는 못하다. 시의 시대라고 불린 1980년대보다도 시인의 수나 시 잡지는 훨씬 많아졌지만, 독자대중과의 소통과 독자에 대한 파급력은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시의 장(場)에 들어온 사람들은 많아졌지만, 그들 대부분이 시인이거나 예비 시인임을 고려해 보면, 결국 예년에 비해 그 외연이 훨씬 좁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현상은 시인들과 평론가들과 예비 시인들로 이루어진 시단(詩壇)이, 그 세부에서 다시 많은 소집단들로 나누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소집단 사이에는 동시대에 시를 쓰는 사람들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의 단절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 문학사에서 어느 시기에나 늘 있어 왔던 단절이나 대립의 징후라고 낙관하기에는 그 차이가 좀더 근원적인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다양성의 징후라고 넘어가기에는 그 단절의 정도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나는 그 결정적 원인이 폐쇄적인 취미집단화해 가는 시단의 변모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배후에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우리 시에서 사회․역사적 상상력이 급격히 사라져 가고 있는 현상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 시는 문화의 최첨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시를 읽음으로써 세계가 바뀌고 자신이 바뀌는 황홀한 체험을 하기도 했고, 소외된 자들의 편에 선 시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뜨게 되는 변화가 일어나기도 했다. 일찍이 김수영은, 시는 문화와 민족과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서도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인간에 대한 예의와 감동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을 과거의 시는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오늘날의 시에는 그런 것이 사라졌느냐는 반문을 해 올 것이다.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인간에 대한 예의나 감동이라는 가치는 더 이상 시에서 기대할 수 없는 것이거나, 그것을 기대하는 일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는 태도가 최근의 시인들에게 형성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과거에 우리 시가 ‘참여-순수’, ‘리얼리즘-모더니즘’과 같은 이념적 대립에 시달렸다면, 오늘날의 시는 미학적 대립이 전면에 부상하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 과거에는 이념적 차원에서의 대립이 미학적 대립을 선취하는 형태였다면, 요즘 우리 시의 징후는 미학적 대립이 강조되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물론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미학적 대립이지만, 그 이면에 이념적 대립이 숨어 있지 않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미학적 대립이 중시되면서 사회․역사적 상상력은 더욱 소홀하게 취급된다. 사회․역사적 상상력과 미학적 성취가 행복하게 만나는 일은 ‘지금, 여기’의 시에서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
취미집단으로의 전향
우리 문학사에서 1920년대와 1980년대는 동인지의 시대였다. <창조>․<폐허>․<백조> 등 1920년대의 동인들은 우리 근대문학의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며, 1980년대에도 시의 부활을 가져왔다. 그리고 지금 다시 동인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시 전문잡지가 시장의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많아진 현실 속에서 동인지의 출간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줄어들었지만, 90년대 중․후반 이후에 등단한 시인들을 중심으로 동인의 결성 및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인들은 아직 동인지를 발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동인으로서의 결속력이 강하지 않다고 할 수도 있으나, 동인들끼리 교류하거나 적극적으로 시를 해설해 주는 방식을 통해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해 가고 있다.
특히 새로운 시를 표방한 젊은 시인들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시를 읽어 줄 수 있는 전문독자로 비평가 대신 동인으로 함께 활동하고 있는 시인을 고르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물론 거기에는 시인과 비평가 사이의, 골 깊은 불화가 얼마간 작용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시인의 자의식과 비평가의 자의식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마 정직한 것일 게다. 자신의 시를 의도대로 정확하게 읽어줄 수 있는 존재가 시인에게 더 매력적일 것은 분명한데, 한편으로 이러한 선택 뒤에는 이미 발표된 시에 대한 소유권 주장의 욕망이 깊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발표된 시는 독자의 몫이라는 수용 미학적 태도가 한때 유행하기도 했지만, 시인들은 여전히 자신의 시에 소유권을 주장하는 꼬리표를 붙여 두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가장 개인성이 두드러진 시라는 장르의 특성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최근에 씌어지는 시들은 오랫동안 우리 시에 둘러씌워졌던 무거운 사명감이나 시 바깥에서 촉발된 동기를 벗어 던지고자 한다. 80년대를 시의 시대라 규정하는 한편에는 80년대를 문학의 자율성이 억압된 시대로 느끼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90년대 시에서부터 지속되어 오던 것이기도 한데, 2000년대 이후의 젊은 시인들의 시는 개인의 내면 속으로 점점 더 침잠해 들어가고 있다. 자기 상처를 들여다보는 데 급급한 이런 시들은 어떤 면에서는 그만큼 솔직한 것일 수도 있다. 내가 할 수 있고 관심이 있고 책임질 수 있는 것만 쓰겠다는 태도는 80년대 문학이 낳은 오류의 한 지점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내면의 문제에 침잠하면서도 그것이 보편성을 가질 수 있을 때 독자의 공감을 끌어내고 충돌적 만남을 통해 독자를 변화시키는 것도 가능해진다.
시가 늘 외롭고 소외된 자리에 있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독자들에게 빛을 던져주는 역할을 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분명 ‘지금, 여기’에서 기존의 문학 개념에 대한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변화를 현상적으로 읽어내는 것 못지않게 변화의 방향을 추동하는 역할 역시 할 수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시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규모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지만, 시단은 조금 규모가 큰 동호회와 같은 성격을 지니게 되어버린 듯하다. 그나마 그 안에는 서로간의 의사소통이 단절되어 있는 더 많은 작은 동호회들이 동인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평가들에게 비평이 아닌 해설만을 요구하는 시단의 풍토 역시 나는 취미집단화해 가는 시단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부의 외부자들이 사라져가고 비판적 목소리가 시들해져 갈 때, 서로 북돋워주는 친목의 논리가 작동하게 된다. 시를 시 이외의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놓아두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 있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좀더 자유로워지기 위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고도의 언어 훈련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읽을 수 없거나 특정 문화에 익숙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읽히는 시들을 마냥 새롭다고 추켜세우기만 할 것인지 이제 한번쯤 물어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대중에 영합하는 시의 위험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새로움을 추구하는 시들에 대해서도 새로움의 정체를 묻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때이다. 새로움만으로는 면죄부를 얻을 수 없다. 스스로 좁아지는 선택이 우리 시의 미래에 어떤 빛을 던져 줄 것인지 자못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언어의 차이
우리의 시단이 폐쇄적인 취미집단화해 가고 있다는 진단에 대해서는 아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반발할 것이다. 다소 도발적인 이 발언에 대해서는 분명 좀더 구체적인 논거가 필요해 보인다. 세상이 달라졌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80년대에 우리가 실감하던 사회 문제들이 일거에 해소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한층 공고해지고 교활해진 시장 논리로 우리 사회는 물론 지구를 장악해가고 있다. 다양성과 차이가 보장된 사회인 것처럼 말해지지만, 자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무소불위(無所不爲)의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제 견제 세력마저 잃어버린 자본에게 자정 능력을 발휘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낙관적이거나 낭만적인 태도일 것이다. 오히려 자본은 변화무쌍한 변이를 거듭하며 한발 앞서 미끄러지며 우리를 비웃고 있다. 문학마저 제어의 역할을 놓아버리는 것은 상상하는 것 이상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은 어디까지나 문학관의 차이와 세계관의 차이를 전제하는 것이므로, 논의의 방향을 좀 달리해 보도록 하겠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시를 쓰는 시인들 사이에는 이미 화합이 불가능한 언어의 차이가 가로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단절과 소통 부재야말로 최근 몇 년간 우리 시에서 무수히 반복되고 변주된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 정작 시단에 몸담고 있으며 시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동시대에 시를 쓰는 시인들 사이에도 심각한 소통의 단절은 일어나고 있다. 소통이 어려운 현상이야 과거에도 있었지만 그것이 대체로 문학관 혹은 세계관의 문제였다면, 요즘에는 세계관의 차원을 넘어서 언어의 차이로 인한 단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인들마다 시라고 생각하는 것과 시를 정의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시에 대한 새롭고 다양한 생각은 오늘날의 것만은 아니지만, 과거에 비해 대립이 훨씬 전면적이고 근원적인 것이 된 듯하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이들이 단지 ‘시’라는 관습적인 장르 명칭을 사용하고 있을 뿐, 이들이 쓰는 시는 결코 하나로 묶이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이들에게는 ‘공통 감각’이 부재한다. 이것은 단지 세대의 차이로 인한 것만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등단해서 활동하고 있는 비슷한 연배의 시인들에게서도 공통 감각의 부재, 언어의 차이는 나타난다.
특히 환상의 전략을 적극적으로 구사하고 있는 2000년대의 젊은 시인들의 시를 읽기 위해서는 그들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야 하는데, 이때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습득하지 않으면 그 세계에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때로 그 언어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어서 기존의 언어에 대한 관습을 가지고는 그 세계에의 진입도, 그것과의 소통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마치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 The Five Star Stories라는 판타지 만화를 읽기 위해서는 본 만화를 압도하는 분량의 용어 설명을 익혀 두어야 하듯이, 이 시인들의 공통 감각과 그것에 기반한 언어를 습득하지 않고는 이들의 시를 이해하거나 즐길 수 없다. 물론 이 시인들 이전에도 환상의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시인들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환상이 그 반대편에 존재하는 현실을 끊임없이 환기하는 것이었던 데 비해, 요즘의 젊은 시인들은 환상과 현실에 대한 고정된 구분을 한결 자유롭게 횡단하며 넘어선다. 환상을 환상이 아닌 현실로 체험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뮬라크르가 오히려 더 진짜 같고, 진짜 또는 현실과 전혀 구분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는 이 시인들에게는 환상이 훨씬 더 리얼한 것은 아닐까? 이들은 현실에서 늘 매트릭스를 체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자잘한 일상의 문제라든가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거대담론 따위는 이들에게는 전혀 관심 밖의 일이거나 오히려 비현실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듯하다.
감각의 차이와 언어의 차이는 결국, 같은 시를 쓰고 있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시를 쓰고 있는, 새로운 국면을 조성한다. 이들의 시가 적지 않은 시인과 비평가와 독자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모든 시가 그래야 할 이유는 없지만, 이런 시들도 얼마든지 쓰여질 수 있고, 또 그것이 얼마간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이면을 환기하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러한 시들이 보여 주고 지향하는 세계나 문제의식이 학습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한번쯤 품어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모든 시가 체험으로부터 빚어지는 것은 아니며, 상상의 체험 역시 또 다른 체험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지나온 시간과 ‘지금, 여기’를 너무 쉽게 파시즘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부정을 위한 부정에 지나치게 이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따져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이론과 학습의 체취가 너무 많이 풍겨 나오는 시에서 감동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물론 이런 시를 쓰는 시인들은 감동 같은 낡은 가치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고 말하겠지만 말이다. 언어의 차이가 차단하는 소통 가능성의 부재. 이것 역시 우리의 시단이 냉랭해지는 데 적잖이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불가해성에 대하여
앞장의 꼬리를 물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나는 앞에서 동시대에 시를 쓰는 시인들 사이에도 공통 감각이 부재하고 언어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일부 시에 대해서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요설이다, 자폐적이다라는 인상에 기초한 진단이 사석에서든 공식적인 좌담의 자리에서든 쏟아져 나오는 까닭도 결국 공통 감각이 부재하기 때문이며, 언어와 시에 대한 생각의 차이로 인한 것이기 쉽다. 이제 시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한층 더 전문적이고 사적인 영역으로 분화하고 있다고 봐야 할 듯하다. 노래로 불리던 시절과는 시의 정의와 위상이 많이 달라진 셈이다. 이쯤에서 젊은 감각을 지닌 젊은 시인들의 시가, 머리로는 탈근대를 외치면서 정작 시를 전문적인 영역에 고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내가 앞에서 이론과 학습의 체취가 느껴진다고 말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오래 전부터 시는 고도의 언어 미학을 지닌 장르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편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반 독자들이 전문적으로 시를 분석할 수는 없었겠지만, 분석 이전에 가슴을 두드리는 힘은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감동이라고 지칭할 수도 있을 것이고, 보편성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의 시는 그런 점에서는 분명 취약해진 게 사실이다. 시에 독자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전문적으로 시를 읽고 전공해 온 비평가나 현장에서 시를 쓰는 시인들에게서도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읽을 수가 없다는 불만의 소리가 새어 나올 정도이다. 나는 최근의 젊은 시인들의 시에 대해서 섬세한 차이를 들여다보지 않으면서 요설로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태도에는 반대하지만, 이들의 불만의 소리에도 경청할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취미생활로 시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폐쇄적인 취미집단화해 가는 추세에 대해 거리를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자족적인 세계에서 한 발 걸어 나와 부정의 대상과 몸으로 부딪혀 보는 것도 나쁜 체험이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감동에 대해 불신하고 생을 뒤흔들 만큼의 충격을 주는 시를 구하지 않게 되어버린 현상은 어찌 보면 ‘문학성’이라는 신화에 대한 또 다른 방식의 부인일 수도 있겠지만,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오히려 ‘문학성’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를 낳을 수도 있다. 독자들에게 눈높이를 맞추고 독자의 요구를 따라가는 시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엘리트주의화하거나 개인방언화해서 독자들을 등 돌리게 하는 시도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서로에 대한 무관심을 낳고 소통 가능성을 차단해 버림으로써 마침내 자기 발목을 붙잡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아마도 시가 다시 문화의 중심에 서는 날은 오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취미집단화해 가는 것은 시의 현대적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운명에 저항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주어진 운명에 맞서는 것이야말로 문학이 지닐 수 있는 최소한의 불온성이 아닐까?
시의 중흥, 혹은 열기(熱氣)의 정체
한 진보적 지식인이 한국 사회는 그 자체로 연예계다라는 다소 충격적이지만 정곡을 꿰뚫는 발언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시단에도 얼마간 통용되는 논리인 것으로 보인다. 자본의 논리가 여간해서는 돈이 될 것 같지 않은 시까지도 상품화하고 있으니 말이다. 모든 예술, 혹은 문화가 불온함만을 지향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무소불위의 자본이 지배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그런 발상은 이상주의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시를 읽으면서 기대하는 최소한의 가치는 불온함이다. 나름의 불온함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최근의 젊은 시들이 보여주는 태도에 얼마간 공감한다. 다만, 불온함마저 상품화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문제의식보다 학습된 이론이나 감각이 선행할 때 그것은 의도와는 달리 후기 자본주의의 논리에 순응하는 것이 될 위험을 가지고 있다. 부정의 대상이 반드시 현실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모든 것을 부정하는 전방위적 부정의 태도는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허무만을 낳을 수 있다. 아직 우리 시가 제대로 체험해 보지 못한 허무의 극단까지 갈 수만 있다면, 그 선택 또한 의미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자기의 세계에서 한 걸음 떨어져 나와 거리를 가지고 자기를 들여다보는 최소한의 태도가 이들에게 필요해 보인다. 몰이해에 괴로워하며 안으로 안으로 파고드는 것도 하나의 대처 방법이기는 하겠지만, 한번쯤은 몰이해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혹시 내부에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하지 않을까?
겉으로 보기에 한국 사회에서 시의 열기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 전 지구적으로 시라는 장르의 위상이 축소되어 가는 현실과 비교해 볼 때, 지금도 여전히 양산되는 시 잡지들과, 한 달에 수십 명 이상씩 쏟아져 나오는 시인들은 일단 양적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시의 열기는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열기의 안쪽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문단의 중앙 집중 현상에 대한 반발과 자신의 시를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을 마련해 보려는 소외된 자들의 욕망이 결합되어 나타난 다소 비정상적인 현상임이 읽히기 때문이다.
제 살 깎아먹기의 관행이 시단에 팽배해 있는 것은 결국 시의 장을 위축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의 시단에 한랭전선이 흐르게 된 책임은 여기에도 일부 있다. 자유롭게 경계를 넘나들기는커녕 좁은 경계 안에서조차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분화되기만 하는 모습은 서로에 대한 지독한 무관심을 낳을 것이고, 마침내 그것이 시단 전체에 독이 될지도 모른다. 소통의 장이 마련되기보다는 서로 다른 언어의 각축장들이 마련되어 가는 이상 징후에 대해 이제 좀더 솔직하게 대화를 나눠봐야 하지 않을까? 상대를 비난하는 방식으로는 아마도 소통의 가능성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를 상정하면서 나를 둘러싼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와 바깥의 존재와 만남을 시도할 때, 당장은 출혈이 있겠지만, 서로에 대한 이해의 장을 넓힐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것은 물론 나 자신에게로 되돌아와야 하는 화살이다.
이경수․
199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저서 불온한 상상의 축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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