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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특집/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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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11회 작성일 08-02-26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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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환상문학, 환상의 리얼리티?

환상성, 현실의 깨진 조각거울

김남석(문학평론가)


1.
우리 문학사는 10년 단위로 시기를 묶고 그 특징을 추출하는 것에 익숙하다. 문학을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은-학자이든, 평론가이든, 오타쿠 수준의 독자이든, 아니면 정규교육을 받은 정도의 일반 독자이든-이러한 분류 방식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분류를 요구하고 정리된 분류를 내재화하여 독서와 연구에 이용한다. 그래서 70년대 문학이나 80년대 문학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인 쓰임새를 넘어 학문과 평론의 영역에서 버젓이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이러한 가름법은 편의주의적 발상이라는 측면에서 경계되어야 하나, 전시대의 문학적 흐름을 감지하고 이 시대의 문학적 조류와 비교하는 데에 상당히 유용하다.)
이러한 가름선의 유용성을 인정하고 80년대 문학을 개관했을 때, 이남호의 지적은 인상 깊다. 이남호는 80년대 전반기를 살부(殺父) 의식에 시달린 문학적 세대들의 활동기로 요약하고, 80년대 후반기를 편모슬하(偏母膝下)에서 문학적 수업을 받아야 했던 세대들의 성향이 뚜렷해진 시기라고 정리한다(「편모슬하에서의 시쓰기」). 이것은 정치적 억압에 저항하고 그 억압에 대한 반발로 권위에 대한 반발이 활성화된 점과, 그 권위의 부정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불균형한 세계인식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타당하다.(물론 이남호의 문학적 세대 구분은 시에 편향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조금 비약하면, 문학 전반의 특질로도 환원될 수 있다.)
그렇다면 90년대 문학은 어떨까. 90년대 문학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순차적으로 잃은 세대들이 고아로 살아가는 시기이다. 새로운 세대-문학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신세대>라고 재명명된 세대-는 혼자 살아간다. 그들은 부모나 가족을 거부한다. 아내도 섹스파트너로 대체된다. 혼자만의 공간이 보장되는 원룸이나 독신자 숙소에 머물고, 타자와의 접촉이 필요하지 않은 직업을 선택한다. 여행과 레저를 즐길 줄 알고, 일이나 동료와 거리를 두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다. 이렇게 구축된 삶의 공간 안에서 스쳐지나가듯이 남들을 만나고 또 그렇게 헤어진다. 집착이나 미련이나 약속과 같은 항목은 순위에서 밀려나 있고, 개성이나 독자성이나 취미나 기호나 이기적 섹스 같은 항목이 격상되어 있다. 실상 90년대 문학은 이러한 개인주의적 사고의 탄생과 성장을 보여주는 형태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살부/편모/고아로 이어지는 세대적 특징은, 2000년대 인근 무렵 필연적인 결과를 맞이한다. 혼자만의 생활은 자기 탐색에서 한발 더 빠져 들어가 자기 분열적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사람이 생기고,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는 사람이 생긴다. 유령과 악마와 초인과 신기한 영혼과 비이성적인 현상이 나타난다. 이러한 것들을 통틀어서 <환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2000년대 우리 문학의 특기할 만한 징후 중에 하나가 <환상적인 것>들의 유입이다. 최근 우리 문학은 여기저기에서 낯설고 기괴하고 이성적으로 쉽게 납득되지 않는, 그래서 섬뜩하고 공포스러운 문학적 현상들과 마주치게 있다. 로즈메리 잭슨은 이러한 환상성의 특징에 대해 주목할 만한 견해를 표출하고 있다.

환상적인 것을 도입하는 것은 친숙함과 안락함과 친밀함을 낯섦과 불안과 기괴함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한 타자이며 은폐된 어떤 것의 암흑세계, 즉 <인간적이고> <현실적인>에 대한 한정된 틀을 벗어나 <언어Word>와 <시선Look>의 통제에서 벗어난 공간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의 환상성은 고딕 공포물로부터 오늘날 공포영화에 이르기까지 공포스러운 것과 결합하게 된다. 비교적 <안정된>시기(18세기 중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중반)에 이런 문학이 나타난 것은 문화적인 억압과, 다양한 형식의 환상예술을 통해 표현되는 대립적인 힘의 생성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을 말해준다.(󰡔환상성󰡕에서)

잭슨은 환상성의 요체를 위반과 전복에 둔다. 그녀는 정치사회학적으로 환상성을 바라보고 그 미학적 특질보다는 의미적 층위에 관심을 갖는데, 그것은 환상성이 지배 이데올로기의 억압적 속성에서 이탈하려는 전복적 동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진정한 환상성은 현실적인 풍경 속에 위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학은 오랫동안 그리고 암묵적으로 현실을 비슷하게 그려내는 작업에 치중해 왔고, 그러한 작업의 우위를 인정해 왔다. 그러나 환상성은 현실의 너머에 혹은 그 밑자리에 웅크리고 있는 비이성과 야만과 광기의 세계를 끄집어내고, 일그러진 욕망과 무의식적 위반의 성향을 일러준다. 지배 이데올로기가 가하는 통제력 밑에서 신음하는 은폐된 가치들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것은 그 자체로 위반이고 전복이다. 아니 잭슨은 위반과 전복을 인정하지 않고 그 가치를 옹호하지 않는 문학에 대해 비난한다. 환상문학은 현실의 모순과 불합리와 집단 무의식의 윤곽과 이데올로기적 쟁점을 부각시키고 이를 문학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환상문학에 등장하는 악마나 유령이나 괴물이나 신이한 동식물이나 비이성적 존재는 인간 내면에서 웅크리고 있는 잠재된 욕망의 흔적이다. 환상문학은 그 흔적을 과장해서 보여줌으로써 기존의 시각으로 감지할 수 없는 실체와 문제점을 인식하려는 사유의 형식이다. 또한 괴상한 세계나 그로테스크한 변신이나 신기한 능력 등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부정적이고 억압적인 측면이 비정상적으로 확대된 측면이다. 이러한 측면에 집중함으로써 우리를 얽매고 있는 사회적 틀과 이데올로기의 자장을 감지하도록 돕는다. 환상문학이 그 자체로 미학적 충족을 만끽하도록 하는 예술 장르가 아니라, 사회와 현실과 권력의 맹점을 부각시키고 그 문제점에 대해 비판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환상문학은 일종의 리얼리즘이 된다. 따라서 환상문학은 현실과 분리된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각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은 많은 작가들에 의해 그 계보를 형성하고 있다. 로즈메리 잭슨은 이러한 계보를 훑으며 우리에게도 친숙한 작가들이 왜 현실의 문제점을 지적하려는 의도를 지녔다고 주장할 수 있는 지를 검증한다. 그래서 광기와 비합리성과 야만주의를 수용한다는 식으로 환상문학에 내려졌던 비평적 폄하들이 실제로는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밝혀낸다. 이러한 견해에 찬동한다. 나 역시 본격 문학이 지나치게 정태적인 방식으로 현실의 양상과 문제를 취재하는 것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소설적 징후가 박절한 전통적 서사양식에 대한 반발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일단, 고무된다. 물론 개별적인 평가는 그 이후의 문제라고 생각되지만 말이다.

3.
언뜻 생각하면, 윤대녕은 환상적인 것과 거리가 먼 작가로 생각된다. 그의 소설에서 환상적인 것은 조금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 정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묘한 상황을 설정해 놓는다. 이성적으로 완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것을 토도로프 식으로 표현하면 <머뭇거림>이다. 토도로프는, 독자들이 기술된 사건을 놓고 이성적 설명과 비이성적 설명 사이에 잠시 머뭇거려야 진정한 환상성의 조건을 구비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 머뭇거림이 없다면 실재적인 문학 양식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윤대녕의 소설에서 여자들은 도저히 사라질 수 없는 상황에서 사라진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그녀들은 사라지곤 한다. 개연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만남이나 텔레파시 같은 운명적 예감을 하기도 한다. 현실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공간에 잠시 편입되었다가 현실의 중심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이러한 구조는 현실과 그 틈새에서 출몰하는 환상적 분위기로 요약될 수 있다. 남진우와 같은 평론가는 이러한 환상적 분위기를 신성에의 회귀 징후 정도로 살펴보고 있다.
잘못된 해석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견고한 해석으로 생각되지도 않는다. 내가 생각할 때, 윤대녕 소설 속의 주인공(주인공이 대게 화자)이 토로하는 경험은 현실의 틈에서 솟아나는 비정상적 징후 정도에 불과하다. 어쨌든 윤대녕은 현실적인 상황과 비정상적인 경험을 교차하여 해석상의 머뭇거림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정체성의 혼란에 휩싸인 현대인의 내면 풍경을 표현한다.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현실적인 고민과 경험을 보여준다면, 좀처럼 감지하기 어려운 내면의 무늬가 이러한 환상적 기법을 통해 새롭게 그리고 이채롭게 드러나는 셈이다.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 징후는 <도플갱어>라는 기법으로 압축하여 살펴볼 수 있을 듯하다. 또 하나의 자아 혹은 내면의 숨겨진 영혼 정도로 해석되는 도플갱어는, 같은 사람이 동시에 서로 다른 장소에 나타나거나 죽음 직전에 본인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현상이자 존재이다. 최근 이순원의 소설 「아비의 잠」에서 화자는 도처에 나타나는 쌍둥이 같은 자신의 모습에 놀라고 있다. 주위의 사람들에 의해 목격되는 그 도플갱어의 형상은, 어릴 적 화전민 촌에서 탈출하여 현실로 편입된 화자와 관련된다. 상실된 유년의 기억과 정체성의 혼란을 예고하는 것이다. 화자는 빈번하게 등장하는 자신의 또 다른 모습에 혼란해 하면서도, 잊고 싶었던 기억의 저편에서 또 다른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텍스트에서 분명하게 그 추이를 내세우고 있지는 않지만, 화자는 자살을 하거나 현실을 떠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것은 내면에 웅크린 도플갱어의 현현과 죽음이 맺는 관계를 문학적으로 상징화한 예라고 생각된다.
정영문이 최근 보여주는 복잡한 서사의 내면에도 자아와 또 다른 자아의 문제가 내재된 듯 하다. 정영문의 글쓰기는 최근 가해지는 각광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미숙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 젊은 작가의 글 속에 삼투된 도플갱어의 징후는 우리 문학의 최근 동향을 암시하는 하나의 나침반이 될 수 있다. 죽음의 징후와 함께 벌어지는 두 인물의 사투는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식과 무의식 혹은, 사회적 자아와 내면적 자아, <페르소나를 쓴 나>와 <페르소나를 제거한 나>와의 전쟁을 옮겨온 듯한 인상이다.
백민석의 경우에도 󰡔목화밭 엽기전󰡕에서 <나> 안에 감추어진 또 다른 <나>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다. <수컷 냄새>로 표현되는 내발적 징후는, 도플갱어와 같은 섬뜩한 인상의 괴물을 우리에게 구경시켜 준다. 마치 두 얼굴의 사나이에 나오는 헐크와 같은 인상의 괴물은, 우리 내면에서 도사린 도플갱어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많은 작가들이 정체성의 혼란이나 내면에 내재한 <알 수 없는 나>로 인해 고통 받는 인물의 모습을 그려왔다. 생각의 범위를 넓히면, 이러한 묘사는 거의 어떤 문학에도 나타난다. 문제는 최근 작품에 나타나는 혼란의 징후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그래서 현실에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절차와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리얼리즘을 뒷받침하는 이성은 공격을 받는다. 이성이 침해할 수 없는 묘사와 상황은 이성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혼란에 빠뜨린다. 인식적 충격이 가능하다면, 이러한 혼란은 이성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나 혹은, 정체성 상실의 정신적 위기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가능성을 제고시킨다. 실제 작품에서 얼마나 정교하게 그리고 미학적으로 형상화되었는지를 일단 제쳐둔다면, 이러한 시도는 분명 새롭고 눈여겨볼 만하다.

4.
비이성적인 존재들의 출현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초인들에 대한 탐색은 별도로 이루어진 적이 있으니, 여기서는 각도와 작품을 달리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하성란은 「여우여자」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소설을 발표한 바 있다. 소설에서 여자는 500년을 산 여우인데, 모종의 사건을 저지르고 수사관에게 쫓긴다. 수사관은 단서를 찾아 수사망을 좁혀 가고, 그 좁혀진 수사망에서 여자의 정체가 확인된다. 그러나 긴장과 서스펜스가 파생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여자의 정체가 독자들에게 싱겁게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아이의 부모는 자신들이 밭일을 하러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집으로 숨어드는 젊은 여자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여자는 산그늘에 숨어 집 안을 엿보고 있다가 아이의 부모가 집을 나서서 조금씩 멀어지면 그제야 그늘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 호박처럼 누르께하던 눈동자가 햇빛 아래에서 순식간에 짙은 갈색으로 변했다. 여자는 허리 높이의 사립문을 도약도 하지 않고 그대로 훌쩍 뛰어넘었다.

에르네스트 만델은 추리소설의 주제가 본래 범죄나 살인이 아니라, <수수께끼>라고 말한다. 범죄는 <풀어야 할 문제, 짜맞추어야 할 퍼즐의 틀>이며, 그 문제 맞추기의 과정에서 <위대한 탐정과 범죄자 사이의 싸움>과 <저자와 독자 사이의 싸움>이 진행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하성란의 「여우여자」는 제목과 도입부에서 이미 사건의 개요와 범죄자의 정체를 유출시키고 만다. 조금만 눈치가 빠른 독자들은 이 소설의 결말에서 여자로 변신한 여우가,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된 남자를 살해했을 거라고 짐작하게 된다. 따라서 「여우여자」는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추리소설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우여자」는 환상성의 표출을 통해 현실의 문제와 특유의 미학을 보여주는 작품인가. 500년 묵은 여우는 그 자체로 초자연적인 설정이다. 합리적인 방식으로 설명하거나 실증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독자들은 초자연적인 상황을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경이의 형태로 이 소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미학적 반전이나 인식상의 충격을 기대하기 어렵다.
「여우여자」의 문학적 함의도 모호하다. 하성란은 널리 알려진 구미호 전설을 비틀어서, 우리 사회의 소수자가 겪는 아픔을 보여주려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여우여자」의 숙원이 붕괴되는 자리는, 인간의 어떤 본질적 속성을 대변하지 못한다. 「여우여자」가 배신에 상심하는 장면에서 이형진과 「여우여자」의 감정적 교류와 은원관계는 절실하게 작동하지 못한다. 그러니 인간 세계의 추악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소설적 전략도 그리 성공하지 못한다.
이러한 실패는 환상성이 현실의 일그러진 면을 과장해서 부각시키거나 인간 내면의 욕망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여 탄생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로즈메리 잭슨은 “유령, 그림자, 흡혈귀, 늑대인간, 분신, 부분적인 자아, 반영물(거울), 봉쇄물, 괴물, 짐승, 식인종> 등은 <성(gender)과 종(種)의 엄격한 경계 설정을 없애는 데 관심을 둔다.”고 전제하고, “‘정상적인’ 지각을 전복하고 보는 것의 ‘사실주의적’ 방식을 무너뜨리려는 환상물의 시도 속에서 여성과 남성의 성적 차이는 전복되고 동물, 식물, 광물 등의 종의 구분 역시 흐려진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를 빌려보면, 하성란의 「여우여자」는 괴물이나 식인종에 가까운 요괴로 성과 종의 경계를 허물고 전복시키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여우여자」는 실제로 정상적인 지각을 전복시키지도 못하고 사실주의 방식에 커다란 충격을 가하지도 못한다. 결과적으로 21세기에 재등장한 「여우여자」는 여름밤의 더위를 식히기 위해 고안된 삼류 괴물의 후예에 불과하다. 우리는 여우의 현대판 전설 하나를 얻어들을 따름이다. 이것은 환상성이 현실에 잘못 개입하거나 현실을 비판하지 못한 좋지 못한 선례로 생각된다.(이러한 태작을 만드는 이유는 안일한 사건 전개와 부정확한 묘사와 어설픈 추리 과정에 있기도 하다.)

5.
이평재의 「마녀물고기」와 「푸른고리문어와의 섹스」와 「불가사리 냄새」는 환상성을 이해하는 데에 좋은 재료가 된다. 먼저 이 세 작품은 몇 가지 공통점과 연결점을 지닌다. 일단 환상적인 것들의 출현을 차치한다고 해도, 첫째, 해양생물의 이미지가 소설의 핵심 모티프로 작용한다는 점, 둘째, 소설가의 잔영이 끊임없이 문면에 어른거린다는 점, 셋째, 화자는 모두 1인칭 남자라는 점, 넷째, 소설의 처음과 끝이 윤환하는 구조를 지닌다는 점이다. 자세하게 살펴보면, 「마녀물고기」에는 해그피시라고 불리는 먹장어가 나타나고, 「푸른고리문어와의 섹스」에는 맹독을 가진 푸른고리문어의 환영이 나타나며, 「불가사리 냄새」에는 불가사리에 대한 언급과 상상이 나타난다. 「마녀물고기」에서 소설가인 친구는 해그피시에 대한 정보를 화자에게 제공하여 화자의 기억을 자극하고, 「푸른고리문어와의 섹스」에서 화자는 푸른고리문어에 대한 소설을 쓰며, 「불가사리 냄새」에서도 화자와, 불가사리에 대한 소설을 쓴다고 수다를 늘어놓는 동료가 역시 소설가이다. 더구나 「불가사리 냄새」의 마지막에서 한 작가가 등장해 이전까지의 소설이 자신의 창작물임을 밝히고 있고, 「푸른고리문어와의 섹스」에서의 화자는 자신이 전에 「불가사리 냄새」를 발표한 적이 있다고 공공연하게 밝히고 있다.
이 세 작품의 복잡하고 연계적인 특성은 환상성의 문학적 표출과 관련이 있다. 이평재는 자신의 소설 속에 환상성을 도용하기 위해서, 자신의 소설을 또 하나의 제목으로 하는 단편 소설과 그 작가를 소설 내에 끌어들인다. 「푸른고리문어와의 섹스」에서 푸른고리문어에 대한 소설을 쓰는 작가가 그러하고, 「불가사리 냄새」에서 불가사리에 대한 소설을 쓰는 미류와, 미류를 소설로 그리고 있는 또 하나의 작가가 그러하다. 이들은 자신들이 쓰는 소설 속의 황당한 설정을 스스로도 회의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평재는 이러한 소설가들의 회의를 빌어, 자신이 소설 속에 환상성을 끌어들인 것을 변명하려 하는 듯하다. 이 변명을 새겨 들어보면 재미있는 특징이 발견된다.

오직 미류의 황당한 소설 속에서 후크 선장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불가사리가 머릿속을 가득 메웠을 뿐이었다. 얼마 전 그녀의 소설을 읽어본 몇몇 친구들과 나는 무슨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를 썼느냐, 상태가 안 좋은 거 아니냐 하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우리는 무척 당황했던 것이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을 감추려고 모두 한마디씩 거들어 그녀의 소설이 우습다는 식으로 떠벌리고 되었고, 어느 한 친구는 아예 그런 비현실적인 글은 소설도 아니라는 식으로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누가 옆집 남자의 뺨에 들러붙은 불가사리 모양의 검붉은 덩어리를 바라보며 그녀의 소설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힐난할 수 있을 것인가.

위의 화자가 사는 세상에 이변이 일어난다. 며칠간 비가 내리더니, 이상 번식한 불가사리인 <붉은 덩어리>들이 인간의 신체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괴상한 현상이 일어난다. 처음에는 방송으로 보도되다가, 화자에게 목격되기도 한다. 화자는 미류라는 동료 소설가의 소설을 떠올린다. 왜냐하면 미류의 소설 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된다고 타박해 버린 소설이 현실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토도로프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 즉 상식적이고 과학적인 절차와 논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를 <경이(the marvelous)>라고 했다. 위의 상황은 일단, 경이에 근접한다. 불가사리가 사람을 공격하고, 그로 인해 성격이 유순해지는 현상은 경험적 질서와 현실 습관으로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이것은 현실의 리얼리즘적 서사 양식에 일대 혼란을 가져온다. 그래서 동료 소설가들은 일종의 불안을 느낀 것이다.
이러한 불안은 동료 소설가들뿐만 아니라, 「불가사리 냄새」 전체를 자신의 창작이라고 주장하는 소설가의 불안이기도 하다. 그는 소설의 말미에 등장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자 여러분, 저는 감히 이 소설을 여기에서 끝내려고 합니다. 불행하게도 저는 지금, 몇 장의 원고를 더 채워 이 소설의 도입부분과 결말부분을 똑같이 맞물려 놓으려 한 제 자신의 애초 의도에 염증을 느껴버리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이 빈약한 글을 집어던지지 않고 읽어준 사람이면 이쯤에서 제가 어떻게 소설을 마무리할 것인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딜레마에 빠져버린 것이지요. 맞습니다.”.
이 소설가는 이평재와 거의 흡사한 분위기를 풍긴다. 소설의 체계에 대한 자의식을 드러내고, 소설이 지닌 무력감을 실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의식과 무력감은 환상적인 것들의 대거 유입을 처리하지 못하는 소설가의 고뇌에서 파생된다. 환상적인 것들의 대량 유입은 현실적인 시야를 멀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평재는 이 소설에서 화자인 소설가와, 본인 그대로를 닮은 소설가로 등장해서, 자신의 소설 속에 나타난 환상성을 지우려는 것이다. 즉, 소설 속의 경이가 경이로 남지 못하도록 마감질을 한다.
이것은 다시 토도로프의 견해를 빌리면, 초자연적인 현상을 이성적이고 인과적인 절차와 증거와 논증 과정으로 증명해 내었을 때 나타나는 <기괴(the uncanny)>가 된다. 처음에는 이성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과학적인 추론과 논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이를 경험적 질서와 상식적 설명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 기괴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토도로프는 경이나 기괴를 환상성의 영역에서 몰아낸다. 왜냐하면 독자들이 초자연적인 현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이성과 반이성, 논리와 초논리, 과학과 비과학, 상식과 상식 밖의 사고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과정이 생략되기 때문이다.
토도로프는 <머뭇거림>을 환상성의 요체로 생각한다. 자연적인 설명과 초자연적인 설명 사이에서 독자들이 머뭇거릴 때, 낯선 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고 초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배제할 수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당혹감과 이성적 교란 작용은 로즈메리 잭슨 식으로 말하면, 문학과 현실을 바라보는 습관적 시선과 타성적 태도에 전복을 가져오는 힘이 된다.
이평재의 소설 「푸른고리문어와의 섹스」는 이러한 교란 작용, 즉 머뭇거림이 잘 구현된 소설이다. 이 소설의 화자는 푸른고리문어에 대한 소설을 쓰는 소설가이다. 그는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푸른고리문어에게 성기를 물리는 악몽을 꾸게 되고, 실제 여자 친구와의 정사에 무기력해지는 증상을 앓는다. 소설은 여자 친구의 도발적 성애의 제안으로 시작되고, 그 도발적 제안은 실제 정사로 연결된다. 문제는 정사 도중 화자에게 나타나는 환각이다. “그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내 다리 사이에 그녀가 아닌 푸른고리문어가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나는 뜻하지 않은 상황에 놀라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온몸을 뒤틀며 푸른고리문어의 입에서 성기를 빼내려고 발버둥쳤다.”
화자의 입장에서 묘사되는 장면은 독자들에게 일종의 환각을 전해준다. 자신 있게 환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푸른고리문어라고 착각한 물체가 실제로는 화자의 섹스 파트너였다는 진술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푸른고리문어의 적갈색 머리가 검은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푸른고리문어의 찢겨진 머리통과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번갈아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며 나는 심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 뒤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의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여자는 푸른고리문어로 착시된다. 이것은 일단, 기괴이다. 남자의 환각은 착각으로 판정되기 때문이다. 소설에 대한 강박관념과 이상할 정도의 집착이 낳은 기괴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말미에는 또 다른 환상이 나타난다. 그 환상은 좀처럼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위의 경우처럼 친절한 설명을 동반하지도 않는다.

믿어지지 않는 장면, 나의 성기가 있던 자리에 검은 공동이 생겨나 있는 게 아닌가.
구멍.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상태에 사로잡힌 나는 꼼짝 않고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뻥 뚫린 구멍 속에 또 한 겹의 구멍이 숨어 있었다. 뭔가, 나는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그것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깊은 신음을 속으로 삼키며 호흡을 멈추었다. 나의 성기가 있던 자리에 생겨난 구멍 안에 그녀의 성기가 한껏 젖은 채 열려 있었다. 나는 구멍 속의 구멍을 향해 조심스럽게 가운데 손가락을 갖다댔다. 그러자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푸른고리문어와 그녀, 그녀와 나, 나와 푸른고리문어가 일체가 되는 순간이었다. 할(喝)!

유감스럽게도 푸른고리문어와 그녀와 나의 일체감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러니까 실제적인 현상인지 환각 자체에 불과한지를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는 단서는 없다. <소설가-나>의 이전 행각을 참조했을 때, 이것이 착각에 불과하다고 추론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세 개체의 일체성 여부가 착각이라는 증거는 없다. 그렇다면 자연적인 설명과 초자연적인 설명 사이에서 독자들은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자신이 읽은 소설 자체에 대해 다시 되돌아보게 되는 것도 두 갈림길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을 일방적으로 맹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합리적인 해석으로 길들여 그 가치를 폄하하는 경우와는 달리, 독서의 긴장감을 오랫동안 확보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토도로프 식의 머뭇거림은, 소설의 실감을 반감시킬 수 있다. 환상과 현실이 길항 관계를 추구함으로써 문학과 현실의 일정한 상관성을 제시할 수 있는 경우에는 그 길항은 나름대로 의미를 생성할 수 있지만, 일정한 상관성을 올곧게 제시할 수 없는 경우에는 이러한 길항은 방황으로 끝나고 만다. 따라서 환상성에 대한 일방적 옹호로 머뭇거림이 작용할 수는 없다.
반면 상대적으로 폄하 받는 기괴일지라도 현실과의 상관성을 밀접하게 획득함으로써, 의미 있는 소설 미학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평재의 「마녀물고기」가 대표적이다. 이 소설은 도입부부터 화자의 이상 징후를 소개하고(물론 이러한 이상 징후는 소설의 말미에서 온당하게 감지된다), 환상적인 복선을 설치하여 독자들을 미궁으로 몰아넣는다. 화자가 만났다는 마녀물고기의 정령이, 천사 몽마(夢魔) 서큐버스의 현신인지 아니면 정신 이상으로 생겨난 공상의 산물인지 분명하지 않다. 물론 소설의 말미에서 이 마녀물고기의 정령인 여자는 정신병자의 무의식적 욕망이거나, 성폭행 파렴치한의 간특한 핑계로 결말지어진다.
그러나 정령인 여자의 현신은, 화자의 목소리와 고백의 진실성에 현혹되는 독자들을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토도로프 식의 머뭇거림이 소설의 여기저기에서 독서의 긴장감과 함께 유인력을 발휘하는 셈이다. 그러나 소설의 결말은 이러한 머뭇거림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즉 자연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해지면서, 기괴로 안착된다. 이러한 기괴로의 기울어짐을 통해, 「마녀물고기」는 상당한 의미 생산력을 확보한다. 이러한 의미 생산력을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다시 읽어보자. 문제가 되는 지점은 남자가 주장하는 여자의 인상착의이다.

여자는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나를 찾아왔다. 하지만 내가 정신병동에 갇히기 전, 한 달 사이에 세 번씩이나 비가 내렸는데도 여자는 단 한번도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미 여자에 의해 광적인 섹스에 길들여진 나는 온통 그 짓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빳빳하게 발기한 성기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남들의 시선은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그러기를 여러 날, 난 잔뜩 독이 오른 성기로부터 전해져 오는 집요한 부추김을 느끼게 되었다. 저기 저 여자 보이지? 주위엔 아무도 없어. 뭘 망설이는 거야, 어서 공격해! 하고 말이다.

남자는 음흉한 욕망에 시달린다. 광적인 성욕은 사회적 체면과 인간적 도리를 도외시하게 만들고 물리적 폭력으로 한 여자를 파괴하게 만든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평상인의 눈에 이러한 남자의 욕구는 비정상적이고 위험한 것으로 여겨진다. 비록 서큐버스의 농간일지 모른다는 가정과 믿음을 가지고 지켜보아도, 가볍게 용인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서큐버스가 작중 인물의 말대로 “관능적으로 타락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황된 이야기”이며 “종교적인 직분을 앞세워 도덕적인 생활을 하는 척하며 온갖 방탕한 행동을 일삼는 자들이 자신들의 죄의식을 희석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희생양”이라면, 우리는 모두 얼마만큼의 서큐버스와 공생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서큐버스의 진정한 정체는 타인에 대해 거침없는 욕망이 자행되고 사회의 곳곳에서 성적 방종이 기승을 부리는, 이 시대의 타락한 정신인 것이다.

6.
2002년 벽두, 두 영화가 기억에 남는다. 둘 다 짙은 환상성을 깔고 있는 작품이었다. 하나는 󰡔The Others󰡕이고 다른 하나는 󰡔뷰티풀 마인드󰡕이다. 두 작품은 강력한 반전을 매복하고 있다. 관객들은 이 매복에 걸려, 정공법으로는 좀처럼 인지하기 어려운 현실의 어떤 측면을 보게 된다. 리얼리즘 거울로 현실을 비추었을 때 소외되거나 감추어지는 부분을, 환상적 반전을 통해 집중적으로 주목하게 된다고나 할까. 환상성은 마치 볼록거울처럼 현실의 틈새 혹은 응달에 생겨난 흠과 결을 부풀려서 확대해 놓은 것 같다.
󰡔The Others󰡕는 인간이 유령에게 느끼는 두려움을, 거꾸로 유령이 인간에게 느끼는 두려움으로 환치하여, 타자의 공포성을 이채롭게 각인시킨다. 뿐만 아니라, 타자의 존재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 역시 올곧게 정립하지 못하는 인간의 속성을 빗대어 진단한다. 이러한 진단은 유령/인간, 타자/자아의 문제를 되새기게 만든다. 따라서 󰡔The Others󰡕의 전언은 나름대로 되새겨볼 구석이 많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이러한 전언이 깜짝쇼에 그치고 만다는 점이다. 이러한 반전에 이은 인식적 충격은 놀라운 데가 없지 않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폐단을 낳기도 한다.
이것은 반전의 위치와 관련이 깊다. 󰡔The Others󰡕의 반전은 결말의 목전이다. 우리가 보고 있었던 존재가 유령이고 인간이 유령의 삶에 방해가 될 수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자마자 영화는 종결된다. 결말의 목전에서야 환상성이 인지되고 또 해결되면서 현실과의 관련성이 암시되는 것이다. 󰡔뷰티풀 마인드󰡕는 약간 다르다. 일단 반전의 위치가 다르다. 이 영화의 반전은 결말에 이르기 위한 중간 기착지에 불과하다. 반전을 영화의 최종 목적에서 끌어내림으로써, 다른 목적을 보다 뚜렷하게 담보하게 된다.
언어는 세상의 창이고, 문학은 현실의 거울이다. 󰡔뷰티풀 마인드󰡕를 보면, 창가에 책상을 놓고 공부하는 수학자가 나온다. 그는 노트 대신에 창문에 필기를 한다. 창문 밖의 세상을 보면서 그것을 언어로-그의 경우에는 수(數)로-정리하려 한다. 수학자라는 그의 직업답게 럭비를 하는 청년들, 비둘기들의 움직임, 도둑을 좇는 여자의 행로 등을 수학적 변수로 상정하고 그 흐름과 방향과 위치를 예측할 수 있는 방정식의 모델을 구하려고 연구한다. 그러나 그의 연구에는 커다란 결함이 있다. 그가 세상의 바깥을 서성이며 세상을 쳐다본다는 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폐쇄적 세계-기숙사 방이나 연구실 혹은 어두운 무의식의 공간-에 스스로를 가두고 세상을 훔쳐보듯 엿본다는 점이다. 그는 수학적 이론을 적용하는 것만큼 도둑을 좇는 여자를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고, 창밖 세상을 구경하는 것만큼 실제로 럭비를 하거나 비둘기를 돌보는 것이 유쾌하다는 사실을 모른다. 아니,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결국 그는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자기와만 대화하고 자기만을 떠받드는, 심지어는 자기만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인물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인물들과의 교류는 환각에 불과하다. 착각이고 자기기만이며 정신분열적 환상이다. 현실과의 심각한 괴리를 야기하고 가족의 안위를 위협에 몰아넣기까지 한다.
영화의 최종 목적은, 내쉬가 자기가 믿던 세상이 환상이라는 점에 놀라고 그 놀람을 관객에게 전이시키는 것에 있지 않다. 내쉬가 이 환각과 공존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있다. 환각이 필요한 세상에서, 어떻게 환각과 싸워야 할 것인가를 탐구하는 것에 있다. 우리는 자기만의 세계를 따로 마련해둘 필요가 있다. 가끔 아무도 없는 독방에 들어가 심연 깊숙이 가라앉은 과거와 미련과 공포와 미움과 열등감과 해소할 수 없는 열망과 말하기 어려운 부끄러운 욕망의 찌꺼기를 들여다보며 위무할 필요가 있다. 난폭하고 험악한 현실에서 받은 상처와 고통을 조용히 치료한 장소와 시간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 방은 아주 가끔씩만 개봉되어야 하고, 타인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위치해야 한다. 너무 자주 개봉되거나 손쉽게 알려진다면, 그 방의 침묵은, 세상의 소란만큼 부담스러운 것이 되기 십상이다. 󰡔뷰티풀 마인드󰡕는 이러한 방의 소재를 보여주고, 그 개봉 정도를 조절하려고 애쓰는 한 남자의 투쟁기인 셈이다. 얼마나 자주 그 방으로 가야 되며, 그 방안의 물건을 얼마나 밖의 세상에 내놓아야 하는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인 현실과 세상을, 비축된 비상식량인 환상과 무의식과 어떠한 비율로 섞어야 하는지.
환상이 예술에서 필요하다면 그 환상이 반대편에 위치하는 현실의 문제적 측면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연결의 방식과 강도와 순번이 다양할 따름이다. 어떤 경우에는 내쉬처럼 환각을 현실의 옆에 두고 살아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환각은 이제 현실이고, 그 환각을 다루는 문학은 이미 현실의 특정 국면을 부각시키는 볼록거울인 셈이다. 환상문학이 존재할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볼록거울에 의해, 일그러진 삶의 틈새 사이로 보이는 진실의 두께와 층위 때문일 것이다.

7.
최근 환상성과 관련되어 인상적인 기억을 남긴 소설이 한 편 제출되었다. 오랜 침묵을 깨고 기지개를 켜고 있는 최인호의 「유령의 집」이 그 작품이다. 이 작품은 독특하면서 동시에 여러 모로 단단한 의미망을 구축하고 있다. 이것은 견실한 의미망과 환상적 미학 체계-주인공의 환각일 수도 있다-가 적절하게 가미되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실직당한 남자의 이야기를 먼저 끌어내야 한다. 회사의 차장을 맡고 있던 초점화자 그는, 어느 날 회사로부터 해고통보를 받는다. <그-회사원>은 처음에는 실직을 실감하지 못하고 다음날 바로 출근했다가 강제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그리고 집에서 며칠을 지내면서 아내와의 보이지 않은 신경전을 벌인 끝에 가족들로부터 암묵적인 추방을 당하게 된다. 그 이후 남자의 황당한 모습이 문면에 포착되기 시작한다.
남자는 <도시의 많은 곳>을 배회한다. 그가 가는 곳은 처음에는 일상적인 장소이다가 점차 특수한 장소로 변해간다. 이것은 현실에 대한 인상이 차츰 흐려지고 있음을 반증한다. 그러다가 그는 깨닫는다. 아무도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고 그 누구와도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참 만에 사내는 잊혀진 친구를 생각해내고, 옛 친구의 집을 방문한다. 문을 열고 나온 친구는 사내를 기억하지 못하고 문전박대한다. 사내는 친구의 이상한 행동에 놀라면서도 기억을 일깨우려고 계속해서 문을 두드린다. 문제는 문소리에 나온 이웃집 사내로부터 자신이 찾아온 집은 빈집이며, 이를 확인하러 온 이웃들로부터 친구가 오래 전에 죽었음을 그래서 친구의 집에는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음을 알게 된 것이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사내가 만난 친구는 죽은 친구의 유령이거나, 친구를 만났다고 느끼는 사내의 착각이거나 할 것이다.
허깨비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경험은 또 한 차례 이루어진다. 사내는 은행에 공과금을 내러 갔다가 영수증을 놓고 간 여인을 기억하게 되고, 결혼식장에서 다시 만났을 때 알아보게 된다. 무작정 여자를 따라나서는 남자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다. 헤어질 수 있는 고비마다 여인이 자신을 “화장실에서 나와 주기를 기다리는 다정한 여인처럼” 기다리고 있으며, 자신 또한 여인을 미행하다 “아내가 볼일을 보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자상한 남편처럼” 기다리게 되었다.
여인과의 기묘한 숨바꼭질은 은행에서 주은 여인의 전화요금 영수증을 이용해서 전화를 걸고 약속 장소로 나가게 되면서 가중된다. 여인과 힘겹게 접선하기로 한 여관방에서 죽은 친구가 나타나고, 친구가 그 여인이 자기 아내임을 밝힌다. 비현실적인 이야기의 끝은 상당히 모호하다. 남자는 여인과 만남을 가진 다음날, 아내의 부탁으로 장례식장을 찾아가게 되고, 거기서 영정 속의 여인이 대단히 낯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논리적인 관점에서 이 소설은 황당하다. 핵심 줄거리를 간추리면, 어떤 실직한 남자가 죽은 친구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그 기억을 잊었다 정도가 된다. 이렇게 논리적으로 유보사항을 두고 읽어도 이 소설은 허점투성이다. 죽은 남자의 환영을 본 것이 과연 사실이며, 미행한 여자가 죽은 남자의 아내라는 점은 어떻게 증명될 것이며, 아내가 장례식장에 보낸 것은 실제로 여자와의 만남을 가졌던 날인데 어떻게 초상 속의 여인과 밤을 보낸 여인이 동일인일 수 있으며, 설령 이러한 의문이 모두 해결되더라도 기억을 잊었다고 주장하는 남자의 행적과 발언을 모두 믿을 수 있을 것인가.(물론 이 소설은 3인칭 시점을 이용하고 있어 초점화자의 내적 독백에 독자들이 현혹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모든 질문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논리적 설명을 포기하던가, 남자를 완전히 정신병자로 취급하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남자의 입장에서 이 소설을 들여다보면, 매우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남자는 꽤 나이를 먹었음에도 도시의 대부분에 무지하다. 전화도 걸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친구의 죽음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며, 어쩌면 절친했을지도 모르는 친구의 아내에 대해서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백치상태에 있는 아이처럼 세상과 타인에 대해 낯설어한다.
최인호에게 낯섦은 돌발적인 주제가 아니다. 최인호의 30년 전 소설 중에 세계에 대해 낯설어하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이 있다. 「타인의 방」은 매우 강렬한 인상을 지닌 작품인데, 그 인상은 환상성에서 유래한다. 초점 화자는 “그-회사원”이다. 그는 예정된 출장에서 하루 일찍 들어온다. 문을 두드리며 아내를 찾는 그에게, 이웃사람들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 역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이웃에게, 자신의 집임을 당당하게 과시하며 불신에 대해 못마땅한 눈초리를 보낸다. 아내는 집을 비운 상태이다. 그는 텅 빈 집에서 목욕을 하고 휴식을 취한다. 그런데 잠갔던 샤워기가 켜지고, 붙이지도 않았던 석유화로가 점화되며, 누군가의 인기척이 희미하게나마 주위에 울려 퍼진다. 점차 그 강도가 강해지더니, 결국에는 이상 징후가 나타난다.

그것은 그래도 처음엔 조심스럽게 시작되었다. 허지만 그들의 대상이 무방비인 것을 알자, 일제히 한꺼번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날뛰기 시작했다. 크레용들이 허공을 난다. 옷장 속의 옷들이 펄럭거리면서 춤을 춘다. 혁대가 물뱀처럼 꿈틀거린다. 용감한 녀석들은 감히 다가와 그의 얼굴을 슬쩍슬쩍 건드려 보기도 하였다. 조심해, 조심해. 성냥갑 속에서 성냥개비가 중얼거린다. 꽃병에 꽂힌 마른 꽃송이가 다리를 번쩍번쩍 들어올리면서 춤을 춘다. 내의가 들여다보인다. 벽이 서서히 다가와서 눈을 두어 번 꿈쩍거리다가는 천천히 물러서곤 하였다. 트랜지스터가 안테나를 세우고 도립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재떨이가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소켓 부분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낙숫물이 신기해서 신을 받쳐 들던 어릴 때의 기억처럼 그는 자그마한 그는 자그마한 우산을 펴고 화환처럼 황홀한 그의 우주 속으로 뛰어든 셈이다. 그는 공범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때였다. 그는 서서히 다리 부분이 경직해 오는 것을 느꼈다.

인용된 부분을 계속 읽어 가면 남자는 석상이 되는 것 같다. 소설에서는 “새로운 물건”으로만 표기되어 구체적인 형상을 지목할 수는 없지만,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어떤 것”이 되는 듯하다. 이 소설에서도 동일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초점화자의 고백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 다리 부분이 경직되며 온몸이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변하는 상황을 납득할 수 있을까. 더 연장하면 물건들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부활하며 활성화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어느 정신이상자의 헛소리로 치부해야 하는가.
한층 중요한 문제는 환상적 서술의 이면에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직언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남자가 석상이 되고 있는 것이 마치 “<부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지치고 피곤한 회사원에게 사물들이 활개를 치면서 소란을 피우는 장면은, 그리고 자신이 그 사물들 사이의 일부로 편입되는 상황은 일종의 해방처럼 여겨진다.
무엇으로부터? 이 소설에서 일단 끄집어낼 수 있는 답안은, 불성실하고 정숙하지 못한 아내로부터이다. 또 지치고 피곤한 회사원을 만들어내는 일상의 구속으로부터이며, 친절하지 못하고 타인을 의심하는 이웃으로부터이다.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집에서조차 타인의 존재를 느끼며 알 수 없는 불편함을 경험하는 자신으로부터이다.
「유령의 집」에서도 답을 찾을 수 있다. 무조건 부하직원을 해고시키는 상사로부터, 상사의 직위를 거리낌 없이 차지하는 부하직원으로부터, 매몰찬 도시의 인상으로부터, 일면식도 없으면서 친지라는 명목으로 누군가를 이용하는 불편한 관계로부터, 이 사실을 알면서도 체면과 도의적인 책임을 지기 위해서 수행해야 하는 위선으로부터,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현실의 냉혹함으로부터, 그리고 친구의 죽음조차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아등바등 살아야 했던 이기적인 자기로부터의 해방을 점쳐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살면서 모멸스럽고 불편해지는 느낌은 익숙하던 현실이 갑자기 멀어지면서 낯설어지는 느낌으로 온다. 우리가 발 딛고 있다고 믿는 세계는 아득히 추락하고, 정방형으로 구획되었다고 믿었던 현실은 순식간에 일그러진다.
나는 최인호의 문학이 이러한 세계의 지각 변동과 현실의 붕괴를 언어로 잡아낸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진동의 폭과 균열의 정도만큼 그의 소설에서 리얼리즘적 서사는 일그러진다. 마치 깨진 거울 사이로 난 모상의 틈새처럼 우리가 연속적으로 이어놓을 수 없고 쉽게 풀어낼 수 없는 간격이 생겨난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환상성은 이러한 간격의 소산이어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우수한 환상성은 이러한 간격 조정에 성공한 경우이다. 최인호의 30년 전 소설과 지금의 소설의 상동성에서 힌트를 얻듯이, 세계의 낯섦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의 공포는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환상성인데, 그 환상성이 어떤 현실을 보여주는가 하는 것이다.
현실의 활주로를 타고 오르는 환상성은 현실의 산물이어야 한다. 환상성은 안착할 수 있는 지상의 영역을 확보한 후에 그 상상의 영공을 장악해 나가야 하며, 고도가 높아질수록 그 폭이 넓고 튼튼한 현실의 활주로를 배면에 깔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의미의 진폭과 파장이 유효적절한 환상성이 탄생되며, 현실의 일그러진 부분을 조명하고 확대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삶과 세계의 진실과 현실을 무시한 환상은 일종의 공상에 불과할 것이고, 개인적인 그리고 자족적인 꿈에 그치고 말 것이다.





김남석․
199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저서 󰡔비평의 교향악󰡕 오태석 연극의 미학적 지평󰡕 등
․현재 고려대, 서울예술대,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본지 편집위원

추천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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