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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특집/곽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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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환상문학, 환상의 리얼리티?
삶의 이원성과 화려한 환상의 유희
―독일낭만주의 작가 에. 테. 아. 호프만의 환상문학―
곽정연(번역가)
“나는 허상으로 존재하고, 내 실체는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나 스스로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이며 나는 나 자신과 분열되어 있다.”
에. 테. 아. 호프만(E.T.A. Hoffmann, 1776~1822)의 장편소설 악마의 묘약(Die Elixiere des Teufels)(1815/16)의 주인공 메다두스는 우연히 만난, 자기와 똑같이 생긴 빅토린을 절벽 밑으로 떨어뜨리고, 한편으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 신기하게도 스스로를 빅토린과 동일시하면서 자아가 분열되는 것을 느끼며 혼란해 한다. 가톨릭 수도사인 메다두스는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한 여자에 대한 그리움을 억제할 수 없어 수도원을 떠나게 되는데, 수도원을 나서자마자 뜻하지 않게 살인을 저지르고 자기가 죽인 사람의 역할을 하면서 자신의 욕정을 채우고 살인을 하게 된다. 범행을 저지른 곳에서 도망친 메다두스가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할 때마다 죽었다고 여겼던 빅토린을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묘한 상황에서 다시 만나게 되면서 떨쳐버리고 싶은 과거를 기억하게 된다. 메다두스가 감옥에 갇혔을 때 바닥을 문지르는 소리, 달가닥거리는 소리, 긁어대는 소리,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부수어진 바닥의 틈사이로 칼을 손에 쥔 팔 하나가 튀어 올라온다. 그때 누군가가 밑에서 “혀-형-제! 형-제! 메다-두스, 끌어올려 줘…… 잡아, 잡아!…… 부숴…… 부숴…… 수-숲으로…… 숲으로 가자!”라고 더듬거리며 말한다. 감옥 바닥을 뚫고 올라와 벌거벗은 상반신을 들이대며 광기를 띤 비웃는 듯한 끔찍한 미소를 지우며 자기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유령처럼 그를 쳐다본다. 메다두스는 어쩔 수 없이 그자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정신을 잃는다. 화가이고 음악가이기도 한 작가답게 호프만은 실감나는 소리를 동원해 독자에게 그림처럼 그릴 수 있는 소름끼치는 환상적 장면을 생생하게 선사한다. 호프만은 이러한 환상적인 장면들에 빅토린 그리고 떠돌아다니는 영혼인 메다두스의 조상과 같은 기이한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이것이 현실에서 일어난 일인지, 꿈에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단지 주인공의 환영인지 독자들을 모호하게 만든다. 1970년대에 환상문학에 대한 학문적인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한 츠베탕 토도로프는 독자들이 느끼게 되는 망설임이 환상문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한다.
호프만은 18세기말부터 유행하였던, 영국의 대표적인 환상문학 장르인 고딕소설의 소재를 활용해 괴기스럽고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이러한 고딕소설을 넘어서 주인공 시점에서 서술하게 함으로써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상세히 묘사하면서 그의 행동과 인물을 심리학적으로 치밀하게 구성한다. 빅토린은 소설의 표면 구조에서는 메다두스의 이복동생으로 밝혀지지만, 다른 한편 메다두스의 무의식적 욕망을 표현하는 그의 제2의 자아라고 해석되어질 수 있다. 메다두스가 그의 또 다른 자아를 자신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일 때까지 그의 방황은 계속된다.
이러한 자아분열을 어떻게 극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것인지는 호프만 문학의 주요주제이다. 그의 작품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무의식적 욕망, 이상 세계에 대한 동경, 현실세계에 대한 불만으로 자아가 분열되는 것을 경험한다. 이러한 주제를 그는 환상적 방법으로 구체화하면서 독자의 주목을 끈다. 환영인지 실체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빅토린의 출현은 바로 메다두스의 정신적 분열을 표현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면서 독자에게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 자체를 의심하게 만들어 공포감을 자아내면서 몰입하게 하는 기법이기도 하다.
모래남자(Der Sandmann)(1816)에서는 평화로운 나타니엘의 삶이 어렸을 적에 두려워하던 아버지의 지인, 코펠리우스와 닮은 코폴라의 출현으로 혼란스럽고 섬뜩해진다. 나타니엘은 친구에게 “내 모든 사고를 혼란시키는 이런 정신적 분열을 느끼면서 내 어찌 집에다 편지를 쓸 수가 있겠는가!-뭔가 끔찍한 것이 내 삶에 침입했다네!-나를 위협하는 소름끼치는 운명의 어두운 예감이 마치 검은 구름의 그림자처럼 내 위를 덮쳐 오고 있어, 우정어린 햇살이 전혀 스며들지 못하게끔.”이라고 한탄한다. 나타니엘은 코폴라를 보면서 어렸을 때 느꼈던 공포감에 빠져들면서 점점 자기 자신에게 침잠하게 되고. 자신의 애인도 잊은 채 자신이 하는 말에 감탄하면서 ‘아아- 오오-’만 반복하는 자동인형인 올림피아를 사랑하게 된다. 점점 자아도취에 빠져 외부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면서 현실감각을 잃게 되고 그는 결국 자살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 호프만은 억압된 과거의 문제가 어떻게 현재에 회귀하여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해체시키면서 파멸에 이르게 하는지 코폴라라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을 출현시킴으로써 환상적으로 풀어나간다.
이렇게 호프만의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자신의 내면세계와 일상세계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사회에서 소외되어 범죄자가 되거나, 정신이상이 되거나,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자아분열은 현실이 일상적인 세계와 자연적인 규칙을 벗어나는 환상적인 세계로 나뉘면서 구체화된다.
자아분열이 극복될 수 있는 길이 조금씩 보이는 것은 호프만의 동화 금항아리(Der goldne Topf)(1814)에서 이다. 시적 정서를 지녔지만 졸업 후 관직을 맡고 남들처럼 출세할 생각을 하고 있는 대학생 안젤무스는 어느 날 엘베강에서 홀리는 듯한 기묘한 목소리로 노래 부르는 푸른 눈을 한 뱀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 이 뱀은 일상세계에서는 도서관장이면서 동시에 환상적인 세계에서는 열정으로 죄를 짓고 쫓겨 난 정령인 린트호르스트의 딸, 세르벤티나이다. 린트호르스트의 집에 들어서면 기묘한 꽃과 곤충들, 새들이 움직이며 속삭이는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안젤무스는 자연의 세계, 시의 세계를 보여주는 세르벤티나와의 사랑을 키우면서 자신 안의 예술적 능력을 연마하게 된다. 안젤무스의 시민적 자아와 예술적 자아의 분열은 소시민적인 속물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파울만 교감의 딸인 베로니카와 예술의 세계로 이끄는 세르펜티나에 대한 사랑 사이의 방황으로 표현된다. 결국 안젤무스는 소시민적 행복의 답답함을 깨닫고 예술세계에 대한 믿음을 키움으로써 세르펜티나와 결혼해 기쁨과 환희 속에서 아틀란티스에서 살게 된다.
소설 속의 화자는 이러한 안젤무스를 부러워하면서 궁핍한 현실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다. 그러자 린트호르스트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이야기 한다. “조용, 조용, 친애하는 양반! 그렇게 한탄하지 마시요!-당신도 방금 아틀란티스에 있지 않았소, 그리고 당신은 적어도 당신의 내면의 시적 소유물로서 사랑스러운 농장을 가지고 있지 않소?-도대체 안젤무스의 행복도 자연의 깊은 비밀로서 모든 존재의 성스러운 화음을 보여주는 시속에서의 삶이지 않고 무엇이겠소?” 안젤무스는 자신의 자아의 분열을 모든 존재와의 화합을 보여주는 예술 속에서 극복하게 된다.
호두까기인형과 생쥐 왕(Nußknacker und Mausekönig)(1816)의 주인공인 착한 심성과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마리도 크리스마스 전날 드로셀마이어 씨께 받은 호두까기 인형에게 묘한 애정을 느끼면서 환상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마리가 잠자리에 들려 하자 사방에서 나직하게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달그락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러자 어느새 사방에서 생쥐들이 몰려들고, 장식장 속의 인형들이 움직이고 말하기 시작한다. 호두까기 인형은 이 모든 인형들을 지휘하며 머리 일곱 개를 가진 흉측한 생쥐와 맞서게 된다. 다음날 마리가 어젯밤에 일어났던 신기한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리는 드로셀마이어 씨가 이야기해 주는 ‘단단한 호두에 대한 동화’를 들으면서 호두까기 인형이 불행한 마법에 걸려있다는 것을 예감하게 된다. 마리는 주위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환상적 세계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호두까기 인형을 위해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인형들을 차례로 희생한다. 결국 호두까기 인형은 마리의 지조 있는 헌신적 사랑에 의해 마법에서 풀려나 드로셀마이어 씨의 조카로서 마리에게 찾아와 청혼한다. 그리고 마리는 장미 호수, 설탕과자 성, 온갖 사랑스러운 사람들과 볼거리가 많은 인형의 나라의 왕비가 된다. “그 나라에서는 어디에서나 크리스마스 숲과 투명한 아몬드 설탕과자 성들, 요컨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신기한 것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기만 하다면 말이다. 이것이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양에 대한 동화란다.”로 화자는 이야기를 끝맺는다. 마리가 살게 되는 인형의 나라도 안젤무스의 아틀란티스처럼 자아의 이원성의 문제가 극복된 예술의 세계다. 이러한 예술의 세계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환상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열려있어야 한다.
일상적 자아와 예술적 자아, 그리고 이상적 자아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또 다른 자아의 분열의 문제는 호프만의 후기 작품에서 좀더 구체적인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이러한 자아분열을 어떻게 극복할지, 예술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예술에서 환상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비유적으로 구현한 작품이 브람빌라 공주(Prinzessin Brambilla)(1820)다. 돈은 변변히 잘 벌지 못하지만 자아도취에 빠져 자신의 연기에 자부심을 느끼는 연극배우 지글리오는 어느 날 꿈에서 본 어느 공주님의 옷을 재단사 보조원인 자기의 애인 지아친타가 입은 것을 보면서 꿈이 단순히 꿈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예감한다. 그리고 사육제 전날 기묘한 가장행렬에 바로 그 공주가 있다고 믿으면서 점점 더 그 공주만을 생각하게 되고, 급기야 그 공주가 사랑한다고 하는 키아페리 왕자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고 믿게 된다. 한편 일상의 빈곤과 지루함에 불만족해 하는 지아친타는 재단사가 맡긴 신비하고 화려한 옷을 입어 보면서 자기 자신 속에서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고 점점 스스로가 키아페리가 사랑하는 공주라고 느끼게 된다. 자아가 분열된 지글리오는 결국에는 자신의 이중인간(Doppelgänger)인 키아페리 왕자와 검을 들이대며 싸우게 된다. 결투를 통해 허영심 많은 비극배우인 지글리오는 죽고, 그는 키아페리 왕자라는 새로운 자아로 거듭나게 된다. 그러나 지글리오는 자신의 옛 자아와의 연관성을 부정하고 자신의 이상적인 자아만을 자기 자신이라고 인정함으로써 여전히 한 몸에 두 사람의 인격을 가지고 헤매는 자아의 이원성에 시달리게 된다.
지글리오와 지아친타가 우르다르 샘물을 쳐다보고 자신과 거리를 가지면서 자신의 이중인간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자신의 자아 안에 통합하였을 때, 그들은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갈등을 극복하고 비로소 현실 속에서 자신의 꿈을 예술적으로 구현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의 내적인 분열과 어두운 심연은 무의식 세계의 끝에서 발굴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인간의 원초적인 예술성을 발견하는 탐사의 과정에서 거쳐야 할 단계들인 것이다. 여기서 우르다르 샘물은 해학적 인식을 구현하는 연극, 나아가 예술에 대한 상징으로 표현된다. 즉 해학적 정신이 깃든 예술은 삶을 거울에 비추듯 객관화하여 수용자의 자기 인식을 돕고, 삶 자체를 ‘강력한 마법처럼’ 변화시킨다. 호프만은 예술이 일상까지도 시적으로 물들일 수 있으며 시적 진실이 지닌 마술적인 힘을 희망한다. 자아인식을 통한 예술가의 구원, 그리고 예술을 통한 현실의 변화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해학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한 화가가 정의 내리듯 ‘반어적인 이중인간을 만들어 그 자의 기묘한 우스꽝스러움에서 자기 자신과 (……) 지상의 모든 존재의 우스꽝스러움을 인식하며 그것을 즐기는 자연에 대한 가장 깊은 직관에서 나오는 사고의 신비로운 힘’이다. 바로 자신의 이중성, 나아가 삶의 이중성을 인정하고 웃을 수 있는 정신의 힘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학적 인식은 이중인간을 만들어내는 환상적 구성력, 즉 상상력을 발휘해 환상적 세계를 구성할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환상은 호프만에게 인간을 ‘평범한 일상의 좁은 영역에서 끌어내 참된 삶과 존재의 인간적인 정신이 자유롭게 지배하는 제국과 결국에는 연결되어 있는 낯선 지역에서 자기식대로 즐길 수 있게’ 하는 예술의 바탕을 이루는 자연이 선사한 ‘고갈되지 않는 우리 내면의 다이아몬드 광’이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마음의 눈으로 본 환상의 세계에 구체적인 형상을 부여하여 수용자에게 보게 하고 그것을 믿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다.
이와 같이 무한한 정신세계를 여는 환상은 예술의 바탕이지만 해학적 인식이 없으면 환상은 외부와 격리된 채 자신 안에 갇혀 의미 없이 스스로를 잃을 수 있다. 때문에 지글리오와 지아친타가 진정한 예술가가 되도록 도와주는 첼리오나티는 지아친타에게 “너는 판타지이고 해학은 높이 날아오르기 위해 먼저 판타지의 날개가 필요하지만, 해학의 몸통 없이 너는 단지 날개일 뿐이라서 바람이 부는 대로 공중에 떠다닐 것이다.”라고 한다. 캐서린 흄이 환상을 미메시스와 함께 문학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보았다면, 호프만에게 환상은 해학적 인식과 함께 문학의 기본 요소가 된다.
호프만에게 현실은 눈에 보이는 일상적 현실과 인간 내면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심층적 현실로 나눠져 있고, 자아자체도 표면적이고, 일상적이고, 이성적인 자아와 무의식을 포함한, 때로는 시적이고, 때로는 악마적인 자아로 나뉘어져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삶의 이원성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재현하는 것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 예술가는 정신적 힘으로써 이러한 삶의 이원성을 객관적으로 보고, 이 이원성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인식하고, 그것을 환상적 방법으로 그려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으나 감지할 수 있는, 또는 내면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심층적 현실은 바로 환상적 기법으로써 형상이 부여될 수 있다.
호프만은 1820년에 출간한 자신의 단편집을 세라피온의 형제들(Die Serapions-Brüder)이라고 칭한다. 이 책 제목은 원래 아주 영민한 백작이었으나 어느 날부터 정신이상에 걸려 자기가 기원후 2세기에 살다 순교를 당한 세라피온 성인이라고 믿는 광인의 이름에서 빌려온 것이다. 예술가는 광인처럼 내적인 눈으로 본 것을 실제로 본 듯 믿고 생생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호프만의 창작 원칙이다. 하지만 예술가는 자신의 내면에 침잠해서 환상의 세계만을 보는 광인과 달리 존재의 이원성을 인정하고 두 세계를 연결해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불쌍한 세라피온, 너의 정신착란은 바로 불운이 네게서 본래 우리의 지상에서의 존재를 지배하고 있는 이원성에 대한 인식을 앗아갔다는 데 있다. 내적인 세계와 그리고 이 내적인 세계를 활기찬 삶의 완전한 광채 속에서 온전히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갇혀 있는 외부 세계가 바로 그 정신적인 힘을 움직이는 지렛대 역할을 하는 것이 우리의 지상에서의 운명인 것이다. (……) 그러나 너, 오 나의 은둔자여! 너는 외부의 세계를 구축하지 못했고, 너는 너의 내적인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그 감춰져 있는 지렛대를 보지 못했다.”라고 호프만은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말한다. 아무런 그리움도 느끼지 못하고 외적인 현실에서만 사는 사람들은 비창조적인 삶을 사는, 시적인 심성을 소유하지 못한 속인이지만, 다른 한편 내면의 현실에서만 사는 사람들은 광인이다.
이중적 현실을 구성하는 데 호프만의 작품에서 해학적 태도를 지닌 화자나 허구적 발행인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악마의 묘약과 같은 괴기스러운 분위기의 소설에서도 주인공의 격정적이고 심각한 서사스타일과는 달리 발행인은 유쾌하고 밝게 독자를 이야기로 끌어들이기도 하고 거리를 두게 하기도 함으로써 독자에게 성찰을 촉구하면서 소설의 또 다른 차원을 형성한다. 브람빌라 공주의 화자도 독자를 환상적 세계에 끌어들여 관심을 집중시킬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이 작품이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것을 끊임없이 주지시키면서 독자가 이야기 자체에 거리를 가지고 이야기 형성 과정을 생각하게 한다. 삶 자체에서처럼 작품 자체에서도 거리를 가지고 그 다층적 측면들을 성찰해야 한다는 그의 예술관이 화자를 통해 표현된다. 호프만은 이러한 화자를 통해 독자에게 한편으로는 주인공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 환희를 함께 느끼게 하지만, 다음 순간 그러한 자신의 감정에 거리를 두고 성찰하게 한다.
모래남자에서 화자는 “오 나의 독자여! 그대는 아마도 현실의 삶보다 더 기이하고 어처구니없는 것은 없으며 작가는 이것을 단지 흐릿하게 연마한 거울의 어두운 반사광에서나 파악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믿게 될 것이오.”라고 말한다. 호프만에게는 현실 자체가 충분히 괴이하고 환상적이며 작가로서 자기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극히 한정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노발리스 같은 낭만주의자들이 유토피아적 세계의 표현에 치중했다면 철저한 현실분석에 바탕을 둔 환상적 창작 방식 때문에 호프만의 문학은 카프카와 더불어 ‘환상적 사실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호프만은 창조적 상상력과 감성,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독일 낭만주의 작가다. 낭만주의는 현실의 모방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고전주의까지 서구 예술론의 근간을 이뤄왔던 미메시스 이론을 넘어서 인간정신의 창조적 상상력에 근거해 인간의 내면의 눈으로 본 새로운 차원의 현실세계를 형상화하면서 예술의 자율성을 확보해 간다. 예술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을 삼을 수 있게 되었으며, 삶의 재현을 넘어서 삶이 아직 실현하지 못한 것까지도 예술을 통해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낭만주의 문학은 내면세계의 환상적인 것, 비현실적인 것, 공상적인 표현에 중점을 두고, 이와 함께 중요성을 인정받은 인간의 상상력, 환상은 문학적 표현의 근저를 이루게 된다. 질풍노도 문학에서 표출된 환상에 탐닉하는 경향은 고전주의를 거치며 기반을 다져오다가 낭만주의에 이르러 실질적인 주요경향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낭만주의의 예술적 경향은 당시의 관념주의 철학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 피히테는 절대 주체인 자아가 개체인 비아(das Nicht-Ich), 즉 현상세계인 자연을 창조적 상상력에 의해 생산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자아의 창조적 상상력에 의거한 예술의 자율성을 확보하게 한다. 정신과 자연, 이성과 감성과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셸링의 철학은 그 동안 저급한 인식기관으로 여겨졌던 무의식, 감성, 상상력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낭만주의는 인간 감성의 해명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요소들을 탐구함으로써 이성적 논리에 의해 형성된 기존의 개념을 해체하면서 새로운 근원적인 인식에 도달하고자 한다.
호프만은 어느 낭만주의 작가보다 이성적인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롭고 괴이한 현상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이를 환상적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그의 환상적인 표현들은 너무나 독창적이고 기이하여 환상이 중요한 문학적 요소로 대두되었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문학평론가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건강하지 못한, 의미 없는, 기괴한 유희에 불과하다고 평가받는다. 괴테나 헤겔도 이러한 평론가들에 속한다. 하지만 호프만은 오히려 외국에서 문학성을 인정받고, 발작, 보들레르, 포우, 푸시킨,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호프만 작품의 수용을 계기로 판타지 문학이라는 장르가 형성된다. 20세기에 들어서는 그의 환상성과 현실과의 연관성이 밝혀지고, 환상적 서술기법에 있어 현대적 요소를 선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호프만에 대한 재평가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두려운 낯설음(Das Unheimliche)」이란 논문에서 호프만의 기괴한 이야기가 얼마나 내적 심리를 치밀하고 정확하게 묘사했는지를 분석한 프로이트의 기여도 크다. 실제로 호프만은 당시 심리학 관련 저서들을 통독하고 직접 정신병원에 가서 관찰할 정도로 열성적으로 인간의 심리를 탐구했다. 그는 당시 심리학 지식을 넘어서 현대 심리학 이론을 선취하는 인간심리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호프만의 현실을 보는 능력은 예술적 직관력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연구에 의해서 연마된 것이다.
호프만의 작품에서 환상성의 특징은 경험적 현실세계와 환상세계의 끊임없는 전환과 병존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과 장소가 명시된 경험적인 일상세계에서 갑자기 환상세계가 펼쳐지고, 환상적인 세계는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변한다. 일상세계에 불가사의한 환상세계가 불현듯 나타나고 사라져 전율과 공포에 싸이게 하기도 하고, 감미로운 황홀감에 도취하게 만들기도 한다. 금항아리에서 안젤무스가 린드호르스트 집에 들어서면, 호두까기인형과 생쥐 왕에서 마리가 혼자 밤에 인형의 방에 앉아 있으면, 브람빌라 공주에서 지글리오가 가면을 쓰고 사육제 행렬에 나서면, 시간과 장소가 명시된 경험적인 일상세계에서 갑자기 환상세계가 펼쳐지고, 꿈에서 깨어나거나 정신을 다시 차리게 되었을 때 환상적인 세계는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변한다.
호프만 작품의 인물들과 사건들은 이성적으로 설명하느냐, 또는 환상적 직관력으로 보느냐에 따라 일상세계에 속하기도 하고 환상세계에 속하기도 한다. 이중적 서사구조 속에서 어떤 관점도 지속적으로 유지되지 않으면서 현실성이 끊임없이 해체되기 때문에 일상과 환상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등장인물들의 정체성은 해체된다. 모래남자의 코펠리우스는 아버지의 지인인 동시에 환상세계 속의 모래남자이고, 호두까기인형에서는 일상적 세계에서 고등법원판사인 드로셀마이어는 환상적인 세계에서 궁정의 시계 제작자이면서 연금술사로 등장한다. 악마의 묘약에서 늙은 화가, 빅토린, 쇤펠트, 헤르모겐은 주인공 메다두스와의 연관관계 속에서 그의 자아의 다양한 모습을 투영하면서 동시에 경험적 일상세계에서 자신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자아의 중복과 분열, 교환은 인물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든다.
사실적인 환상세계의 묘사와 일상세계에서 펼쳐지는 기이한 환상적인 사건들, 그리고 다중적인 의미를 가진 인물들의 등장은 기존의 공간개념과 시간개념을 해체시킨다. 우리의 일상적인 공간은 제한된 한계를 벗어나 다른 차원으로 확장 가능해지며, 규정된 시간은 의미를 잃게 되고 과거․현재․미래의 구분도 사라진다. 이로써 경험적 일상세계의 현실성 자체가 의문스럽게 된다. 자아의 중복과 분열은 인간 영혼의 심연을 형상화하면서 무의식의 부정적인 면, 위험하고 파괴적인 면과 함께 긍정적인 면, 인간의 초현실적 욕구와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잠재되어 있는 더 나은 자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호프만 작품의 환상적 세계는 인간 내면의 현실과 삶의 심층적 차원을 형상화하면서 사물과 인간 실존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기존의 개념들을 해체시키고 삶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로즈마리 잭슨(Rosemary Jackson)은 환상문학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해지게 하는 것이며 현실을 고정되고 불변하는 것으로 파악해 온 종래의 상식적인 시각을 전복시킨다고 정의한다. 호프만의 작품은 이러한 환상문학의 정의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호프만의 이러한 환상문학의 전통은 독일어권에서 카프카, 헤르만 헤세, 미하일 엔데, 쥐스킨트 등으로 이어진다. 환상성이 현실을 표현하는 주요한 요소로서 확실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일상세계와 병존하고 있는 호프만의 환상문학과 비교하면 한국현대문학에서 환상적 세계는 일상적 세계에 불현듯 뚫고 들어오나 일상세계와 병존하기 보다는 일상세계 속에 기이함으로 분리되어서 남아있는 듯하다. 환상적인 인물이나 동물, 사건 등은 무엇인가를 상징하고 있지만 환상세계 자체가 현실의 또 다른 차원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장정일의 「펠리컨」에서 펠리컨이라는 새 자체의 출현이 기묘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주인공이나 독자에게 환상적 체험을 하게 하지 않을뿐더러 지각하고 있는 현실성을 해체시키지도 않는다. 호프만의 환상적 세계가 일상의 심층적 차원을 드러낸다면, 최인석의 「내 영혼의 우물」이나 김영하의 「피뢰침」에서의 환상성은 일상에서 벗어난 기이한 세계를 그려낸다. 호프만의 환상적 세계나 인물들은 때론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때론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다면, 한국문학에 등장하는 환상적 인물이나 동물들은 주로 공포와 배제의 대상이다. 호프만의 환상성이 현실의 이원성을 인식하고 이러한 현실을 표현하면서 보다 나은 삶을 지시한다면 한국문학의 환상성은 주로 현실의 부조리와 압박감, 내면적 갈등을 표현하는 데 그치거나 이러한 현실을 벗어나는 데 쓰인다. 한국의 현대 환상문학은 어둡고 침울하여 호프만의 밝고 경쾌한 해학적 태도가 부재한다.
오늘날 우리는 현실과의 연관관계에서 벗어난, 감각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새로운 현실을 기술적으로 생산하고 체험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가상현실은 실제현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면서 심지어 현실을 변화시키기에 이르렀다. 가상현실을 창출하는 환상은 경험적 현실의 제한에서 벗어나 우리의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다른 한편 상업논리와 합세하여 인간의 말초적 욕망을 자극하면서, 상상력과 현실간의 건강한 긴장관계를 위협하고 현실에 대한 인식 능력을 저하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충분히 흥미롭고 화려한 호프만의 환상적 유희가 바로 현실과 나 자신을 보다 심도 있게 이해하는 데 기여하면서, 나아가 보다 낳은 삶을 제시하기 때문에 오늘날 더욱 값지게 느껴진다. 우리의 내면에 잠재해 있지만 아직 표현되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은 신화적 세계관을 구성했던 고대로부터 존재했던 인간의 본성이다. 디지털시대에 들어선 오늘날, 이러한 환상성의 실감나는 구현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문화현실에 부응해 20세기 중엽까지도 현실성 없는 허무맹랑한 대중소설이라고 평가 절하되어 평론가들의 관심 밖에 있었던 환상문학, 나아가 이러한 환상문학의 전통을 어떻게 디지털매체에 활용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의의가 크다.
곽정연
․저서 에. 테. 아. 호프만의 소설 “악마의 묘약”에서의 자아문제
-독일 관념주의 철학과 관련시켜 본 정신분석학에 입각한 연구
․역서 자프란스키의 악 또는 자유의 드라마, 호프만의 브람빌라 공주․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독문학 박사 학위 취득. 한독문학번역상 수상
․현재 서울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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