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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대학생의 독서 일기/송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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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 사랑의 파괴(김남주 옮김, 열린책들, 2002)
유년의 기억
송지은(경희대 연극영화과)
유년의 잔인한 기품, 사악함, 절대에 대한 감각, 순수함. 오만함. 이 책을 두고 많은 말들이 오고 가겠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랑’이다. 아멜리 노통이란 오만하고 도발적이며 철학적인 동시에 사랑스럽기까지 한 프랑스 여류작가의 첫사랑 얘기인 것이다.
아멜리 노통, 그녀의 지적인 당돌함은 이미 시간의 옷에서 접한 바 있으나 사랑의 파괴를 보고 나는 확신했다. ‘이 여자, 천성이구나.’ 나에게 있어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녀 특유의 천부적인 당돌함이 어느 한순간, 깨달음에 의한 것이 아닌 어릴 적부터 자연히 습득되어 온 일종의 생활 방식 중 하나임을 재확인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확인 과정이 내겐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어서, 이 간단한 깨달음 덕분에 난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란 비트겐슈타인의 첫 번째 명제를 반론하며, “세계는 나의 존재를 위해 존재한다.”란 엄청난 결론을 끄집어낸 이 여섯 살 난 계집아이의 당돌함을 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마침내는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있음을 알아버린 아이에게 일순 끝없는 동정심마저 일렁이고 만 것이다. 그렇다. 처음으로 세상의 중심이 자신 아닌 타인에게 있음을 알아버린 날, 아이는 처음으로 사랑을 알았다.
하지만 ‘제 버릇 개 주랴.’라는 속담이 있듯, 이 아이의 첫사랑이란 것이 자기 성격처럼 지독히도 자기중심적이며 사념적이고 가학(?)적이기까지 한 것이어서, 처음 이 책을 읽을 당시 난 아이의 첫사랑이 나와는 다른 종류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증거로 아이의 사랑은 자신과 정반대의 시선과 취향을 갖고 있는 ‘엘레나’의 시선을 잡아두기 위한 노력으로 시작되었으나 내 사랑은 그 사람과 나를 동일시하는 데서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혹자의 말에 의하면, 사람 다 거기서 거긴지라, 다만 비슷한 점보다 다른 점이 더 눈에 띄기 쉬울 뿐이라고 하나, 그 시절 난 그 동질감이 그 사람과 나만의 특별한 그 무언가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와 그 사람이 유별나게 닮았음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반한 내가 유난스럽게 서로의 닮은 점을 찾고자 했었음을 사랑에 눈먼 내가 알 리가 없었으므로 부끄럽게도 난 그 유대감을 일종의 운명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리고 또한 노통보다 적어도 십년쯤 뒤에야 처음 인지하게 된 내 사랑은, 십년이란 그 세월, 딱 그만큼씩 비겁했다.
“내가 널 사랑하니까 너도 날 사랑해야 돼.”
‘엘레나’가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된 어린 노통이 자신 안에 격정을 참지 못한 채 엘레나에게 한 첫 번째 고백이다. 난 지금껏 이처럼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절대적인 고백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내가 이 건방진 꼬맹이에게 완벽하게 반해버린 것도 바로 이 순간이 아닌가싶다. 내가 노통의 나이 때 첫사랑을 알았다면 이 엄청난 고백을 상대에게 할 수 있었을까? 한참 사랑에 빠져 있던 그 순간조차도 감히 입안에 머금지도 못했던 이 엄청난 고백을? 아마 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할 수 없는 말을 예전이라고 할 수 있었을 리 없었으므로. 아까 언급했다시피 이건 천성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책을 덮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어린 노통과 내 사랑의 지독한 합일점을 찾고야 말았으니 그건 바로 사랑의 ‘파괴’란 시점에서였다.
어린 노통은 간절히 바란다. 자신의 사랑이 고통 받기를, 그리고 그 고통의 전달자가 자신이 되기를, 그 애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를, 그 애의 철없는 오빠가 마을의 놀림거리가 되기를. 그리하여 자신이 우는 그 애를 위로할 수 있기를, 사랑받을 수 없다면 차라리 지독한 미움의 대상이 되기를, 하지만 그것이 절대 자신의 사랑에게 직접적인 고통이 될 수 없음을. 부끄럽지만 사랑에 빠진 당시 나 역시 이런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이 지독한 감기에 걸린다면, 우연히 길을 걷다가 다리가 부러진다면, 거동이 불편한 그 사람의 수족이 되어 그에게 지금보다 좀더 절실한 그 무언가가 될 수 있을 텐데 하는……. 하지만 노통과는 달리 그 사람의 직접적인 고통을 바란 나의 바람은 어쩌면 어린 노통보다 좀더 파괴적인 집착을 동반했는지도 모르겠다.
“꽃들이 알려주는 기별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언제나 배신이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위의 말은 ‘엘레나’가 처음으로 노통에게 눈물을 보인 날, 그녀에게 의도적인 쌀쌀함으로 일관해 오던 노통이 끝내 참지 못하고 내뱉은, 진실에 대한 답례로 얻은 일종의 깨달음이라고나 할까? 노통이 자신 안의 열정을 고백한 순간 그녀의 사랑은 예의 그 오만한 미소를 띤 채 그녀 곁을 떠나갔다. 그리고 내가 그 사람에게 내 자신을 완전히 내보이고 싶었던 순간 그 사람은 내 곁에서 한발 물러섰다.
꽃이란 그 식물의 거대한 성기라고 한다. 그 성기가 설사 거대한 욕정의 산물일지라도, 자신의 추악함을 가리기 위한 화사함이더라도, 그 향기가 다른 이를 매혹시키기 위한 그윽한 사탕발림일 뿐이라도, 여전히 내게 그 꽃은 아련한 아름다움이다. 먼 훗날 우연히 그리운 그 향기를 마주하게 된다면 아마 난 별수 없이 가던 걸음을 멈춘 채 한참을 향기에 취해 비틀대야 할 것이다. 이것이 내게 남은 첫사랑의 후유증일까?
이제 겨우 스물을 넘긴 나이에 사랑에 대해 운운한다는 건 재채기가 나올 만큼 낯간지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아마 난 내일 아침이면 벌개진 얼굴로 냉장고로 달려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이 글을 쓴 자신에 대한 뼈 아린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할 수 없다. 세상엔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게 있는 법이니까. 내게 첫사랑이 그러했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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