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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신작단편/방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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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단편|
13층, 수요일 오후 세시
방현희
그가 칵테일링해준 블러디 메리를 마시는 자, 오렌지색 등이 어딘지 모르게 시선을 분산시킨다고 느끼는 자, 홀 분위기가 며칠 전과 또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자, 올 때마다 무언가 아주 작은 것들이 달라져 있다고 어렴풋이나마 알아채는 자, 그럼에도 무엇이 수상쩍은지 깨닫지는 못하는 자. 그런 자는 이곳에 다시 오게 되어 있다.
그는 어두운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왼편에 있는 스위치를 올렸다. 오렌지색 핀 포인트 등 불빛이 그의 머리 위에서 빗줄기처럼 내렸다. 그는 불빛 아래 가만히 멈춰 섰다. 빛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의례적으로 빛줄기 아래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 그는 눈꺼풀에 힘을 줘 깜빡이고, 입술을 위아래 양 옆으로 움직여 입주위의 근육을 풀어주고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뺨이 억지로 밀려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어깨도 둥글게 움직여 보고 손도 털었다. 양 다리를 벌리고 번갈아 몸무게를 옮겨보고 허리를 둥글게 돌려보았다. 마음에 들 정도로 몸이 부드럽게 풀렸다. 마지막으로 턱을 끌어당기고 골반을 움직여 한발을 내디뎠다. 이만하면 그녀와 다르지 않겠지.
자신 있는 걸음걸이로 주방을 향해 걸어갔지만 그는 어서 구두를 벗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발등을 내려다보니 얽힌 끈 사이로 살이 도도록해 보였다. 끈에 묶인 발은 그가 실제로 십삼 층을 걸어 올라온 것처럼 부어 있었다. 여름 들어 세 번째 신는 그녀의 스트랩 샌들은 아직 그녀의 속옷만큼 익숙해지지 않았다. 발부리를 조이는 끈 때문에 신을 때마다 물집이 잡혔다. 발가락에 굳은살이 박일 정도가 되어야 익숙해질까. 마트에서 사온 비닐봉지를 주방 앞 바에 올려놓고 큐빅 장식이 반짝이는 뮬로 갈아 신으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아, 벌써 다섯시네. 그는 중얼거린다. 수요일의 음료에 넣을 재료를 사는 데 시간이 걸렸다. 냉장고를 열어 빈 곳을 채워 넣는 중에 벌써 손님이 들어왔다. 남자와 여자는 들어오자마자 손을 들어 그를 불렀다.
여자가 테이블에 바짝 다가앉으며 물었다.
“왜, <13층>이에요? 여긴 삼 층이잖아요.”
눈동자가 당돌했다. 주먹 속에 숨겨져 있다가 ‘왜’라고 입을 뗄 때 불쑥 나타나 벌어지는 보랏빛 손톱을 오렌지색 핀 포인트 등 불빛이 핏방울처럼 만들었다. 갑작스러웠다. 마치 날카로운 빛줄기를 타고 핏방울이 여자 손톱 위로 뚝 떨어진 것만 같아 그는 움찔 놀랐다. 그러나 곧바로 그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 이런 일쯤 가볍게 넘길 때가 되었을 텐데. 그는 일부러 코를 높이 치켜 올리듯이 고개를 젖히고 눈을 내리 깐 채 아무 대답 없이 여자의 손 아래 놓인 하얀 종이를 잡아당겼다. 종이에는 여자와 남자의 생년월일이 적혀 있었다. 세로획이 죽죽 뻗은 여자의 글씨체가 제법 시원스러웠다.
“왜 <13층>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하긴 정말 십삼 층 올라오는 기분이었어, 그치 오빠?”
여자는 그와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수선스런 여자의 태도에 그는 굳이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이들은 아마도 비상계단을 통해 올라온 모양이다. 비상계단은 한 층을 네 개의 계단참으로 나눠놓아서 이 층만 올라와도 벌써 한 사오 층 올라온 것처럼 기운을 뺏어갔다. 복잡한 상가에서 사람으로 가득 찬 엘리베이터를 놓쳐 계단으로 올라온 손님들이 대체로 그렇게 묻곤 했다. 그가 맨 처음 이 카페에 왔을 때 주인이었던 그녀에게 한 질문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13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것이니, 13층이라는 공간이 의미하는 것이니 뭐니 설명하는 따위, 그도 하지 않을 작정이다. 대신 벽에 붙인 커다란 영화 포스터를 가리켰다. <13th Floor>라고 쓰인 포스터는 검은색이 주조색이어서 이쪽에 앉아서는 그림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여자는 고개를 쭉 뽑고 쳐다보는 척하더니 금세 잊어버리고 보랏빛 손톱으로 옆에 앉은 남자의 어깨를 꼬집듯이 잡았다. 뭐 볼 거야? 그녀는 다른 손으로 메뉴판을 펼쳤다. 그는 여자에게 꼬집힌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여자의 행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고 무심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는 해가 건너편 가게의 간판을 비추고 있었다.
<발렌타인 17년>, <까뮈 XO> 등의 메뉴를 손톱으로 만지작거리던 여자가 결심한 듯 <칵테일>을 콕콕 짚었다. 그는 남자와 여자의 생년월일을 컴퓨터에 입력했다. 엔터 키를 두드리자마자 화면 상단에 굵은 고딕체로 ‘갬블러적 사랑’이라고 떠올랐다. 두 사람의 궁합이다. 첫 줄에 이들은 풍류적이고 춤을 잘 추며 처세술도 능란하다고 쓰여 있다. 그는 네 속을 읽은 건 컴퓨터가 아니라 나라는 듯 여자의 눈에 초점을 깊이 맞추었다. 여자의 눈을 붙잡고 나자 느리게 입을 열었다.
“갬블러적 사랑이네요.”
호기심과 장난기가 서린 여자의 눈이 반짝 빛을 튕겼다. 그도 슬며시 입가에 웃음을 물었다. 여자의 기분을 적당히 만족시켜준 괘인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는 눈동자가 좌우로 쉬지 않고 움직이는 여자의 눈을 잠시 더 바라보았다. 수많은 소설에서 여자의 눈이 흔들렸다, 하는 표현들을 읽었지만 실제로 이 여자처럼 일정한 간격 일정한 속도로 눈동자가 쉼없이 움직이는 여자는 처음 보았다. 초점은 맞추고 있는 것일까, 머리가 아프지는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도 언뜻 들었다. 이 여자는 변덕이 심할 것이다. 파란이 많은 운명이다라고도 쓰여 있다. 여자를 보니 파란 많은 운명이 마땅해보였다. 이런 여자에게 평온한 삶은 지루해 견딜 수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갬블러인 것이지. 이 여자는 둘의 사랑을 위해 가진 것을 한번에 다 털어 넣겠지? 이들 사이가 얼마나 오래 갈지 모르지만 참 흥미진진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그럴 수만 있으면 어떤 계기로 더욱 가까워지며 어떤 계기로 비틀어질지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조금만 흥분하면 눈동자가 마구 움직이는 여자야 그렇다쳐도 사주 따위에는 흥미 없다는 듯한 표정의 남자는 갬블러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남자는 <칵테일>을 신청하는 사람에게 무료로 제공된다면서 그가 권한 특별한 음료 ‘블러디 메리’를 마시고 있다. 남자는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갸웃하며 잔을 내려다보고는 그를 힐긋 쳐다보았다가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리는 행동을 몇 번째 계속하고 있었다. 남자는 그를 거듭 쳐다보았지만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왠지 처음부터 남자가 마음에 걸렸다. 그를 자꾸 흘깃거리는 것이 영 개운치 않았다. 남자가 혹시라도 무슨 낌새를 챈 건 아닐까. 그는 여자를 상대로 궁합 운을 풀어주는 척하고 있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남자에게로 곤두서는 신경을 어쩔 수 없었다.
남자의 굵직한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붉은 ‘블러디 메리’는 반으로 줄어 있었다. 그는 남자를 한번 더 훔쳐보다가 그만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찐득한 그 음료의 맛에 몰두해 있던 남자는 그의 눈을 찌를 듯이 노려보면서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웬일인지 그는 남자의 눈빛에 몸서리를 쳤다. 모니터에 떠오른 내용의 표현을 바꾸고 설명을 곁들여서 죽 늘어놓던 목소리조차 떨려오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의 눈을 노려보면서 살피기만 하던 남자가 한 손을 탁자에 툭 내던지듯 올려놓고는 삐딱하게 앉은 그대로 그에게 물었다.
“주인 바뀌었어요?”
그럼 그렇지. 남자는 카페의 전 주인을 알고 있었던 거다. 그는 남자가 어쩐지 자신의 입 모양을 한동안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에는 그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살피는 것 같았다. 예감이 맞았다. 남자가 묻자마자 마침 맞게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말을 많이 해서 물을 마시려던 참인 것같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가 대수롭지 않은 질문이라서 그냥 넘긴다는 양 계속해서 모니터의 글을 읽어주고 해석해주었다.
남자는 다시 등받이에 몸을 내던지며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쉬었나…….”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성대가 갑자기 바람 소리만 내보내고는 쉭쉭 마찰을 일으켰다. 그는 남자를 향해 머리를 끄덕이며 다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쯤 되면 그 자신 벌써 귀신에 가까운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싶었다. 남자는 다시 조금 전의 자세로 돌아갔다. 느긋할 필요가 있다. 그는 남자의 음료가 특별했던 게 다행이라고 마음 깊이 안심했다. 내일은 새 걸 써야겠기에 남은 재료를 없애야 했고, 마침 맞게 이전 주인을 가물가물 기억하고 있는 남자에게 무료라며 ‘블러디 메리’를 권한 것이다. 남자는 아까부터 독특한 맛 때문에 음료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게 확실했다. 보드카와 소금과 후추, 타바스코와 비터스와 레몬 웨지, 그리고도 몇 가지가 더 첨가되는 음료는 뭔지 모르게 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여겼던 것조차 흐지부지 녹여버린 것이다. ‘블러디 메리’를 마시며 그 무엇에든 의문을 품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그 맛에 녹아들어 오히려 수상쩍은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면 최상이니까. 그러나 내일은 수요일이다. 내일이 수요일이라는 것을 깨닫자 무언가가 그의 기분을 깔짝거렸다. 내일은 수요일인 것이다. 그가 아무리 느긋한 척하려 해도, 그 자신 ‘블러디 메리’의 맛에 빠진 사람처럼 수상쩍은 분위기를 즐기려 해도, 수요일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요일은, 하루 앞둔 화요일부터 그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블러디 메리’의 재료를 반드시 신선한 것으로 바꿔 명을 만족시켜줘야 했고, 침대를 정돈해야 했고, 그가 명을 위해 입어야 할 속옷도 깨끗한 것으로 준비해둬야 했고, 또.
두 사람이 가고 나서 그는 창가로 다가가 비스듬히 밖을 내다보았다. 두 남녀가 막 거리를 가로지르는 것을 보고 그는 주먹을 꼭 쥐었다. 이처럼 그녀와 꼭같은 옷을 입고 꼭같이 화장을 했어도, 그녀만큼 높은 굽을 신고 흔들리지 않고 걷는 데도 그녀가 아님을 알아보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또다시 그가 다른 사람임을 알아볼 사람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주의 깊은 사람이라면 그깟 조명만으로 기억을 흐리게 할 수는 없을 터. 하지만 그는 해보는 데까지 해볼 셈이었다. 고객의 눈에 빛을 쏠 수는 없지만 시선을 분산시킬 수는 있겠지. 마침 지는 해가 건너편 건물을 비췄다. 밖이 어두워지자 실내가 더욱 밝아졌다. 핀 포인트 등을 단 것은 한 군데가 강렬하게 밝으면 주변은 상대적으로 한층 어두울 거라는 짐작 때문이었는데, 등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있다면 큰 효과는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리창에 틴트를 한 꺼풀 더 입히고 오렌지 조명 사이에 푸른 조명을 끼워 넣고, 조명의 위치를 바꾸는 방법도 연구해봐야겠다. 그는 조명업체에 전화를 걸어 방문을 요구했다. 그리고 남은 블러디 메리를 들고 다시 창가로 왔다. 찐득하고 뜨거운 액체가 조르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건너편 가게들에 저녁 해가 비쳐들어 아주 오래된 거리를 보는 듯했다. 테이크 아웃 커피숍도, 호프집도, 그 앞에 내놓은 의자들도 어쩐지 진짜 같지가 않았다. 아주 먼 기억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고, 그래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 전 일이 그 거리에 느닷없이 등장할 것만 같았다. 그는 길 건너편의 황금빛 중심이 왼편으로 아주 조금씩 기울어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황금 자락의 한 귀퉁이에서 튀어나와 이미 석양이 사라진 오른편 거리를 가로지르는 남자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그는 움찔, 놀랐다. 어디에선가 불쑥 튀어나와 이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남자에게서 도망치려 그는 뒤로 물러났다. 설마, 그 친구가? 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미 겪은 시간이 되풀이된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어지러운 머리를 가라앉히기 위해 손에 든 음료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단순히 특별한 음료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겪은 시간은 막무가내의 도돌이표처럼 앞뒤 무시하고 되풀이되었다.
저 사람처럼 어깨를 흔들고 발걸음이 가벼웠던 친구가 있었다. 애인이냐고 불릴 정도로 친하게 지내던 친구였다. 그 친구가 여름밤이 지끈지끈 머리를 아프게 한다며 그를 불러냈다. 그도 쉬 지나가지 않는 여름밤이 지겹기는 마찬가지였다. 친구는 작고 가녀린 그의 어깨를 감싸고 앉아 술을 마셨다.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문지르기도 했다. 여름밤이 더욱 지끈지끈 그들을 내리눌렀다. 그는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발딱 일어설 수 없었다. 친구가 그를 잡아서가 아니라 여름밤이 그를 일어서지 못하게 했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골목 어디에선가 그들은 아쉽게 헤어졌다. 친구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네가 여자였더라면, 이렇게 헤어지지는 않을 텐데……. 그는 그 말을 듣지 않은 것으로 하고 뛰어갔다. 그리고 선잠을 자고 일어나자마자 친구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응급실에 쫓아가보니 친구는 얼굴이 핼쑥한 채 잠든 것처럼 보였다. 골목길을 걸어가다가 친구는 넘어졌고 돌에 머리를 부딪쳤다. 순찰을 돌던 파출소 순경인 또 다른 친구가 돌을 베고 자고 있는 친구를 업고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랬는데 친구가 죽었다는 것이다. 친구의 어머니는 쉬지 않고 울었다. 의사는 볼펜 같은 램프를 비춰 동공이 완전히 열린 것을 보더니 턱 아래쪽을 눌러 경동맥이 멈춘 것까지 확인하고 흠, 한숨을 쉬었다. 친구는 의사가 열어놓은 눈을 감지 않았다. 친구의 어머니는 콧물을 삼키며 울다가 넋두리를 늘어놓다가 했다.
“일어나지를 않더라구, 일어나지를 않아. 출근해야 하는데……, 고개를 홱 꺾고 자더란 말야. 바로 눕혀줬지. 그런데 베개에 피가 흥건하잖아. 다친 데도 없는데…… 귀에서 피가 흘러 나오더라구.”
그는 친구의 어머니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오르막도 내리막도 아닌 평평한 길에서 넘어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신 것이 자신과 무관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친구의 귓바퀴에는 말라버린 핏물이 한줄기 남아 있었고, 귀 뒤의 머리카락은 범벅이 된 핏물 때문에 이미 뻐등뻐등하게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귀에서 흘러내린 실낱같은 피가 친구의 머릿속을 깨끗이 비워놓았다.
그는 의사가 열어놓은 대로 크게 뜨여 있는 친구의 눈을 바라보았다. 동공이 완전히 열려 그 검은 길을 걸어 들어가면 친구의 뇌수에 이를 것 같았다. 아니, 뇌수가 이미 다 빠져나가 텅 비어버린 두개골 안을 산보하다가 적당히 후미진, 이를 테면 뇌간이 있던 자리에 편안히 걸터앉아 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앉아 시간이 흐르면 친구와 그의 구분이 없어질 것 같았다. 친구의 눈은 그토록 고요하게 열려 있었다.
그는 친구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머리가 박살나지 않아도, 뇌수가 밖으로 삐져나와 흩어지지 않아도, 실낱같은 핏줄기를 조금씩 흘려보내는 것만으로도 두개골은 텅 비어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상처 하나 없이 죽은 친구의 얼굴을 보며 죽음이란 그것이 완전히 덮칠 때까지 누구도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피가 한두 방울 흐르기 시작할 때 친구는 이미 죽었을 텐데, 몸은 아직도 따스할 테고 뻣뻣하게 굳지도 않았을 테지. 친구는 그 사이에 한 세상을 뛰어 넘었을 텐데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던 거지. 이렇게 가까운 자기 자신조차. 그 뒤로부터 그에게 죽음이란 어디선가 똑 떨어진 핏방울 하나면 충분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귀에서 흘러나온 두 번째 핏방울을 보았을 때 그는 여지없이 여자가 죽었다고 믿어버렸다. 완전히 죽지는 않았을지라도 지금 죽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머릿속을 비워내고 있는 중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깨끗이 비워진 머릿속으로 다른 영혼이 들어오도록 눈을 열고 기다리는 중이라고 믿었다. 그는 자기가 십 분 전에 자동차로 친 여자의 눈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두컴컴하게 열린 눈은 움직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문고리를 잡듯 그녀의 귀를 붙잡고 몸을 부르르 떨다가 불현듯 확 잡아끌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는 저항하지 못했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칠 겨를도 없었다.
추운 겨울 그는 오랜 시간 새벽의 어두운 길을 달려왔다.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이 거리로 접어든 이유를 그는 명확히 알지 못했다. 갈 곳이 없긴 했다. 하지만 갈 곳이 없어진 지는 이미 여러 해 되어서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며칠 사이 그녀의 카페에 몇 번 드나들었다는 것이, 그리고 그녀를 만나면 편안해졌다는 것이 그 이유가 될 거라는 생각 또한 당연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아무리 편안해졌다 한들 며칠 동안 차에서 자느라 몸 한번 제대로 펴보지 못한 그를 재워줄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는 그곳으로 가는 동안에도 내가 왜 거길 가려는 걸까, 내내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는 이 거리로 접어들었다. 간간이 비치는 노란 가로등 빛이 짙게 깔린 안개에 스며들어 낯익은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하루만, 정말 하루만 재워달라고 말해볼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친 순간 그는 너무나 고단한 몸을 느꼈다. 재워준다면 그녀의 발치에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의 카페가 있는 골목으로 차를 꺾으려는 찰나 누군가 그의 차에 와서 부딪쳤다. 새벽이었고 오랜 시간 달려왔지만, 맹세코 술을 마셨다거나 졸음이 왔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마지막 휴게소에서 먹은 따끈한 가락국수 국물이 얼어붙었던 그의 머리를 노근노근하게 풀어버렸을 수는 있겠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의 방에서 잘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당치 않은 희망으로 가슴이 어처구니없게 뛰었을 수도 있다. 여자는 횡단보도도 아닌 곳에서 튀어나왔다. 출렁거리는 머리칼이 그의 차 보닛 위를 쓸어내리는 것을 보았다. 술에 취했던 것인지, 또는 일부러 죽기 위해 길을 가로지르려던 것인지, 그 여자의 짓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어쨌든 여자를 병원으로 옮기려고 시도했다. 그녀를 뒷좌석에 눕히고 병원을 찾아 차를 돌리던 중 언뜻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여자에게 연신 말을 시키고 있는 중에 여자가 무슨 안타까운 소리를 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가 룸미러로 뒷좌석을 보았을 때 여자는 반쯤 눈을 뜨고 있었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몸을 한껏 돌려 여자를 보았다. 실내등은 여자의 귀와 방울방울 떨어지는 피와 누런 가죽시트에 흥건한 핏물을 비췄다. 그리고 막 그를 향해 얼굴을 돌리려다 옆으로 홱 떨어진 머리.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낯이 익어 보였다. 그는 뒷문을 열고 들어가 여자의 얼굴을 흔들기 위해 귀를 잡았다. 찐득한 액체가 그의 손바닥을 휘감고 들러붙었다. 무한히 큰 동공이 눈에 들어오고,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귀에서 떼었다. 떼려고 했다. 그러나 손은 떨어지지 않았고 몸도 일으켜지지 않았다. 그는 문고리인 양 귀를 붙잡고 몸을 어정쩡하게 숙인 채 자기가 아는 여자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언제인지 모를 시간, 문이 활짝 열렸다. 그는 문고리를 잡고 그 검은 통로로 성큼 들어서고 말았다. 거기에서 그는 그녀가 카페의 여주인인 것을 알았다. 만나자마자 쉽게 친해졌던 것하며, 생김새도 비슷하지만 절묘하게도 사주가 똑같은 것에 손뼉을 치며 반가워했던 일을 기억해냈다. 어쩌면 너와 나는 쌍둥이인지 모르겠다며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았었다. 그녀의 가늘고 긴 눈매가 촉촉이 젖어들자 그는 그녀와 쌍둥이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녀와 영혼을 공유한다 해도 아니, 자신은 없어지고 그녀의 삶을 산다 해도 하나도 아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까지 살아온 삶은 아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빨리 버리면 빨리 버릴수록 좋았다. 그는 죽어가는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숨결을 느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숨결 끝에 내쉰 말을 들었다. 내 삶을 부탁해. 그는 입을 맞추어 그녀의 숨결을 들이마셨다. 그는 밤이 새도록 그녀의 두개골 안을 걷다가 후미진 곳에 편안히 주저앉았다.
그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맞대고 있었던 시간이 수 시간인지, 수 분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설사 수 시간이었다 해도,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해도 기꺼이 그녀를 안고 있었을 것 같았다. 그녀가 전혀 남 같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우연찮게도 그녀의 내밀한 기분, 그녀의 취향, 그녀의 촉각을 관장하는 바로 그 자리에 깃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13층>으로 갔다. 혹시 있을 씨씨티비를 피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지나 비상구로 갔다. 그리고 좁은 계단에 발을 들여놓았다. 층마다 나누어진 네 개의 계단참은 쉬어가라기보다 오히려 다음 계단의 아득함을 일러주는 것만 같았다. 그 계단은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지고 이어졌다. 마침내 <13층>이라고 쓰인 아크릴 판이 보였다. 철문은 처음에는 무척 무겁게 열리다가 삼분의 일쯤 열리면서는 훅, 빨려가듯이 열렸다. 손잡이에 매달리다시피 한 그가 <13층>에 덜컥 들어섰다. 카페의 유리문도 기다렸다는 듯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홀을 지나 구석에 있는 방문을 열자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누가 볼까 겁이 나 창문의 커튼을 치려고 했다. 커튼을 움켜잡다가 그는 아직 새벽인 것을 알아챘다. 이 시간 햇빛이 이렇게 찬란할 리가 없지 않은가. 창문을 열었다. 창문 안은, 안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지만, 강렬한 오렌지색 등이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는 보는 사람이 없어도 커튼을 쳐서 빛을 조금 죽였다. 그러자 벽면에 바짝 붙여 놓은 하얀 도기 콘솔이 열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옆의 하얀 서랍장에도 노란빛이 스며들더니 시폰 자락을 늘어뜨린 황금빛 브라스 침대로 서서히 부드러운 그늘이 지고 있었다.
방안은 스물아홉의 여자를 재우던 흔적으로 가득했다. 자잘한 꽃무늬가 양각된 도기 콘솔 위엔 화장품이 더없이 세심하게 놓여 있고, 콘솔과 한 세트인 듯싶은 서랍장 안에는 이 이상 더 여성스러울 수 없다는 듯 레이스가 요란한 옷가지들이 차곡차곡 챙겨져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똑같은 모양의 속옷들이 사이즈만 다른 채 두 개씩이었다. 그는 그 속옷가지들 중에서 한 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챈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정작 가려야 할 젖무덤을 고스란히 내보이도록 젖가슴 둘레만 레이스로 엮어진, 브래지어가 틀림없는 그것을 한 손에 들고 그 아래 놓인 팬티를 다른 손으로 집어 들었다. 그것도 치모를 가려야 할 부분은 정작 삼각형으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어디서 이런 것들을 구했을까. 그녀는 점을 치며 카페를 운영하는 일 외에 다른 일에 빠져 있었던가보다. 남자치고는 작은 체구였던 그는 삼각 창이 있는 브래지어에 마음이 끌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브래지어의 고리를 채웠다. 가슴둘레는 그가 조금 더 큰지 브래지어가 지나치게 꽉 조였다. 삼각형 안으로 납작한 맨살과 젖꼭지가 드러났다. 팬티까지 입어볼까 하는 순간 그것을 사들고 왔던 날이 기억나려고 했다. 그는 이상스럽게 설레는 가슴으로 무언가가 기억나길 바라며 하나하나 들춰보고 가슴에 대 보았다.
그는 마치 기억 속을 뒤지듯 그녀의 서랍 속을 뒤졌다. 그녀는 여기서 무엇을 했던 것일까. 그녀의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무엇인가가 저질러졌던 흔적들이 그를 몹시 피곤하게 했다. 밤새 차를 달려왔고 그녀와 야산에서 작별 인사를 했으며 오랫동안 그녀의 방을 탐사한 끝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침대로 갔다. 너무 고단한 나머지 몸을 던지고 누웠다. 그리고 버릇대로 발을 교차시킨 채 까딱거렸다. 발을 세 번 연속 까딱거렸는데 머리맡에서 촉촉촉, 마치 입을 맞추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는 다시 발을 까딱, 움직였다. 촉, 소리가 났다. 그는 여러 번 거듭해서 발을 흔들고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침대는 그의 발짓에 대답을 했다. 그래서 그만 그 침대가 마음에 들어버렸다. 이게 이렇게 좋은 소리를 내준다니 여기서 그냥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이 집에 처음 들어와 그녀의 생활을 낱낱이 익힐 때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다는 듯이. 오직 침대가 낸 소리 때문이라는 듯이. 더 이상 몸 둘 곳이 없어 십오 년 된 고물 자동차에서 먹고 살았던 지난 시간은 까맣게 잊고.
그래서 그는 여기 살기 시작했다. 삼 층인 <13층>에서.
그는 <13층>에서 그녀의 옷을 입고 그녀의 노트북을 열어 찾아오는 사람 운이나 봐주며 한가로이 지내리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서랍 속은 이제 처음부터 그의 것이었던 것처럼 익숙해졌다. 단 한 번 들춰보았을 뿐인데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낼 수 있었다. 손쉽게 두 손을 뒤로 돌려 브래지어 고리도 채울 수 있게 되었고 원피스 지퍼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가늘디가는 목걸이도 목 뒤로 돌린 채 잠글 수 있었다. 굽 높은 스트랩 샌들만 빼고는 아무것도 낯선 것이 없었다. 그녀의 두개골 안은 생각보다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검은 유리문이 있었고 그 문을 열고 들어서면 테이블이 열 개 남짓한 홀이 있었고 그 한구석에 작은 방이 있었다. 방 안에는 언제나 환한 빛을 내뿜는 유리창이 있었고 하얀 도기 서랍장과 콘솔이 있을 뿐이었다. 복잡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노트북은 두드리기만 하면 열렸다. 힘들이지 않고 손님의 사주를 풀어주었다. 그러나 수요일 오후 세시가 되면 그녀의 두개골은 또 다른 세상으로 향한 작은 문을 열었다. 손님들의 운명을 봐주는 사람 외에 또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가, 그녀의 침대에 몸을 눕혔을 때, 알았을 리가 없다. <13층>이 열리는 시간이 따로 있었다.
이곳에서의 첫 수요일 오후 세시. 그는 어두운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 유리문을 열고 들어와 테이블에 앉지 않고 카운터 앞을 지나 그녀의 방으로 다가가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그는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엉겁결에 몇 걸음 내디뎠다가 멈칫했다. 여자는 한 번 뒤돌아보고 웃음 짓더니 그대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는 망설였다. 카운터에 앉아 있는 그가 다른 사람임을 알아보고도 천연덕스럽게 하던 대로 하는 것을 보면 보통여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옷을 입고 그녀처럼 앉아 있는 것이 무엇을 뜻한다고 생각할까. 그는 내키지 않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명랑한 말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그래서 그는 여자에게로 갔다. 여자는 그에게 바짝 다가서더니 몸의 모서리를 들이밀었다. 왜 그랬는지 여자는 그의 앞에서 몸을 비틀어 팔을 들어올리다가 팔꿈치로 그의 가슴을 찔렀고, 오른편 골반뼈는 그의 앞섶을 찔렀다. 그래서 그는 여자가 몸의 모서리로 자신을 열고 들어왔다고 느꼈다. 예감이 수상쩍었다. 몸이라 할지라도 모서리는 어쨌건 날카로운 것이니까.
“명이라고 불러줘.”
그의 몸을 연 여자가 속삭였다. 그는 여자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도무지 알지 못하는 여자를 다정하게 부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명은 그를 낯선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듯했다. 오늘은 무엇을 준비해뒀지? 명의 목소리는 그의 횡경막을 살살 간질여 돛이 펴지듯 점차 팽팽하게 만들었다. 바람을 가득 받은 돛처럼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 그는 하얀 서랍장 속의 괴이한 속옷들과 그 아래 놓인 괴이쩍은 물건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물건들이 제각각 하얀 돛폭 위에서 날듯 움직거리는 것을 보고 새로운 것을 미처 마련하지 못한 자신의 실수를 알아챘다. 그리고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명을 올려다보았다. 명은 그런 그를 안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실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지금부터 하려는 짓에 비하면.
명은 바닥에 누운 그가 움직이지 못하게 한 손으로 지그시 누른 채 옷을 벗겼다. 역시 한 손으로 서랍장을 열고 뒤적여 꺼낸 그녀의 야릇한 속옷을 입혔다. 그리고는 그녀가 입었을 때하고는 사뭇 다르다며 그를 내려다보고 웃었다. 아, 너는 이상한 여자야. 명은 그의 가슴에서 배에 이르도록 무성히 돋은 털을 두 손으로 쓸었다. 검은 털과 하얀 속옷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명은 정말 독특해, 하며 만족스러워했다. 명은 그가 속옷을 벗지 못하게 했고, 그는 명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당황했다. 명은 그가 그저 여자처럼 얌전하길 바랐던지 입도 다물게 했고 팔도 움직이지 못하게 했고 바닥에 가만히 누워 있도록 했다.
그는 명이 원하는 것을 어쩌면 알 것 같기도 했다. 그의 몸과 명의 몸이 비벼지는 동안 지금까지와는 달리 자신이 아무 짓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적이 편안해졌다. 명이 명령하는 대로 움직이면 됐다. 검은 털 사이로 땀이 배어나왔다. 몸이 비벼질수록 그와 명 사이에 푸른 수초가 돋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수초가 가득 잠길 정도의 땀이 흘러서 그와 명 사이에서 철벅거렸다. 명의 몸과 그의 몸이 떨어졌다가 다시 붙을 때는 수초가 잠긴 물에 발바닥을 담글 때처럼 표면장력이 그들의 가슴을 때렸다. 철벅.
그는 그 소리에 놀라 명을 와락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물소리가 가슴을 쪼개는 것 같았다. 그는 정말이지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명도 아무도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명이 말릴 새도 없이 그는 속옷을 벗어버렸다. 그리고 명을 바닥에 눕혀 움직이지 못하도록 몸으로 눌렀다. 둘 사이에서 표면장력을 일으키며 미끈거리던 물은 두 사람이 마지막에 찰싹 달라붙어서야 온몸으로 흘러넘쳤다. 그런 어느 순간 명에게로 가는 무한한 애정을 느끼고 그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무언가가, 무엇인가를 알리려고 그의 가슴속에서 가슴팍을 마구 두드렸다. 그는 절정에 이르러 단 한마디를 소리쳤다. 명! 그녀였을까, 그의 몸 안에서 소리친 것은. 때로 결코 원치 않았던 순간이 가슴에 착 달라붙는 경우가 있었다.
“어쩌다 네가 여기 있게 되었지?”
그가 폐부 속에 남은 숨을 모두 몰아내듯 가쁜 숨을 쉬고 있을 때 명은 그의 등줄기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는 더듬거렸다.
“그것은, 그것은, 그러니까 침대가 좋은 소리를 내서.”
명은 피식 웃었다. 침대가 스스로 소리를 내는 일은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다면 그건 머리판과 몸체 사이에 틈이 있거나 매트가 오래되었거나 해서 나는 거지, 침대가 내려고 해서 낸 소리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발을 까딱거릴 때만 촉촉, 소리를 냈고 다른 때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삐그덕거리는 소리와는 아주 다른, 좋은 소리를 명은 아직 들어보지 못한 것 같았다. 명은 그래, 그렇다고 해두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오직 침대 때문에 그가 여기 머물게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여주는 시늉을 했다. 그는 어두운 도로에서 갑자기 뛰어든 그녀를 친 것과 그녀가 자기를 이곳으로 끌어들인 것, 그리고 그가 여기 머물며 그녀가 된 것을 더듬거리며 설명했다. 그러나 그가 침대에 오른 것과 침대가 좋은 소리를 내준 것과 그가 여기 머물게 된 것은 그가 그녀를 치어 죽인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우연이었다고 명이 말했다. 그는 명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모든 일은 그저 시간 순서대로 일어난 사건일 뿐이라는 것이다. 명이 오직 진실을 말했기를.
“당신은 그녀를 어떻게 만났지요?”
명은 일주일에 두 번씩 규칙적으로 사 층에 갔었다. 사 층은 조주협회 사무실이다. 그곳에는 칵테일 연구와 창작이 이루어지는 연구실이 있었다. 어느 날 엘리베이터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명은 계단으로 올라갔다. 한참을 오르다보니 누구나 그렇듯이 명도 그만 몇 층인지 잊었고, 혹시나 하고 무거운 철문을 열자 낯익은 유리문이 보였다. 더구나 명이 다가가자마자 유리문이 안으로 열렸다. 사 층이리라고 생각한 명은 아무 의심도 없이 카페에 들어왔고 그녀를 만났다. 아, 우리는 우연히 만난 거야. 그는 그 말을 이해했다. 많은 사람들이 계단으로 오르다가 길을 잃었다. 그도 또한 사 층까지 올라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의 유리문은 카페의 유리문과 비슷하다면 충분히 비슷하달 수 있었다. 허연 유리판 한가운데에 활짝 핀 꽃이 새겨져 있느냐 둥그런 테 안에 여신이 새겨져 있느냐만 다를 뿐이었다.
그녀가 사 층과 혼동하기 쉬운 삼 층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오는 매주 수요일 오후 세시. 그 시간은 명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시음회 현장과 연구실들을 오가는 스케줄이 가득한 일주일의 한가운데서 잠시 쉬어가고 싶은 시간일까. 잠시 일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빠져들고 싶은 욕망이 만든 그저 그런 시간인가. 혹은 오직 두 사람만이 만들어낸 특별한 시간인가.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없어진 지금도 여전한 의미를 갖고 있는가.
“당신은 그녀가 없어진 것을 몰랐나요?”
그녀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긴 했었지. 하지만 그 말은 심심하면 내뱉는 말이어서 믿을 필요가 없었어. 다음에 와보면 언제나 그녀는 저 자리를 지키고 있었거든. 어느 날 그녀가 없어지고 다른 사람이 명을 기다릴지라도 놀라지 말라고 말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내뱉던 제 말을 지켰을 뿐이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놀라 말했다.
“그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네요.”
그렇다면 이 시간은 그녀가 그로 대치된 지금도 여전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터였다.
“물론 그녀는 가끔 무당 같은 소리를 하곤 했지. 하지만 그녀는 아냐. 운명 같은 건 믿지 않았어.”
그는 첫 번째 수요일을 자주 돌아본다. 그가 다르게 반응했다면 명과 그의 관계는 달라졌을까. 명은 카페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와 카운터 앞에 이를 때까지 다른 사람이 그녀의 옷을 입고 그녀처럼 다소곳이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네가 앉아 있는 자태에 깜빡 속았지. 하지만 네 앞을 지나가는 동안 눈빛만은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
그가 명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해서만은 아니었다. 명은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결정적으로 그의 눈빛 속에는 새로운 사람에 대한 기다림이 없었다고 했다. 그 누구든 문을 열고 들어올 때 그녀의 눈빛은 어쩌면 새로 찾아올지 모르는 우연과 변화를 기대하느라고 파르르 빛을 쏘며 떨렸어. 그런데 당신의 눈은 아무 빛깔도 없이 그저 새까맣더군.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둔해 보였어. 그런 당신을 정말 그녀라고 믿을 수 있을까. 그런 당신이 과연 그녀가 될 수 있을까.
그는 그 순간 그녀의 뇌량을 타고 마구 지나가는 기억들 중 하나를 붙잡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난겨울 세 번째 수요일, 당신은 오지 않았지요. 나는 그날 보드카 병을 잡고 얼마나 망설였는지 몰라요. 날아가 버린 보드카의 향기를 당신이 귀신같이 알아차렸기 때문이지요. 당신이 오기 직전 넣어야 하는 그 술을 언제 넣어야 할지 알 수가 있나요. 결국 오지 않았고, 당신은 네 번째 수요일에 와서 변명했지요. 시음회가 갑자기 연기되는 바람에 오지 못했다고 말이에요. 명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그 말을 너에게 했어? 그녀와 오래 사귀었구나? 명은 비웃었다. 그는 단정히 앉은 명의 블라우스를 확 잡아 뜯었다. 명이 약속을 어기고 네 번째 수요일에 왔을 때 그녀가 다짜고짜 했던 행동이었다. 블라우스의 두 번째와 세 번째 단추가 뜯겨져 나가고 그녀의 젖가슴이 드러났다. 그는 그것을 움켜쥐고 물었다.
“명이라구? 밝다는 뜻이에요 어둡다는 뜻이에요? 도대체 나를 어디로 몰아넣겠다는 거예요? 난 그녀가 맞다구요.”
명은 그의 손을 탁 때려서 치우며 피식 웃었다. 그 둘 다야.
“그래, 내가 여기 오는 동안은 너는 그녀야. 내 앞에서는 언제나 그녀인 거지. 네가 원하고 내가 원하니까.”
너와 그녀는 나 모르게 친해져 있었던 모양이군. 그것으로 됐어. 그는 명이 자신보다 훨씬 많은 것을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호기는 단번에 꺾였다. 어떤 사이이건 두 사람 사이에는 힘의 우열이 있게 마련이다. 그가 그녀가 아니라고 믿으면서도 그가 그녀이기를 원한다는 것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와 명의 관계도 이러했으리라. 조명이 자주 바뀌는 어두운 카페에서 사주를 봐주고 명을 기다리며 그녀로 사는 일이 한참 동안은 계속되어질 것이고, 그녀의 취향이 보드카 향기에 레몬 웨지가 섞이듯 그의 온몸 구석구석 배이리라. 그 첫 번째 수요일에 정해진 그들의 우열은 지금껏 유지되고 있었다.
그의 등줄기 한가운데는 마치 봅슬레이 슬로프처럼 깊고 가파르게 패여 있어서 명의 혀가 빠르게 미끄럼을 타고 내려갔다. 명은 그의 허리를 잡고 돌려 눕히려고 했다. 그는 두 팔을 단단히 짚고 버텼다. 그러나 명은 손쉽게 그를 돌려 눕혔다. 그리고 그의 입 속에 숨을 불어넣었다. 두려워했던 순간이지만 막상 뜨거운 숨과 차가운 숨이 섞여들면 그는 비로소 여자가 된 듯 몸이 뒤틀렸다. 등허리가 심하게 굴곡지면서 팔딱 뛰어올랐다가 철퍼덕 떨어졌다. 그의 굴곡에 명의 몸은 딱 들어맞았다. 바닥은 땀으로 찐득해지고 살갗은 바닥에 밀착되어 위로 아래로 밀리면서 찢어지듯 아팠다. 그는 여기저기 붉게 찰과상을 입으리라는 것을 안다. 뱃가죽 안에서 비틀리는 창자들을 느낀다. 그는 실제로 복통을 일으키는 것과 날카로운 기쁨이 복부를 찢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는 그 두 가지 고통을 구별하지 못한 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확실히 안다. 그래서 명을 두 팔로 끌어안는다.
맞닿은 가슴과 배, 푸른 수초 사이로 물이 괴어오르고 명은 불가사리끼리 끌어안듯 한 팔과 다리로 그를 안고 거푸 물었다. 네가 어떻게 여기 오게 되었지? 네가 어떻게 내게로 왔냐구. 그도 다른 쪽 팔과 다리로 명을 감싸고 말했다.
“내가 이리로 오도록 모든 게 짜여져 있었던 거예요. 그녀는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해요.”
그렇게 확신하고 싶었다. 그러나 명은 그 따위 말을 단번에 잘라버렸다.
“여기 와서 저 노트북을 열게 만드는 사람들이 죄다 운명을 알기 원한다고 생각해? 자기 삶에 남아 있는 우연을 알고 싶어 하는 거야. 이 보잘 것 없는 삶에서, 우연한 기회에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없겠어? 그녀는 사람들에게 그 기대를 채워주었지.”
그녀와 그의 의견이 다를지언정 그녀 얘기를 주고받다보니 지금 어디에도 없는 그녀가 마치 그와 명 사이에 살아 있는 듯했다. 조금 더 생각해보니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자기가 죽인 여자가 다정하게 곁에 서 있는 것 같았고, 그것이 아무렇지 않은 것은 물론 무척 친근하게 느껴졌다. 어쨌든 그녀가 아니라 해도 무엇인가가 그들 사이에서 서성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명과 함께 치른 기쁨 혹은 고통이 그녀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그는 중얼거리지만 명은 졸음에 겨워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그래그래, 여기서 우리 셋이 사는 거야. 그러면 됐지. 명은 제 숨을 그의 목구멍으로 불어넣을 것처럼 그의 입에 바짝 대고 말했다. 숨소리가 섞인 목소리는 그를 잠속으로 이끌었다. 그는 명의 옆구리에 달라붙어 가물가물 잠에 떨어졌다. 명이 말하는 그대로일지도 모른다. 그가 여기로 오게 된 것은 그의 삶에 남아있는 우연이 이끈 것일지도. 뭐 어떤가. 운명이든 우연이든, 그들이 지금 이렇게 여기 있는 것은 사실인데. 깊은 숨소리를 내는 그녀가 이렇게 옆에 있는데.
작지만 특별한 소리가 순간을 갈라놓지 않았는가. 그녀가 오직 그만을 위해서 마련해놓은 특별한 소리라고 여겼지만 하필 그 순간 침대의 나사가 비틀려 생긴 틈이 낸 소리일 수도 있었다. 그가 원치 않았는데도 둘의 가슴 사이에서 난 물소리가 그를 명에게 빠져들게 하지 않았는가. 그런 작은 순간들이라면 여기 있는 이유를 백 개도 더 댈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 때문에 그가 여기에서 그녀의 영혼을 안고 있는지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걸까.
짧은 잠에서 깨어난 그는 진한 갈증을 느꼈다. 작은 탁자 위에 놓인 음료 잔을 집으러 손을 뻗었다. 금방 잠이 깬 명은 자기 가슴 위로 가로지른 그의 팔을 잡아당겨 음료를 빼앗았다. 명은 음료를 천천히 마시면서 비터스가 많이 들어갔다고 했다. 그는 정해진 양대로 넣었을 뿐이라고 대꾸했다. 정해진 양이란 없어. 어떤 맛을 원하는가가 중요한 거지. 언제나 정해진 그대로의 비율이어야 한다면 단순한 음료로 만족하겠지. 조지가 팜 스프링의 선술집에 들어가 바텐더 대신 처음 이 술을 만들었을 때 이 맛은 아니었을 테니까.
비터스가 병아리 눈물만큼 더 들어갔다는 ‘블러디 메리’는 긴 잔을 기울일 때마다 수평을 이루며 뭉클거렸다. 자칫 엎지르기라도 하면 영락없이 피를 쏟은 꼴이 될 것이다. 그녀 말이 맞다. 그는 명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한입에 털어 넣어버렸다. 기분을 바꾸는 건 소금 한 알갱이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토마토 쥬스가 영점몇 씨씨 더 들어간 ‘블러디 메리’는 그 날의 기분을 띄울 수도 있다. 영점몇 씨씨 더 들어간 레몬 웨지는 무엇 때문인지 우울증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을 할 수도 있을 테고. 명은 운명이라는 계획표가 가득 짜여 있는 인생이란 지루하기 짝이 없을 거라고 했지만 그로 말할 거 같으면 앞 일이 환히 보이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병아리 눈물만큼 더 들어간 비터스 때문일까. 눈에 보이는 명이 보이지 않는 그녀보다 더 위력이 센 것일까. 그는 명에게로 기울어졌다. 명에게 기대어 그는 사소한 것들을 기억했다. 계획에 없었을, 그러나 명에게 가서 달라붙게 한 수많은 작은 소리들을.
그는 밤이 되면 침대에 오른다. 침대에 오르면 딱 세 번 발을 까딱거린다. 처음 말을 걸었을 때처럼 반드시 다리를 교차시키고서. 그러면 오직 그의 귀에만 들리는 작은 소리로 침대는 머리맡에서 대답을 한다. 촉촉촉. 그 소리를 밤새도록 듣고 싶지만 너무 익숙해져서 아무것도 아닌 소리가 될까봐, 그는 더 이상 발을 까딱거리지 않고 잠을 잔다. 어쩌면 그녀는 더 이상 그 소리에 감동하지 않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다른 소리를 찾아 간 것인지 모른다. <13층>을 떠난 그날 밤의 야산에서 그녀가 특별한 사람을 우연하게 만났을지 누가 알겠는가. 목젖 근처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사람이라든가, 바람이 불면 귓바퀴로 바람이 소용돌이쳐 들어가는 통에 머리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는 사람이라든가.
그래서 우연히 그와 함께 사랑에 빠지고 다른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에 빠져 있는 상태는 다른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과 같으므로.
방현희․
200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2002년 ≪문학/판≫ 장편소설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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