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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신작시/김왕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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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25회 작성일 08-02-26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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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노


퓨전나라


입안이 깔깔하거나 허기가 나면 발길을 돌려야 한다
쭉쭉 빵빵이 물결치는 시티극장 앞이나 명동이나 홍대 앞, 물 좋은 곳으로
별자리가 보이지 않는 날 그곳에 가면 입맛에 맞는 달짝지근한 음식이 기다리고 있다
일회용 사랑도 있다. 급속도로 만들어지고 채워지는 그리고 비워지는
그곳에 가면 성형으로 하나같이 아름다운 얼굴이 있다
기다림이 싫고 제 생이 하나의 고깃덩어리같이 느껴지는 날은
푸른 블루스에 뱀같이 흔드는 허리, 음란을 내뿜는 미끈한 다리가 있는
풋과일 같으나 텅 빈 가슴이 있는, 원두커피가 향기를 내뿜는
갈망의 눈빛이 있고, 속전속결의 이별이 있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
모든 게 희망이나 모든 게 독인 그곳, 불안도 슬픔도 다 개떡인 곳
그곳엔 사랑하는 여자와 가지 않아도 된다
오픈 하우스, 오픈 바디, 오픈 가슴, 실리콘 가슴이 가득 찬 곳
성형의 역사가 쓰여지는, 리모콘 하나로 모든 게 작동되는 곳
우리의 유토피아, 우리의 몽유도원, 우리의 장수촌인 곳
상처가 아물지 않거나 그리운 이름이 있으면 슬픔을 걸치고
스포츠 일면의 연예가 소식을 읽거나 그날 운세를 읽으면서
지하철을 타거나 파란 버스를 타고
따뜻한 자본주의의 시트에 앉으면 검문도 검색도 없이 이르는 곳
자위가 있고, 셀프서비스가 있고





세련된 창가에 앉으면 새로운 혁명의 노래가 귓가에 맴돈다
심심하거나 더 망가지고 싶으면 그곳으로 가야 한다
신발을 질질 끌며 껌을 씹으면서 길가에 서서 키스를 하면서
한 번쯤 네 생도 국적불명의 양념으로 요리하고자 하면
들키는 게 싫으면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러브호텔로 들어가듯
얼굴을 가리고 긴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보톡스를 맞아 탱탱한 욕망으로 비아그라를 챙겨서 그곳으로

가자 우리가 가지 못하면 우리는 쉰 세대다



친구는 욕하다 잠이 들고


친구는 맥주로 눈이 풀려 그렇게 욕하다 홀 한편 의자에서 잠들고
방금 지하 1층 사막이란 카페에서 휘청거리는 발로 지상으로 올라와
피닉스 맥주집까지 온 우리는 잠든 친구와 함께 어디로 가야 하나
불사조가 사는 나라는 어디 있는가?
그간 이야기는 진부했고
가슴에서 비수같이 품었다 꺼낸 이야기도 이제 재탕에 불과하다
누가 사랑하기 위해 꽃등 켠다는 밤
친구는 욕하다 잠이 들고 3차 4차 5차 갈 곳은 어디 있나
큰 부도 내고 달아났다는 친구를 어제는 학동사거리에서 만났고
믿어달라며 구호를 외치던 시대도 결국 부도를 내고 있다
친구는 욕하다 잠이 들고 그래 서울의 밤은 예나 지금이나 불온하다
간발의 차이로 놓쳐 버린 막차는 종착지에 이르러 시동마저 껐을 것이다
깨워도 자꾸 욕하다 잠드는 친구는
결국 외면하고 싶은 서울의 사랑과 서울의 밤과 서울의 남산으로부터 더 멀리 떠나려
서울에 내린 닻을 잠 속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누군가 나타샤를 사랑하는 밤에는 펑펑 눈이 내린다는데
누구를 사랑해야 이 밤 별빛이라도 사르르 내릴까?
친구는 욕하다 잠이 들고 잠든 친구를 떠메고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아픈 죽지마다 새살로 돋아나는 울음을 퍼덕여
이 밤 우리는 시베리아나 더 깊은 내륙으로 떠나가는 철새 무리여야 하나
친구는 욕하다 잠이 들고


김왕노․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슬픔도 진화한다󰡕

추천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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