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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지난 계절 작품 읽기(시)/백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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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64회 작성일 08-02-23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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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계절작품읽기【시】

반향과 울림의 자리, 혹은 경계
―김정수의 「마음의 자리」
(≪리토피아≫ 2004년 겨울)

백인덕(시인)


문은 늘
태극문양으로 닫혀 있었지만
거기, 끝이 시작이고 시작이
끝인 길이 있었고 마음이 결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곁가지인 양 허공을 비껴가는 풍경소리만이
경계를 넘나드는 유일한 법문이었지만
속세의 언덕이 철거되면서
가장 먼저 기원정사가 이사를 갔다
미처 방면하지 못한 풍경 속으로
바람이 불고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
바닥에 누워 있었다 한쪽 귀퉁이 부서진 채
함부로 몸을 열고 있었다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기원을 밟고 들어가
속을 다 비운 정사(精舍)를 보고서야
밖의 소리보다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았다
마음이 앉았던 자리 주변에 수북이
먼지가 쌓여 있었다
언덕이 흔적도 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김정수의 「마음의 자리」

일반적으로 회고의 감정이란 차분한 정서적 조응을 동반하고 어떤 깨달음에 이르러 그 종국을 맞는다. 우리 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터에서’, ‘-지에서’, ‘-를 다녀와서’ 등의 작품들은 대개가 이러한 공식적인 경로를 밟고 있다. 물론 그런 작품들의 가치나 효용을 부정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현상이 그렇다는 것뿐이다.
나는 이 난을 써 오면서 가급적이면 신인들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그들이 그려나갈 우리 시의 미래 지평의 한 부분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의 김정수 시인은(약력을 통해서도 확인되겠지만) 매우 이례적인 경우라 해야겠다. 물론 그 이유는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매력 때문이다. 그 매력은 대략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시인과 대상과의 관계 설정이 하나고, 다른 하나는 작품의 전체적인 형식과 사용된 기법들의 부조화가 빚어내는 독특함이다.
시인과 대상, 다시 말해 주체와 객체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시인의 태도를 결정하고, 그 태도에 의해서 이른바 장르로서의 양식이 결정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고 있는 ‘서정시’란 말하기 방식에 따른 분류로 그것은 시인이 대상과 합일되어 그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일컫는다. 따라서 감정이입이 생겨나는 것은 불가피하다. 「마음의 자리」는 이를 회고적인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철저하게 시인의 감정을 숨긴 진술(보고)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해 감정이입을 비록 소외의 방식은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방해하려는 시인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음의 자리’가 대상인 ‘기원정사’의 터인지, 한때 그 정사를 기웃거렸던 시인의 ‘마음’인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을 통해 확인된다.
그리고 이러한 시적 태도는 다른 하나의 독특함, 즉 서정시라는 전체 형식에도 불구하고 사용된 기법이 비유적이기보다는 아이러니나 역설에 가깝다는 점과 맥이 통한다. 그 중에서도 언어유희란 시어의 기표와 기의의 차이를 파고드는 가벼움의 놀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에 역시 이러한 언어유희의 정신이 드러난다. 음성적 유사함을 노린 ‘결가부좌’와 ‘곁가지’, 동음이의어인 ‘풍경’과 ‘풍경’, 모순어법으로 보이는 ‘끝이 시작이고 시작이 끝인’과 ‘시작도 끝도 없는’의 비교 등이 그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기교라면 기교를 통해 김정수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작품이 현실에 대한 처절한 비유(철거촌에서 가장 먼저 이사 가는 정사를 생각해 보라)라는 측면을 애써 제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밖의 소리보다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게/얼마나 어려운 줄 알았다’는 구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에 약하고, 종교적으로도 이해가 깊지 못한 필자의 역량 탓에 ‘밖의 소리’를 ‘반향’으로, ‘안의 소리’를 ‘울림’으로 밖에 읽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은 보다 정밀한 분석이 가능하다면, 선불교의 이른바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경지를 의미하지 않을까? 일상과 무상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어쩌란 말인가? 하지만 이 땅위에서 아직도 우리는 허물어진 ‘마음의 자리’를 배회하거나 새 ‘마음의 자리’를 돋워야 하지 않을까? 할 수 있는 한은 말이다.


백인덕․
1964년 서울 출생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한밤의 못질󰡕 󰡔오래된 藥󰡕
․한양대, 한양여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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