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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신작시/허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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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462회 작성일 08-02-26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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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선



어느 꽃잎


신문사 그만두고 지리산 오르던
2003년 봄날
광주 헌책방에서 조선어표준말모음 하나 샀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너덜너덜 낱장까지
다 헤진 그을음 달고 나온
1936년판
1만원 주고 샀다
손만 대면 바스러질
그 말들 일으켜 세우며
한장 한장 넘기는데
말귀 알아들었다는 양
떨어진다 툭!
그을음에 고개 숙인 내 그림자 하나 떨어진다
87쪽 깊숙이 박혀 오래 몸을 누이느라면
설운 맘도 이미 재가 되었을
어느 꽃잎
흘러 흘러  마주친 저 핏빛
오늘 내 책상 위 그 속절없는 꽃잎 한장
1988년판 조선말사전 87쪽에 끼워 넣는다
어느 꽃잎 한장



곳간 속 물항아리
―북제주군 송당리 고평선 할머니


동편 배지근 창곰* 하나로
홀린 듯이 빛 하나 드나들었겠다
바람 불고 비 오는 휘어진 밤
흙바람벽, 그 틈새로
사나운 바람살 굽이쳤겠다

문 열자 왈칵 덮쳐오는 진한 발효향
사십년 기억처럼 흙살 부슬부슬 떨어진다
날카롭게 반사하는 빛 수평으로 갈라진 곳간
천장 서까래 받치다 가로로 지쳐 누운 누런 서슬목
뒤엉킨 거미줄이 흔들리며 포위한다

그때 그 자리였겠다
이 밤과 저 밤 사이로
물허벅 한톨 한톨 길어나르던
스무 동이 등을 적시던  
석 섬들이 검은 항아리

오래오래 기다렸겠다
소매 적신 손으로 짚어보던 그때 그 물항





실빛조차 닫아버린 저 둥근 몸

그때가 언제였을까
오래 묵었으나 성긴 알갱이들
아직도 싱싱하구나 누릇누릇 흩어진 나락 한줌
설드럭질* 넘고 넘어서
종지만한 남박 하나로
물 떠 담던,
시린 겨울에도 항을 닦던 자갈 같은 손

이제 보니 빈 항처럼, 물처럼 살았겠다
내가 숨을 쉬듯 나를 기다렸겠다, 저 숨쉬는 검은 독
우두커니 서서
여든여덟 생 비우고 비워서 썩을 것도 없는


*창곰:밝게 하려고 바람벽에 뚫은 구멍.
*설드럭질:돌들이 쌓이고 잡초목이 우거진 곳으로 통한 길.



허영선
1980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추억처럼 나의 자유는󰡕 등
  문화칼럼집 󰡔섬, 기억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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