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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지난 계절 작품 읽기(시)/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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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계절작품읽기【시】
이 세상 소풍, 끝나지 않기를
―허수경의 「소풍 갑시다」
(≪문학동네≫ 2004년 겨울)
강경희(문학평론가)
그대가 나의 오라비일 때, 혹은 그대가 나의 누이일 때 그때 우리 함께 닭다리가 든 도시락을 들고 소풍을 갑시다, 아직 우리는 소풍을 가는 나날을 이 지상에서 가질 수가 있어요, 우리는 그 권리가 있어요, 소풍을 가는 날, 가만히 옷장을 보면 아직 개키지 않은 옷들이 들어 있어도 그냥 둡시다, 갈잎 듣는 그 천변에서 우리는 다시 돌아올 것이므로, 돌아올 것이므로, 그날 그 소풍에 가지고 갈 닭다리를 잘 싸고 포도주 두어 병도 준비하고, 그대가 내 오라비로만 이 지상에서 그대가 나의 누이로만 이 지상에서 살아갈 것을 서약을 할 수 없을지라도 오래 뒤에 내가 그대를 발굴할 때, 그대의 뼈들이 있을 자리에 다 붙어 있었으면 합니다, 그 이름 없는 집단무덤에서 우리는 얼마나 머리 없는 뼈들을 보았던가요 울지 맙시다, 작은 소녀가 웅크린 그 부엌 안에 작은 불을 켜며 라디오를 켜며 서약한 많은 나날들이 연빛 웃음처럼, 소녀 또한 연등빛 웃음처럼 저 폭약 많은 오후에 사라져갈지라도 우리들이 먹은 닭다리가 저 천변에 해빛에서 아득해질지라도 오 오 소풍을 갑시다, 울지 맙시다
―허수경의 「소풍 갑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더 이상 안전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과연 있을까? 수없이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과 사고들을 우리는 하루도 접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이유도 알 수 없는 무자비한 범죄가 판을 치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종족간의 분쟁, 기근과 천재지변으로 처참하게 죽어 가는 사람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하는 파렴치한 권력자들의 만행. 모두 셀 수도 없고, 모두 다 기록할 수도 없는 이 지구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참사를 우리는 단 하루도 지켜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그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사실은 자신의 한몸을 편히 누일 안전지대가 사라졌다는 사실만은 아니다. 폭력과 무자비함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이제 스스로 폭력의 희생자만이 아닌 폭력의 소비자들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 폭력의 이미지들을 통해 스스로를 무감각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좀더 자극적인 좀더 잔인한 폭력적 현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아니 심지어는 그 잔인함에 매료(?)되는 기이한 행동까지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에드먼드 버크는 “범상치 않고 통탄해 마지못할 재앙의 광경만큼 사람들이 열심히 좇는 광경도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이러한 인간의 행위가 본질적으로 “불행에 대한 사랑, 잔악함에 대한 사랑은 연민만큼이나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인간의 본성 속에 간직된 추악함이야말로 폭력에 심취되어 가는 오늘의 현실을 그대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 우리는 폭력에 대한 방관자, 혹은 폭력에 대한 관람자, 또는 폭력에 대한 향유자가 되어야 하는가? 대답은 너무나 자명하다. 우리는 결국 모두 폭력의 희생자일 뿐이다. 다만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폭력과 스스로가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있는가에 의해 그 심각성이 다를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위험에 노출되는 작은 상황이라도 방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정작 타인의 고통 앞에 우리는 또 얼마나 초연한가? 나와 타자를 나누는 이 뚜렷한 구분 앞에서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속절없고 무능하고 몰염치하고 이기적인 대상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허수경의 「소풍갑시다」를 읽으면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것은 그가 타자와 함께하고자 하는 삶을 간절하게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인은 “아직 우리는 소풍을 가는 나날들이 지상”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소풍을 가는 나날들을 “이 지상에서 가질 수가 있”다고 강조한다. 존재하기에 소유할 수 있고, 존재하기에 그것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음을 그는 기뻐하는 것이다. 아직 남아있는 자유를 만끽하며 지상을 거닐 수 있는 시간을 ‘우리 함께’ 누리자고 시인은 제안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상에서 살아갈 것을 서약은 할 수 없을지라도”,“이름 없는 집단무덤에서” “머리 없는 뼈들을 보”았더라도 결코 “울지 맙시다”라고 제안한다. 죽음이 그리고 죽어서까지 고통받고 있는 자들을 향해 그는 눈물짓는 것이 아니라 “울지 맙시다”라고 위로하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인 동시에 타자를 향해 외치는 절규이기도 하다.
행복은 결코 지속될 수 없다. 그러나 행복을 바라고 실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꿈은 계속된다. 그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바로 이 지상에서의 아름다운 ‘소풍’일 것이다. 허수경은 그 날의 소풍을 위해 “연등빛 웃음”을 웃고자 하는 것이다. 그 웃음이 비록 “저 폭약 많은 오후에 사라져갈지라도” 그 사라짐을 슬퍼하거나 분노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시인은 이 세상의 잔혹함에 대해, 형체도 온전히 남아있지 않는 끔찍한 죽음에 대해, 여린 영혼에 새겨진 아픈 상처에 대해 구체적으로 발설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꿈에 대한 인간의 무서운 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이 폭력적인 세상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 비록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자유에 대한 갈망임을 전언하고 있는 것이다.
허수경의 「소풍 갑시다」는 아픔과 고통에 길들여짐으로써 절망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행복을 꿈꿀 수 있는 ‘소풍’과 같은 그날이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고통과 상처, 죽음까지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에 대한 한없는 믿음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의 저변에는 ‘나’와 ‘그대’,‘오라비’와 ‘누이’가 함께라는, ‘우리’라는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깔려 있는 것이다. 우리도 시인처럼 이 지상에 아직 남아 있는 “소풍을 가는 날”을 위해 “오 오 소풍을 갑시다”라고 한번 외쳐봐도 좋지 않을까.
강경희․
1967년 서울 출생
․200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숭실대, 호서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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