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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신작단편/송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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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05회 작성일 08-02-26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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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단편|


하루

송수경



나무는 힘이 있다. 나무는 인간의 슬픔과 절망을 다스려주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운명의 길로 이끌기도 한다.
어느 한 기업체로부터 아까시나무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가 들어온 것은 우연이었을까. 그때 나는 매발톱나무의 주요 성분인 베르베린과 옥사칸틴의 성분이 암세포의 산소공급을 차단하는 효과에 흥미를 느끼고 매발톱나무의 항균력 시험에 매달려 있었다. 만약 그 프로젝트 대신 매발톱나무를 택했다면, 그래서 아까시나무 개발 연구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내 생에 한번이라도 그녀와 다시 만날 일이 있었을까.

1.
그 프로젝트는 대체 재목으로 아까시나무가 어느 정도의 효율성을 갖고 있을지에 대한 연구였다. 물론 일부 아까시나무로 가구를 만들어 시판해 온 소규모의 가구업체가 있기는 했지만 품질 향상을 통한 고급 원목 자재를 개발하는 것이 그들의 사업 목표였다.
연구팀에서는 프로젝트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를 놓고 의견이 둘로 갈려졌다. 처음부터 아까시나무를 고급 원목 자재로써 개발한다는 것 자체에 회의를 갖고 반대를 한 것은 나이든 원로 교수 쪽이었다. 그들은 아까시나무가 지금까지 주로 지장목이나 간벌재로 이용되어 왔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우량목을 생산해 내기엔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삼사십 대의 젊은 교수들 생각은 달랐다. 우선 새로운 육종방법의 개발은 아까시나무에 대한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으며, 최신 유전공학 기법을 통한 우량품종을 계속적으로 육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목재로 이용 시에 치수 안전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수축률은 한국산 아까시나무재의 경우, 방사 및 접선 방향 모두 상수리나무재보다 작고, 일본산과 비교해서는 훨씬 작은 수치를 기록했다. 특히 건조 활열 발생이나 비틀림 정도의 지표인 접선 방향과 방사 방향의 수축률 차는 상수리나무재보다 작았으며 일본산 아까시나무재보다는 훨씬 작은 값을 보였다.
무엇보다 우리는 아마존의 숲들이 매일매일 이 지구상에서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었다. 지금까지 불필요한 잡목으로 여겼던 아까시나무로 가구를 대량 생산해 낼 수만 있다면, 이 지구상에서 아름다운 숲들이 더 이상 사라지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베토벤은 숲에서 전원교향곡의 영감을 얻었으며, 시벨리우스는 수오미 숲을 노래한 ‘타피올라’를 탄생시켰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엔 베츨라 주변의 아름다운 숲이 있었다. 헤세는 숲에서 ‘마로니에 숲의 5월’을 남기지 않았는가.
결국 나는 프로젝트의 성과와는 상관없이, 매발톱나무의 항균력 시험까지 내팽개친 채 아까시나무에 대한 연구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전국에 자생한 아까시나무의 우수한 개체만을 골라 식재하여 연구하고 있는 어느 지방 대학의 아까시나무 시범림을 비롯해, 강화도의 아까시나무 군락지역을 바쁘게 오갔다. 그 안에서 운영되고 있는 연구단지 내의 연구팀과 미팅을 가지면서 나는 아까시나무 용재 연구에 대해서 더 강한 의지를 갖게 되었다. 이미 국내에서도 외래유전자를 이용한 형질전환 아까시나무를 육성하고 있으며, 앞으로 얼마든지 원하는 형질을 얻을 수 있는 아까시나무의 신품종 개발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확신은 어쩌면 전혀 다른 것으로부터 온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까시나무가 물고기자리인 내게 보낸 기(氣)이거나 아우라였는지도.

강화도에 있는 그곳 연구단지를 돌아보고 난 뒤 나는 광릉수목원 연구소로 전화를 넣었다. 좀더 필요한 참고 자료를 얻기 위해서였다. 전화 속의 여자 목소리는 의외로 사무적이거나 기계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기분을 유쾌하게 해줄 만큼 친절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톤 낮은 목소리에서는 조심스레 피로감과 권태로움이 느껴졌다.
“네. 지금 오셔도 괜찮아요.”
짧고 간단한 대답이었다.
“강화도에서 출발하느라 퇴근 시간 조금 넘어 도착할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내 말에 여자는 다시 짧게 ‘네’라고 응답했다.
“될 수 있는 대로 시간에 맞추도록 차를 밟아보겠습니다. 그럼 도착해서 뵙겠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조용히 전화기가 내려지는 소리가 몇 초의 사이를 두고 들려왔다. 얼굴도 모르는 여자와의 짧은 대화였지만 여자의 권태롭다 못해 우울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가 왠지 마음에 걸렸다.
차를 몰기 시작했을 때 이미 하늘 위로 검은 구름이 빠르게 움직이며 날 쫓고 있었다. 광기에 찬 사내의 눈빛처럼 심상찮아 보이는 구름은 나무 끝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을 휘잡아 끌며 일렁였다.
수목원 내에 있는 임업연구소에 도착했을 때 이미 비는 드러머의 손에 들린 북채처럼 사정없이 땅바닥을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푸른 숲은 뽀얀 물안개 속에서 마치 바다에 떠 있는 섬처럼 보였다. 각기 다른 수백 여 종의 나무들이 뱉어낸 수목의 향내가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물안개를 따라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차를 연구소 앞에 주차한 채 잠시 차안에 앉아 끊임없이 부채꼴의 영상을 만들고 있는 윈도우브러시의 움직임 너머로 숲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차갑고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을 두들기며 떨어져 내리는 빗소리와는 분명 달랐다. 각기 다른 모양의 나뭇잎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서로 다른 빗방울 소리. 팽나무, 자작나무, 후박나무……, 아름드리 큰 소나무와 어린 소나무. 줄기의 껍질 두께나 그 골의 깊이에 따라 그것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그 다양한 종류의 빗소리가 모두 들리는 것 같았다. 좀더 마음을 비운다면 그 다양한 빗소리에 숨어드는 온갖 종류의 벌레소리까지도.
차창을 열자 신선한 공기와 함께 상쾌한 빗방울이 가볍게 날아들었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아까시꽃 향이 스쳐지나 갔다.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그쪽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그 때 한 여자가 연구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여자는 낯선 차를 한번 흘긋 쳐다보곤 몸을 옆으로 돌려세운 채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작고 동그란 어깨 끝을 간신히 벽에 기대어 서서 빗속으로 멀리 시선을 둔 채 담배연기를 느리게 뱉어냈다. 마르고 작은 여자의 어깨는 바람개비 날개처럼 보였다. 바람에 옷자락이 날리는 것 같기도 했고 어깨가 떨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여자의 하늘색 실크블라우스 자락이 조금씩 젖어들었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여자의 모습이 무척 화사해 보였을 법하게 희고 갸름한 얼굴은 하늘색 블라우스와 잘 어울렸다. 전화를 받았던 그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의 마르고 긴 다리가 스커트자락 밑으로 시원하게 눈에 들어왔다.
핸드브레이크를 올리고 자동차 열쇠를 빼어 주머니 속에 밀어 넣었다. 연구소 현관까지는 가까운 거리였으므로 뒷좌석 어딘가에 있을 우산을 놔둔 채 차에서 내렸다. 차안에서 보고 있을 때보다 빗줄기는 제법 거셌다. 팔뚝으로 머리를 감싼 채 온몸을 동그랗게 말고 연구소 처마 밑을 향해 달려갔다.
여자는 그런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반대 쪽 숲을 바라보며 담배를 빨아들였다. 내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전화를 받았던 그 여자는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다. 옆에 서서 젖은 옷자락을 털어 내며 흘금 바라본 여자의 옆모습은 지나치게 정적이었고 차가움이 느껴졌다. 어쩌면 비에 젖은 숲의 배경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 푸른 숲을 배경으로 날아가는 담배연기 때문인지도.
여자의 작은 입을 통해 피어오르는 담배연기는 빠르게 빗속으로 사라졌다간 다시 그녀의 입을 열고 조금씩 퍼져 나왔다. 기계 속에서 끊임없이 떨어져 내리는 똑같은 모양과 크기의 전자 부속품처럼 담배연기와 그녀의 입 모양은 기계적인 반복을 되풀이했다. 여자의 옆모습이 왠지 낯이 익다는 생각을 하며 그 앞을 지나치려는 순간이었다.
“K대에서 온 박연우 교수님이시죠?”
여자는 지금까지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모습과는 달리 처음부터 날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물었다. 여자의 목소리는 차가우면서도 탄력감이 느껴졌고 가벼웠다. 전화로 들었던 목소리와는 사뭇 달랐다.
그러나 여자는 왠지 긴장한 모습이었다. 이마 위로 흩어져 내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걷어 올리며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밑으로 내리 깐 채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저 때문에 퇴근도 못 하시고, 죄송합니다.”
나는 여자의 굳은 표정에 마음이 쓰였다.
“생각대로 한눈에 절 알아보지 못 하시는군요. 저 윤주예요. 강윤주…….”
여자는 마치 선전포고를 하듯 조금 전과는 달리 단호하고도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보면 여자가 내게 화를 내고 있다고 느낄 만큼 여자의 목소리엔 감정이 실려 있었다. 조금은 황망한 느낌으로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느 화랑에선가 보았던 그림 속의 여자가 떠올랐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느껴지는 깊은 적막감. 정면을 향해 공허하게 벌어진 커다란 눈동자. 그 눈동자는 누군가를 원망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그림 속의 여자가 과거의 어느 한 시절의 내 삶과 오버랩 되는 것을 보았다. 아, 그녀…….
순간 빗물이 번들거리는 그녀의 흰색 샌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지런히 묶어놓은 나뭇단같이 마르고 가는 여자의 발가락들이 꼬물거리고 있었다. 순간 스무 살이 되던 해, 내가 느꼈던 신선한 욕망들이 떠올랐다. 그 볼품없이 마르고 가는 그녀의 발가락 하나하나를 혀끝으로 핥으며 물고 풍선껌처럼 잘근잘근 씹어 입 안 가득 그 풍부한 살덩이를 느끼고 싶었던 지난 기억들이.
그녀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꼬물거리는 발가락을 모아 붙이곤 그때까지 혼자 타들어가며 손가락 사이에 끼어있던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발로 비벼 껐다. 아주 천천히 그러면서도 뭔가 생각을 정리한 듯 홀가분하게.
“아까시나무 프로젝트 건에 대한 연구자료 협조공문서를 받았을 때 당신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당신이 그 대학에 있다는 소식은 몇 년 전에 알고 있었지만 막상 당신 이름이 적인 그 공문서를 보니 기분이 묘하더군요. 결국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는구나, 이런 식으로 얼굴을 볼 수도 있는 것이구나, 빗속에서 담배를 피우며 내내 그 생각했어요. 정말 이건 누구의 탓도 아니잖아요.”
그녀의 말은 내 마음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아직까지 지난 세월을 털어내지 못했단 말일 거였다. 강화도에서 연구소로 가겠다는 전화를 했을 때, 퇴근 시간이 지나도 기다려주겠다며 쉽게 수화기를 놓지 못했던 여자의 목소리를 다시 떠올렸다. 전화를 받고 내가 도착하는 순간까지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단 말인가.
천장이 낮은 그녀의 지하 단칸방 창문으로 흘러가던 구름과 나른한 햇살.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지나갔던 마당의 작은 텃밭. 햇살이 막 수도꼭지에서 떨어져 내린 물줄기처럼 어두운 방안을 채워오던 날을 함께했던 그 순간들. 그런 기억들이 막 물에서 건져 올린 물고기의 싱싱한 비늘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건 기억이 아니라 일종의 풍경이었다. 우리의 등 뒤에 무심히 서있었던 나무와 그 나무가 기대어 서있던 오래된 담장과 머리 위로 흘러가는 여러 모양의 구름들. 그런 풍경과도 같았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연구소는 마치 깨끗이 씻어 말려놓은 흰 조개껍질 속처럼 정갈했다. 유리창마다 걸린 하늘색의 블라인더 사이로는 조금 전 비를 맞으며 그녀가 보고 있었던 숲이 보였다. 숲은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처럼 깊어 보였다.
사무실 한 가운데엔 흰 테이블보가 깔린 긴 사각의 탁자가 놓여 있고, 그 뒤로 줄을 맞추어 사무용 책상들이 늘어서 있었다. 벽마다 코팅된 금연이란 스티커가 주는 사무적인 딱딱한 이미지 외에도 일반적인 연구소와 그리 다른 분위기는 아니었다. 창가 쪽에 놓인 잎새란들이 누군가의 보살핌 속에서 잘 자라 푸른 잎사귀를 우아한 자태로 뽑아 내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한눈에 그녀의 자리를 찾아냈다.
책상 가득 펼쳐진 서류철과 그 위로 굴러다니는 색색의 볼펜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여러 의자 밑에 놓인 슬리퍼들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녀의 자주색 하이힐을 보았던 것이다. 그녀의 취향이 한눈에 느껴지는 단순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구두는 정갈하게 잘 닦여져 있었다.
그녀는 나를 입구 쪽에 놓인 손님 접대용 유리탁자 앞의 의자 빼내어 앉게 했다.
“강화도에서 여기까지 빗속을 달려오느라 힘들었겠군요. 그래도 빗속을 달려오기엔 꽤 먼 거리잖아요.”
그녀는 향이 짙은 중국차를 끓여 내 앞으로 밀어 놓으며 말했다. 그녀가 커피가 아닌 중국차를 내게 내민 것은 의외였다.
“강화도에서부터 비를 만난 건 아니고 거의 이곳에 와서야 비를 만났어.”
아무도 먼저 찻잔을 들어올리지 않았다. 그녀도 나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를 풀어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었다.
“아침에 전화를 받았던 사람이 윤주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지. 왜 얘기 안 했어, 알았다면 …….”
알았다면, 그랬다면 어떻게 했었을까. 그랬다면 어쩌면 나는 그녀를 만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쉽게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땐 사무실에서 다른 얘기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거든요. 어차피 만나면 알게 될 테고 해서…….”
“윤주가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질 않는군. 오랫동안 윤주가 산림자원학과를 나왔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그런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말 그녀는 나를 이해했다는 뜻일까. 아니면 자신이 무슨 과를 나왔는지조차 잊게 한 그 세월을?
그녀는 한 손으론 찻잔을 감싸 쥔 채 말이 없었다. 그 동안 잘 지냈니? 아무도 그렇게 묻지 않았다. 그렇다고 달리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는 동시에 유리탁자 위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렇게 침묵했다. 해야 할 말들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무게로 너무도 다르게 흘러가 버렸을 지난 세월을 먼저 끄집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말들은 무의미했다. 우리는 그걸 알고 있었다.
유리탁자 속으로는 로즈베라늄, 메리골드, 바실, 세이지 같은 관엽식물들이 작은 화분에 심어져 있었다. 마치 어항 속의 물고기처럼 그것들은 두꺼운 유리탁자 속으로 깊이 가라앉은 채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찻잔은 로즈베라늄 위로 작은 배처럼 떠있었다.
“아까시에 대한 프로젝트라고 했죠?”
그녀는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그리고 낯선 사람을 바라보듯 말했다. 헝클어진 감정들을 차분히 정리하고 배열해서 간결하게 서론 본론 결론까지 마친 표정이었다. 그녀다운 모습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고 조금도 서툰 감정 따위는 남기지 않는. 아직 반도 맞추어지지 않은 내 감정의 조각들이 서로 뒤엉켜 덜거덩거리고 있는 것에 비한다면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재단하는 데 있어 프랑스의 유명 패션스쿨의 노련한 수석 재단사의 솜씨보다 나았다. 당신은 아이를 몇 낳았으며 아내는 어떤 사람인지 등등의 상식적인 질문을 뛰어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사람들의 선입관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다시 깨달았지. 아까시나무라 하면 무조건 쓸모없는 잡목으로만 알고 있으니 아직까지 이쪽에 대한 연구가 시원찮은 거구. 또 아까시와 아카시아는 전혀 다른 수종이라는 것도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을 정도니까.”
나는 천천히 찻잔을 들어올렸다. 찻잔이 놓인 자리로 메리골드가 눈에 들어왔다.
“고급가구로 잘 팔리는 등가구도 사실은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등나무와는 전혀 다르잖아요. 공원이나 놀이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등나무의 학명은 위스테리아 플로리분다인데, 그 나무를 찾아낸 위스터라는 미국인 학자를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고, 가구재로 쓰이는 등나무는 사실 ‘라땅’이라는 다른 수종이란 걸 사람들은 잘 모르죠.”
연구원들 앞에서 자신의 연구 과제를 브리핑하듯 그녀는 필요 이상의 진지함을 보였다.
“사실, 아까시나무의 부가가치에 대한 연구는 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봐요. 이 나무는 우선 인공적이거나 천연적으로 황폐화된 지역에 식재할 수 있는 개척수로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으니까. 또 빠른 생장과 질소 고정 능력은 큰 장점이 아닐까요? 뿌리혹박테리아와의 공생으로 얻어진 질소 성분은 잎과 가지 등에 축적된 상태로 토양에 떨어져 부식되면서 토양을 양토로 개량할 수 있으니 환경친화적인 수종으로서 더할 나위가 없다고 봐야죠. 이것 보세요, 아까시나무림의 생육 단계별 적성밀도에 대한 보고서예요.”
그녀는 미리 찾아놓은 자료들을 펼쳐 보이며, 차를 다시 한 모금 입에 물었다. 그녀의 작고 동그란 입술에 난 입술주름이 말을 할 때마다 살이 오른 누에처럼 좌우로 펴졌다 오므러졌다를 반복했다. 입술에 유난히 힘을 주고 있는 그녀의 입 모양새를 나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10년 만에 만난 과거의 남자 앞에서 아까시나무에 대한 보고서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은 분명 그녀답지 않았다. 직선적이고 우회적이지 못한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당신 행복하게 잘 사는 거예요? 두 눈을 보니 당신도 그렇게 쉬운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데 내 말이 틀렸어요? 처음 사냥감을 찾아낸 사냥꾼처럼 나를 공격부터 하고 나섰어야 할 그녀가 아닌가. 용기 없이 쉽게 사랑을 포기해 버린 비겁한 남자를 그녀는 절대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윤주는 그랬다. 그래야 옳았다.
지금까지 서로의 시선을 피하던 그녀가 갑자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짙은 습기 때문인지 그녀의 눈빛은 무겁게 젖어 있었다. 말하는 사람과 그 실체 주인공의 육성이 다른 외화 더빙을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아니 실에 묶여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인형극 속의 인형들과 서로 따로 노는 목소리의 울림 같았다. 입만 벙긋거릴 뿐 사실 그녀의 두 눈은 내게 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내게 눈으로 하고 있는 그 얘기에 열중하려고 애썼다.
“우리나라에 조림되어 있는 아까시나무림은 대부분이 흉고직경 20cm 이하의 소경재로서 생산되고 있을 뿐이지만 92년도의 경우 참나무, 포플러류 및 오리나무에 이어 4번째로 많은 생산량을 보이기 시작했어요. 헝가리에서 벌기령 30년 된 육종을 생산하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우리나라에서도 관리를 잘 하면 유용한 용재로 충분히 그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우리나라와 같이 목재 자원이 빈약한 곳에서는 포플러처럼 속성수이면서, 참나무처럼 재질이 좋은 아까시나무림을 집중 관리할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여기 이 도표 좀 보세요. 아까시나무의 알레로파시 (다른 수종 생육에 영향을 미치는 물질) 효과에 대해 조사한 거예요. 생엽 10g, 뿌리 10g, 그리고 낙엽 4g을 각각 증류수 100ml에 36시간 추출한 추출물을 가지고 소나무․해송․리기다․리기테다․아까시나무․산오리나무․사방오리나무․싸리․새․수크령 등 10개 수종의 종자 발아시험을 실시했는데, 아까시나무의 추출물이 사방오리나무 이외의 다른 시험 수종의 발아에 특별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걸로 분석되었어요. 보통 아까시나무가 다른 수종의 번식을 방해한다고 알고 있는데 잘못된 상식이죠.”
내게 전혀 그 의도도 짐작할 수 없는 표정으로 말하고 있는 그녀가 조금씩 안타까워졌다. 이럴 필요가 있을까. 그녀는 지금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 무엇을 숨기고 싶은 것일까. 내내 석탄같이 까맣게 탄 절망의 덩어리가 자꾸 목으로 넘어왔다.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게 있어요. 오랫동안 나무와 인간 사이의 기 영역을 연구해 온 보고서를 보면 자신이 태어난 별자리마다 영향을 미치는 나무가 존재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유연히도 당신은 물고기자리군요. 물고기자리의 사람에게 아까시나무는 특별한 힘을 주죠. 아까시나무의 진동파는 그들에게 사랑할 수 있는 힘과 관용을 베풀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거예요. 특히 슬플 때는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고 과거의 어두운 기억들을 버림으로써 새로운 힘을 얻게 해주죠. 이 나무의 진동파는 막혀버린 마음과 두려움을 해소시켜 줌으로써 새로운 경험이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준다고 해요. 참, 신기하네요. 아까시나무는 물고기자리뿐 아니라 게자리의 운명도 지배하거든요. 우리가 함께 아까시나무를 통해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걸 보면…….”
“그럼, 게자리인 당신에게는 어떤 힘을 주지?”
“오래 묵은 죄책감이나 체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주죠.”
나는 탁자 속의 메리골드에로 눈길을 떨어뜨렸다. 순간 그녀가 말을 멈추고 쫓기듯 창밖 너머로 얼굴을 돌렸다. 침묵은 쏟아지는 빗소리와 함께 내 심장을 두들겨댔다. 이제 그녀 안에 감추고 있었던 그 모든 것을 다 털어내 버릴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여자의 두 눈에 가득 고여 있을 눈물을 상상했다. 지난 기억 어느 곳을 찾아보아도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 앞에서 울고 있구나.
그러나 다행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여자는 울지도 않았고, 오히려 지금까지의 불안정한 모습과는 달리 편안해 보였다. 나는 그녀를 외면하고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쓰고 독한 니코틴으로라도 가슴 속 공허감을 채워야 할 것 같았다.
라이터 불을 켜 내 앞으로 내민 건 그녀의 작은 손이었다. 라이터 불이 창백한 그녀의 얼굴에 생기를 불러일으켰다. 그 위로 얼굴을 숙이자 희고 푸른 실핏줄이 도는 그녀의 마른 팔뚝이 보였다. 적당히 탄력감을 상실하고 희기보단 창백한 피부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일 듯 솜털 하나하나까지 가까이 보였다. 20대에 볼품없이 마르고 작은 그녀의 발가락들을 보면서 느꼈던, 벌레처럼 온몸을 스멀거리며 기어오르던 그 성욕이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한번도 그녀의 육체를 소유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도. 한번도 후회해 본 적 없었던 그 일을 나는 쓸쓸히 떠올리고 있었다.
연거푸 두 개비의 담배를 태워낸 후에야 나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항상 대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날 것같이 차갑고 총기 있었던 그녀의 눈빛은, 이제 끝이 닳아지고 무뎌진 송곳니나 날이 빠진 커터 날처럼 예리함을 잃어 버렸다. 그렇게 세월은 결코 가볍지 않은 삶의 깊이로 흔적을 남겨놓았다.
“이 프로젝트가 확실히 결정이 난 사항은 아니냐. 별 타산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교수가 있어서 몇 번 더 미팅을 가져봐야 알겠지.”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 나무에 대한 연구가 좀더 체계적으로 활발히 이루어진다면 경제성에서 환경문제에까지 폭넓게 이득을 추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는 기업들이 실리적인 이득보다는 이런 환경문제에까지도 신경을 써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사십 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삼십 대의 나이란 이미 겪어버린 이십 대의 그 열정을 간직할 용기도 없고, 그렇다고 사십 대의 체념과 완숙을 배우지도 못한, 뜸이 덜든 밥처럼 그 어느 쪽도 아닌 채 설익어 꼬드러진 그런 감정들과 부딪치고 싸워야 할 나이인 것이다. 인생에 있어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함께했었던 그 사랑이 바로 눈앞에 있지만, 그 사랑을 열정으로 다시 불태울 만용도 없었고, 깔끔하게 작별 인사하고 서류를 챙겨 돌아올 호기도 없었다.
“이거.”
그녀는 책상 위의 보고서와 CD룸이 함께 든 서류봉투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찾아볼 수 있는 자료는 다 찾아본 셈이에요. 헝가리에 있는 아까시나무 재단과도 연락을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곳에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 사업을 하고 있으니까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나는 그녀가 건네주는 봉투를 받아 들고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학교 근처에 볼일이 있으면 한번 들러. 따뜻한 밥이라도 같이 먹게.”
그녀는 잠시 망설이듯 나를 바라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럼, 나중에 한번 보자.”
나는 그녀를 향해 작게 손을 들어 보였다. 분명 웃으려고 애썼는데 그녀의 얼굴을 보니 정말 내가 웃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웃지 않았고, 하얗게 마른 입술은 굳어 있었다. 그 입꼬리 끝으로 괄호무늬 같은 가는 주름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 주름이 조금씩 선명해지면서 그녀의 입꼬리가 양끝으로 올라가 붙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내게 웃어 보이고 있었다. 나는 차마 그녀를 바라보지 못한 채 먼저 등을 돌렸다. 어느새 비가 그친 창 너머로 검은 숲이 보였다.
“그래요, 시간 나면 들를게요.”
등 뒤로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의례적인 말에 의례적인 대답. 그녀가 가장 싫어했던 대화를 우린 남처럼 하고 있었다. 그녀가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서 현관 쪽으로 걸어 나보다 먼저 밖으로 나갔다. 빠른 걸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금방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그녀의 온몸이 삼베옷처럼 얼기설기 구멍이 뚫려 그 속으로 찬바람이 마구 쏟아져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의례적인 인사법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작별인사는 무엇일까.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밖으로 걸어 나와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고 주차장에서 차를 뺄 동안 그녀는 연구소 처마 밑에 서서 조금 전처럼 한쪽 어깨를 벽에 붙인 채 담배를 피워댔다. 푸른 담배연기가 그녀의 어두운 얼굴을 가리며 허공 속으로 녹아들었다. 달라진 것은 이제 더 이상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과 그녀가 바라보던 숲이 조금씩 어둠 속에 잠겨 가고 있다는 것뿐이었는데도 그녀는 더욱 낯설어 보였다. 몇 번이나 그녀와 눈을 맞추려는 내 의도는 빗나갔다. 그녀는 어둠이 달려오는 숲을 향해 희뿌연 담배연기를 날리며 그 연기가 사라지는 허공만 눈으로 느리게 쫓았다. 엔진이 찢어질 듯한 강한 소음과 함께 차는 연구소의 낮은 철문을 통과했다. 이 철문을 통과하는 순간 그녀에 대한 모든 기억들은 다시 쓸쓸한 과거 속으로 묻힐 것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아까시나무 프로젝트로 나는 그녀를 다시 만났었고, 그리고 우리는 남처럼 헤어졌다라고 그렇게 그날을 기억할 것이었다.
철문을 지나 핸들을 우측으로 꺾는 순간, 문뜩 눈길을 던진 백미러엔 담배가 꼽힌 손에 얼굴을 묻고 벽에 기대어 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꽃잎처럼 가벼워 보이는 그녀의 어깨가 곤충의 날개처럼 쉴 사이 없이 파득거렸다. 바람에 날리는 블라우스 자락은 금방이라도 그녀를 끌고 곧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았다. 흰색 치맛자락은 동사무소 옥상에 걸린 깃발처럼 그녀의 마른 종아리에 감겨 어느 방향으로 날아갈지 갈피를 못 잡고 허우적거렸다. 그 뒤로, 그녀의 슬픔과는 아랑곳없이, 보이지 않는 생명체들이 자신의 보금자리를 향해 빠르고 날렵한 걸음으로 젖은 풀숲을 달려가는 발자국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리고 있을 숲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없는 분노와 연민의 감정 사이에서 몸을 떨며, 시동이 멈춰진 백미러 속의 그녀를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2.
눈을 떴을 때,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활처럼 구부러져 있는 그녀의 작은 등이 보였다. 척추의 마디마디가 작은 돌멩이를 얹어놓은 듯 돌출 되어 있는 모습이 이른 새벽의 푸르스름한 여명 속에서 동물적인 야성을 흘리고 있었다. 뜨거운 사바나에서 먹이를 쫓다 지쳐 쓰러진 사자의 마르고 단단한 그 등골이 떠올랐다. 입 안 가득 뜨거운 타액이 고여 왔다. 타액이 껌처럼 질컥거리며 혀 주위로 흘러들었다. 가장 위쪽 목뼈부터 핥으며 미끄러지듯 하나씩 입을 맞추어 나갔다. 그녀의 겨드랑이 사이로 천천히 손을 집어넣자 손아귀에 겨우 잡힐 만큼 작은 가슴이 들어왔다. 그녀는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보다 많이 말라 있었다.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살의 감촉보다 그녀의 지난 삶이 더 강하게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아직도 비가 오나요?”
그녀는 이미 잠에서 깬 듯, 티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며 신문을 보는 사람의 여유로 내게 물었다.
“밤새도록 비가 내렸었는데 그 소리 들었어요?”
그녀는 여전히 내게 등을 돌린 채 그렇게 물었다. 그녀도 나처럼 상대방의 얼굴을 마주보고 그 표정을 읽어내야 할 일이 두려웠을 것이었다. 간밤 우리가 이곳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일어난 모든 일들은 이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어떤 변명으로도 설명되어질 수 없는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났다.
“나도 빗소리에 잠을 좀 설쳤어. 낯선 곳에서 듣는 빗소리는 언제나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지.”
손을 뻗치면 금방 닿을 수 있는 곳에 담뱃갑이 놓였다면 한 개비 뽑아 입에 물고 싶었다. 담뱃갑은 TV가 놓인 낮은 장식장 위에 놓여 있었다.
“낯선 곳에서 듣는 빗소리가 우울한 게 아니라, 당신 마음이 그런 거겠죠.”
그녀는 가슴을 잡힌 내 손가락들을 하나하나 뜯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널려 있는 속옷들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는 입술이 손톱이라도 씹는 사람처럼 특이하게 양 꼬리를 미세하게 떨며 일자로 다물어졌다. 마네킹에 옷을 끼우듯 기계적으로 속옷을 몸에 걸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우리가 저지른 일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작은 도랑에 한쪽 발이 빠져 진흙이 조금 묻은 정도로, 아무 일 아니라는 듯 그렇게 깔끔하게 털고 일어서 각자 자기의 길로 돌아가 버리면 되는 그런 일일까. 그녀가 바라는 것이 그것일까.
그녀답게 틀에 맞춰 남는 부분은 잘라내고 가차 없이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린 채 잊어버리면 그만인 그런 일은 분명 아니었다. 적어도 내겐 그런 일은 아니었다. 삼십여 년을 한번도 부끄럽게 살아온 적 없었던 내 양심은 그랬다.
“왜 남편에 대해선 아무것도 안 묻죠? 당신 어머니가 얘기 안 하던가요. 손수 내 손목을 끌고 맞선 장소까지 나가 시킨 결혼인데. 그럼 그 집안 장남이 어떤 위인인지에 대해서도 말 안 했겠군요?”
그녀는 스타킹을 반쯤 무릎 위로 끌어올리다 말고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렸다.
“일년 365일 중에서 360일을 해외골프 나들이로, 라스베가스 카지노 판으로 바쁘게 쫓아다니며 각 인종의 여자들을 공평하게 골고루 다 데리고 노는 세계화 속의 국제적인 백수라는 얘기도?”
그녀는 마치 해부학실의 실험대 위에 놓인 실험용 침팬지를 향해, 수술 칼로 어느 부위를 먼저 열어볼까 탐색하며 달려들 듯 내 표정을 살폈다. 내가 받을 상처와 고통을 상상하며 그 희열감을 잔인하게 곱씹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만 자리에서 퉁기듯 일어나 TV 장식장 위에 놓여진 담뱃갑을 집었다. 담배 한 개비를 뽑아 입에 물고 라이터 불을 댕기며 나는 어머니가 그녀의 남편에 대해서 한마디도 내게 해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면 가끔씩 그녀의 결혼생활에 대해 얘기를 해줄 수 있었겠지만 그녀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어머니는 내게 얘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혼하지 그랬어. 부당한 것을 참고 살 네가 아닌데.”
순간 그녀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무지한 시골여자처럼, 그녀답지 않게 참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잔인하게 내 앞에 까발리고 있는 그녀의 위선이 역겨워졌다. 나는 창문 쪽으로 걸어가 반쯤 내려 있는 커튼을 젖히고, 밖으로 담배연기를 멀리 뿜어내며 말했다. 담배연기는 뜨거운 분노로 헐떡거리는 내 심장을 태우듯 끊임없이 열린 목구멍으로 넘어왔다. 생각해 보면 내가 화를 낼 이유는 없었다. 그녀가 무슨 이유로 불행한 결혼생활을 견디고 있든 내가 간여할 일도 아니었다.
창밖으로 그녀가 근무하는 수목원의 푸른 숲이 보였다. 차로 무작정 달리다 모텔 간판을 보고 차를 세웠었는데, 지금 보니 우리는 그곳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몸에 하나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가 걸쳐지는 외제 고급 브랜드의 브래지어와 팬티. 저것들이 그녀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지탱해 주는 힘이란 말인가. 순간 현관에 벗어놓은 두 켤레의 구두 쪽으로 눈을 던졌다. 한 공간에 나란히 놓여 있는 두 짝의 구두는 너무도 동떨어진 모습으로 어색한 그림을 만들고 있었다. 생크림과 키위, 체리 등으로 장식된 제과점 유리 진열장 안의 화려한 데커레이션케이크와 이리저리 사람들 손에서 굴러다니다 말라비틀어진 볼품없는 인절미 조각처럼. 일년이 넘게 집과 연구실로 바쁘게 누비고 다녔던 내 구두는 엄살 많은 노인처럼, 이제 편히 쉬게 자신을 내버려달라고 애원하기라도 하듯 한쪽에 초라한 모습으로 쭈그러져 있었다. 맨발로 뛰어다니며 소죽을 끓이는 시골 농가의 사내아이얼굴처럼 윤기 없이 버석버석한 그 신발을 더욱 초라하게 만드는 것은, 신발창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녀의 샌들 속 이브로생 상표였다. 물론 지금의 내가 유명 메이커의 구두 하나 장만하지 못할 만큼 어려운 처지도 아니지만, 시간 강사를 하면서 몸에 배어버린 내 취향은 아내가 큰맘 먹고 사다주는 국내 브랜드가 전부였다. 경제적인 사정이 나아졌다고 해서 구태여 수입 유명 브랜드로 자신을 장식하고 싶은 치졸한 욕구도 가져보지 않았다.
10년 전의 윤주는 한 계절 동안 거의 같은 옷만 입었으므로 그것은 마치 계절마다 바뀌는 은행 여직원의 유니폼과 다를 바 없었다. 사실 유니폼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검소하고 유행과는 거리가 먼 면티나 청바지 정도였지만 언제나 그녀는 자신의 스타일에 당당했다. 그 또래의 여자아이들에게선 느낄 수 없는 오만함과 자신감으로 가득 찬 그녀는, 낡은 청바지 하나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그녀와 헤어져 돌아온 날은 혼자 어두운 방에 누워 온 전신이 땀으로 젖어 버리는 강렬한 수음에 빠져들었다. 상상의 스크린 속에서 느끼는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혀끝에 올려놓고 씹은 광어회의 그 신선한 육질이 하나하나 터질 때마다 느꼈던 야릇한 탄력감처럼 내 혈관 구석구석을 팽창시켰다.
그런데 단 한번도 현실 속의 그녀를 경험해 보지 않았던 내가 간밤 거짓말처럼 그녀의 뜨거운 육체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녀의 작은 몸 구석구석을 꿈틀거리는 혀로, 뜨거운 입술로, 확인해 나가는 동안에 나는 전혀 그녀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따뜻한 살에 내 몸을 섞으면서도 버릇처럼 상상 속의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그녀의 가뿐 숨소리, 끈끈하게 달라붙는 땀과 젖은 살갗의 감촉이 오히려 그런 상상력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내 몸은 오히려 경직되었다.
몇 번 그런 순간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현실과 상상 속을 파도처럼 오르내리며 어렵게 치른 그 행위에 나는 참을 수 없는 허탈감과 쓸쓸함을 느꼈다. 오랜 시간을 온몸을 다해 싸웠지만 내가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알 수 없었을 때처럼. 간밤을 그녀와 함께 있었지만 실제 그녀의 육체를 알아버렸다는 희열이나 감동, 그 어느 쪽도 없었다.
“혹시 내가 이 일로 상처를 받았을 거라는 생각 하고 있는 건 아니죠?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이란 요즘 세상에 흔해 빠진 농담처럼 진부한 일이 되어버렸잖아요. 처음부터 당신도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요?”
그녀는 이마 위로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쓸어 넘기며 나를 바라본 채 웃음을 흘렸다. 우리가 바란 것이 이런 서로의 육체였다고. 그러니까 만에 하나라도 옛날의 잡다한 기억 따위 때문에 평생 가슴을 아리면서, 애틋한 사랑을 간직하면서 살아왔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나의 지나친 착각이라는 뜻이었다. 너로 인해 나는 아무것도 상처를 받지 않았고 불행해지지도 않았다. 결혼생활이 평탄치 못한 것을 눈치 빠른 네가 알아버렸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도 너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서로 하룻밤 함께했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필요는 없다. 지금 그녀는 내게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었다.
윤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옷을 입고 일어나 화장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곧 샤워기에서 쏟아져 바닥으로 다시 튀어 오르는 강한 물소리가 났다. 내 벗은 몸뚱이를 끌어안고 동물적인 울음을 울던 그녀의 진심을 나는 분명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오랫동안 수사자에 굶주린 암컷의 몸뚱이 위에다 모든 힘을 다 쏟아내 버리고 만 사자처럼 나는 점차 초라해지고 비굴해지는 느낌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나는 담배를 두 개비 피워냈고 그 사이 옷을 입었다. 창 너머로 보이는 수목원의 푸른 숲은 아직도 젖어 있었다. 두 손아귀에 쥐고 잡아 흔들면 초록색 물방울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짙은 숲의 그 푸름에 눈이 아렸다. 하늘의 구름은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보였다. 진한 크레용으로 사물의 테두리를 덧칠해 놓은 것처럼 선명한 풍경들은 이른 아침의 청명함 속에서 밝게 빛났다. 단 하루라도 이런 아침의 풍경들을 함께 어루만지듯 바라보며 행복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그때의 간절함이란 분명 이런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때의 순수로 돌아가기엔 세월은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불순물을 쏟아냈다.
창문 너머로, 낮은 지붕들 사이로 난 좁은 골목길을 따라 출근을 서두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길을 나서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초라하고 남루한 풍경 속에서 오히려 경쾌해 보였다.
그런 풍경과 달리 내 기분은 엉망이었다. 불투명한 감정의 잔해들이 구더기처럼 오래된 상처를 갉아대고 있었다. 누구나 남을 배반할 때는 자신을 상대방보다 더 큰 연민으로 방어하고 합리화시키는 법이다. 그녀보다 내 자신에게서 더 큰 연민을 느끼며 어떤 타당성을 찾아내고 있었다. 그런 내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니 무심히 감기약을 삼킨 것처럼 입 안이 씁쓸해졌다.
담배를 한 개비를 더 꺼내 입에 무는 순간, 내가 이 방을 나가기 전까지는 그녀가 나오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담배에 불을 붙여 깊게 연기를 빨아올렸다. 깔깔한 혓바닥의 돌기들이 소름처럼 솟아올라 입 안은 남의 살처럼 감각이 없었다. 이렇게 헤어질 줄 알았다면 연구소 벽에 어깨를 기댄 채 울고 있었던 그녀를 뒤로하고 돌아섰어야 옳았다.
짧은 메모라도 남길까,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하지만 그런 의례적인 인사말을 남긴다고 해서 달라질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아니라고, 너의 진심은, 그리고 나의 마음도 그게 아닐 거라고 수십 번 되뇌어 보았지만 마음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나는 끝내 비겁했고, 그 비겁함을 그녀에 대한 마지막 배려라고 믿고 싶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가지만 때로 역류하기도 한다. 그걸 사람들은 운명이라고도 하고 우연이라고도 한다.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나를 그 길로 이끌었던 것은 운명이었을까. 그러나 이런 질문은 우문일 것이다. 운명은 필연적으로 다가오지만 그 다음 순간부터는 우연의 선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나는 그녀가 남겨진 방의 문을 열고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 어디선가 아까시꽃 냄새가 났다. 6월이었다.


송수경․
서울 생
․200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2002년 장편소설 󰡔꽃이 있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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